카를로스 신부님 강의록

천상의 책_지향 {9권 29장} "올바른 지향은 영혼의 빛이다." 1910년 3월 8일카를로스 신부님 강의록

은가루리나 2017. 10. 17. 00:09



카를로스신부님 하느님의 뜻 영성 피정 

(메리놀 사제 피정 제9강의-지향의 순결, 순수함)




제9권 1910년 3월 8일 일기  



“올바른 지향은 영혼의 빛이다.”



오늘 아침에는 복되신 예수님께서 아주 잠깐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딸아, 올바른 지향은 영혼의 빛이다. 


그것이 영혼을 빛으로 변화시켜 신적인 방식으로 활동하게 한다. 


영혼은 어두컴컴한 방에 불과하지만, 

올바른 지향이 태양과도 같이 빛살을 보내어 방을 조명해 주는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올바른 활동은 모든 것을 빛으로 바꾸는 반면, 

태양은 방의 벽까지 빛으로 바꾸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예수님께서는 몇 번이나 몇 십 번이나 이 문제로, 이 지향의 문제로 되돌아오십니다. 

반복해서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하려는 지향

신적인 방식으로 일하는 법을 그녀에게 알려주십니다. 


여기에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인간적인 방법으로 행하는 것이고, 

다른 것신적인 방법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셨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들을 모두 품어서 하느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사람들을 그냥 이 눈물의 골짜기에 다 남겨두려고, 

그냥 거기 같이 살려고 사람이 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데려가려고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의 원 성소는 하느님의 모상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닮아서 하느님의 모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모상이 된다, 그분과 닮는다는 것은 

그분 식으로, 하느님 식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 안에 영성 신학들은 

성령께서 우리 영혼 안에서, 성령의 선물을 가지고 일하신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신비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움직여주셔서, 

감동시켜주셔서 우리가 행동을 하면 

우리의 행동이 신적인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 


영성 신학은 사람을 두 시기로 구별합니다. 

영혼이 가는 길에서 수덕적인 부분신비적인 부분을 갈라서 이야기합니다.


수덕적인 단계에서는 영혼이 하느님의 영향을 받아들입니다. 

하느님의 영향을 받아서 인간이 자기 힘으로, 자기 능력으로 자기 힘으로 일을 행합니다.


영혼이 신비적 단계에 도달하면 

성령이 당신의 선물을 통해서 영혼을 움직이십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자신의 선물을 가지고 영혼을 움직이십니다. 


우리의 자유의지를 말할 수 없이 존중하시지만 성령이 영혼 안에서 주 활동자이십니다. 

우리는 성령이 원하시는 대로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이 원하시는 대로 하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신비적인 단계에서 성령이 원하시는 대로 내가 원해서 행동하는 것을, 

그래서 성령이 가르치시는 대로 감동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것을 

신적인 방법으로 일하는 것이라고 

영성 신학은 말합니다.



내가 돌리도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신부님이 주신 아름다운 예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에수덕적인 단계는 작은 배, 노를 저어가는 작은 배니다. 

영혼은 아주 힘들게 자기 힘으로 노를 저어서 갑니다. 


수덕적 단계에서는 그렇게 하는데 

언제나 은총이 가르쳐 주는 대로 힘들게 노를 저어갑니다. 


신비적 단계에서는 작은 배가 있는데, 돛단배입니다. 

성령이 바람을 불어줘서 돛단배가 돛을 달아서 갑니다. 


그러면 영혼은 그렇게 할 일이 많지가 않습니다. 

바람을 불어서 배를 몰아가는 것은 주로 성령이 하시는 겁니다.


교회와 영성 신학은 지금까지는 이 상태를 

하느님 뜻대로, 그것이 신비적인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주님께서 또 지향에 대해서 20권 어디에선가 말씀하십니다.


지향이 없는 행동은 시체와 같다. 시체이다.”


왜, 이것을 하는지 목적도 없이, 지향도 없이 무슨 행동을 하면 

그것은 죽은 시체와 같습니다. 



지향이 우리 행위의 영혼입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행위들 안에 여러 가지 다른 종류의 영혼을 줄 수 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는지 그 목적에 따라서 

우리 행위에 여러 가지 다른 영혼을 줄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목적이면, 

내가 인간적인 목적으로 일하면 그 목적에 주는 영혼은 인간적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무슨 일을 행동을 하면,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행동에게는 우리가 거기에 맞는 영혼을 주게 됩니다.


이렇게 지향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수도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바로 아침에 봉헌을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것이 봉헌입니다. 


수도자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지향을 두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도 기도 생활을 좀 하는 사람이라면, 

하루가 끝나면서 그날 하루 잘못한 것을 용서하고, 감사하고 용서해 달라고 기도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말고 

아침에 바로 그날 할 모든 걸 봉헌하면서, 

그날 하루 자기가 할 일 안에, 할 일들에게 지향을 주어야됩니다.


평신도들이 다 이렇게 해야 됩니다. 

아침에 봉헌하는 것을 평신도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일상생활, 보통의 생활, 보통의 일들을 하느님께로 들어 올리는 것, 

하느님의 수준으로 들어 올려야 됩니다. 


그렇게 아침에 봉헌해야 합니다. 

이것은 평신도들에게 큰 도전입니다. 


이것은 평신도들에게 큰 도전이 되고 평신도들에게 아주 중요한 것인데,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하느님의 수준으로 신비적인 수준으로 들어 높여야 합니다.



우리 사제들은 이미 벌써 아침에 미사 봉헌하고, 

성무일도를 드리고, 기도 바치고 있고,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초자연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은 이미 다 초자연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일을 따로 들어 높일 필요는 없습니다. 


미사나 성무일도나 이런 것은 다 이미 초자연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될 것은, 

우리가 하는 이런 모든 초자연적인 일들을 잘못하면 

자연적인 수준으로 내려 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조심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평신도도 성직자도 다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평신도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 

자기들의 모든 것을 영적인 초자연적인 수준으로 들어 올려야 되고, 

사제들은 초자연적이고 영적인 것들을 인간적인 수준으로 낮춰버리지 않도록 

그것을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여기 교회 안의 두 부분에, 두 가지 도전이 있습니다. 

이것이 하느님 뜻 안에서 사는 곳으로 가는 출발점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지향의 순수함이 없이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무엇 때문에 가는지를 분명히 모른다면,

만약 우리가 순수한 지향이나,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올바른 의식이 없다면 

이런 모든 것들이, 아름다운 말들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헛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사제들의 중요한 의무는 

평신도들에게 자기들의 일상생활의 모든 것들을 초자연 수준으로 들어 올리는 것, 

그렇게 하도록 도전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만약 우리가 모든 것을 다 하느님을 위해서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절대로 하느님과 함께 아무것도 할 수 없고, 

하느님 안에서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