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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광신부 - 마귀의 실체 녹취록| ▣ 보조교사방

은가루리나 2020. 1. 14. 15:09


김태광신부 - 마귀의 실체 녹취록 ▣ 보조교사방


하늘의군대 등급변경▼ 조회 906 추천 0 2019.10.31. 08:17



김태광 신부, 나해 연중 13주간 수 - 마귀의 실체(약 24분)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건너편 가다리아인들의 지방에 이르셨을 때, 

마귀 들린 사람 둘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왔다. 

그들은 너무나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다닐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하고 외쳤다.


마침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놓아 기르는 돼지 떼가 있었다. 

마귀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쭟아내시려거든 저 돼지 떼 속으로 들여보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가라 하고 말씀하시자, 

마귀들이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 떼가 모두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몰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로 가서는, 

이 모든 일과 마귀 들렸던 이들의 일을 알렸다. 


그러자 온 고을 주민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나왔다.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영의 세계에 있어서 

우리 눈으로 다 확인할 수 없는 어떤 신비의 세계가 엄연히 존재하는데 


그 중에도 악의 세력,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이 마귀,

여러분들도 마귀에 대한 관심이 많으셔요? 


어떤 사람은 하느님 보다 마귀에 더 관심이 많아,

그래서 뭘 하면 마귀, 하느님의 이름을 불러야 되는데 


마귀의 유혹이라고 아주 보면은 

마귀의 이름을 친근하게 뭘 하면은 이렇게 마귀 마귀 마귀~

하느님을 찾아야 되는데,


어쩌면 우리가 하느님이 계시면 왜 마귀를 허락하실까? 


그냥 없애버리시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하느님의 나라가 될껀데,

우리의 편협적인 그런 발상 속에는 

하느님께서는 이 악을 허락하시는 것도 신비라는거예요.


우리가 볼때는 

마귀라는 존재가 

이 세상에 공존하고 있는 이 가운데 하느님을 찾게끔 하는 

또 다른 어떤 우리에게 작용을 하기 때문에 악을 허락하신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오늘 아모스 예언서에 

'너희는 악이 아니라 선을 찾아라,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우리는 여기서 악과 선이라는 것을 

이분법적으로 이렇게 분리해서 생각하면 안돼요.


어쩌면 하느님은 악을 창조하신 게 아니죠. 

근데 왜 이 악과 선을 이분법적으로 말씀하시는가,


우리 편에서는 악과 선이라는 분명한 영역이 필요하지만 


하느님의 편에서 본다면 하느님은 선 그 자체이시고 

그리고 타락한 천사에 의해서 

사탄이 이 세상에, 인간에게 유혹과 죄가 유입되도록 

또 이 세상에 들어왔지만 


중요한 것은 이 악과 선이라는 두 개념을, 

우리는 '이게 악이고 이게 선이다.'

이것에 대해서도 너무나 섣불리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가 겉으로 보면은 

아주 선한 것으로 다가오는 것 같지만 그 배후에 마귀가 있을 수 있죠.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볼때는 

겉으로 볼때는 고통이라는 것,

여러가지 시련, 우리의 어떤 본능에 반하는 어떤 그런 것은 악이라 

너무나 섣불리 판단해서도 안된다는 것이죠.


그 안에는 

하느님께서 더 큰 선으로 이끄시기 위한 하나의 시험으로서 

또 통과해야 될 어떤 과정으로서 허락하셨다면 

그 배후에는 하느님이 계시죠.


근데 우리가 악과 선이라는 이분법적인 이 개념은 

결국 하느님 편에서는 선 그 자체이시고 


악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결국 죄를 지으면서, 

우리가 창세기 3장 5절에 뱀의 형상으로 그 하와에게 유혹할 때 그러죠. 


'너희는 눈이 열려서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 알고 

저 나무 열매를 따먹지 말라고 한 것이다.' 라고 

아주 이중적으로 둘러치죠.


근데 여기서 보면 

너희들이 눈이 열려서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거예요.


결국 이 마귀, 사탄의 유혹 

그 속에는 선과 악은 누구만이 알 수 있다는 거예요? 


하느님만이 알 수 있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악과 선이라는 이것이 이분법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하느님,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시고 

이 모든 것을 주재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느님 안에서 

우리에게 있어서는 선과 악이라는 이 이분법적인 개념보다는,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과 일치된 그 상황은 뭐겠어요?




우리가 선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빛 안에서 그냥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그것이 선이죠.


그러면 악은 뭐예요? 

하느님의 부재하심이라는 거예요. 


하느님을 망각해버린다는 거예요. 


하느님의 빛에서 벗어나 버린다는 거예요.

이 모든 것에 선과 악은 하느님만이 알고 계셔요.


그럼 우리는 악이라는 이 개념을 

선에 대비되는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라 하느님, 

오로지 한분이신 하느님 안에서 벗어나는 것, 망각해 버리는 것, 




그래서 우리가 얼마 전에도 

시편 그 후렴에 '하느님을 잊은 자들아' 그랬어요.


하느님을 잊었다는 그 순간이 뭐예요?

이미 악의 유혹에 연합 했다는거죠.


우리가 죄를 짓는다는 것, 

악의 유혹에 빠져서 죄를 짓는다는 그 순간은 뭐예요?


우리가 하느님이 이것을 하지마라 해서 

우리가 이것을 하지 않을 수가 있어요? 


우리의 욕망은 하지마라 해도 또 하잖아~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을 잊지 않는 거죠, 

하느님 말씀을 늘 상기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죄를 범했다, 

그 순간은 어떤 악의 유혹에 빠졌다, 


그것을 또 결과론적으로 

의지가 결국 악의 유혹에 넘어가서 저지른 것이 죄라면, 




결국 그 순간에는 하느님의 부재하심, 

하느님은 늘 존재하시지만 나 스스로 하느님을 저버렸고 

하느님을 잊어버렸고 하느님을 피해버렸다는 거예요.



이러한 악에 대한 우리가 그런 개념이 있으면,

오늘 그 두 사람에게 마귀 들린 사람이라 그랬어요~


마귀 들린 사람들 부마자라 하는 이런 사람들은 

여러가지 증상이 있어요.


저 사람이 마귀 들린지 안 들린지 보면 대번 표가나요.



많은 경우 우리 교회 안에서도 그건 무지해서 그런가봐요.

어떤 사람보고 그냥 '마귀 들렸다' 라고 그래요.

그런데 마귀 들린 경우에는 어떤 특수한 경우에 마귀가 들린거고,



어떤 경우에 점마라고 해서 

어떤 부분에 생각과 어떤 행위에 마귀에게 포로가 된 어떤 구분들이 있어요.


어떤 사람들은 음식을 폭식을 해요.

음식에 절제를 못해요. 그런 부분에 마귀의 부분적인 속박에 걸려 있는 사람이고 


또 어떤 행위에 있어서도,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마귀 들렸다는 것은 

완전히 마귀가 들씌워졌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은 겉으로 봐도 표시가 나죠.

일단 안 씻어요.(웃음)



여러분들 중에 안 씻는 사람은 일단 조금 의심을 해봐야 돼요.(웃음)

그리고 안 씻으니 냄새도 나죠. 


그리고 뭐 외모적으로도 눈을 봐도 그렇고 

여러가지 입에서도 냄새나고, 

이런 부분들은 겉으로 봐도 이사람이 마귀가 들렸는지,

근데 우리가 너무나 쉽게 마귀 들렸다 그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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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 들린 사람의 여러가지 행동에 일관적인 부분들이 

오늘 이 마귀가, 두 사람 안에 있는 마귀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을 보면은,

예수님이 나자렛 회당에서도 마귀들린 사람을 구마를 시키잖아요.


그때도 그런 말을 해요. 나는 당신이 누군줄 안다고,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낸 거룩한 분이시라는 것, 

그러면서도 왜 우리와 상관이 있습니까? 이렇게 꼭 대답을 해요. 



그러니까 마귀는 예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거예요.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 

이것은 겉으로 보면 아주 거룩한 신앙고백이예요. 


그런데 이들은 뭡니까,

하느님이 보내신 분이라는걸 아는데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이거예요. 


상관이 있다 없다? 마귀는 상관이 없다는 거예요.


우리가 어떤 마귀에 들씌워지고 

또 마귀의 어떤 부분적인 습이 있더라도 

우리의 존재 자체가 결국 마귀와 유혹에 연합하고 

마귀의 노예 상태로 이끄는 데에는 

서서히 우리 안에서 뭐가 작동을 하는 거예요?


내 존재가, 내 삶이 하느님과 상관이 없다는 거예요. 

그럼 서서히 어떻게 돼요?


내 중심적으로 살아가요.

모든 것을 내 중심적으로 살아간다구요. 



심지어는 내가 필요로 하는 것만 하느님께 딜을 해요.


이 세상이 얼마나 이 마귀의 간교함에 그 교활함에,

그냥 거기에 파묻혀 살죠 이 세상에,

이 세상은 왜? 하느님을 생각 안하니까,


어떠한 현상과 사인에 대해서도 

하느님 안에서 이것을 식별해야 되는데 그것을 하지를 못해요. 


왜? 이미 자기라는 존재는 하느님과 떨어져버린 존재니까,



상관이라는 것은 뭐예요?

어떤 끈이 맺어져 있다는 거예요. 떼려야 뗄 수 없는,

우리는 신앙적인 차원에서 유대관계가 맺어졌다는 거죠.


우리는 심지어 미사에 참례해서 예수님의 몸을 모시잖아요,


예수님의 피 흘리심과 속죄 재물로 우리에게 먹혀지시는,

그 예수님의 몸을 모시고도 우리는 우리 삶에 있어서 

예수님과의 관계를 내 인간적인 관계보다 더 하등하게 여겨요.


모든 상황들 어떤 일어나는 현상들에 있어서 

과연 이것을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얼마만큼 비중을 두고 

여러분들이 이것을 식별하고 묵상합니까?


우리가 성경에서 루카 복음을 보면 

성모님 같은 경우에 모든 일들을 마음에 새기고 되새겼다 그랬어요.


이것은 지극히 하느님 중심적이죠.


신앙인이라고 하지만 그 사람은 신앙인이 아니죠, 

종교인일 뿐이죠.


가톨릭 종교에 입교했을 뿐이고 세례명만 가지고 있을 뿐이지 

그의 삶은 뭐예요? 


그냥 지극히 인간적인 거예요.



하느님은 그냥 와서 필요로 할 때, 

또 어떤 때 교회에 봉사를 한다던지 어떤 직책을 맡았을 때 

어쩔 수 없이 자기가 하느님과 맺어진 관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겉치레적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거예요.


내 존재와 하느님하고의 그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는 

이미 끊어진지 오래 돼버렸어요.


어쩌면 이 마귀가 말했듯이 

내 존재도 하느님과 상관이 없는 거예요.


현재는 어떻습니까? 


나는 지극히 나 중심적으로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께 다가와요.

모든 것은 뭐예요? 내가 해요.



하느님이 나를 오늘 어떻게 이끄실까? 


또 어떤 사람을 어떤 상황 속에 놓여졌을 때, 

오늘 이것이 왜 하느님이 나를 이 상황 속에 머물게 했을까? 


왜 저 사람을 만나게 했을까? 

저 사람이 어떤 말을 하기를 원하는가? 


또 저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데 주님, 

이 뜻이 당신의 어떤 뜻입니까? 


하느님과 계속 관계, 거미줄과 같이 

어떤 모든 것을 하느님 그 관계성 안에서 

그 빛 안에서 바라보지 못하고 지극히 뭐예요.


인간적으로 나 중심적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해석하는 거죠.


심지어 고해성사 와서도 뭐예요, 

내가 이 죄를 지었다는 것도,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해서만 고백을 해요.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서 진정으로 죄라는 것은, 

제가 서두에 말씀드린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하느님을 망각하고 

나 중심적으로 살았던 그 하느님과의 관계 속에 이 죄를 보지 않고 


지극히 나 중심적으로 죄를, 

이게 죄라고 생각하고 또 그걸 죄라고 고백을 해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은 밖에 나가서 고해성사의 은총에 의해서 

자신의 존재요 삶이 변화가 일어나겠습니까? 


지극히 자기 중심적으로 모든 것을 하는데,


그리고 또 그 마귀가 뭐라고 그래요?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이랬어요.


우리 어떤 경우에 그래요?



나도 모르게 하느님 계시면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냐고,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냐고,

하느님은 나를 구원해 주시기를 원하셔요.


어쩌면 내가 원치 않는 일이 발생되고 닥쳐올 때 

그것이 어떤 하느님의 뜻인지 그 안으로 들어가서,

어제도 한국에 태풍이 그냥 지나가서 다행이었는데, 

태풍 곁에 있으면 바람이 세고 비도 많이 내리죠.


그러나 그 태풍의 눈 속으로 들어가면 잔잔하죠.


우리는 어떤 겉으로 드러나는 

부산하고 혼란스러운 그 과정 속에서 안절부절 못하는데 

그 하느님의 뜻 안으로 들어가 보면 

하느님이 그 안에 분명 어떤 뜻이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 주위에서 뱅뱅 도는거죠. 

그 속에서 그냥 하느님께 구해 달라고 기도할 뿐이죠.


진정으로 거기에 들어가 보면 

이 모든 상황이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느님의 어떤 섭리가 

지금도 역사하고 계심을 우리는 깨닫게 되는것이죠.



그래서 우리가 테살로니카서에서도 그러잖아요.

어떤 경우에도 우린 감사해야 된다 늘 기도해야 된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뜻이라는 것,


근데 예수님께서 또 오늘 참 재미 있는 표현이, 

그 마귀가 도저히 예수님 앞에서 안되니까 딴데로 들어가죠. 

이 죄 없는 돼지한테 들어가요.


그 돼지는 비탈에 가 죽어요. 

또 그것을 본 사람들은 또 예수님은 떠나가 달라 그래요.

이런 것들이 지금 현 세상의 어떤 현상인 것 같아요.



우리는 중요한 것이 외부의 것을 보고 

이제 종말이 왔다, 세상이 끝났다 라고 하는데

세상 종말을 그렇게 쉽게 일어나지 않죠.


하느님은 계속 기회를 주시고 당신의 때를 늦추신다기 보다는 

우리가 모르는 당신의 방법대로 당신의 때를 또 이끄시는데 


중요한 것은, 

관건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있다는 거예요.


분명히 예수님께 그 마귀들이 뭐라고 합니까? 

돼지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 했어요. 


그들은 돼지떼 안으로 들어갔어요.

그들이 왜 비탈길로 가서 쳐죽는지,

그 안에 마귀가 들어갔기 때문이에요. 



결국 이 두 사람은 어떻게 됐겠어요? 

마귀를 쫒아냈죠.


그 존재는 어떻게 됐겠습니까? 

새로 태어났죠.


중요한 것은 우리는 어떤 경우에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내 내면을 깨끗이 해주시고 어둠을 몰아내시는데,

그 다음에 어떤 상황, 이것을 어떻게 잘 유지해 가는 것,



여기에 대해서는 우리 교회에서 

너무나 쉽게 하느님께 와서 치유해달라, 

뭐 해달라고는 많이 하는데 

그것을 받고나서 그 이후에 상황이 더 중요해요.


어떻게 보면은 

수술을 하고 병을 나음받은 그 순간 보다도 


다시 재발하지 않기 위해서 처방받은 사후에 

재활에 대해서 더 철저히 살아가지 못하면, 


성경에서는 더 많은 마귀가 들어온다 했잖아요.


우리는 어떻게 보면 즉각적이고 눈에 보이는 그 현상에는 매달리면서 

보이지 않는 우리 내면의 상황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해요.



내가 왜 아침에 일어나서 촛불을 켜고 왜 기도를 왜 해야 되는가?

내가 하루를 마치면서 왜 하루를 되돌아 보며 

하느님 앞에서 또 셈을 해야되는가? 


이것이 결국에서는 그것은 우리를 무장하는거죠.


아침에도 뭐예요,

우리가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부터 발끝까지,


에페소서 6장에 

그 전신갑주와 같이 영적인 것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아침에 힘들더라도 쪼개진 시간 속에서도 

먼저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 은총으로 무장을 해야죠.


그리고 오늘 하루라는 시간 동안에 

우리는 모르더라도 알게 모르게 

악의 그 더럽힘과 찢겨짐으로 만신창이가 됐을 때,


자기전에라도 내 영혼 상태는 하느님 안에서 셈을 해야 돼요.



그것이 안되니까, 그것이 무방비 상태로 흘러가니까 

고백을 하려고 해도 성찰을 해도 죄가 떠오르지 않는 거예요.



내 영혼이 죄를 짓고도 더 이상 죄책감을 느끼지 못해요. 


이것은 뭐예요? 

안의 죄가 이미 보면은 나름 무감각해 버린 거예요.


아무런, 하느님 앞에 와도 

하느님 느끼지도 못하고 몸뚱아리만 앉아 있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 내면의 상태, 

결국 영성 생활이라는 것은 내 내면에 무엇이 존재하는가, 


하느님만이 존재하지 않죠.

나라는 것은 뭐예요? 허깨비예요.



어떻게 보면 우리가 여기에 사람들이 개체수로 있지만 다 헛것이예요.

여기는 하느님만이 계신다는 거예요.


그럼 여기는 여러명이지만 다 하나라는 거예요. 


하느님의 존재들이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가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나와 남이라는 어떤 개별성으로 끊임없이 판단하고 미워하고 

이게 악의 틈바구니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거죠.


결국 우리가 내 안의 영신사정,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신다. 


이것을 끊임없이 되내이고 살아가려고 할 때, 

악은 나에게 침범하지 못하죠.


내 안에 누가 사시는데? 예수님이 사시는데,

이것만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예요.


여러분들 어쩌면 오늘 마귀 들린 두 사람이 

예수님의 그 현존 앞에서 마귀들이 물러갔어요. 

도망갔어요.



우리들도 오늘 예수님의 현존 안에서 

예수님의 그 존재를 우리 존재의 중심에 온전히 모실 때 


우리는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세상에 사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선 안에서 선의 그 빛 속에서 우리는 거닐 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잊지말고 

하느님을 잊어서도 안되고 

온전히 하느님과 일치되는 삶을 살아갈 뿐입니다.



이 미사를 통해 

다시금 나라는 존재가 나 중심적으로 살은 나의 삶을 

하느님 중심적인 삶으로 바꿔주시기를 하느님께 자비를 구하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