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아, 역시 내맡김은 첫걸음(과정)입니다, 거룩한 내맡김(초탈)으로 나아가는 영성

은가루리나 2020. 1. 4. 19:46

 

아, 역시 내맡김은 첫걸음(과정)입니다, 거룩한 내맡김(초탈)으로 나아가는 영성

 

이해욱프란치스코60 등급변경▼ 조회 535 추천 0 2015.03.01. 12:44

 

 

 

최근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초탈(최고의 덕)"에 대한 글을 올리면서,

그분이 말하는 초탈이 거룩한 내맡김과 같은 최고의 수준

(초탈 = 거룩한 내맡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그 생각은 옳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엑카르트의 글,

 

<"초탈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쏙 빼닮게 합니다. 

사람은 확고한 초탈에 의해 하느님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초탈에 의해 순수성과 단순성 그리고 불변성을 얻습니다. 

 

피조물이 하느님과 같아질 수 있고, 

그래서 사람이 하느님과 같아져야 한다면, 

그것은 초탈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람은 초탈을 통하여 순수성으로 나아가고, 

순수성에서 단순성으로, 단순성에서 불변성으로 나아갑니다. 

초탈은 하느님과 사람을 같게 합니다.">라는 글과,

 

 

<"우리의 성모님께서는 온갖 덕을 완벽하게 갖추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완전한 초탈도 갖추셨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초탈이 겸손보다 높은 차원이라면, 

그녀는 왜 초월을 자랑하지 않고 자신의 겸손을 자랑했을까요?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여종의 겸손을 굽어보셨습니다"(루카1,48)

그녀는 왜 여종의 초탈을 굽어보셨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을까요? 

 

나는 이렇게 말씀드립니다. 

하느님의 덕에 관한한 

하느님 안에는 초탈과 겸손이 모두 자리하고 있습니다.">라는 글을 통하여,

 

 

 

예수님(하느님)은 "초탈의 원형"이시며,

 

성모님"겸손"을 통하여 

초탈의 은혜("하지만 이 일은 은총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를 입으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엑카르트가 말하는 초탈

거룩한 내맡김과 같은 수준의 최고의 덕(초탈 = 거룩한 내맡김)이라는

저의 생각이 틀리지 않다는 생각은,

 

예수님은 "거룩한 내맡김의 원형"이시며,

 

성모님은 당신의 겸손(피앗)을 통한 하느님의 은혜로

"거룩한 내맡김의 원형적인 삶"을 살아가실 수 있으셨던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예수님처럼, 성모님처럼" 살기 위해서

맹세 수준의 굳은 결심으로 "거룩한 내맡김의 봉헌 서약"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삶이 엑카르트가 말하는 "초탈(거룩한 내맡김)"의 상태,

 

<초탈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참된 초탈은 

마음이 돌연한 사랑이나 슬픔, 영예나 치욕, 비방에도 

꿈쩍하지 않는 상태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합니다.

 

이는 태산이 미풍에도 미동도 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 초탈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쏙 빼닮게 합니다.

 

사람은 확고한 초탈에 의해 

하느님이 하느님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에 도달한 것은 분명 아닙니다, 

그 상태를 목표로 살아가고 있는 중일 뿐입니다.

 

 

저는 이 번에 저에게 일어났던,

아니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제 일생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일,

일본 도쿄대교구와 서울대교구로부터의 

저에 대한 엄한 제재(制裁)를 통하여

제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정말 좋은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영적(거룩한 내맡김)인 상태는

거룩한 내맡김의 삶을 살기 전과는 하늘과 땅 차이인 것은 확실하지만

"아직도 많이 멀었다"는 체험이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만일 제가 주님께 내맡긴 삶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저는 아마 죽었을 것입니다."

 

혈압이 210/120 , 맥박도 110회가 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저의 모든 것을 내맡겼기에,

그래도 저와 제가 하는 일을 거스르고 제재하는 모든 사람들,

그들에 대한 원망이나 미움은 제 마음속에서 거의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저를 가장 크게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일이 바로,

"도쿄-어밴던하우스"였습니다.

 

그 고통이 지금은 많이 줄었지만

아직도 남아 계속되고 있음을 여러분 앞에 고백합니다.

 

 

언젠가 도쿄-어밴던하우스는 제 생명과 같은 것이라 말씀드렸지만,

도쿄-어밴던하우스는 제 생명이 아니라 "제 자식"과 같은 것입니다.

 

이 번 일로 

자녀를 두고 있는 부모들의 심정을 가까이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식구들 중에 

오랜 동안 자녀문제로 이곳에 글을 올리고 기도를 청하는

어떤 식구가 생각났습니다.

 

제 자신은 주님께 내맡겨 주님의 뜻에 맡길 수 있지만,

제 자식과 같은 도쿄-어밴던하우스와 저 없이 남겨진 그 봉사자들은

제가 아무리 화살기도를 통하여 주님께 내맡겨 드려도 

저를 아프게 할뿐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은 성부께 내맡기셨지만,

당신 없이 남겨진 모친과 제자들, 세상 사람들이

당신의 고통에 크게 더해졌을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맡긴 삶을 사는 것이

<고통에서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다시 증명받게 되었습니다.

 

 

엑카르트의 말대로,

 

<"완전한 초탈에 이른 사람은 영원 속으로 옮겨집니다.

 

그는 더 이상 덕없는 것의 영향을 받지 않으며, 

육적인 것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그는 이 세상에 대하여 죽은 사람입니다.">가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에 대하여 죽은 것"이 분명한 것 같지만,

"덕없는 것"들로부터 찔림을 받았을 때는 육적인 고통을 느꼈습니다.

 

저의 영육의 상태는 아직 "영원 속으로 옮겨지지" 못했습니다, 

아직 많이 멀었습니다.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겨 드리겠다는 맹세 수준의 굳은 결심의 봉헌은

분명, "거룩한 내맡김"입니다, 

 

또한 분명 "초탈"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 더 중요한 것은 또한 분명,

우리의 내맡김의 삶(靈肉)은,

"거룩한 내맡김(초탈)의 과정 중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단계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영육을 나날이 조금씩, 때로는 엄청,

또 조금씩 때로는 엄청나게 이끌어 주심을 믿을 뿐입니다.

 

 

 

 

 

 

 

14-71

 

1922년 11월 6일

 

하느님 뜻에 대한 앎과 소유의 여러 단계.

 

 

11 나는 이 말씀을 듣고 그분께,"제 사랑, 제 생명이시여, 저는 아직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항상 주님의 지극히 거룩하신 뜻을 실행하며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방식으로 주님 뜻 안에서 산 성인이 이제껏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하고 물었다.

 

 

12 예수님께서는, 

"아, 딸아, 

사람은 자기가 아는 한도만큼만 

빛과 은총과 다양성과 가치를 지니게 된다는 것을 

아직 알아듣지 못하겠느냐?

하시며 이렇게 설명해 주셨다.

 

 

 

13 "물론 항상 내 뜻을 실행한 성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성인들은 자기네가 아는 한도만큼만 내 뜻을 소유하였다.

 

그들이 알고 있었던 것은,

내 뜻을 행하는 것이 가장 위대한 행위이고 

나를 가장 영예롭게 하며

그들의 성화를 가져오는 행위라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그런 지향으로 내 뜻을 행했고, 그것이 가진 전부였다.

 

 

 

14 과연 내 뜻이 없는 성덕이란 없다.

어떤 선도 어떤 성덕도, 큰 것이건 작은 것이건,

내 뜻없이는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15 내 뜻은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같다.

도무지 변하지 않는다.

너는 이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내 뜻은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에 따라 

자신이 지닌 다양한 특색과 효과와 가치를 알린다.

 

게다가 알리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다양한 특색과 효과와 가치를 영혼에게 준다.

 

그렇지 않다면 왜 그런 것들을 알리겠느냐? 

 

 

16 내 뜻은 어떤 군주가 

자기의 가장 크고 호화로운 궁궐을 백성들에게 보여 준 것처럼 행동해 왔다.

 

그는 

첫 번째 사람들에게는 그의 궁궐에 이르는 길을 가리켜 보였고,

두 번째 사람들에게는 문을, 

세 번째 사람들에게는 층계를,

네 번째 사람들에게는 첫째 방들을 가리켜 보였다.

그리고 

마지막 사람들에게는 모든 방들을 열어 주며 그 소유주가 되게 하고 

이들에게 궁궐 안의 좋은 것들을 모두 주었다.

 

17 그러니 

첫 번째 사람들은 길에 있는 좋은 것들을 가졌고,

두 번째 사람들은 문에 있는 좋은 것들을,

세 번째 사람들은 층계에 있는 좋은 것들을,

네 번째 사람들은 

좋은 것이 더 많고 더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는 첫째 방들의 것들을 가졌고,

마지막 사람들은 온 궁궐에 있는 좋은 것들을 모두 가지게 되었다.

 

 

18 내 뜻도 그렇게 해 왔다.

피조물이 내 뜻의 무한성 전체 속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길과 문과 층계 및 첫째 방들을 차례로 보여 주었고

 

내 뜻 안에 있는 크나큰 선들을 알려 주었으며,

 

이 선들 안에서 활동함으로써 

어떻게 내 뜻의 다양한 특색과 무한성과 성덕과 능력 및 

나의 모든 업적을 획득하게 되는지를 알려 주었던 것이다. 

 

 

19 나는 알리면서 알리는 그것을 영혼에게 준다.

신적 속성을 드러내 보일 경우 

영혼 안에 그 속성을 박아 넣어 주는 것이다.

 

 

20 한 걸음 더 나아가 

내가 내 뜻의 다른 효과들을 알려 주려고 할 때,

 

너에게 얼마나 강력한 은총의 파도가 밀려오는지를 안다면,

 

그리고 내가 능숙한 화가처럼 지금 알려 주고 있는 여러 효과와 가치들을 

얼마나 생생한 색채로 네 영혼 안에 채색하는지를 안다면,

 

너는 내 파도에 짓눌려 으스러질 것이다!

 

 

21 하지만 너의 약함이 측은해서 떠받쳐 주는 것도 나다.

떠받쳐 주는 동안,

너에게 말하고 있는 것을 네 영혼 안에 더 깊이 박아 넣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 말은 곧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주의를 기울여 내게 충실하여라."

 

 

 

 

 

19-41

 

1926년 7월 26일

 

하느님 뜻 안에서의 삶에 이르는 네 가지 단계

 

 

 

1 늘 하듯이 지고하신 의지 안에서 나 자신을 맡긴 상태로 있었는데 

언제나 사랑하올 예수님께서 오시자마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2 "딸아, 

같은 햇빛이라도 모든 사람이 똑같이 누리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태양에 어떤 결함이 있는 것은 아니다. 

 

보편적인 선을 내포하는 나의 사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다. 

 

이 사업을 통하여 

아무 제한 없이 누구에게나 선익을 베풀고 있으니, 

결함이 있다면 인간 편에 있는 것이다.

 

 

 

3 방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생각해 보아라. 

 

이 사람은 빛나는 햇빛을 다 누리지는 못한다. 

의 일부를 받긴 하지만, 그 을 받지는 못하는 것이다.

 

 

4 그 반면에  

집밖에 나가 있는 사람은 

더 많은 을 받으며 태양의 열을 느끼기도 한다. 

 

이 열은 썩은 공기를 소독하며 정화한다. 

그래서 그는 깨끗한 공기를 호흡하면서 활기를 띠고 

더욱 건강해졌음을 느끼게 된다. 

 

그러니 태양이 지구에게 가져오는 혜택을 더 많이 누리는 쪽은  

두 번째 사람이다.

 

 

5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태양 광선이 내리쬐는 지표(地表)의 한 지점에 가 있는 세 번째 사람을 

생각해 보아라. 

 

그는 자신이 광선에 휩싸여 있음을 느낀다. 

태양이 내뿜는 기에 몸이 타는 것 같고, 

작열하는 이 눈에도 쏟아져 땅을 보기가 어렵다. 

 

빛 속으로 빨려드는 자신을 보고 있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발을 땅에 붙이고 있으면서도  

땅이나 자기 자신을 거의 의식하지 못한다. 

오직 태양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다.

 

 

6 보아라, 

이 첫째와 둘째와 셋째 사람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를!

 

 

7 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번에는

햇빛 속으로 날아올라 태양의 중심에 이른 사람을 생각해 보아라. 

 

이 사람은 태양이 그 중심에 내포하고 있는 강렬한 에 몸이 타고 

 의 강도로 말미암아 녹아 흩어질 정도로 태양 자체 안에 사라진다. 

 

이 네 번째 사람은 더 이상 땅을 보거나 자기 자신을 보지 않는다

설령 본다고 해도 을 보고, 불길을 느낄 따름이다. 

 

그래서 그에게는 일체가 다 끝나 버린다. 

 이 그의 삶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8 그러니 이 네 번째 사람과 앞의 세 번째 사람 사이에도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 모른다! 

 

이 모든 차이는 그럼에도 태양이 아니라 사람 편에 있다.

사람이 어느 정도로 햇빛 앞에 그 자신을 내놓느냐에 따라 

다르니 말이다.

 

 

 

 

9 여기서 태양은 내 뜻의 상징이다. 

그러나 내 뜻은 태양보다 더 강렬한 광선을 쏘아, 

내 뜻의 나라에서 살기를 원하는 이들을 

완전히  사랑으로 변화시킨다. 

 

여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각각 내 뜻 안에서 사는 것의 네 가지 단계를 상징한다.

 

 

 

10 첫 번째 사람은 내 뜻의 나라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단지 내 뜻의 태양이 그것의 나라에서 만인에게 내뿜는 을 받으며 

산다고 할 수 있다. 

 

곧 내 나라의 경계선 밖에 있는 사람인데, 

그래도 약간의 빛을 받는 것은  

사방으로 퍼지기 마련인 빛의 성질 때문이다.

 

11 그의 본성과 나약과 격정이 

그 자신을 둘러싸는 집이 되고 오염된 썩은 공기층을 이루기에, 

이 공기를 마시며 사는 그는 

병약하고 선행을 할 수 있는 활력이 없다. 

 

이 모든 점에도 불구하고 

그가 생명과의 만남으로 존속할 수 있는 가능성이 큰 것은, 

내 뜻의 빛이, 아무리 약한 빛이라고 하더라도, 

언제나 그 자체의 선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12 두 번째 사람은 

하느님의 지고한 뜻의 나라 속으로 첫발을 내디딘 사람의 모습이다. 

 

이 사람은 더 많은 뿐만 아니라 도 받는다. 

따라서 그가 숨 쉬는 공기는 맑다. 

이 공기를 마시며 살기에 격정이 사그라지는 것을 느낀다. 

 

그는 선에 항구하고, 

십자가를 참아 받을 뿐더러 사랑으로 지기도 한다. 

 

그러나 내 뜻의 나라 안에서 처음으로 걷기 시작한 상태에 있으므로 

땅을 바라보며 인간 본성의 무게를 느낀다.

 

 

13 한편, 세 번째 사람은 이 나라에서 상당히 진보한 사람의 모습이다. 

 

그는 많고 큰 을 받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잊게 된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이제는 아무런 느낌이 없다

 

선과 덕행과 십자가들이 그 자신의 본성으로 바뀐다. 

 

이 그를 휩싸며 변화시키고, 

이제 그 자신에게 속하지 않게 된 것은 멀리서도 거의 보이지 않게 한다.

 

 

14 네 번째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내 나라 안에서 살 뿐만 아니라 

내 나라를 차지한 사람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지고한 태양인 내 뜻 안에서 완전한 소멸을 겪는다. 

 

그 빛으로 인한 소멸이 얼마나 강렬한지 

그 자신이  이 되고,   외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게 된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사랑으로 변하는 것이다.

 

 

 

15 그러므로, 내 뜻의 나라에는

사람들이 그 은혜를 나누어 받기를 원하는 정도에 따라서 

다른 단계들이 있다. 

 

그러나 

첫째 단계가 마지막 단계를 이르기 위한 격려와 길이 될 것이다.

 

그러니 너는  

마지막 단계에서 사는 것이 매우 필요한 일임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

 

 

 

 

< 천상의 책

17-32 1925년 2월 22일
인간 창조와 더불어 소통의 길들도 만들어 주신 하느님


4
"딸아, 너는, 하느님께서 인간창조의 순간에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소통을 위한 여러 길들도 만드셨다는 것을 알아 두어라.

우선 세 개의 길이 있었으니 바로 영혼의 세 가지 능력이었다.

즉, 지성은 내 뜻을 이해하기 위한 길이고,
기억은 끊임없이 내 뜻을 기억하기 위한 길이고,
의지는 이 두 길 중앙에서 창조주의 의지 안을 날아다니기 위한 셋째 길이 되었다.

지성과 기억은 의지의 길의 지주요 보호이며 힘으로써
그것이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비틀거리며 나아가지 않게 해 주었다.




5 그리고

눈이
길이었다. 내 뜻 안에 있는 아름다움들과 재산을 보기 위한 길이었다.

청각은
내 뜻의 부름과 내 뜻 안에 있는 화음들을 듣기 위한 길이었고,

말은
내 말인 '피앗'의 지속적인 분출과
내 '피앗' 이 지닌 좋은 것들을 받기 위한 길이었고

손은
사람이 내 뜻 안에서 그의 활동을 하며 손의 격을 높임에 따라
그의 활동이 하느님의 활동과 결합되게 하기 위한 길이었고,

발은
내 뜻의 걸음을 따라가기 위한 길이었고,

마음과 욕망과 애정은
내 뜻의 사랑으로 충만해져 내 뜻 안에서 쉬기 위한 길이었다.


6 그러니, 보아라,
사람이 원하기만 하면 내 뜻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이
그에게 얼마나 많이 있는지를!

그 모든 길이 하느님과 사람 사이에 열려 있었고,
우리의 뜻에 의해 우리의 재산이 그의 재산이기도 하였다.

요컨대 사람은 우리의 자녀요 모상이며,
우리의 손에서, 또 우리 가슴의 뜨거운 숨에서 나온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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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보조14:14 새글


10 이 길들은
여정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고,
짧게나마 자주 하늘 나라를 방문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이다.

이 나라가 얼마나 아름다우며 그 안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아는 사람은
그것을 사랑하며 소유하기를 열망하게 되기에,
★귀양살이하는 땅에서 *초탈*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11 그러므로 이 길들은
사람이 자신의 참된 나라로 자주 올라가며
이를 알고 사랑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영혼이 이 길 위에 있다는 것과
자신의 천상 나라를 사랑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표징은
그가 우리 뜻 안의 길을 통해 짧은 방문을 하곤 한다는 것이다.





13
보아라.
이는 이 세상의 저급한 것들에 대해서도 일어나는 현상이다.

어떤 사람이 넓은 땅을 가지고 있다면 그 소유지에 길을 낸다.
자주 찾아보고 즐기며 이 땅에 있는 좋은 것들을 거두어 가기 위함이다.
그리고 자주 찾아보는 동안 애정이 깊어져서 마음속에 품고 다닌다.


14 반면에
그가 길을 내지 않으면 자기 소유지를 찾아보지 않게 된다.
길이 없으니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그 땅에 대해서 말하는 법도 없다.
이는 그가 애정을 가지고 있지 않을뿐더러
자신의 재산을 업신여기기도 함을 드러내는 표징이다.

그러니 충분히 부유할 수 있는데도
그의 좋지 못한 의지 때문에 극히 비참한 가난에 쪼들리며 지내는 것이다.



15
나의 지혜가 사람을 창조하면서
나와 사람 사이에 길들도 만들고자 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그가 더욱 쉽게 성덕에 나아가고 우리의 재산을 전해 받으며
하늘 나라에 들어올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