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2회 토마스 머튼의 생애 1 -현대영성가 토마스 머튼과의 만남 - 박재찬 신부 해설

은가루리나 2020. 3. 12. 22:54




제2회 토마스 머튼의 생애




+찬미예수님

성 베네딕도 왜관수도원의 박재찬 안셀모 수사신부입니다.

이렇게 여러분들과 함께 토마스 머튼의 생애와 영적인 변화의 여정에 대해서 오늘

이시간 함께 하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토마스 머튼의 영성에 대해서 여러분들과 좀 더 잘  나눌 수 있을까 김남희

교수님과 함께 상의해 본 결과 어떤 토마스 머튼에 대해서 모르는 분들이 많기 때문에 토마스

머튼에 대해서 먼저 여러가지 자료나 정보를 제공해 드리고 한 두시간 하고, 그 다음 세번 째

시간쯤에는 김남희 교수님과 함께 여러분들이 궁금해하는 질문들을 나누고 또 함께 좀 더 영적

으로 깊이 나아가는데 도움이 되고자 하는 대화를 나누면 더 좋겠다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오늘 이시간에는 특별히 토마스 머튼의 생애에 대해서 한번 나누어보고 싶습니다.

먼저 많은 분들이 토마스 머튼에 대해서 궁금해하고, 또 그의 생애에 대해서 칠층산에서 어렴풋이

나마 알고는 있는데 여기에서는 연대기적으로 토마스 머튼에 대해서 나누기보다는 제가 좀 더

집중해서 

토마스 머튼의 영성에 있어서 무엇이 중심이 되고, 

또 그의 생애에 있어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먼저 살펴보고자 합니다.


강의에 들어가기에 앞서 토마스 머튼이 직접 한 기도를 통해서 기도를 함께 바치면서 강의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하느님, 저를 당신의 의지안에 가두시고

당신의 사랑과 지혜안에 가두시며 당신께로 이끄소서.

제가 어떤 일을 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가

단지 저 자신의 만족때문이라면, 저는 결코 아무 일도 하지않겠습니다.

저는 당신의 의지와 당신의 사랑을 원합니다.

저는 저 자신을 전적으로 당신께 내어 맡깁니다.

저는 무조건 당신을 믿습니다.


그 어둠이 어떤 것이든, 저의 두려움이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저는 늘 당신 가까이 있을 것입니다.

당신만의 때와 당신만의 방식에 맞게 제가 모든 일을 할 수 있도록

저를 이끌어 주소서. 아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이 기도는 토마스 머튼이 쓴 <침묵속의 만남>이라는 그 책에 나오는 기도내용입니다.

방금 우리함께 기도한바와 같이 토마스 머튼이 얼마나 하느님 중심적으로 살았고, 또 생각

하고 그렇게 해왔는지를 이 기도를 통해서 알 수 있는데 과연 처음부터 그러했을까요?


토마스 머튼은 처음에는 이렇게 하느님 중심으로 살지도 못했었고 또 자기를 초월해서 진정

으로 하느님과 일치된 삶을 살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처음에는 무신론자였고 또 방탕한 생활도 했었으며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들어와서도

여러가지 어려움들을 많이 겪었었고 또 심지어 어떤 간호사와 사랑에 빠지는 그런 체험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빠스랑, 아빠스는 베네딕도 수도회의 장상을 이야기합니다.

그 아빠스님과 같이 서로 순종하며 살았어야하는데 여러가지 갈등들도 많이 겪었습니다.


얼핏 보기에는 토마스 머튼은 그냥 평범한 트라피스트 수도승이였습니다.

하지만 토마스 머튼이 과거에 여러가지 방탕한 생활도 했었고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회개의 삶을 살아갔었고, 지속적인 그 회개의 삶을 통해서 온전히 하느님과 일치하는 체험

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의 이 생애를 우리가 한번 살펴보면서 토마스 머튼과 우리가 그리 다르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한번 체험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또 토마스 머튼의 이 생애를 통해서 여러분 각자도 한번 되짚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한번에 모든 걸 완성한 사람이 아니라 끊임없이 넘어지고 또 쓰러지고 하면서

회개의 지속적인 삶의 여정을 걸어갔습니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 이 강좌를 들으면서 토마스 머튼의 이 삶의 여정을 통해서 내 삶에서 하느님

께서 어떻게 내 삶에 작용해왔는지, 또 내가 쓰러졌을 때 어떻게 도움을 주셨는지, 또 내가 하느님의

부르심에 어떻게 응답해 왔는지 한번 살펴보시면, 또 숙고해보시면 이 강의가 그냥 단순한 어떤

배움의 자리가 아니라 영적인 그런 성찰의 자리가 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그런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오늘 이 나눔은 먼저 토마스 머튼의 생애에 대해서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토마스 머튼의 생애는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누어볼 수 있을겁니다.


처음에는 토마스 머튼이 이제 수도원에 입회하기 전 단계, 1915년에 태어나셨는데 1941년

12월 10일날 수도원에 입회했습니다.


입회하기 전까지 단계, 

그리고 수도원에 입회해서 통적인 그런 수도승의 삶을 배우던 단계.

보통 머튼 학자들은 이 시기를 미성숙한 머튼의 시기였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물론 그 다음의 단계는 성숙의 단계인데 머튼이 이 미성숙한 단계, 미숙했다는 뜻이 아니라

보다 더 성숙한 머튼에 비해서는 다소 정통적인 관점의 수도승이었다. 그래서 좀 더 미숙한

수도승의 단계였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그러나 한번에 이러한 과정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에 마치 요나가 고래뱃속에

3일동안 있었던 것처럼 변형을 위한 그런 시간들도 있었습니다. 대략 1950년대로 보고 있

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958년에 루이빌에서의 영적인 그 체험이후에 1960년대에는

완전히 달라진 토마스 머튼을 만나게 될 겁니다.


토마스 머튼은 흔히들, 많은 분들이 책을 워낙 많이 쓰셨기 때문에 작가이고 또 부모님이

화가였기 때문에 그림도 제법 잘 그렸습니다.


그리고 시를 쓰는 것도 굉장히 좋아했고 그분이 쓴 아름다운 시들이 굉장이 두꺼운 분량으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해서 사진작가이기도 했구요 또 신비가였고 예언자였고 또 사회운동가

였습니다. 그래서 '피스메이커'(peacemaker)라는 별명도 가졌죠.


또 그리고 나중에 종교간 대화를 하면서 많은 불교 신자들, 힌두교도들도 만나고 나중에 이제

아시아에서는 무슬림들도 만나게 되고 종교간에 대화하는 그런 분이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토마스 머튼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분은 수도승이었습니다.

관상의 삶을 살아가는 수도승이었고 하느님을 찾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토마스 머튼이 어떻게 하느님을 찾는 여정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수도원 입회 전

시기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1915년 1월 31일날 프랑스에서 어머니 루쓰 젠킨스(Ruth jenkins)와 아버지

오웬 머튼(Owen Merton)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3년 뒤에 동생인 존 폴이 이제 태어났죠.


그렇지만 토마스 머튼의 어린시기는 결코 화목한 가정생활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토마스 머튼이 6살 되던 해에 어머니 루쓰 젠킨스가 위암으로 사망하게 됩니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서 그 여성적인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많이 받지 못했기 때문에,

특히 사춘기에는 반항아적인 기질도 많이 가지게 되었다고 그런 평가를 합니다.


그 이후에 이제 아버지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기 때문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여기저기 이동

하는 그런 시간도 많았고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외가댁에서 한동안 지내게 되었고, 리스의 잉글

래스 국립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이때도 부모님과 함께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굉장히 외로움을

많이 탔고 또 결핵에 걸리기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면서 또 사춘기 시절에 토마스 머튼에게는 또 큰 충격적인 아픔의

시간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납니다. 뇌종양으로 1931년, 머튼이 조금

있으면 생일을 맞는데 그 생일 직전에 16살 되던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래서 이 시기엔 굉장한 절망과 실의와 좌절을 겪게 됩니다.


그 이후에 독일도 여행하고 이탈리아도 여행하고 하면서 다시 회복할려고 했지만 오캄 학교에서

다시 방탕한 생활을 시작하게 되죠.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자신의 어린시절을 이렇게 회고합니다.

'저의 어린시절에 거의 매달 우리의 삶과 계획이 지속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지속적인 재정돈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때때로 아버지와 저는 함께 살았고, 때때로 낯선 이들과 살았으며 가끔씩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삶 안으로 들어왔다가 밖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우리는 친구들을 사귀었다가 또다시 다른 친구들을 만나야 했습니다.

모든 것이 항상 변화되고 있었습니다.'


토마스 머튼에게 있어서 어린 시절은 항상 외롭고 쓸쓸하고 혼자 있는 그런 시간들이 많았다고.

그래서 뭔가 아늑한 공간, 집을 그리워하고 아버지의 품,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하던 그런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볼 수 있을겁니다.


1933년에 캠브리지에 있는 클레어 대학에 입학했는데 이때 굉장히 토마스 머튼은 아버지를

먼저 세상을 떠나보내고 난 다음이었으니까 굉장히 외롭고 힘든 이 상황에서 방탕한 생활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술을 좋아하고, 여자들을 좋아하고, 담배피는 걸 좋아하고 아무튼 이런

사생아를 낳았다는 그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런 방탕한 생활을 했기 때문에 마치 그 '어거스틴' 성인께서 방탕한 생활이후에 회개해서

교회의 위대한 학자가 되었듯이 토마스 머튼도 이런 방탕한 생활, 자기의 자포자기한 그런

삶, 세상의 매력에 대해 푹 빠져있던 시간들로부터 회개의 시간으로 건너갔기 때문에 토마스

머튼을 '어거스틴'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1936년에 이제 할머니가 이제 세상을 떠나십니다. 1937년부터 조금씩 조금씩 뭔가

변화가 생기는데 이 변화가 생긴 결정적인 이유는 그 토마스 머튼이 이제 공부를 하지 않고

계속 방탕한 생활을 하니까 그의 대부였던  이미 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에 법적 대부역할을

해주시던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토마스 머튼에 대해서 굉장한 실망을 하고 그 학교를 그만두게

하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가 계신 미국으로 보냅니다.


그런데 이 미국으로 도착한 것, 이게 바로 어쩌면은 요즘말로 해서 '신의 한 수'였습니다.

토마스 머튼의 하느님의 크신 섭리였다고 볼 수 있겠죠.

토마스 머튼은 미국에 와서 여러 좋은 친구들, 또 대학교에서 좋은 교수님들을 많이 만나서

정말 서서히 서서히 이제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게 됩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이 이제 여러가지 가톨릭에 대한 관심도 갖기 시작하고 신비주의에

대한 관심, 그리고 또 세례를 받고자 하는 그런 열망들이 이 시기에 일어났습니다.


또 특별히 윌리엄 브레이크를, 토마스 머튼이 연구를 많이 했는데 이 윌리엄 브레이크를

통해서 석사학위도 받고, 박사학위를 등록해 놓은 상태에서 이제 세례를 받고자 하는

열망도 생기고 해서 1938년에 세례를 받고 그 다음에 사제성소에 대한 관심도 갖게 되고

견진성사도 받고 그리고 1940년에 성 보나벤투라 대학에서 영어강사로서 활동하던 중에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학할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입회를 못하게 되었죠. 왜냐하면 자신의 과거의 방탕했던

삶이 전해졌을 때 수도회에서는 입회를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깊은 섭리로 토마스 머튼은 다른 수도회인 겟세마니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알게 되었고 그 수도원에 1941년 12월 10일날 입회하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개략적인 토마스 머튼의 입회하기 전까지의 청년시절, 어린시절에 대한 요약이라고

볼 수 있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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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젠 좀 더 구체적으로 토마스 머튼이 가톨릭으로 회개하게 되고, 또 그냥 평범한

수도자의 삶이 아니라 '트라피스트 수도회 엄율 시토회'에 입회하게 된 그 배경, 또 그 영향은

무엇일까 한번 살펴보고 싶습니다.


세 가지 원인을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먼저 심리적인 요인과 가정적인 배경, 두번째는 많이 만났던 사람들의 영향들, 또 읽었던

좋은 책들의 영향, 그리고 세번 째는 제가 볼때는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신비적인 체험, 하느님 체험들이 토마스 머튼이 회개하고 수도원에 입회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많이 미쳤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 하느님의 신비체험에 대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게 될 겁니다.


우선 이제 토마스 머튼은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어린시절에 좌절과 외로움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학창시절에 반항아적인 기질을 가지고 살았었고 어떤 그 진정한 정체성과 친교를 위한

그런 안정적인 집을 갈망했고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했습니다.


특별히 이제 6살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는데, 사실 우리가 6살 때의 기억을 잘하기 힘들쟎아요.

그런데 토마스 머튼이 칠층산에 6살때 어머니와 사별한 그 시간은 정말 자포자기하고 절망적인

어린시절이라고 표현을 하고 또 그 엄청난 무게가 나를 짓눌렀다고 표현하는걸 보면 이때

토마스 머튼이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서 겪었던 어떤 좌절감 이런것들이 굉장히 강했다고 볼

수 있을겁니다.


그 칠층산에서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슬픔과 좌절의 엄청난 무게가 저를 짓눌렀습니다.

이것은 어린 아이의 슬픔이 아니라 성인의 무거운 당혹감과 침울한 비탄이었으며,

어떤 면에서 자연스럽지 않았기 때문에 더 견디기 힘든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아마 이 강좌를 듣고 계신분들 가운데에서도 어린시절에 여러가지 많은 상처와 아픔을 체험

하신 분들도 계실겁니다.  어머니 혹은 아버님을 어린시절 일찍 여의신 분들이거나 아니면

여러가지 상처를 받으신 분들도 많으실거구요.


그런데 이 상처와 아픔들이 어떻게 토마스 머튼에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본다면 여러분들이

겪었던 그런 상처와 아픔들이 단지 나를 아프게만 했던 시간들이 아니라 나를 성장시키는

그런 시간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여러분들이 이제 생각해 보실 수 있을겁니다.


사실 저도 어린시절에는 부모님과 떨어져서 살았습니다.

초등학교 때 부모님께서 저는 좀 더 좋은 학교에 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골에 머무시는

부모님께서 도시로 저를 공부시키기 위해서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때에 자취생활도 하고

친척집에 얹혀 살기도 하고 그렇게 생활했었는데 그때 당시에는 부모님과 함께 살지 못한다

는 것이 제게는 엄청 설움이었고 단란한 가정에서 살고 있는 그런 친구들을 보면 부럽기도 하고

나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또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런 생각들을 많이 하면서

보냈던 시간들이 많았습니다.


특별히 고등학교 입학하면서 점점 더 삶의 의미에 대한 생각도 많이 하게 되고, 외로웠기

때문에 안정된 삶을 찾고자 하는 그런 갈망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저에게 수도원이라는 곳을 보여주셨고 그래서 수도원이라는 곳은 저에게

굉장한 안식처처럼 느껴졌었습니다.


그래서 수도원의 여러가지 성소모임에 참여하면서 굉장히 편안함을 느꼈고  쉽게 수도원에

입회할 수 있는 그런 결심도 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만약에 제가 어린 시절에 그렇게 홀로 지내고 외롭게 지내던 시간이 없었다면 수도원에

입회는 아마 못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어린시절의 저에게 있어서 그런 시련이 오히려 성소를 발견하게 해 주는 계기가

되었던 것처럼 토마스 머튼도 이런 어린시절의 여러가지 어머니, 아버지의 죽음, 외로운 삶,

방탕한 삶, 또 자기자신에 대해서 비관하던 그런 삶, 이런 삶들이 오히려 토마스 머튼이 엄격한

수도원에 입회하게 된 어떤 결정적인 요인도 되었다고 볼 수도 있을겁니다.


그리고 또 부모님의 죽음에 대해서 여러 학자들 가운데 이제 칼 융의 심리학을 응용해 가지고

토마스 머튼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아니마(anima) 

적인 요소, 또 여성성이 결여되어 있는 어린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끊임없이 뭔가 안정적인 것을

찾고자 하는 갈망이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죽음은 무의식안에서 고독을 찾고 세상을 거부하는

그림자의 원형( shadow archetypes). 이런것들을 형성시키는데 원인이 되었다.  이렇게 보는

심리학자들도 있습니다.


또 토마스 머튼이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가게 된 배경중의 하나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캠브리지 대학에서 그러한 여러가지 방탕한 생활을 했던  것, 그래서 죄로부터 회개하고

싶었던, 그래서 더 엄격한 수도원으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그러한 결심을 하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결점에 대한 이해 안에서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을 배우는 것은

우리가 진정한 관상가가 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부족함과 결점, 죄, 타락 이런 시간들이 오히려 더 깊은 관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관상가의

삶을 택할 수 있는 어떤 동기가 될 수 있다는 말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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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두번 째로 토마스 머튼이 수도원에 입회하고 또 가톨릭 세례를 받을 수 있게 된 하나는

배움을 통해서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학구적인 열정이 굉장했습니다.

그리고 또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고 전공이 영문학이었죠.

그런데 우연히 정말 아주 우연히 자기 주머니에 동전이 몇 개 있었어요.

아, 이 동전을 그냥 써버려야겠다 이런 마음으로 서점엘 갔는데 마침 우연히 '에띠엔느 질송'의

<중세철학의 정신>이라는 책이 눈에 띄었습니다.


근데 토마스 머튼이 생각할 때는 중세철학 하니까 조금 거부감이 있었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이 당시 가톨릭이라는 거에 대해서 굉장히 거부감이 깊이 있었습니다.

근데 이 책을 사게 된 이유중의 하나는 '에띠엔느 질송'이라는 사람이 과연 누군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동전을 지불하고 '에띠엔느 질송'의 <중세철학 정신>을 사 가지고 기차를 타고

집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기차안에서 첫 페이지를 딱 펼쳤는데 '교회인가' 이런게 딱 적혀있는 겁니다.

아마 칠층산 읽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은 그순간 토마스 머튼은 갑자기 너무나 화가 나서

마치 중세의 그 가톨릭에서 종교재판 했던 것처럼 뭔가 판단하고 이렇게 결정하는 이런 모든

것들이 떠올라서 너무 화가나서 이 책을 차창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었다라는 이런 표현을 쓰기

까지 합니다.


다행히 토마스 머튼이 이 책을 버리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다 읽고 난 다음에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 가톨릭이라는 종교가 그냥 무대뽀로 믿어라, 혹은 종교재판 하는 것처럼 자기네들 정신

에만 그냥 집중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신자들에게 혹은 세상 사람들에게 뭔가를 전하는게

아니라 굉장히 논리적이고 굉장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종교이구나'  이것을 이 때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점점 가톨릭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알도스 헉슬리의 <목적과 수단>

이라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금욕주의에 대한 것, 또 아시아 종교에 대한 것, 또

신비주의에 대한 이런것들에 매력을 느끼게 됩니다. 이 책을 읽고 난 다음에 도서관에 있는

여러가지 동양에 대한 책들, 금욕주의, 신비주의에 대한 책들을 샅샅이 찾아 읽었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토마스 머튼과 불교에 관해서 설명할 때도 나오겠지만 지금 토마스 머튼이

아시아의 종교와 처음 만나게 된, 첫 번째 계기가 되는 그런 책이기도 했습니다.


윌리엄 브레이크에 대한 그러한 여러가지 책들, 연구들은 토마스 머튼이 회개하는데 굉장히

많이 영향을 미칩니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시인이자 예언자이고 신비가이쟎아요.

토마스 머튼은 나중에 그렇게 변화가 됩니다.


그리고 또 저는 굉장히 흥미로운것 중에 하나는 토마스 머튼이 인도 힌두 수도승 브라마카리

만나게 됩니다. 근데 이제 이 만남에서 재미난 일화가 있는데 이 인도 수도승한테 정말 나에게

도움이 되는 힌두교의 좋은 책이 있으면 나한테 소개해달라! 이렇게 부탁을 합니다.


그런데 이 힌두 수도승은 오히려 '너네 가톨릭 안에 그리스도교 전통안에 아오스딩 성인의

고백록이라든지 준주성범을 읽어봐라. 굉장히 도움이 되고 굉장히 좋은 책이다. '


토마스 머튼은 이때 아직 세례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 그렇지만 그리스도교 안에 살았기

때문에 오히려 힌두 수도승으로부터 그리스도교에 관계되는 책을 읽기를 권고받았다는게

참 아니러니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나중에 오히려 토마스 머튼이 아시아의 종교에 대해서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도 하나의 하느님의 섭리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 이외에도 자끄 마리땡(Jacques Maritain이)라든지 스콜라의 철학 이런것들도 토마스 머튼이

가톨릭으로 개종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리고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이제 토마스 머튼이 콜롬비아 대학에서

좋은 교수님들을 참 많이 만났는데 그 가운데 마크 반 도렌(Mark Van Doren)교수님, 이 분은

머튼이 어떤 지적인 성소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품위와 도덕적인 진실성, 이런것들을

머튼에게 좋은 표양이 되고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댄 윌쉬(Dan Walsh) 교수님도 토마스 머튼에게 큰 영향을 미쳤는데 무엇보다도 이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것 뿐만 아니라, 수도생활, 사제성소에 영향을 많이 미쳤고, 또  토미즘

(Thomism)에 대한 것들도 배울 수 있도록 해 주었고,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소개해 주기도

했습니다.


또 토마스 머튼이 이 시기에 참 좋은 친구들을 만났는데 이 좋은 친구들 가운데에 로버트

렉스가 있었는데 이 친구는 수도원에 입회해서도 토마스 머튼을 도와주고 토마스 머튼이

출판하는 것도 함께 할 수 있도록 많은 격려를 해주고 했었습니다.  또 토마스 머튼에게

머튼이 사제가 된다고 하니까 '너 성인이 되고 싶은거냐?' 이렇게 이야기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이 좋은 친구들, 좋은 책들을 통해서 토마스 머튼은 참 많은 영향을 받았고, 또 토마스

머튼은 이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가지고 가톨릭으로 점점 개종할 수 있는 그런 힘을

얻게 됩니다.


우리도 삶을 살아가면서 여러가지 좋은 분들, 좋은 책들, 또 여러가지 좋은 환경들을 통해가지고

하느님께로 인도될 수 있는 그런 길을 찾아갈 수도 있을겁니다.


아마 오늘 이 강좌를 통해가지고 이 이야기를 통해서 여러분들이 그동안 삶을 살아오면서

만났던 좋은 사람들은 누구였는지, 또 하느님께로 인도해주었던 분들이 누구였는지 한번

살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가까운 지인분들도 있을 수 있겠고, 또 때때로는 그 당시에는 나를 힘들게 했던

그런 사람들도 있을 수 있을겁니다.


저도 예전에 수도원에 살면서 굉장히 힘든 체험을 한 적이 있었는데  어느 한 수사님으로

인해서 굉장히 마음이 무겁고  괴로웠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어느날 책을 읽다 보니까

이런 구절이 있더라구요.

'너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느냐? 그 사람은 하느님께서 너에게 보내주는 선물이다.'


그 구절을 읽는 순간에 당장에는 나한테 좋은 분으로 느껴지지 않았었지만 점점 내가 더

성숙해 나가고, 또 내 마음이 넓어지는데 있어서 하나의 선물로써 하느님이 보내주신

도구로서의 역할을 했구나 라는 것도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좋은 책들, 그 좋은 책들을 통해서도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토마스 머튼의 책들도

여러분들께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이 시간을 시작으로해서 토마스 머튼과 가까워지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칠층산>이라든지,

또 토마스 머튼의 일기들을 모아놓은 <토마스 머튼의 시간>이라든지 또 <토마스 머튼의 단상>

혹은 '토마스 머튼의 요나의 표징' <토마스 머튼의 영적일기>로 번역되어 있지요. 이런 책들도

여러분들 읽으면서 조금씩 토마스 머튼과 가까워지기를 바랍니다.


토마스 머튼이 쓴 이 책들은 굉장히 깊이 있는 책들도 있고, 또 일기들, 편지들을 모아놓은 책들

도 있습니다.


그래서 일상을 좀 알고 싶은 분들은 먼저 일기나 편지들을 접해보시면 인간 토마스 머튼을 만나

실 수 있을겁니다. 그리고 토마스 머튼이 쓴 깊이 있는 영적인 서적들도 읽어나가면서 이런 책

들은 한번에 이루어지지 않더라구요  이해되지도 않고, 여러번 읽고 또 읽으면서 하나 둘 점점

토마스 머튼의 영성으로 들어가 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오늘 이렇게 처음 토마스 머튼의 생애를 소개해 드렸구요, 이 시간들을 통해서 토마스 머튼이

이제 어떻게 점점 하느님과 가까워질 수 있게 되었는지를 여러분들에게 소개해드렸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토마스 머튼이 결정적으로 어떤 영적인 변화를 갖게 되고 영적인 성장을 하게

된 신비로운 체험들, 하느님 체험들에 대해서 한 번 나눠드리고 싶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특별히 신비로운 하느님 체험들을 많이 했습니다.

이 체험들이 토마스 머튼의 인생에 있어서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같이 함께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우선 우리가 이제 한 명의 인간으로서 태어나서 자라고 성장해서 나중에 늙어서 죽게되는

그런 삶의 여정이 있어요. 그런데 그 여정가운데 우리가 본래의 삶의 모습, 본래 하느님께서

창조했을 때의 인간의 모습, 그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

그게 바로 토마스 머튼이 이야기하는 'New Man' 새로운 사람이 된다는 그런 정의예요.


관상적인 깨달음이란 표현은 뭐 여러가지 하느님 체험을 통해서 혹은 또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로 인해서 내가 본래 하느님께로 받은 나의 모습으로 되돌아 갈 수 있는 그 길을

깨달았다는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