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책_끊임없는 기도

카를로스신부님 제2차 피정 강의록(제11강의) 끊임없는 기도의 정신에 대해서

은가루리나 2015. 12. 31. 17:47



 카를로스신부님 제2차 피정 강의록(제11강의)     (2013. 4. 18 전체 피정 넷째 날 오전 강의1)    





이제 기도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루이사의 글에서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기도를 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몇 가지 조건들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의 하나는 내적침묵이었습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겪더라도 우리 마음 안에 평화를 유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항구함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끊임없는 기도의 정신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이제 기도의 다른 중요한 요소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것은 하느님 뜻이 하는 일을 행하고 따를 때 

주의를 기울이고 충실하게 하고 또 거기에 가치를 두는 것입니다. 

지난번 끊임없는 기도의 정신에 대해서 얘기했을 때, 예수님께서 하신 설명 부분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기도의 정신이 영혼 안에 있을 때, 

하느님께서 그 외적인 것에 대한 일만 보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내 인성이 하는 외적인 일도 보여주신다.”

하느님께서는 복음에서 나오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우리가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빛과 성령을 주십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행적과 말씀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그 행적과 말씀들은 우리 구원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들입니다. 

오늘 아침 독서에서 필리포스가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해준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필리포스는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의 의미를 그 내시에게 설명해 주기 위한 성령의 도구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끊임없는 기도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영혼에게는 

예수님의 삶의 이런 차원의 것도 드러내 보여주십니다. 

끊임없는 기도의 참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영혼에게는 하느님께서는 다른 것도 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내적인 것에 대해서도 설명하기 시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것은 내 인성 안에서 나의 신성이 했던 일이다.”

예수님의 신비 안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한 가지 차원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인성으로 하신 것인데 

이것은 복음에 다 기록이 되어 있어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다른 차원은 예수님의 내적 차원에서 하신 것인데, 

이 차원의 것은 만일 예수님께서 당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일을 우리에게 알려 주지 않으시면 

우리가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과 행하신 기적에 대해서는 묵상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과 교회에서 이런 모든 것들에 대해서 우리에게 아주 잘 설명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내적 생활에 대해서는 우리는 거의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분의 신성이 그분의 인성 안에서 무엇을 했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는 신비입니다.

 


아마 제가 첫째 날에 베네딕토 교황님께서 하신 말씀을 드렸던 것 같습니다만, 

겟세마니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에 대해서 설명하는 복음 부분이 

전체 복음 안에서 

예수님의 내면에 대해서 알려 주는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는 교황님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속에 일어난 일을 좀 더 분명하게 묘사하고 있는 것이 이 겟세마니 부분입니다. 

그런데 그 부분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분의 말씀은 몇 마디도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는 성부님께 말씀하십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이 부분이 성경 전체에서 가장 심오한 부분이라고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말씀드린 것과 같이 교황님께서도

 “그날 밤에 예수님께서 자신의 인간적인 뜻을 성부께 드렸는데 

자기 자신의 뜻만이 아니라 온 인류의 인간적인 뜻도 성부님께 드린 것입니다. 

그날 밤에 땅이 천국이 되었습니다. 

인간 존재가 구원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완전한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몇 마디도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그 짧은 말씀에 어떤 의미가 들어있을까요?

 그곳에서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피조물인 인간의 마음이나 지성은 없습니다. 

그날 밤에 예수님의 신성이 예수님의 인성 안에서 한 일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날 밤에 

모든 인간의 역사와 죄의 모든 비밀이 전부 다 그분의 마음과 인성 안에 들어갔습니다.

 

아담과 하와로부터 세말(世末)의 마지막 인간까지의 모든 인류가 당할 모든 고통을

예수님께서 그날 밤에 다 당하셨습니다. 

그날 밤에 모든 인간 하나하나의 죽음과 고통과 일생을 

전부 다 예수님께서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이름을 부르시면서 껴안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저의 이름과 여러분의 이름을 부르시면서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한 완전한 보속을 바치셨고, 

우리의 모든 죄 안에 들어있는 고통과 공포를 그날 밤에 전부 다 당하셨습니다.

그날 밤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다음날 죽어야 될 것에 대해서 걱정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로 인해서 고통 받으시거나 못에 박히심이나 가시관을 쓰심에 대한 걱정이 아니었습니다. 

그 순간에 그분 앞에는 모든 인류의 역사가 있었고, 

또 그분께서는 성부 앞에서 그 모든 인류 역사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하셨습니다.

 

그날 밤에 예수님께서는 수십억의 가시에 찔리시고, 수십억의 못에 박히시고, 

수십억의 창에 찔리시고, 수십억의 채찍질을 당하셨으며 그 모두를 껴안으셨습니다. 

이 큰 고통 앞에서 예수님의 인성은 그 고통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음을 느꼈습니다.

 

모든 인류 역사의 죄의 무게가 너무나 무거워서 

그 모든 것 때문에 그분의 인성은 부수어졌습니다. 

여러분의 죄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그리고 동시에 

자신의 아버지이신 성부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존경심을 가지고 성부 앞에 나간다는 것을 

여러분은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루이사에게 

그날 밤에 나한테 일어났던 것은 하늘이나 땅의 어떤 피조물도 이해할 수 없다. 

하늘의 높은 영혼도 겟세마니에서의 나의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성부님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라고 청한 이유입니다. 

그 고통이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인간적인 뜻은 모든 피조물과 천사와 인간의 뜻을 대표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부께 자신의 뜻을 완전하게 드리기 위해서 

최고의 영웅적이면서도 믿기 어려울 만큼의 굉장한 일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부터 계속해서 그분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모든 피조물이 새로 재창조되었습니다. 

모든 것들이 다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과 피조물들 사이에 다시 평화가 온 것입니다. 

이것이 그분의 신성이 그분의 인성 안에서 하신 것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인성이 한 일과 당신의 신성이 당신의 인성 안에서 한 일을 드러내 보여주시고,

설명해 주시고, 증명해 주시기 시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이 끊임없는 기도의 정신을 가지도록 불림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인성으로 하셨던 모든 것과 

예수님의 신성이 예수님의 인성 안에서 하신 모든 것은 

다 여러분에 대한 사랑으로 하신 것입니다. 

이 사랑은 복음 안에서, 그분의 말씀 안에서, 그분의 기적 안에서, 그분의 가르침 안에서 

그분께서 자기 자신을 여러분에게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께서는 성사들 안에서, 또 그분의 교회 안에서 자기 자신을 여러분에게 주십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께서 사신 그분의 내적 생활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 주시는 그분의 사랑이고 선물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예수님의 영혼 안에서 생긴 일을 모르면 

여러분들이 어떻게 그 보배들을 사랑하고 감사하고 소유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은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또 우리는 우리가 모르는 것을 소유할 수 없고, 그 모르는 것과 하나가 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성부의 뜻이 우리에게 예수님을 완전하게 주기를 원하시더라도 

우리가 그 선물을 알게 될 때까지는 

우리는 그 선물을 받을 수도 없고, 그 선물에 감사할 수도 없고, 그 선물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들을 완전한 진리로 인도해 줄 나의 성령을 너희에게 보내주겠다.” 라고 

말씀하신 이유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완전한 진리입니까? 

완전한 진리는 참 하느님이시고 참 인간이신 예수님 자신이시며, 

그분의 인성과 그분의 신성, 복음에 나와 있는 그분의 외적인 삶과 그분의 내적인 삶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이 모든 신비를 우리에게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에게 보내지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신비를 알아야만 우리는 이 신비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 신비를 모르면 우리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신앙은 무엇의 열매입니까? 

신앙은 복음의 열매입니다. 복음이 선포되면 신앙이 나오고 생겨납니다. 

그래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필리포스가 에티오피아 여왕의 내시에게 한 것처럼 복음을 알려주면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열망이 그의 마음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 내시가 성경 구절을 알아들을 수 있기를 원해서 

필리포스는 그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내시의 마음 안에 신앙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그는 즉시 세례성사를 받기를 청했습니다. 

왜냐하면 신앙과 세례성사는 함께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날 그 사람은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예수님의 내적 생활의 이 모든 보물도 반드시 알려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피와 말씀과 기적의 신비가 

예수님의 성심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방법으로 선포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내적 생활의 신비가 우리에게 알려졌을 때에만 우리는 그 신비를 모방할 수 있습니다.

 

복음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겸손하시고 양선하신 예수님을 모방할 수 있습니다. 

복음이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과 죄인들을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을 모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모르는 예수님의 신성과의 관계는 

우리가 어떻게 모방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하느님 뜻의 선물입니다. 

루이사의 글 중에 예수님께서 루이사에게 

“나는 나의 인성을 보여줌으로써 이 세상을 다시 새롭게 하였다.” 라고 

말씀하시는 장(章)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새롭게 하신 것은 2,000년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루이사에게 

“이제 나의 신성이 나의 인성 안에서 한 일을 보여줌으로써 

나는 이 세상을 또다시 새롭게 하겠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 뜻의 왕국입니다. 

하느님 뜻의 왕국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시기를 원하시는 예수님의 신비한 내적인 삶입니다.

 


끊임없는 기도의 정신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끊임없는 기도의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하느님께서 자신의 신비를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마르타처럼 이 끊임없는 기도의 정신을 잃어버리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그 신비를 보여주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정신이 산만하고, 정신이 다른 세상에 있고, 자기가 흥미 있는 일만 찾아다닌다면 

하느님께서는 그 신비를 보여주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비를 가르쳐주시는 것을 들으려면 여러분의 귀를 열어 놓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이 신비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여러분의 영혼 안에 있으면서 영원한 생명의 물을 주는 샘과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자신의 신비에 대해서 가르쳐주실 때 예수님의 신비는,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라고 

베드로가 말한 것처럼,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서는 너무나 잘 알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에 열려 있어야 되고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또 그분의 인성에 대해서 우리에게 아주 잘 가르쳐 주는 

우리 어머니인 교회에도 귀를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 예수님께서 자신의 내적 삶을 설명해 주시는 루이사의 가르침에도 

아주 집중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신성이 당신의 인성 안에서 한 일에 대해서 설명해 주십니다.

여느 때와 같은 상태로 있는데 

예수님께서 내 안에서 나오셔서 잠깐 동안 자신을 보여주셨다.” 

루이사가 여기에서 말하는 것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루이사를 만나기 위해서 창문으로 들어오시는 것도 아니고, 

루이사의 방문을 노크해서 들어오시는 것도 아닙니다. 

루이사는 “내 안에서 예수님께서 나오셨다.” 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대 데레사 성녀가 말한 “궁방(宮房)”과 같이, 

우리의 순례는 우리 내부로 들어가는 순례라야 하는 이유입니다. 

세상의 신앙인들은 성지 순례를 한다고 성지들을 찾아다닙니다. 

물론 그것도 좋습니다. 성지는 거룩한 장소이기 때문에 그것도 물론 좋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여러분 마음 안에 계시는 예수님을 찾으러 자기 안으로 들어가는 내적 순례를 꼭 해야 합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경우와 같습니다. 

성인은 

“밖으로 순례 다니는 것은 관광입니다. 그것도 좋기는 하지만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마음 안에 계신다는 것을 꼭 확신해야 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왕국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고 있는 내적 침묵과 여러 가지가 아주 중요한 이유입니다.

 

우리 마음의 밑바닥으로 우리가 순례를 해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길을 잘 몰라서 우리를 이끌어 줄 인도자가 필요합니다. 

그 인도자는 우리의 마음을 아주 잘 아시는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여러분의 손을 잡고 

예수님과 성부의 뜻을 찾기 위해서 여러분의 마음 밑바닥으로 여러분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루이사는 자기 안에서부터 나오신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처음에 루이사는 예수님 한 분만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성삼위 전부를 보았습니다. 

이건 복음의 말씀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의 계명을 지키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내 아버지께서도 그들을 사랑하시고 

우리가 와서 그들 안에 머무를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세례성사로 삼위일체 세분께서는 이미 다 우리 영혼 안에 들어와서 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삼위일체께서 우리 영혼 안에 들어와 사시는데도 우리는 마르타처럼 바쁩니다. 

정신도 산만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일도 많이 하지만 그분들과 함께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루이사는 자기 마음속에 계신 성삼위를 다 보았습니다. 

“그런데 세 분께서 전부 아주 깊은 침묵 속에 계셨다. 

그래서 이 세분들 앞에서 나는 내가 늘 하던 내적인 일을 계속했다. 

그런데 성자께서 나와 합치시는 것 같아서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분을 따랐다.”

 

루이사는 자신의 내적 삶을 아주 충실하게 예수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내적 삶에서 예수님께서 루이사와 합치하셨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분을 따랐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복음에서 여러 번 하신 말씀입니다.

“나를 따라라. 나를 따라라.”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스승님이시고, 길이시며,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은

 ‘나를 닮아라, 내가 하는 것처럼 해라, 모든 것을 나와 함께 해라.’ 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이 조용했다. 

이 침묵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하느님과 동일화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발명하라는 소명을 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 아주 분명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영성생활 안에서 무엇을 창조하거나 발명하라는 소명은 받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정신적으로, 내적으로 해야 할 일은 관상(觀想)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하느님과 동일화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루이사가 하는 것은, 예를 들면, 

자신의 눈을 예수님 눈 속에, 자기 귀를 예수님 귀 속에, 자기 걸음을 예수님 걸음 속으로 

녹여서 넣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발명하지 않고 자기들의 부모님이나 선생님을 그냥 따라서 하는 

어린이와 같아야 합니다. 

고양이나 강아지들을 포함해서 동물들도 가끔 주인들을 닮습니다. 

어떤 집안에서 태어나서 자라면 결국은 주인을 닮게 됩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어떤 때 강아지가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면 

여러분은 개의 그 행동이 그 주인과 같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무엇을 발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서는 스승님이십니다. 그분에게서 배우십시오.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그분께서는 완전하십니다. 

그분을 빼놓고서 여러분이 무엇을 할 수 있겠으며, 무엇을 닮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사제들은 무엇을 발명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모방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모방하고 닮으면 

우리는 아주 훌륭한 사제, 훌륭한 수도자, 훌륭한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이런 침묵 속에서 루이사가 주님을 묵상하면서 성취하려고 노력한 유일한 일은 

자기 자신을 하느님과 동일화하는 것이었습니다.

 

루이사의 말입니다.

“그리고 

나의 내적인 애정과 열망과 숨결 등이 모두 최고의 왕께 바치는 아주 심오한 흠숭이 되었다.”

이것이 흠숭의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흠숭은 

여러분 자신과 여러분의 마음과 뜻 등의 모든 것을 하느님과 동일화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안의 모든 것이 흠숭이 됩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이 하늘의 성부님께서 찾고 계시는 영과 진리 안에서 흠숭하는 사람입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라는 것은 이런 것을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과 하느님 뜻의 지속적인 흠숭자로 불림을 받았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