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11회 대담 : 기도와 관상_현대영성가 토마스 머튼과의 만남_박재찬 신부 해설

은가루리나 2020. 3. 19. 00:58



김남희 교수 : 찬미예수님! 안녕하세요~ 오랫만에 다시 인사드립니다. 지난 시간에 3주에 걸친 토마스 머튼 신부님의 관상과 명상과 그 다음에 기도에 관한 강의 잘 들으셨나요? 저는 개인적으로 정말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감명을 받고 다시 저도 새롭게 기도를 해볼려고 했는데 사실 생각보다 쉽지를 않더라구요. 시청자분들은 어떻게 느끼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신부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박재찬 신부 : 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김남희 교수 : 네, 강의를 통해서 토마스 머튼 신부님의 그 하느님을 향한 기도와 명상과 관상의 여정을 정말 잘 알 수 있었구요 저도 개인적으로 감명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면 아마 시청자분들도 궁금해 하실 것 같애요. 저도 같은 질문인데 많은 분들이 그럼 정작 이 강의를 하시는 신부님께서는 어떻게 기도생활을 하시고 명상을 하시고 관상생활을 하실까 궁금해하실 것 같거든요. 신부님의 그 변화를 설명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박재찬 신부 : 네, 토마스 머튼 신부님도 처음부터 관상에 깊이 들어가신 것도 아니었고, 처음에 아주 초기 단계에서는 뭐 기도할 줄도 잘 모르셨었구요, 마찬가지로 저도 여기 이렇게 수도복을 입고 수도자로 살아가고 있지만 처음부터 하느님과 아주 친밀한 관계에 있었던 것도, 또 하느님의 그런 신비를 제 안에서 발견하고 그랬던건 아니었습니다. 또 저도 토마스 머튼 신부님이 기도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은 초보자다 라고 말씀하신 것처럼,늘 또 새롭게 매일매일 하느님을 만나가고 있는데요, 제가 처음 이제 기도에 대해서 체험을 하고 느낀건 부모님으로부터였습니다. 아마 우리 교수님께서도 부모님과 함께 기도한 적이 있으셨을텐데 저도 어릴때에 부모님께서 '안셀모야 오너라!'해서 같이 동생들과 같이 기도하는데 그 기도시간이 왜 그렇게 길고 힘든지, 온 몸을 비틀면서 기도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성소에 대해서 느끼면서 조금씩 조금씩 기도의 맛을 들이기 시작했고, 또 제가 학교를 15분 정도 걸어서 다녔는데 그때 가는 길에 등교할 때는 매일 묵주기도를 5단씩 바치고, 또 오는 길에는 조금 돌아오면 조그만한 성당이 있는데, 그 성당에서 매일매일 성체조배를 했던 그런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성체조배가 뭔지도 잘 모르고 그냥 거기 앉아있는 그 시간이 참으로 행복했던 그런 생각이 납니다.


근데 그 이후로 수도원 들어와서 전통적인 그런 기도에 대한 것들을 배웠죠. 뭐 성무일도 하는 것도 그때 처음 접했었구요. 그리고 또 여러가지 묵상하는 시간들, 또 다양한 방법으로 기도에 대한 설명도 듣고 실제로 이제 배웠는데, 사실 처음 관상기도라든지 명상기도를 배울때는 저도 처음 알았어요. 30분이 그렇게 긴지를~ 아마 여러분들 가운데서도 처음 관상적인 그런 기도를 하신 분들은 10분, 20분, 그냥 우리가 놀때는 금방 흘러가는데 가만히 아무것도 하지않고 30분을 앉아있는게 굉장히 어렵다는 것을 아마 체험하셨을 겁니다.


저도 역시 처음에는 그런 힘겨운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그 당시에 어떤 관상적인 기도에 있어서 힘겨움 중의 하나는 제대로 하느님에 대한 깊이랄까 그런 게 부족했던것 같아요. 그런데 살면서 점점 하느님에 대해서 하나 둘 체험해가는 과정에서 특히 더 깊은 체험들은 자기의 무너진 체험, 아, 내가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정말 하느님앞에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는 그런 것을 깨달으면서 점점 더 하느님에 대한 갈망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하느님 없이는 내 힘으로는 하느님을 절대 찾을 수 없구나 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부터 조금씩 조금씩 하느님에 대한 더 깊은 관계를 갖게 되었는데 특별히 이제 토마스 머튼의 이 관상체험에 대한 것, 또 기도에 대한 그런 것들을 읽고 또 느끼고 체험하면서 더 하느님에 대해서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근데 더 구체적으로는 요즘 들어서는 아, 이 기도하는 시간, 관상하는 시간은 내 인간적인 시간이 사라지고 하늘의 시간속으로 들어간다는 느낌이 참 많이 듭니다. 이제는 기도하면서 뭔가 목적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 그 시간을 주님께 봉헌할 수 있는 그런 힘도 생겨납니다. 하지만 늘 새롭게 그분을 만나가고 있고 또 그분을 체험해 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김남희 교수 :  그냥 돌발질문인데 혹시 몇 시간 성당에서 앉아계시고 그런 기도를 하시나요?



박재찬 신부 :  아, 주로 저희 수도원에서는 아침기도가 끝나면 지급 본원의 집에 살고 있는데 한 40분 정도 묵상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아침기도 끝나고 묵상하는 시간 갖고요 그 다음에 아침미사를 하고 그리고 이제 낮기도 전에도, 또 저녁기도 전, 끝기도 후에, 저는 끝기도 후에 시간을 참 좋아합니다. 수도원에서는 끝기도 후에 성당의 불을 다 끄고 대침묵에 들어가면서 조용히 그분 곁에 머무는데, 여러분들께는 하루에 한 20분, 혹은 30분 아침, 저녁으로 이렇게 조용히 그분 곁에 머무는 시간을 갖는다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봉헌된 시간이죠.


김남희 교수 : 네, 세속적인 삶에 더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보니까 아침 일찍 일어나서 아이들 보내고, 아니면 또 학교 가고, 직장생활하고 또 그래서 저녁에 퇴근이 일정하지가 않쟎아요. 그리고 또 어머니들은 또 아이들을 챙겨야 되고,  학생들은 공부해야 되고 그래서 혹시 신부님께서 그 세속적인 삶에 비중이 더 많은 신자들에게 신부님께서 제안하고 싶은 방법이 있으실지, 비법을 좀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박재찬 신부 : 네, 그래요. 뭐 사실 일상을 바쁘게 살아가는 분들 가운데 이제 20분, 뭐 10분 명상할 시간이 없다고 하는데, 사실 또 50분 뭐 60분 드라마 볼 시간은 또 있거든요. 그래서 제 나름대로 각자 마음먹기에 다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바쁘다 하더라도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가느냐, 세상 중심으로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내가 정말 하느님 중심에 있을 때는 하느님께 기도하는 시간이 가장 값진 시간이고 귀한 시간입니다. 그래서 어디에 먼저 가치를 두느냐가 중요한 것 같애요. 그래서 하느님 중심으로 삶을 살아갈 때는 10분, 20분 시간내는게 오히려 더 수월할 겁니다. 그리고 또 구체적으로 제안을 드리고 싶은 것 중에 하나는 우리가 매일미사에 참례하시는 분들이 참 많으신데 미사 전이나 미사 후에 10분이나 20분정도 조용히 그분 곁에 머물면서 뭔가 지향하지 않고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내어보여 드리면서 저같은 경우에는 그냥 '주님, 사랑합니다.' 혹은' 주님, 감사합니다.' 이 말만 계속 되풀이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그분 곁에 사랑을 고백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도움이 될 겁니다. 물론 이제 구체적으로 제가 피정 지도할 때는 뭐 자세라든지, 호흡이라든지 뭐 그리고 만트라의 사용법, 이런 것들을 가르켜 드리긴 합니다. 그런데 그것도 하나의 수단이고 방법이지 그게 절대적인건 아닙니다. 하지만 바른자세로 호흡을 가다듬고 또 생각을 가다듬고 주님께 집중하는 거죠.


그리고 또 지난번 제가 이렇게 그림 그려서 강의 그 비유를 통해서 설명해 드린 것처럼 그렇게 분심이 들거나하면 다시 또 원위치로 돌아가면 되는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께서,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기도에는 특별한 비법이 없다는 겁니다. 뭐 비법? 요즘 무슨 영어의 맥~! 이런것처럼 뭐 기도에 대해서도 그런 핵심이 있는게 아니고 기도할 때 기도를 배울 수 있는거고 또 기도를 하면서 점점 더 하느님과 가까워졌을 때 그 기도의 맛을 이제 알게 됩니다. 아무리 오렌지가 맛있다고 정보를 구글에서 찾고 하더라도 그 오렌지를 먹어보지 않으면  오렌지의 맛을 알 수 없는 것처럼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경험, 체험해 보는 것! 직접 기도를 할 때, 기도의 맛, 그리고 또 체험할 때 하느님의 사랑이 내 안에 스며듦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거죠.


김남희 교수 : 네, 그러니까 기도의 가장 큰 비법은 직접해라! 네, 잘 새겨듣겠습니다. 저희가 관상을 할 때 어떤 면에서 가장 많이 방해를  받는 부분이 있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그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에는 뭐가 있을 까요 신부님?



박재찬 신부 : 우선 이제 그 기도에 있어서 장애물들이 뭔지를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애요. 여러가지 뭐 영적인 타성에 젖은 그런 삶이 있을수도 있을거구요, 사실 처음 기도할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막 이 뜨거움을 많이 느낍니다. 기도할 때 굉장히 하느님 가까이 있는 것 같고 하지만, 그게 하루 이틀 흘러가다보면 기도에 있어서 타성에 젖기도 하고, 그 다음에 어떤 냉담함, 사막과 같은 건조함, 내가 기도를 하고 있는건지, 그냥 앉아 있는건지 아니면 잡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그런 느낌이 들 때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우선은 그런 모든 것들도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을 먼저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이런 감각의 밤을 건너서 어떤 영적인 그런 깊이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 또 사막을 통해서 하느님께로 간다는 것을 다시금 기억하시면 좋겠구요, 그리고 또 실제로 명상을 하는 게 항상 중요합니다. 뭐 해봤자 뭐하겠노 라고 생각하고 태만하거나 게으를 때 점점 이제 유혹이 찾아오는거죠. 그래서 실제로 하는거 아까 말씀드린 것 중요하고요, 그 다음에 또 기도를 하다보면 혼란이 오기도 합니다. 또 무기력에 빠지기도 하구요. 그래서 그런 혼란과 무기력중에 있을 때 끝까지 항구하게 늘 꾸준히 그 시간을 지켜나가는 것, 이것도 참 중요합니다.


그리고 또 지나친 활동을 할 때, 관상이나 어떤 영적인 그런 기도하는 시간들이 방해받기도 합니다. 내가 막 너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을 때 분심도 많이 들게 되구요, 그래서 어쩔 수 없는 활동도 있을 수 있지만, 아직 초보단계에 있을때는 어떤 활동을 줄이는 것도 굉장히 기도에 집중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나중에 이제 더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의 단계에 이르게 되면, 활동과 어떤 또 실제적인 기도하는 시간의 어떤 구분이 좀 사라지게 되고, 모든 곳에 계시는 하느님도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이 영적인 장애물이지만 사실은 이 영적인 삶의 여정에 있어서 장애물은 반드시 있구요, 그리고 그 장애물을 어떤 원인이라든지 그 다음에 어떤 기질적인 원인, 학습적인 원인, 심리적인 원인, 이런 원인들을 살펴본다면 오히려 그 장애물을 통해서 디딤돌이 되어서 더 기도에 맛을 들일 수 있고 하느님과 가까워질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김남희 교수 : 네,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사실 기도하면서 저희들이 방해를 받게 되는 요소들을 안할려고 하는게 아니라 그것을 인지하는게 중요하다. 그렇게 이해해도 될까요?


박재찬 신부 : 네, 그런 것도 있구요~ 또 분심이 들 때, 그 분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이제 무의식중에서 올라오는 것 같은 경우에는 그런 분심은 내 안에 있는 나도 몰랐던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에 어떤 영적인 치유에도 도움이 되요. 그래서 명상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그런 영적인 치유에 많은 도움을 받는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냥 잡생각들이 많이 쓸데없이 날 때는 그것들은 좀 더 흘러가게 내버려두고 다시금 하느님께 집중하는게 중요하죠.


김남희 교수 : 네, 그래서인지 지난 강의에서 신부님께서 강 흘러가는대로 다시 또 돌아오면 되지 않느냐 라고 했던 말이 더 많이 와닿게 됩니다. 그 토마스 머튼이 관상은 낙원의 회복이다.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를 미리 맛보는거다 라고 하셨는데요, 사실 기도를 시작하지도 못한 저같은 초보자들이 실제로 이게 어떤건지 감이 사실 오지는 않거든요. 그래서 그 높은 경지에 오른 이들에 대한 이야기가 현실과는 거리감도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 기도를 통해서 낙원이나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맛볼 수 있을까요?



박재찬 신부 : 하하하하, 굉장히 좋은 질문이신것 같아요. 왜냐하면 이게 그리스도교 우리 전체의, 우리 신앙생활의 어떤 핵심이 되는 질문으로도 이렇게 포함될 수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제 흔히들 예수님께서 처음 말씀하신게 회개하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런 선포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는 너희들 가운데 있다.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 가운데 있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 가운데에 와 있다고 이제 선포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에서 이미 하느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그 하늘방식의 사랑을 배우고, 또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던 것처럼 그렇게 사랑하면서 이 하느님과의 어떤 일치, 그 다음에 하느님과의 만남의 어떤 기쁨을 지금 여기에서부터 사는게 바로 천국을 사는거고 또 그게 바로 하느님 나라에서의 어떤 우리가, 이 세상에살아가고 있는 삶의 방향이고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흔히들 많은 경우에 천국은 죽고 난 다음에 도달해야 되는 곳, 그래서 여기서 착하게 살아야지 천국에 가서, 지옥불에 빠지지 않는 다는 것, 이렇게 이해를 하다보니까 지금 당장 천국에 가십시오. 하면 죽어야 되나? 이렇게 생각하는데, 사실 영적으론 죽어야겠죠. 근데 거기에 어떤 모순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첫 출발점이 다른거죠! 예수님은 이미 하느님 나라가 왔다고 했는데, 우리는 그 하느님 나라를 다르게 생각하는거죠. 그래서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기도나 관상을 통해서 이미 와 계신 그분을 미리 맛보는거죠. 미리 만나는 겁니다. 미리 체험하고 그래서 그분의 소명으로서의 사랑을 이웃들과 나누고 살 때, 지금 여기가 이제 천국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현실감의 괴리감이라는 표현을 쓸 수 밖에 없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 하느님 나라, 천국을 다른 장소적인 개념으로 생각하거나, 다른 공간으로 이해하거나, 혹은 죽고 난 다음에야 갈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괴리감이 느껴질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그만큼 하느님과 지금 만나지 못하고 있고, 또 하느님과 가까이서 살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괴리감이 더 생길수도 있는 걸겁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하느님을 미리 맛보고 또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의 사랑을 나눌 때  나는 관상을 통해서 천국을 미리 살아가는거죠. 지복직관이라고 제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기억이 나시죠? 네 그렇습니다.



김남희 교수 : 신부님, 그러다보면 저희가 기도를 열심히 하고, 저희 표현으로는  이제 열심히 한다라고 할텐데요 그렇게하다보면 식별을 잘 할수 있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토마스 머튼이 명상이란 무엇인가 라고 하는 책에서 관상이 자기만족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적주의자가 되는 것을 경계하라 라고 하는 대목을 본적이 있거든요. 그러면 정적주의자가는 무엇인지, 그래서 자기만족을 기도라고 착각해서는 안되는 그 구별점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박재찬 신부 : 이것도 좋은 지적인 것 같애요. 왜냐하면 그 관상과 정적주의, 또 나중에 얀센주의 같은 그런 것들로 이제 17세기는 굉장히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런데 토마스 머튼이 이야기한 관상에서는 이 정적주의에 대해서 굉장히 비판을 많이 하는데, 이 정적주의란 용어를 모를 때에는 도대체 토마스 머튼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라고 생각을 할 수밖에 없게 되겠죠. 근데 정적주의라는 것은 모든 것은 이제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이렇게, 또 하느님과의 온전한 합일을 이루었을 때 그걸로 충분하다는 겁니다. 관상에서 하느님과 온전히 합일을 이루었을 때, 어떤 그런 기쁨과 참된 일치의 그런 평온함을 느끼고 또 그 안에서 하느님과의 일치를 맛본다고 했는데, 이 정적주의자들은 이걸로 충분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뭐 어떤 윤리적인 생활이라던지, 아니면 또 종교생활 이런게 필요없다. 그냥 하느님과 합일만 하면 된다. 그렇다보니까 종교생활이 필요없는거죠. 윤리생활도 문란해지고. 그래서 이제 어떤 예를 들면 17세기에 몰리노스라든지 귀용부인이라든지 그 다음에 페를롱, 이런분들이 이런 주장을 많이 했는데 사실은 나중에 다 교회에서 다 이단으로 판명을 받았죠.


하느님과의 합일, 하느님과의 깊은 관상에서의 어떤 충만함은 반드시 열매가 필요하고, 또 한 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분들은 한 번에 완성되고 또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했기 때문에 토마스 머튼은 관상은 그런게 아니다. 관상은 끊임없이 하느님을 만나가는거고, 끊임없이 사랑의 열매를 통해서 또 교회의 여러가지 성사라든지 또 윤리적인 삶을 통해서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더 깊어진다고 그렇게 보았던거죠. 얀세니즘 같은 경우에는 물론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게 주어지지만 너무 지나치게 엄격하게 윤리적인 것, 그 다음에 규범들을 만듦으로 인해가지고 오히려 하느님께 접근할 수 없는 그런 상태로까지 만들었기 때문에, 교회에서 또한 지나친 엄격함을, 또 지나친 규범주의화 되는 것을 피하라고 교회에서는 이런 얀세니즘에 대해서 잘못된 가르침이라고 이제 알려준거죠.


김남희 교수 : 아, 네 그러면 정리해 본다면 토마스 머튼이 관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일상안에서 이루어지는건데 우리의 삶이 곧 기도가 되어야 한다 라고 하는 것이지 어떤 그 규율주의나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형식에 도취되어서도 안되고 또 하느님과의 합일을 이뤘다고 하는 그 자기만족에 그쳐서도 안되고 그 양쪽의 극단적인거를 피하라고 하신거죠?


박재찬 신부 : 네, 교수님께서 요약을 잘해주셨네요.


김남희 교수 :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신부님 덕분에요. 음, 한 말씀만 더 덧붙인다면 이런 대목이 있더라구요. 그 정적주의를 피하라고 하면서 만일 그대 명상이 하느님에 대한 어떠한 사랑이나 열망도 없는 전적인 공허함, 영적혼돈이다. 그러니까 어떠한 공허함에 빠질 수 있다. 이렇게 얘기한 것 같습니다. 신부님, 그러면 현대인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매일 20분을 할애하기란 쉽지 않을 것 같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부님께서 이렇게 기도를 강조하시고 관상이 우리 삶에서 중요하다 라고 하는데, 이 기도가 나약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는 토마스 머튼의 그 관상은 저희에게 어떤 메세지를 던져주는 걸까요?



박재찬 신부 : 그래요. 사실 분주하게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 또 어떤 분들은 기도는 나약한 사람들이나 하는거지 뭐 이렇게 기도가 필요없다. 그리고 기도해서 실제로 얻어지는게 뭐가 있느냐! 기도를 많이 했는데 오히려 눈에 보이는 이득이 없다. 이렇게 표현하는 분들도 많이 계신데 실제로 우리가 정말 중요시 생각해야 되는 것, 그리고 일부 그리스도인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많더라구요. 기도는 어떤 이익을 얻기 위해서 하는게 아니고 어떤 나에게 득을, 예를 들면 내가 이런 지향으로 기도를 해서 하느님의 뜻을 바꾸어서 하느님의 뜻이 이제 내가 원하는대로 하느님께서 해주기를 바라는 것, 예를 들면 우리 집안에 좋은 일이 생기고 내가 돈을 많이 벌고 자녀들이 아프지 않고 뭐 여러가지 기복적인 그런 기도를 통해서 어떤 기도의 이득을 생각할 때는, 그 기도는 좀 잘못된 기도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청하는 기도가 궁극적으로 잘못된 건 아니죠. 왜냐하면 하느님께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에, 그렇지만 우리가 기도할 때 내 뜻대로 뭔가 하느님께서 변화되도록 기도하기 보다는 하느님의 뜻대로 우리가 변화되기를 기도하는 것, 그게 우선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이 참된 이득인가 이것도 생각해봐야 될 겁니다. 그냥 현실적인 어떤 이익을 얻는 거하고 영적인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서, 영적으로 우리가 구원에 도달하기 위한 어떤 축복을 받는 시간으로써, 기도는 제가 그랬쟎아요. 토마스 머튼 신부님을 통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이미 우리 가운데에 와 있는 하느님의 신비속으로 들어가서 그분을 발견하고 그분을 만나서 그분과 일치하는게 관상이라고 기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우리가 기도해서 추구해야 될 것은 하느님과의 만남이고 하느님과의 일치이며 또한 하느님과 온전히 사랑을 속삭이는 시간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이외에 부수적인 것들에 연연할 때에는 우리가 그런 기도가 현세적인 이익이 없다라고 평가할 수 있는거겠죠.



김남희 교수 : 네, 갑자기 떠오른 생각인데요 신부님께서 지난 강의에서 번민이 많이 생길 때, 방금 말씀하신 것처럼 정말 저희가 관상을 잘 해야 할텐데, 그 번민이 떠오를 때마다 신부님께서 만트라와 같은 방법이 좋다라고 하셨거든요. 신부님께서 하시는 만트라를 그때 짧게 언급해 주셨지만 좀 더 설명해주시면 좋을 것 같고, 그리고 또 신자분들에게 추천할 수 있는, 권유할 수 있는 만트라와 같은 것들 뭐가 있을지 궁금합니다.


박재찬 신부 : 네, 만트라라는 말은 같은 어떤 명상에 있어서 키와 같은 역할을 하는 단어입니다. 

그 단어가 이제 의미를 묵상하는게 아니죠. 

토마스 머튼이 이야기하는 관상기도에서 중요한 건 머리로, 이성으로 하는게 아니라 

마음으로 주님께 나를 봉헌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제 머리가 가만히 있질 못하는데, 

이 방송을 듣고 계시는 분들도 다른 생각이 자꾸 들기도 할겁니다. 


근데 아무튼 여러가지 머리속에서 떠오르는 분심들, 또는 잡념들이 떠올라서 

나를 집중하지 못하게 할 때, 

이 만트라를 계속 되내이는 것은 굉장히 많은 도움이 됩니다. 


특별한 우리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에서도 이런 만트라를 많이 사용을 합니다. 

가장 쉬운 예로 불교에서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이렇게 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요한 가시아노 성인 같은 경우에는 

'하느님 저를 구하소서. 주님 어서 오시어 저를 도우소서' 라는 시편 구절을 계속해서 되내이셨죠. 


우리가 성무일도할 때, 처음 시작할 때 그 구절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의 기도 같은 경우에는

'주 예수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소서' 그런 기도를 계속해서 끊임없이 반복하기도 했구요. 


근데 요즘 최근 들어서는 

'마라나타' 요한묵시록에 마지막 구절에 나오는 '주 예수여 오소서'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이게 아.아. 아 하고 발음하는데 조금 수월하기 때문에 

마.라.나.타.를 호흡에 맞춰서 이렇게 반복하기도 합니다.


저같은 경우에 저는 '아버지' 혹은 '예수'라는 단어를 계속 반복하기도 하구요, 

또 '주님 사랑합니다'

이 말을 계속 마음속으로 되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여러가지 본인이 편안한 단어를 찾으시면 됩니다. 

뭐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 강하신 분들은 '마리아'라고 하셔도 좋구요, 

'예수' '하느님' 여러가지 자기한테 맞는 그런 만트라를  찾아가시면 됩니다.



김남희 교수 : 네, 많은 공부가 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오늘 집에 돌아가서 저만의 하나의 문구를 또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신부님, 조금 어려운 질문이기도 한데요 또 지난 강의에서 느꼈던 것중에 조금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서 질문을 드립니다. 초기 머튼과 후기 머튼의 관상에 대한 이해가 조금 차이가 난다고 말씀해주셨거든요. 조금 구체적으로 어떻게 차이가 나는건지 어렵지만 간단히 요약해서 쉽게 전달해주셨으면 하는데요.


박재찬 신부 : 네, 제 논문에 아주 길게 나오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이 초기에 쓴 책하고 후기에 쓴 책에 나타난 관상에 대한 이해는 굉장히 차이가 많이 납니다. 초기에 쓴 책은 굉장히 전통적이고 그 다음에 토마스 아퀴나스라든지 토마스 머튼이 좋아했던 십자가의 성요한과 같은 그런 분들의 영성을 바탕으로 해가지고 수덕적인 관상, 생덕적인 관상 뭐 이런식으로 이제 구분을 하구요 그리고 또 수덕적인 관상이 뭐냐하면 수동적인 관상이예요. 하느님의 은총으로 특별한 사람들, 특별히 신비가라든지 뭐 수도승이라는 이런분들한테 그런 은총이 내리면 온전히 하느님과 일치하는 그런 깊은 경지에 도달한다라는 그런 표현이죠. 그리고 생덕적인 관상 같은 경우에는 그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 예를 들면 불교의 그런 좌선이라든지 참선을 통해 가지고 어떤 깨달음을 얻는 것,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이제 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에 보면 비그리스도인들에 관한 선언 2항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그런분들이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 어떤 뭔가 깨달음을 얻는 것을 생덕적인 관상이라고 합니다.


근데 제가 볼 때 여기에도 어떤 성령의 은총이 내렸다고 저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이렇게 구분해서 수도승들은 아주 특별하고, 신비가들은 특별하기 때문에 하느님의 어떤 그런 깊은 관상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고, 평신도들이나 혹은 이런거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도달할 수 없다고 처음엔 보았습니다. 뭐 전통적으로 그렇게 다 보고 있었죠. 아마 지금도 이 TV 를 보는 사람들도, 관상하면 다른 분, 어떤 특별한 사람들만 하는거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렇지만 이제 토마스 머튼이 생각할 때는 점점 자기 스스로 그런 깨달음으로 나아가면서 관상의 씨앗이 모든 사람에게, 제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었죠. 모든 사람한테 그 씨앗이 이미 하느님의 씨앗이, 관상의 씨앗이 포함되어 있고,  내 안에 있는 그 관상의 씨앗을 하느님의 신비로운 영역안으로 들어가서 발견하고 키우고 자라고 성장해서 열매맺는 것, 그게 바로 관상적인 삶이고  관상적인 체험으로 나아가는 방법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후기의 책들, 예를 들면 <새 명상의 씨>라든지 그 다음에 <관상적인 기도> 한국말로는 '마음의 기도'라고 번역되어 있을 겁니다. 그런 책들에서는 모든 사람에게 관상에 대한 게 열려있고, 또 그리고 관상에 대한 설명을 굉장히 현대에 대한 철학이라든지 동양 철학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이용을 해서 현대화시켜서 설명을 합니다. 기본적인 골격은 같다 하더라도 우리시대 사람들에게 알아듣기 쉬운 방법으로 설명을 합니다. 하지만 아까 예를 들었던 초기 작품들, <관상이란 무엇인가?> <진리에로의 상승>, 뭐 이런 책들에 보면 이론적이고 지적인 부분에서 관상에 대해서 접근을 하고 있죠. 사실 토마스 머튼이 이야기할 때는 아, 이게 아니다. 관상이라는 것은 머리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마음으로 그리고 온 몸으로, 온 삶을 통해서 하는 그런 하느님의 체험이다,  체험을 강조하게 됩니다. 경험.그래서 점점 후기에 이르러서는 관상에 대한 이해가 더욱 폭넓어지고 또 종합하게 됩니다. 그래서 관상을 현대화시키고 그 다음에 관상을 종합한 것, 이게 바로 머튼이 한 하나의 공헌이라고도 합니다. 앞으로 우리 시대에도 한국적인 언어에 맞게끔 또 설명해 내는 것, 그게 아마 제 몫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김남희 교수 : 오, 신부님 기대하겠습니다. 근데 관상을 통해서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렇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사실 추상적으로 잘 그려지지 않거든요. 어떤 모습일꺼라고 생각하세요?


박재찬 신부 : 글쎄요~ 제가 볼 때는 토마스 머튼 신부님도 그러셨고 뭐 또 제 주변에 계시는 정말 영적으로 깊이 있는 분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그분들이 아주 특별한 분이 아니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오히려 더 지극히 평범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릴 줄 알고, 그 다음에 어떤 뭐랄까!  부딪힘없이 흘러가는, 마치 물과 같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는 그런 평범한 모습, 그리고 또 겸손한 모습, 또 여러가지 삶 속에서 오는 어려움이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께 의탁할 수 있는 모습, 그래서 굉장히 자연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관상가라 해가지고 뭐 특별하게 아주 고상하고 거룩하고, 뭐 그런분으로만 여긴다면 아마 그분은 진짜 관상가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관상가일수록, 또 관상에 깊이 들어간 사람일수록 

개방성을 띠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열려져 있고, 사랑을 나눌 줄 알고, 

실천할 줄 아는 그런 삶인 것 같습니다


예전에 제가 종신서원자 피정할 때 어느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영적으로 깊이 나아간 사람일수록 손쉬운 사람이 되어야 할꺼다. 

그러니까 편안하게 누구나 다가와서 이야기할 수 있고, 

누구나 와서 자기 생각을 표현할 줄 알고 또 그 사람들을 받아들일 줄 알고, 

또 겸손하게 자기 생각을 수정할 줄도 알고, 그런 평범한 삶, 

또 그게 오히려 더 하느님께로 더 깊이 나아가는 삶, 사랑의 삶이겠죠, 

끊임없이 나를 내어줄줄 아는 삶, 

그게 바로 관상가로서의 삶의 모습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남희 교수 : 그렇게 말씀하시니까 저희가 성당에서 정말 말없이 본당 생활이 이루어지도록 말없이 뒤에서 도와주시는 그런분들이 오히려 정말 훌륭한 관상가들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정말 말씀 감사드리구요,  시청하시는 모든 분들이 토마스 머튼이 얘기한 명상의 씨앗을, 각자의 명상의 씨를 잘 키워서 풍성한 결실을 이웃사랑 안에서 맺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오늘의 대담은 여기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신부님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박재찬 신부 :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