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1회 만남 - 현대 영성가 토마스 머튼과의 만남 - 박재찬 신부 해설

은가루리나 2020. 3. 12. 21:39


<1회> 나에게 있어 토마스 머튼이란?



+찬미예수님


저는 성 베네딕도 왜관수도원 소속의 박재찬 안셀모 신부라고 합니다.

토마스 머튼에 대한 공부를 토론토 대학교에서 한 9년 정도 했구요

그 가운데 공부하는 과정에(쓴) 이제 논문이 최근에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이 토마스 머튼에 대해서 나눌 수 있게 되어서 참으로 기쁘게 생각하고

특별히 아시아에서는 이런 토마스 머튼 영성에 대해서 많이 알려져 있지 않기 때문에 이런 기회를

통해서 이 영성을 널리 알리고 또 함께 나누면서 하느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원래 부산이 고향인건 아니구요 고향은 경상북도 성주입니다.

그리고 1991년에 왜관수도원에 입회를 했구요, 28년 되었네요.

그리고 2001년에 사제로 서품이 되었었습니다.

얼마전에 귀국해서  지난 3월부터 여기 본원장으로서 책임을 맡고 또 토마스 머튼의

영성을 나누기 위해서 여기 피정의 집에서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Q. 수도원 입회는 어떻게 해서...?


저는 사실 처음부터 수도회에 관심이 있었던건 아니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에 어느날 문득 기왕 한번 사는 인생인데 좀 더 의미있게 살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의미 있는 길은 사람들을 도우며 사는게 가장

의미있는 삶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었구요,  사실 제가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 초등학교 시

절을 비롯해서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고 여러 친척집에 같이 지내기고 하고 또 자취하기도 하면서

좀 홀로 있는 시간들, 외롭게 있는 시간들이 많았던것 같아요.


그런 시간들이 저한테 좀 더 삶의 의미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끔 만들어주었구요~

그러던 과정에서 하느님께서 저한테 이런 성소의 길을 보여준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다시 돌아가면 아마 이런 결정을 못했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사실 또 뭘 잘 몰랐기 때문에 아마 더 그렇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물론 학교다니던 시절에는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도 좋아했고 그리고 저희 부모님께서도

저를 반대하지 않으셨어요. 그냥 어릴 때부터 인생은 너의 것이기 때문에 네가 알아서 살아라.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고, 제가 수도원 입회하는 것도 제가 부모님한테 결정해서 보고했어요.

'아버지! 저 수도원 갑니다.' 이렇게~ 그때가 18살, 19살 이때였죠.



Q 수도원 입회한다고 했을 때 부모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던가요?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네가 결정한 거니까 난 널 존중한다. 다만 살다가 이제 그만 둔 사람 보니까 조금 마음이

안됐더라, 신중하게 생각해라.'

대신 어머님은 그날은 동구밖까지 나오셔가지고 제 손을 잡고 '안셀모야, 안 가면 안 되냐?'

이런 말씀도 하시고 눈물도 흘리시고 그러셨는데 지금은 너무 좋아하십니다.




Q 수도회에 입회하지 않았다면?


글쎄요. 전 아마 사업을 하거나 이런걸 했으면 금방 망했을 것 같애요.

저희 집안에 교육자들도 많으시고 하니까 아마 가르치는 일이나 이런 것들을 하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 성격은 조금 내향적이기도 하고,  또 혼자 있는 시간들도 많이 좋아하고, 그렇지만

수도원에서 와가지고 상당히 많이 변화된 것 같애(아)요.

또 특별히 토마스 머튼 신부님을 통해서 제 안에는 영적인 큰 변화도 있고 그런 것 같습니다.



Q  토마스 머튼이 와닿게 된 계기는?


사실 제가 캐나다에서, 토론토 대학에서 공부할 때 당시에 토마스 머튼의 책을 처음 만난 건 아니

었습니다. 신학교 들어가기 전에도 칠층산을 읽었었구요,  마지막 페이퍼로 교수님께서 저한테

안셀모 신부는 베네딕도회 회원이니까 monk(수도승)이기 때문에 토마스 머튼에 대해서 한번

써보면 어떻겠느냐 하면서 저에게 권유를 하셨어요.


그분의 책을 읽는 가운데 굉장히 매력적인 부분들을 많이 발견을 했는데 그게 뭐냐하면

그분이 변화된 삶을 사셨다는 겁니다.

토마스 머튼과의 만남이 어쩌면 하느님의 섭리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그 토마스 머튼의 책을 읽음으로 인해서 저한테는 굉장이 많은 변화가 왔었고

또 그 변화를 통해서 제 삶이 새롭게 시작하는 출발점이 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토마스 머튼이 1958년 3월 18일날 루이빌에서 하느님을 체험한 대목을 읽을 때였어요.

그때 토마스 머튼이 루이빌에서 체험한 하느님이 어떤 하느님이었냐하면

길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우연히 보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 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겁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을 체험하면서 토마스 머튼이

아! 자기 자신은 그동안은 좀 더 우월하고 , 왜냐하면 수도자였고 또 성직자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좀 더 내적인 사람이고, 좀 더 영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고, 더 거룩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고 그래서 저 사람들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토마스 머튼이 그 사람들 안에 있는 예수님을 머리로가 아니라 진짜 가슴으로 뜨겁게

만나게 된 겁니다.

그래서 그 체험을 통해서 토마스 머튼은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는데

그 과정을, 기록되어 있는 것을 읽으면서 저는 굉장히 뜨거운 감정을 저역시 느꼈어요.


왜냐하면 저도 똑같이 토마스 머튼처럼 수도자이고 또 성직자였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거룩해야된다고 생각했었고 또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영적으로 뛰어나야 된다고 생각하는

그런 영적인 교만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 깨닫게 되었던 것 같아요.


제가 사실 토론토로 공부를 하게 된 배경중의 하나도 공부하기 직전까지 남자 장상협의회

사무국장으로 일하면서 또 성소 담당자로 일하면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또 많은 일들을

하면서 많이 지쳤어요. 그래서 더 이상은 못하겠다. 번아웃(burnout)되는 그런 체험을 했었습니다.

영적으로 피폐해진 그런 체험이랄까! 밑바닥 체험, 다 무너지는 듯한 그런 체험이 있었기때문에

더이상 못하겠다 이런 막다른 골목에 온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곳에서 공부하는 동안에 여러가지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특별히 토마스 머튼의 그

변화된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동안 제가 완벽할려고 했고, 제 성격상 부모님의 영향도 받아서

그런지 항상 완벽할려고 하고, 또 잘 할려고 하고 , 잘 해야 되고, 뭐 그런 것에 항상 마음이 가

있었기 때문에 잘 되지 못했을 때 굉장히 자기자신한테 실망을 느끼고 또 난 이거밖에 안되는가

그런 자괴감도 느끼기도 하고 항상 완벽하게 할려고 했던 그런 성향들이 저한테는 더 큰 짐이었

던것 같애요.


그런데 거기에서 토마스 머튼이 자기자신의 고백을 하면서 자기자신은 절대 우월한 사람이

아니고 부족하고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거죠.


러니까 수도원이라는 그런 아주 거룩한 공간에서 자기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는데

다시 이제 평범한 사람으로 내려온 겁니다.


그래서 이 평범한 사람이 되었다는 그 사실을 통해서 저한테는 어떤 감정이입이 되고,

제 자신의 삶과도 이렇게 맞춰지게 된 겁니다.


그래서 아, 나도 그렇게 그동안 살아온 삶의 여정에서 여러가지 쓰러지기고 하고,

또 완벽하지도 못한데 그런 가면을 쓰고 살아왔던 그런 시간들이 하나의 과정이구나!

왜냐하면 그분이 변화되었던 것처럼 나도 변화될 수 있구나,

그런게 저한테 절 아주 압도하듯이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그때  그 대목을 읽는데 눈물이 주루룩 눈에서 흘러내리더라구요.

그리고 제 내면에 이런 소리가 들렸어요.

'괜챦다 안셀모야! 괜챦다 안셀모야!

가 너와 늘 함께 하고 있고, 또 앞으로도 너와  함께 할 것이다.'

그런 내적인, 제 안에 그런 소리가 들렸어요.


그 음성을 듣는 순간에 아! 굉장히 뭔가 치유가 되고 제 안에 정화가 일어나는 느낌이 들었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토마스 머튼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많은 신뢰를 하게 되었고,  마치 그 토마스

머튼이랑 연애를 하는 것처럼 그분의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이 저한테는 너무너무  기쁨이었고

그분의 삶에 제가 완전히 동화되는 느낌이 많이 들었습니다.




Q 토마스 머튼을 접하면서 강력한 은총의 체험을 한 순간이 있으셨다는데,,,


그 때, 따사로운 햇볕이, 제 방에는 창문이 굉장히 컸어요. 그 창문에 들어오는 따뜻한 햇볕이

제 온몸을 감싸는 그런 날이었구요, 그리고 제가 제 책상의자에 앉아 있었는데 거기에 자그마한

테이블에 기대서  책을 보고 있었는데, 그때 따사로운 햇볕이 아주 강렬했던 기억이 나구요

그리고 뭔가모르게 저를 압도하는 그런 강한 느낌이 들었었어요.


그리고 그 시간은 저한테 아마 너무 강렬해서, 얼마나 긴 시간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또 짧은 시간일수도 있었겠죠. 그런데 그 순간의 체험은 굉장히 큰 영적인, 저한텐 큰 은총이었고

은총의 체험이었습니다.





Q 토마스 머튼을 만나기 전과후 나는 어떻게 다른가.


처음에 제가 가지고 있는 토마스 머튼을 만나기 전의 영성이라면 어쩌면그냥 교회에서 가르쳐

주는대로 공의회의 어떤 정신들, 정통적인 교리와 신학들을 배웠었고 또 거기에 따라서 저 자신

도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또 저 자신도 그렇게 믿고 있었죠.


그런데 토마스 머튼의 영성을 접하면서 토마스 머튼이 결코 가톨릭 신학에 대해서 부족하거나

충실하지 않았던 분도 아니었고 굉장히 가톨릭 신학에 대해서 풍성한 영성을 가지고 계셨고,

또 충실하셨어요.  그렇지만 그것을 관상적인 체험을 통해서 완전히 뛰어 넘으신 분이시죠.


당신이 평범한 인간으로 내려왔지만, 평범한 삶 속에 사셨지만, 오히려 관상의 깊은 체험을 통해서

더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나아가고  또 열려진 마음에서 세상을 향해서 많은 글도 쓰시고, 또 많은 

의식의 변화를 시키기 위해서 많은 활동도 하셨어요


그리고 종교간 대화를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하셨구요.

그래서 제가 토마스 머튼을 만나고 난 이후부터는 굉장이 좀 열려진 마음이 생겨난 것 같습니다.

사람들에 대해서.


그리고 같은 관상적인 기도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도 좀 더 여유가 생긴 느낌이 듭니다.

좀 더 자유로워졌다고 그래야 되나요. 저 저신에 대해서도 좀 더 자유로워진 느낌이고 사람들에

대해서도 좀 더 기다릴 수 있는 마음, 또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그런 내적인 여유로움

이런 것들이 제안에 생겨난 것 같아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종교에 대한 그런 관심도 더 많이 생겨났고, 또 그 종교로부터 배우고

싶어하는 그런 마음들도 생겨났어요.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재미난 얘기를 하나 해드리고 싶어요.

저는 사실 토마스 머튼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공부할 때가 있었어요.

탐독하듯이 책을 읽고, 모든 생각이나 모든 가치관이 토마스 머튼의 영성을 중심으로 바라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했어요.


그런데 2017년에 아일랜드에서 개최된 종교간 대화의 모임이 있었어요. 수도승들간의~ 그래서

스님도 오시고 하셨는데 그때 제가 어땠냐하면 항상 이야기하면 <아, 그건 토마스 머튼의 영성

입니다. 토마스 머튼>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만 계속하니까 어느 신부님께서 <왜 토마스 머튼만 이야기하느냐!>

그 표현을 듣는 순간에 아 제가 뭔가 깨달음을 얻었어요.

그게 뭐냐하면, <토마스 머튼을 버려야되는구나!>


제가 토마스 머튼에 대해서 굉장한 많은 관심을 가지고, 그 영성을 쫓았지만은

사실은 토마스 머튼이 체험한 하느님이었지 제가 체험한 하느님이 아니었쟎아요.

그래서 토마스 머튼을 넘어가기 위해서 내가 토마스 머튼을 버려야 되는구나.


이 체험을 하고 난 이후로 그동안 제가 배워왔고, 또 공부해왔던 그 토마스 머튼이

제 머리속에, 제 배속에 가득했다면 이제는 소화되기 시작했어요.

점점 머튼의 영성이 제 안에 소화되어서 제 영성으로, 혹은 제가 이제 하느님을 찾아가는데

어떤 도구로서의 토마스 머튼이지 그것이 저한테 목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 배경이 된

것 같애요.


그런 시각으로 다른 성인들, 또 다른 성경에 나오는 여러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들에 대한 그

이야기를 다시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때, 아, 내가 그분들의 체험도 내것이 아니라 그분들의

체험이구나!


예를 들면, 뭐 아브라함이 체험한 하느님, 모세가 체험한 하느님, 이사악, 베드로, 바오로, 막달라

마리아가 체험한 하느님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어요.


그렇지만 그건 내가 체험한 하느님이 아니쟎아요. 그분들이 체험한 하느님이 성경에 적혀있기

때문에, 물론 그분들을 통해서 우리가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지만 그분들의 체험이 마치 자기

것인양 나도 그렇게 되어야 된다고 생각하면서 거기에 집착하면  오히려 나의 하느님을 못 만나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토마스 머튼을 버리고 난 이후부터 굉장히 더 자유로워진 느낌이 듭니다.

또 토마스 머튼의 영성을 통해서 제가 체험했던 영적인 삶의 여정, 그리고 제가 체험했던 하느님

에 대해서 제대로 볼 수 있는 눈도 생겨났어요.


저는 영적인 생활은 어떤 레벨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느님에 대해서도 우리가 마지막까지 알 수 없는 것처럼 한 단계, 한 단계 또 새로운 측면의

하느님들을 또 바라보고  느끼고 공부하고 하는 과정에서 더 다른 하느님을 또 만나고, 또 몰랐던

하느님을 만나고 해서 점점 내가 알고 있는 하느님관이 커지고 더 충만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여정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토마스 머튼도 똑같이 그렇게 처음부터 완벽했던게 아니고, 계속해서 이제 완벽을 향해서

하느님을 향해서 나아가는 여정중에 사셨고, 저도 역시 똑같이 제가 지금 가지고 있는 하느님

관이라든지 또 어떤 영적인 여정이 여기서 완성된게 아니라 앞으로 계속 하느님께서 새로운 당신의 영을  통해서 새로운 당신의 모습을 또 보여줄거라고 믿습니다.


이 논문이 제가 박사학위를 받은 논문입니다.

"THOMA MERTON'S ENCOUNTER WITH BUDDHISM AND BEYOND"


토마스 머튼이 불교와 어떻게 만남을 가졌고 또 앞으로 이것을 어떻게 BEYOND(넘어갈건가).

토마스 머튼도 완벽하지 않았거든요. 또 토마스 머튼이 알고 있던 불교하고, 또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 불교는 또 종파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또 시대마다 다를 수 있고,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우리 한국에서 또 아시아 지역에서 토마스 머튼이 불교와 대화할려고 노력했던 그

모습을 더 발전시킬 수 있는가.


토마스 머튼은 불교와의 종교간 대화에 있어서 선구자다, 개척자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그분의 그런 좋은 모델들을 어떻게 오늘날 우리 시대에 더 잘 개발해내고 또 더 잘 소화해

낼 수 있는가에 대해서 다루었는데 그 가운데 4개의 챕터가운데 첫 번째 챕터는

토마스 머튼이 어떻게 이제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는가. 그 변화의 과정을 그렸구요~


두번째 장에서는 토마스 머튼이 어떻게 불교와 대화하게 되었는가.

사실 미국에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사는 수도승이 불교에 혹은 토마스 머튼은 장자도 좋아했어요.

도교나 이런것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것 그 자체도, 공의회 이전에 그런데 관심을 가졌다는

것도 상당히 어떤 하느님의 섭리처럼 느껴져요.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토마스 머튼이 얼만큼 불교에 대해서 이해를 했고 또 불교와 대화하려고

어떤 노력을 했는가. 여기에 대한 것을 두번 째 장에서 다루었구요~


또 세번째 장에서는 수도승들 안에서 토마스 머튼이 수도승으로서 종교간 대화를 했기 때문에

이 수도승간의 종교간 대화가 어떤건가...


사실 모든 종교안에는 수도승들이 있어요. 불교는 특히 더 그렇구요.

불교는 수도승제도로 시작되었죠. 그리고 힌두교도 마찬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교는 수도승 제도가 없다고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대신에 '수피'라는

그런 관상생활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모하메드가 처음 의도할 때 모든 사람들이 관상가가

되기를 원했어요. 그래서 관상적인 대화가 가능하다. 저는 이렇게 표현을 했구요~


마지막 장에서는 이제 토마스 머튼의 그런 유산을 우리 시대에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서 또 내부에서 우리 안에서, 우리 지역안에서 어떻게 서로 다른 종교가 같은 문화권 안

에서 어떻게 대화를 할 수 있는가 이런거에 대해서도 이 논문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논문이 얼마전에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4월에 나온 따끈따끈한 책입니다.

이 책은 한국말로 번역 작업이 다 되었고, 교정작업중에 있습니다. 올 11~12월 중에는

한국말로도 번역되어서 출판되어 나올 예정입니다.


북미에서도 그렇고 한국에서도 그렇고 이런 문제를 가지고 논문을 쓰고 책을 낸게 처음이기

때문에 북미에 계시는 분들도 제 책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가지시고, 또 논문도 가치있는

논문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Q 보통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토마스 머튼의 매력?


두 가지로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첫번째는 토마스 머튼은 우리와 멀지않는 현대 영성가라는 겁니다.

아빌라의 데레사라든지 십자가의 성요한, 이냐시오, 저같은 경우엔 베네딕도 성인을 따르고

있는데 이런 분들은 좀 다른 문화, 다른 시대에, 먼 시대에 사셨기 때문에 사실 우리 시대와

맞지 않는 부분도 많이 있을 수 있을겁니다.


그런데 토마스 머튼은 우리 가까운 시대에 1915년에 태어나시고 1968년에 돌아가셨는데

우리와 그리 멀지않는 그  시대에 사셨고 또 그분이 매일매일 일기를 쓰셨는데, 그런 일기쓰신

것들, 또 영적인 서적을 많이 쓰셨는데 그런 것들이 아주 구체적으로 그분의 삶을 잘 묘사해

놓고 있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친근감을 느끼실 수 있을거예요.


특별히 일기같은 경우에는 정말 하루하루 수도원에서 살아가는 그런 삶, 자기가 떠오르는 생각들을

자연스럽게 기록해놓았기 때문에 그런 편지, 일기 이런것들을 통해서 내 삶을 한번 이렇게 빗

대어 볼 수 있는 그런 현대영성가로서 우리에게 가까이 있다는 점에서 이제 매력적이구요~


두번째로는 우리와 다르지 않고 평범함 사람이다. 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사실 이 말은 조금은 어패가 있어요. 왜냐하면 그분은 사제였고 또 엄격하기로 유명한

트라피스트 수도원의 수도자였어요.


그런데 그분이 우리 평신도, 또 일반인들하고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하고 무슨 비슷한

점이 있겠느냐 하고 이렇게 질문하실수도 있을텐데 아까 제가 잠깐 말씀드렸던 루이빌의

체험에서 그분은 이제 당신 자신이 아주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또 사람들을 위해서

살아야 된다 것을 깨닫는 그런 깊은 체험을 했어요.


동시에 우리가 토마스 머튼의 글을 읽으면 아, 우리도 토마스 머튼과 같이 관상가가 되어야

되는구나! 사실 관상가가 된다는 그부분, 영적인 삶을 사는 것이 일반인들에게는 마치

수도원이나 혹은 특별한 사람들만하는, 수도승들이나 하는 걸로 생각할 때가 많아요.

또 그렇게 인식되어 왔구요.


왜냐하면 관상이라고 하면 어떤 황홀한 체험을 해야되고, 또 신비적은 어떤 그런 체험을

한 사람들이 관상가라고 하는데 토마스 머튼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약간 맛배기로 말씀드리자면  토마스 머튼은 우리 모두는 이미 관상가라고. 또 관상의 삶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다는 것을 깨닫고 또 그 깨달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통해서,

또 글을 통해서 나누었어요.


이게 뭐냐하면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안에 모든 것을 다 주셨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느님은 이미 우리안에 계신다는 겁니다.


근데 관상을 통해서 우리안에 계신 그 하느님이 깨어나게 하는거, 또 그안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관상의 씨앗! 그 씨앗이 자라나게 하는 것, 그것이 관상의 삶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하느님과의 일치를 향해서 불리움을 받았고 그 불리움이 완성되는 때, 체험을

할 때 우리는 더 이제 한단계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레벨 업 되어서 좀 더 다른 영적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힘이 생겨나는거죠.


그래서 토마스 머튼이 우리에게 매력적인 이유중에 하나는 우리 모든 사람들을 정말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는 길로 초대해주었다는거죠.




Q  '분도 명상의 집'과 '토마스 머튼 영성센터'에 대해


물론 자체 프로그램을 가지고 와서 시설을 이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저희가 토마스 머튼

영성을 중심으로 한 달에 두번 월요모임과 토요모임이 있습니다.


월요모임은 당일피정인데 아침부터 해서 오후까지해서 토마스 머튼에 대한 강좌도 있고

미사도 하고 해서 하루종일 토마스 머튼을 중심으로 어떤 피정을 하는거죠.


사실 전 토마스 머튼이 관상가였고 또 영성가였기 때문에 그분의 영성을 어떤 배움을 통해서

지적인 그런 나눔을 통해서 전달하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제가 이 프로그램을 피정이라는 말을 붙인 이유도 이 영성은, 기도는 기도함으로써

배울 수 있는거거든요. 그래서 같이 기도하는 가운데 자기자신을 되돌아보는 가운데  더

깊이 심화할 수 있는 그런 과정으로서 이런 강좌, 피정을 만든거죠.


토마스 머튼의 그런 영성을 배우기 위해서 또 느끼고 체험하기 위해서 이런 시간들을 활용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멀리서 오는 분들을 위해서, 가까이 있는 분들은 하루피정을 하면 되

지만 멀리서도 오고싶어하는 분들이 계셔가지고 1박2일 프로그램을, 토요 프로그램인데 토요일

에 시작해서 주일 오후에 마치는 겁니다. 강의도 있고 직접 관상기도도 같이 해보고 그리고

나눔을 통해서 서로의 영적인 여정들을 같이 또 한번 살펴보고 같이 미사하는 가운데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나누고 하는 그런 시간으로 1박2일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Q 토마스 머튼의 영성의 세계! 이런 분을 초대하고 싶다.


아까 말씀하신 그런분들 초대하고 싶습니다. 외로운 분들, 정말 고독을 씹고 싶은 분들, 그리고

영적으로 조금 더 성장하고 싶은데 방향을 잡기 힘든 분들, 또 스스로 거룩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들, 혹은 좀 더 자기자신을 되돌아보고 싶은 분들, 특별히 토마스 머튼 영성가운데는 기도에

대한 부분들이 굉장히 많아요.


토마스 머튼은 누구보다도 관상가였기 때문에 어떻게해서 그런

관상의 여정을 갖게 되었는지 굉장히 사람들에게 어필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구요 또 사실

토마스 머튼의 영성이 안맞는 분들도 계실 수 있어요.


관상이라는 단어자체가 오늘날 한국사람들안에서 마치 관상하면 얼굴을 통해서 뭔가 이렇게

운세를 맞추는 그런 용어로 연결이 되기 쉽기 때문에 사실 이 관상의 영성을 산다는 것은 또

듣는다는 자체가 굉장히 어렵게 느껴져요.


그런데 어떻게하면 관상을 더 쉽게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관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 알고

싶어하는 분들에게도 초대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종교간 대화나 사회운동 하는 분들, 토마스

머튼이 1960년대에는 피스메이커라는 별명을 가질정도로 세상에 대한 관심이 많았어요.


오늘날 교회의 사회참여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기도 하고 교회가 왜 기도나 하지 그렇게

세상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지, 그 원리가 뭔지에 대해서 먼저 설명이 있지않으면 마치 교회와

세상이 분리된 것처럼 여기고 있는 분들도 많으세요.


도대체 이 세상에 참여하는, 세상과 연대하는 교회가 왜 필요하냐에 대해서 그 근본원리를 알고

싶은 분들도 이 강좌에 초대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영적으로 더 성장해나가고 싶은 분들, 또

하느님을 찾고자 하는 분들, 하느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분들, 또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싶은 분들, 또 인간적인 사랑을 통해서 어떻게하면 더 하느님께로 더 나아갈 수 있는지, 사실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토마스 머튼은 생애 말년에 M이라는 여성과 사랑에 빠지는 체험을 하기도해요. 그런 수도자가 사랑에 빠지는 체험을 한다는 그 사실이 납득이 안되쟎아요. 그러나 그 안에서

뭔가 심리학자들이라든지 페미니스트들은 거기에서 어떤 인간적인 사랑을 통해서 더 하느님의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또 제시하기도 하거든요.

어떤 로맨틱한 사랑이야기를 듣고 싶은 분들도 초대하고 싶습니다.





Q 이 프로그램 또는 토마스 머튼 영성센터 피정에 앞서 필요한 준비는?


아마 토마스 머튼한테 이런 질문을 한다면 토마스 머튼이 이런 답을 할 것 같애요.

그냥 오십시오. 마음 편안하게, 그냥 받아들이는, 비워지는 마음으로 오십시오. 이렇게

얘기하실 것 같애요.^^


그리고 굳이 조금 준비를 해야된다면, 예습을 해야된다면 토마스 머튼의 생애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는 <칠층산>이라든지, 또 최근에 한국말로 번역된 책이 있는데 <토마스 머튼의 시간>이라는

책이 있어요. 그 책은  토마스 머튼의 입문에 아주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그 책은 토마스 머튼이 수도회에 입회해서 돌아가실 때까지 일기를 아주 일목요연하게

요약을 해놨어요. 사실 일기만 모으면 이렇게 긴  아주, 7권인가 될거예요. 책입니다.

이것을 한권에 요약해 놓은 책이기 때문에 이 책을 읽고 오시면 토마스 머튼을 이해하시는데

굉장히 도움이 되실겁니다.


자기를 온전히 내어주는 사랑의 삶, 또 자기를 희생하는 삶, 또 십자가를 통해서 오히려 더 큰

부활의 영광에 이르는 그런 은총에 이르는 빠스카의 그런 신비로운 삶이 이런 삶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어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 그건 예수님이니까 그렇지 우리도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어~라고 하는데  많은 성인들이나 또 영성가들이 그런 삶을 미리 맛

보았어요. 너무 좋은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좋은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에게 이런 삶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했던 본래의 삶의

모습입니다. 인간으로서의 삶의 모습입니다. 라고 모델을 제시해주시기도 하고, 또 본인 스스로

그걸 체험으로 나누기도 하고 글을 통해서, 여러가지 나눔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초대하는거죠.


그러나 궁극적으로 우리를 초대해주시는 분은 성령이신거죠.

그 시대에 맞는 언어로, 그 문화에 맞는 언어로  예를들면 토마스 머튼의 경우는 우리 시대와

아주 가까이 있기 때문에 우리 시대에 맞는 그런 모습으로 어떻게하면 하느님안에서 정말

인간다운 삶,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해서 관상이라는 길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는거죠.


관상이라는 단어자체가 굉장히 좀 딱딱한 용어처럼 들릴 수 있겠지만 그 한자를  잘 풀이해보면

굉장히 그 안에 사랑이 가득하다는 걸 볼 수 있어요.


觀자는 볼관 자인데 아주 자세히 본다는 뜻이예요.

그리고 想자는 서로 상(相)변에 마음(心)심 자가 있어요.


그러니까 서로가 마음으로 자세히 바라본다는 거죠. 지그시!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어요.

하느님께서 내 바로앞에서 나의 현존가운데에서 나와 함께 하고 있음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 서로가 마음이 통하는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