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4회 대담 : 토마스 머튼은 우리와 다르지 않다_현대영성가 토마스 머튼과의 만남_박재찬 신부 해설

은가루리나 2020. 3. 13. 15:57



안녕하세요.

영성가 토마스 머튼의 속내와 뒷 이야기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명사 특강만큼이나 깊이 있고 토크쇼 만큼이나 흥미로운 신개념 시사 프로그램

'현대영성가 토마스 머튼'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가톨릭대학교 학부대학 교수 김남희 율리아입니다.

이 시간에는 박재찬 수사신부님과 토마스 머튼 강의를 일반 신자들의 눈높이에서 이해하고

그리고 현대적 관점에서 무겁지 않게 풀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김남희 교수 : 신부님, 안녕하세요~! 네~반갑습니다.먼저 지난 시간에 1950년대까지의 토마스 머튼의 생애를 잘 설명해 주셨는데요. 특히 신부님께서 강조하셨던 부분이 연대기적으로 보는 것 보다는 그 생애에 있었던 중요한 사건들을 중심으로 보는 게 중요하다, 그렇게 해서 3가지를 지적해 주셨거든요. 그 영향을 받았던 3가지 사건인데 간단하게 우선 정리해 주실 수 있으세요?



박재찬 신부 : 네, 그렇죠. 토마스 머튼이 회개의 삶, 또 수도원으로 입회하게 된 과정중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게 3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심리적인 것, 그리고 가정적인 배경들, 그리고 두번 째는 좋은 사람들, 또 좋은 책들과의 만남이라고 볼 수 있구요, 또 세번 째는 신비로운 하느님 체험들도 토마스 머튼이 회개하는데 굉장히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을겁니다.



김남희 교수 : 아~ 네! 저는 그 강의를 들으면서 그 3가지 가운데 가장 먼저 제가 평신도이고 일반 신자 입장에서 가장 먼저 흥미로웠던 점이 토마스 머튼이 반항아였다~ 라는 점인데요, 여기서 그분의 성격이 갑자기 궁금해졌습니다. 토마스 머튼을 연구하신 신부님께서는 첫번 째 오프닝에서는 나는 소극적인 사람이다. 그러니까 내향적 성격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셨는데 내향적 성격인 신부님이 보시기에 토마스 머튼은 어떤 성격을 지닌 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박재찬 신부 : 글쎄요. 토마스 머튼은 본인이 뭐 직접 성격을 말한 건 아니지만 그분의 글을 읽어보거나 또 예전 시절을 회고한 '칠층산'이라든지 다른 일기 부분들을 읽어보면 이분은 외향적이면서 또 동시에 굉장히 어떤 내적인 깊이를 가지신 그런 성향을 가졌다고 볼 수 있을겁니다.


왜냐하면 어린시절에 굉장히 좀 불행하고 또 좌절의 체험, 우울의 체험들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들여다 보고, 또 자기 자신에 대해서 또 주변 환경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다 보니까 좀 소외된 느낌도 갖게 되고 또 오히려 그 소외된 것을 감추기 위해서 어떤 외향적으로 뭐 술을 좋아한다든지, 친구를 사귀는 걸 좋아한다든지 그런 성향이 있었을거라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나중에 후대에 그 토마스 머튼이 직접 강의한 강의내용들, 수련자들한테 한 내용들이 이렇게 녹음되어 있습니다. 그 녹음들을 한번 들어보시면 토마스 머튼이 얼마나 유머러스하고 또 굉장히 밝고  또 적극적이고 또 강의 내용을 들어보면 강의내용 내내 막 수련자들이 웃습니다. 토마스 머튼의 그 재치때문에.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어린시절의 그 삶을 보면은 가정적인 그런 환경때문에 소극적이면서도 또 그것을 감추기 위한 외향성을 지녔다면은 후대에 갈수록 점점 자기 정체성이 좀 더 확고해지고 그래서 외적인 내적인 그런 차이가 점점 줄어들었다고 볼 수 있을겁니다.



김남희 교수 : 제가 토마스 머튼의 일기를 보다가 흥미로운 문구를 발견을 했었거든요. 토마스 머튼이 고백을 하는거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뭐 심리치료를 받은 건 아닌데요 그걸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융을 읽고 내가 어떤 성향인지 알아내려고 했다.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외향적 감각형이라고 했다. 분명 나는 내향적이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면서 한 사람을 유형으로 가른다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이렇게 얘기를 하고 있는데 아마도 본인은 외향적이고 굉장히 감각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수도원에 들어오면서 어떤 내향성에 관한 것도 길러지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것보다 더 중요하고 저에게 흥미로웠던것이 조금전에 말씀드렸던 '반항아'라고 하는건데요 신부님은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토마스 머튼은 반항아였나요?



박재찬 신부 : 반항아라는 표현은 윌리암 쉐논(William H. Shannon)이라는 토마스 머튼 아주 전문적인 학자분께서 반항아라는 그 표현을 썼습니다. 그분이 쓴 '고요한 등불'이라고 아마 한국말로 번역되어 있을텐데 그 책을 읽어보면 이제 토마스 머튼은 어린시절도 반항아였었고, 또 수도원 들어와서도 수도원 안에서도 수도원의 여러가지 관계되는 규율이라든지 이런거에 대해서도 반항아였고 또 교회에 대해서도 어쩌면 교회의 쇄신을 위해서 자기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주장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측면에서의 반항아였다고 표현을 합니다.


그런데 어린시절에는 본인이 어떤 주어져 있는 삶의 여건안에서 지금 주어져 있는 삶을 어떤 다른 표현을 할 수 없는, 내적인 어떤 그런 갈등, 또 우울함, 소외됨, 그리고 부모님을 어려서 여위었쟎아요 그래서 자기자신을 감추고자 하는 그런 것도 있었지만 동시에 또 주어져 있는 자기 삶에 대해서 뭔가 마땅한 안정감이라든지 평화로움을 찾을 수 없으니까 그것을 외적으로 표현하다보니까 또 왕따 당하는 그런 체험도 좀 있었거든요.


그러다보니까 자기자신을 표출하기 위해서 반항아적인 그런 기질, 그래서 교회에 대해서도 반항아적인 기질, 또 친구들에 대해서, 자신에 대해서 심지어 반항아적인 그런 기질을 갖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반항아적인 기질이 어쩌면 오히려 토마스 머튼이 좀 더 외향적인 면, 동시에 내향적인 면이런 면들이 나중에 더 점점 하나의 인격체로 통합되어 가는 과정에서 어쩌면 필요한 과정이었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결국은 우리가 외향적이든 내향적이든 통합된 인격으로 나아가는게 전인적인 인격으로 나아가는게 중요하기 때문에 토마스 머튼이 외향적으로는 반항아였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내적으로 수줍음도 많이 타고 또 내적인 갈등, 고민도 많이 했던 분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봅니다.



김남희 교수 : 그렇다고 한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평신도들에게 토마스 머튼처럼 반항아가 되라고 하실 수 있으신가요 어떠세요?



박재찬 신부: 토마스 머튼이 교회에 대해서 비판하거나 혹은 또 수도원에서 비판할 때 항상 본인이 가지고 있는 어떤 영적인 깊이 안에서 그런 표현을 했던 것 같애요.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셨던 것, 그리고 또 지금 현재 이 교회안에서 필요한 것들이 스스로 이제 깨달은 바가 있었던거죠.

그 깨달은 바가 있었던 것을 수동적으로 그냥 교회의 어떤 것들을 받아들인게 아니라 좀 더 이제 개척자적인 그런 자세에서 그리고 또 예언자적인 그런 자세에서 입장에서 표명을 한거죠.


그래서 그 수도원이 이제 개혁을 하면서 변화가 되면서 여러가지 이제 수도원 안에서 판매도 많이 하고 뭐 치즈도 팔고 쨈도 팔고, 또 새로 공사도 많이 하고 트렉터도 다니고 하니까  너무 소음도 많아지고 하니까 토마스 머튼은 심지어 'Cheese is Jesus ' 라고 하면서 치즈가 하느님이 됐다. 예수 그리스도가 됐다. 이런 표현도 쓰기도 하는데  실제로 토마스 머튼은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토마스 머튼을 표현을 할 때 예언자였다, 신비가였다 이런 표현을 하는데 그 자신이 깨달은 바를 교회 공동체나 또 수도 공동체에 나누지 않을 수 없었던 거죠. 그러다보니까 기존에 있는 생각을 뛰어넘는 이야기를 하니까 거기서 어떤 부딪힘이 생길 수 있는데 그것들은 한 시대를 앞서가기 위해서는 필요한 예언자적인 목소리가 아니겠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예언자적인 목소리는 한 개인에게서 나오는 게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또 하느님께로부터 온 거라면 우리 구약에 나오는 또 신약에 나오는 여러 예언자들의 삶을 보면 그네들이 그분 성인들께서 본인들은 원하지 않지만 외쳐야 되쟎아요. 그런 입장에서 우리 토마스 머튼이 반항아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 교회에 대한 비판 이런 것들을 가졌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후대에도 토마스 머튼이 어떤 종교간 대화라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사회정의를 부르짖기 위해서는 개인이 먼저 교회안에서 또 자신의 종교안에서 영적으로 성숙해졌을 때 그것이 가능하다고 표현을 합니다. 


무슨 말인고하니 자기 자신의 종교안에서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사회정의라든지 또 교회에 대한 비판이라든지 또 다른 종교와의 대화를 나눌 때  부족한 상태에서 하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좀 더 이제 영적으로 성숙해졌을 때 사회정의라든지, 또 종교간 대화를 했을 때 더 깊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그런 뜻일 수도 있을겁니다. 나중에 그 부분은 제가 후에 종교간 대화할 때 또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김남희 교수 : 네 맞습니다. 이 부분을 좀 더 정리를 해 본다면 반항이라고 하는 것이 거칠고 폭력적인 의미가 아니라 이미 굳어진 행동 양식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를 할 수 있고, 그 다음에 그 굳어진 상태로 가지 않을려는, 끊임없이 쇄신할려고 하는 의지! 이렇게 평신도 신자들에게 해석해도 될까요? 



박재찬 신부 : 네. 토마스 머튼이 강조한 것중에 하나가 제도적인 개혁이 아니라 내적인 쇄신이 먼저다. 중요하게 강조를 많이 했었거든요. 그래서 방금 말씀하신대로 어떤 쇄신을 위한 어떤 의지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반항아적인 기질로 보일수도 있겠죠.  기존 제도 안에서는요.



김남희 교수 : 그쵸. 그러면 반항아라고 명명해도 될 것 같습니다. 신부님.

그럼 두번 째로 저는 또 흥미로웠던 점이 토마스 머튼이 무신론자였다고 하는건데요 사실 토마스 머튼이 어렸을 때는 성공회 신자였고 또 이제 무신론자로 청년시절을 보냈고 그 다음에 수도원에 들어가기 전에 무려 3년전에 신자가 되서 세례를 받고 들어갔는데 그러면 그 사이에 왜 무신론자였는지 무신론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어떤 시대적 상황들이 있었을까요?




박재찬 신부 : 네, 그럼요. 토마스 머튼은 성공회 세례를 받았지만 아버지가 성공회 신자였어요. 그런데 뭐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태어나면 자연스럽게 이제 성당에 가서 세례를 받는 그런거였고 또 아버지가 그것을 원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성공회 신자로서 충실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았었고 또 어머니는 퀘커 교도였는데 칠층산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퀘커 교도의 모임에 어머니 따라서 가끔씩 가기도 했지만 거기에도 어떤 매력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리고 아버지 어머니랑 같이 지내던 시간도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홀로 있는 시간도 많았고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어릴 때 어떤 종교적인 교육을 전혀 받지 못했다고 보면 될 겁니다. 그러다보니까  자연스럽게 어떤 신에 대한  거부감도 있었고 또 종교 교육을 못받았기 때문에 교육을 못 받은 상태에서 종교적인 활동을 할 수도 없었던거죠.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제 그런 반항아적인 기질때문에 학교기숙사에서 의무적으로 채플에서 경당에서 이제 예배를 하거나 혹은 미사를 드리거나  그런 시간이 있을 때에도 의식적으로 사도신경이 울려나올 때는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속으로 이렇게 뇌이기도 했다고 그러는데 무신론자로서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그런 배경이 있었던 것 같구요 또 그 당시에 세계 여러 2차대전도 일어나고  뭐 그런 과정에서 어떤 종교적인 분위기가 좀 더 부족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김남희 교수 : 저는 그 질문을 드렸던 이유가 저희 한국 상황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왜냐하면 2014년 한국갤럽 조사에서 보면 종교가 있느냐, 그러니까 종교를 믿는다와 믿지 않는다가 딱 정확하게 50%가 나왔어요.


근데 사실 그 전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교를 갖고 있다 라고 하는 사람이 조금 많았는데 2014년을 기점으로 정확하게 50%로 나왔구요, 2015년에 있었던 인구 총조사에서 종교가 있는 국민은 43.9% 없는 국민이 무려 56.1%로 이제 이 기점으로는 저희가 무신론자라고 감히 명명할 순 없지만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거의 50% 과반이 넘어가는 상황이 초래가 되었거든요.


그 가운데 가장 종교가 없다 라고 생각하는 그 세대가 20대 입니다. 20대는 40%가 안돼요. 그러면 저는 토마스 머튼이 청년시절에 무신론자였다 라고 한다면 지금 현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도 비슷한 고민을 할 것 같거든요.


그러면 신부님께서 토마스 머튼을 연구한 입장에서 토마스 머튼이라고 한다면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이렇게 얘기를 해 줄 것 같다. 나는 믿지 않는다 이렇게 끝나는게 아니라 어떤 이야기, 조언을 해 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박재찬 신부 : 네. 사실 한 개인의 인생의 여정에서도 제가 생각할 때는 '하느님의 때'라는 게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는우리처럼 과거, 현재, 미래와 같은 시간의 개념을 초월해서 계시쟎아요. 그래서 항상 현재만 있으신 분이시고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을 부를 때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응답을 하시는 것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어떤 하느님의 때가 되었을 때 한 개인의 삶의 역사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또 하느님께 나의 하느님,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때가 오는 것 같습니다.


그게 어떤 사람들은 일찍 어린시절부터 오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토마스 머튼은 어린시절에는 오히려 믿지 않는다 하느님을 찾지 않고 거부했지만 그 뒷면에는 그런 안정적인  하느님의 품에 안겨서 엄마 품에 안긴 어린 아기처럼 그렇게 뭔가를 갈망하는 그것들이 무의식중에 담겨 있을지도 모르죠.


아무튼 본격적으로 표면적으로 하느님을 찾기 시작한 것은 막 20대를 넘어서면서 시작되었구요 또 어떤 분들은 토마스 머튼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에 살아가는 많은 분들이 어릴 때 세례를 받았어도 하느님을 멀리하다가 나중에 이제 나의 하느님을 만나는 그런 분들도 계시구요 나중에 연세드셔서 또 하느님을 찾는 분들도 계시구요.


그래서 우리가 볼 때에는 지금 이 세대가 점점 종교가 종교적인 의식보다는 세상의 물질적인 것들을 찾아가고 마치 맘몬이 재물이 신이 되어가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긴 인류역사 안에서 본다면 내려가는 시간이 있고 또 올라가는 때가 있는 것처럼 지금 비록 외적으로는 하느님을 찾지 못하고 있다 할지라도 또 많은 이들이 하느님 이외에 다른 것을 섬기고 있다 하더라도 소수의 사람들이 끝까지 굴하지 않고 하느님께 의탁하며 또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며 살아갈 때, 다음 그 다음 세대에는 많은 분들이 또 하느님을 찾아갈 수도 있겠죠.


율리아 성녀께서 "All shall be well(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하느님의 흐름안에서 하느님의 선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라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우리 시대를 진단하고 평가하는 건 물론 중요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믿고 있고, 지금 내가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고 있는지, 그리고 지금 내가 진정으로 그 사랑을 이웃들과 잘 나누고 있는지를 먼저 고민해봐야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네가 사랑을 나눌 때 사람들이 내 제자라는 것을 알거라는 예수님 말씀처럼 우리 시대안에서 우리 한 명 한 명이 이제는 진정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그런 사도들이 되어야 하는 그런 시대에 있는 것 같습니다. 표면적으로 우리가 하느님을 믿고 안 믿고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실제로 하느님의 사랑을 살고 있는가? 이것이 더 중요한 우리 시대의 질문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남희 교수 : 네, 그렇게 생각해 본다면 좀 집요하게 말씀드려서 제가 정리를 해서 죄송한데요 첫번째 질문과 두번 째 질문을 연결해서 본다면 결국 토마스 머튼이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비록 현재 종교에 대한 관심은 없지만 중요한 것은 늘 굳어져 있는 형식에, 굳어져 있는 사상에, 굳어져 있는 틀에 박혀 있는 그런 기존의 제도에 대해서 제도 자체를 비판하는게 아니라 굳어져 가는데 대해서 끊임없이 반항을 하지 않는다면, 시도해 보지 않는다면 종교를 찾을 수 있는 길도 없어진다는 거죠. 그래서 첫번 째 질문과 굳이 연결을 하자면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박재찬 신부 : 예전에 어떤 젊은 청년이 저한테 하느님의 존재에 대해서 질문을 했었어요. 그럴 때 여러가지 이제 고민이 많이 된다고 말을 했는데 그럴 때 여러가지 본인의 근거를 대서, 그 때 제가 의심하는 그 자체는 죄가 되는 게 아니다. 더 의심하고, 더 연구하고, 더 공부하고, 또 더 질문하고, 더 기도해 봐라. 그리고 또 더 많이 사랑하라. 그러면 진정으로 하느님이 계신지 안계신지 본인 스스로 체험하게 될거다.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고민하고 더 깊이 연구하면서 또 공부하면서 하느님을 만나갈 수 있는 길을 스스로 찾아가야 되는 것 같습니다.



김남희 교수 : 네, 젊은이들에게 물어보면 바라는 사회가 뭐냐 그러면 정의로운 사회, 공평한 사회, 행복한 사회, 풍요로운 사회 이런 얘기를 하거든요. 근데 그걸 생각해 본다면 결국 우리가 원하는 바는 같거든요. 그런데 그걸 가기 위한 시점이 어른들이 보기에는 20대들이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는 것 같은데 사실은 또 그게 아니라는 것을 토마스 머튼을 통해서 대안을 좀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열심히 반항을 해야되겠는데요. ㅎㅎㅎ


신부님, 또 하나 궁금했었던 점은 토마스 머튼이 수도생활 초기에 전통적인 수도생활에 대해서 배웠다고 하는데 전통적인 수도생활이란 토마스 머튼이 후기에 살았던 수도생활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박재찬 신부 : 네, 굉장히 중요한 핵심이 되는 질문이라고 볼 수 있을겁니다.  왜냐하면 토마스 머튼이 전기나 후기나 수도생활에 어떤  뭐 규율을 지키는 거에 있어서는 똑같았습니다. 그렇지만 전통적인 그런 수도생활관을 전기에 배웠다면 그 전통적인건 어떤거였냐하면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이었쟎아요. 그래서 좀 더 이원론적인 사고가 조금 있었고 육신의 고행, 십자가에 대한 강조 이런 것들이있었다면 후기에는 좀 더 부활한 예수님과 함께 하는 그런 삶, 그리고 참된 기쁨의 삶, 행복의 삶,  또 세상과 대화하는 삶, 그러니까 머튼의 수도원이 50년대 전기에는 그 수도원의 울타리 안이었다면, 60년대 머튼의 수도원은 그 벽이 허물어지고 온 세상이 머튼의 수도원이 되었다. 이렇게 표현하면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겁니다.


그래서 조금 후에 제가 다음 시간에 강의를 하겠지만 60년대에 머튼은 사회정의에 대해서 그리고 종교간 대화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시간들을 투자를 하고 또 거기에 관심을 많이 기울인 이유도 그만큼 머튼의 그 영적인 영역은 단순히 수도원이라는 울타리를 넘어서 세상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김남희 교수 : 그러니까 시대의 응답에 하느님께서 불러주시는 그 시대적 응답에 부르심에 응한것인 거죠



박재찬 신부 : 네네, 그렇죠. 머튼 스스로의 표현에 의하면 

깨달은자의 책임감, 깨어난 자의 책임감, 

깨어난 사람이 세상에 대해서 헌신하지 않는다면 

그 깨어남은 잘못된 거라고 볼 수 있을겁니다.



김남희 교수 : 네네, 참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또 중요했었던 것은 토마스 머튼의 생애에서 좋은 친구들, 좋은 만남들이 있었다고 했었는데요 그 여러 좋은 친구들 가운데 유난히 기억할 만한 친구가  있을까요? 그 동료나, 스승이나 있을까요?



박재찬 신부 : 특별히 그 중에 여러 교수님들, 좋은 교수님들 만났고 특히 지난 시간에 제가 3명의 친한 친구가 있었다고 했는데 렉스라는 친구는 토마스 머튼이 입회한 다음에도 토마스 머튼이 글을 적고 또 책을 출판하는데 여러가지 도움을 많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좋은 친구들, 또 좋은 교수님 덕분에 토마스 머튼은 세례를 받고 또 수도성소로 나아가는데 있어 큰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을겁니다. 제가 토론토에 있을때도 보면은 참 좋은 사람을 하느님께서 필요한 때에 저에게 보내주셨다는 그런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제가 토마스 머튼을 만나고 또 그곳에서의 삶에서도 여러가지 언어적인 어려움, 문화적인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하느님께서 저에게 소중한 분들을 많이 보내주셨고 또 그분들을 통해서 저도 많이 배우고 느끼고 했던 것 같습니다.



김남희 교수 : 아, 네 참 좋습니다. 저는 토마스 머튼이 3년간 세례를 받자마자 수도원에 사실은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들어갈려고 했었는데 거절을 당하쟎아요. 그러면서 수도원을 바꿀려고 입회를 할 때 자기만의 어떤 부르심이나 성령이나 그 설레임이 있으셨을것 같은데 혹시 어떤건지 설명해 주실 수 있으세요?



박재찬 신부 : 토마스 머튼은 사제가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제 프란치스코회를 소개를 받았죠. 그런데 프란치스코회에 입회를 하게 된 배경주의 하나는 성 보나벤투라 대학에 프란치스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영향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칸이 될려고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삶을 살려고 이제 준비를 하고 있었구요 그 과거의 생활을 자기가 고백하지 않고는 이 수도원에 들어간다는 것이 너무 양심에 걸려서 처음에는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죠. 입회서류를 처음 낼 때는. 그런데 나중에 다시 방문했을 때에는 아, 내가 이것을 감추고는 도저히 내가 들어갈 수 없다 해서 말씀을 드렸고, 말씀드리고 난 이후에 수도회에서는 입회를 거절을 했죠.


그런데 하느님께서 그 이후에 두 군데를 보여주셨어요.  뉴욕 할렘가에 있는 '우정의 집'(friendship  house)이라는 곳 하고 그 다음에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보여주셨어요. 그런데 우정의 집은 할렘가에 있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공동체였는데 그 공동체하고 트라피스트 수도원은 아주 극과 극이쟎아요. 하나는 굉장히 활동적인 수도원이고 하나는 봉쇄적인 수도원인데 토마스 머튼이 지난 시간에 제가 보나벤투라 대학 경당에서 겟세마니 수도원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성소식별을 위해서 기도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제 하느님께서 토마스 머튼에게 겟세마니 수도원의 종소리를 들려주셨고 머튼은 주저함 없이 겟세마니 수도원으로 들어가게 되었죠. 아무래도 이제 봉쇄수도원안에 살고 세상 사람들과의 접하는 기회가 적기 때문에, 과거의 어떤 그런 히스토리가 있더라도 토마스 머튼이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사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었나봅니다. 그래서 입회가 허락되었었죠.



김남희 교수 : 그러면 수도원에 들어갔을 때 제가 인상에 굉장히 많이 남아 있었던 것은 그전에 글을 계속 끊임없이 쓰면서 출판거절을 엄청 많이 당했더라구요. 그런데 이제 수도원에 들어가게 되면서 칠층산을 내면서 자기고백을 하게 되고 그 고백한 내용이 이제 출판이 되기 시작하면서 또 그 안에서 또 여러 번민을 했었던 같아요. 또 작가로서의 활동과 그 다음 수도자로서의 삶 안에 여러 갈등이 있었던 것 같은데 신부님께서는 그 갈등을 어떻게 보셨나요?



박재찬 신부 : 아, 하느님께서 그 한 사람의 인생에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그 사람을 성장시켜 주시고 변화시켜 주시는 그런 역할을 우리에게 하시는 것 같은데, 토마스 머튼 같은 경우에는 가장 잘하는 것을 통해서 어쩌면 가장 힘겨운 시간을 허락하셨고 또 그 힘겨운 시간을 극복함으로 인해가지고 어떤 관상과 활동의 통합이라는 단계에 이르를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것 같애요.


그러니까 그 당시에 토마스 머튼은 굉장히 글쓰는 것을 거부했죠. 나는 온전히 관상가가 되기 위해서 수도원에 입회를 했지, 이 글쓰는 작가가 되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내가 제일 잘하는 이것을 포기해야지 하느님께서도 기뻐할거라고 생각을 했죠. 오히려 하느님께서 주신 달란트인데 그 달란트를 이제 한 쪽으로만 생각했던거죠. 관상가가 되는 것,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오히려 토마스 머튼은 나중에 본인이 스스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내가 글쓰는 동안 그 시간은 바로 기도시간이었고, 

글쓰는 동안 내가 내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고 

하느님을 만나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너무 아름다운 표현을 나중에는 했죠. 


관상가가 되느냐, 혹은 작가가 되느냐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위해 사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위해서 저도 이렇게 방송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아무튼 토마스 머튼이 여러가지 외적인 것들이 있었지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그 갈등을 통해서 이제 깨닫게 된거죠. 그 글쓰기라는 어려운 작업을 통해서 오히려 갈등하면서 진짜 하느님을 위해 사는 것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니까 어쩌면 이 방송을 보고 계신 여러분들도 


내 삶에서 여러가지 갈등이 오고 이거냐, 저거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무엇이 하느님을 위한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구요 

결국 우리가 구분지어놓은 인간적인 것들이 여러가지 많이들 있지만 

더 넓게 본다면 모든 것을 통해서 우리가 하느님께 찬양과 찬미를 드릴 수 있다는거죠.


내 삶에서 내가 방을 닦으면서 그 방을 닦는 과정에서 내 마음도 닦여질 수 있을거고, 또 깨끗하게 하는 그 과정에서 또 여러가지 가정공동체가 밝아질 수도 있는거고 그래서 소소하고 사소한 일이지만 

그 모든 것안에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게 바로 머튼을 통해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그런게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남희 교수 : 그쵸. 작은 일상의 나의 행동들을 도외시하지 말아라. 간과하지 말아라. 사실 저희가 굉장히 많이 잊고 살쟎아요 작은 행동들을, 그러니까 큰 행동들을 할 때만이 돋보이거나 내가 누군가에게 호소력이 있다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자신의 일상안에서 그 행동의 의미들을 찾아내는 것, 그게 토마스 머튼에게서 배울점일 것 같습니다.


근데 갑자기 궁금해졌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거든요. 가볼 수도 없구요, 근데 트라피스트 수도원같이 엄격한 규율에 따라서 움직이는 수도원들은 하루일과가 어떻게 진행되나요 신부님?



박재찬 신부 : 아, 네. 대게 새벽 3시에 일어납니다. 일어나서 아침기도를 바치고 묵상하고 미사도 하구요 그리고 아침 식사가 끝나고 나면 삼시경을 바칩니다. 낮에 육시경, 또 삼시경과 육시경 사이는 각자가 수도원에 자기 소임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일터에서 일을 합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이제 육시경을 바치고 점심식사를 하고 식사도 다 침묵가운데 식사를 하죠. 그리고 한 명이 식당 독서를 합니다. 그러면 그 독서를 들으면서 식사를 하구요, 식사가 끝난 다음에 구시경을 바치고 그 이후에 또 자기 일터에서 노동을 합니다. 그리고 노동이 끝난 다음에 이제 조배를 하고 저녁기도를 바치고, 또 렉시오 디비나 영적 독서를 하구요 ,


그 이후에 저녁 식사를 하고 난 다음에 끝기도를 하고 그 기도하고 난 다음에는 그 다음날 아침까지 대침묵에 들어가죠. 그래서 거의 기도가 이제 중심이 되고 사이사이에 일을 하고 밥을 먹는다. 이렇게 생각하면 될겁 니다.




김남희 교수 : 갑자기 소설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 의 '장미의 이름'이 떠올랐구요 그 다음에 하나는 현대인들이 제일 어려워하는 침묵이 굉장히 많이 들어왔습니다. 아마도 침묵에 관한 이야기는 저희가 계속 이어갈 것 같아서요  네 여기서 마무리를 지으면서 마지막으로 신부님께 하나 여쭤보겠습니다. 저희가 매번 대담을 나눌 때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토마스 머튼의 생애를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무엇일까요? 토마스 머튼은 ㅁㅁㅁ다. 신부님의 생애 안에서 토마스 머튼은?




박재찬 신부 :  음... '토마스 머튼은 우리와 다르지 않다.' 저는 그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김남희 교수 : 네, 가장 특별할 것 같으면서도 우리와 우리와 다르지 않은 토마스 머튼의 이야기는 아마 나누면 나눌수록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 같습니다.  그러면 2주 뒤에 있을 이 시간에도 머튼의 흥미진진하면서도 깊이있는 영성이야기를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신부님, 오늘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재찬 신부 :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