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10회 토마스 머튼의 관상에 대한 새로운 이해 3_현대영성가 토마스 머튼과의 만남_박재찬 신부 해설 |

은가루리나 2020. 3. 18. 01:44


+ 찬미예수님.

지난 한 주간 주님안에서 다들 편안하셨는지요? 지난 시간에 저희는 토마스 머튼이 이야기하는 관상에 대한 것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토마스 머튼이 정의한 또 우리에게 알려준 관상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관상의 세상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고, 또 자기 자신으로부터 깨어날 수 있는지 설명해 드리고 또 저 자신의 어떤 내적인 체험들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선 지난시간에 이어서 관상에 대한 토마스 머튼의 이해를 좀 더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토마스 머튼은 관상을 통해서 우리 의식이 변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관상을 통해서 내안에 있는 참자아로부터 깨어난다는 걸 말씀해드렸습니다. 그리고 관상은 하느님을 찾는 삶이고, 또 우리는 관상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과 자연과 우주와의 관계를 새롭게 배운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관상으로부터 깨어난 이들은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고 또 하느님과 일치되어 있는 마음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자, 오늘 이시간에는 이제 토마스 머튼이 이 관상에 있어서 어떠한 공헌을 했는지 그 공헌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토마스 머튼은 관상을 현대화 하신 분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예전에 관상은 그 '신비주의' (mysticism) 라는 용어와 결부되어서 좀 우리와는 먼, 뭔가 다른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실제로 토마스 머튼은 용어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 'mysticism'(신비주의)이나  'Contemplation'(관상), 다시 말해서 신비주의나 관상은 같은 것을 다른 의미로 쓰는 거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16세기에 접어들면서 이상하게 이 신비주의라는 그 의미가 황홀경이라든지 또 초자연적인 어떤 기적적인 그런 모습, 뭐 환시라든지 이런 것들로 이야기 되다 보니까 관상의 본래 의미를 많이 놓쳤다는 겁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신비주의(mysticism)라는 용어보다는 관상(Contemplation)이라는 용어를 더 즐겨쓰게 되고 그러면서 점점 이 관상을 설명하면서 사막 교부들의 어떤 영향을 새롭게 받게 되고 또 그분들로부터 배운 것을 재정립하고 또 오늘날의 여러가지 다른 종교들과 만나면서 관상에 대해서 새로운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좀 더 쉽게 관상에 대해서 배울 수 있고  다가갈 수 있도록 용어를 풀이해서 설명을 해줍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관상에 대해서 그릇된 이해를 바로잡게 됩니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관상은 무아지경이나 황홀경이 아닙니다. 그것은 광포한 힘에 의해 점령된 감각적인 광신도 아니요 신비적인 광란에 의해 자유안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흔히들 우리 현대인들은 관상하면 이제 무아지경, 신비주의 라는 것처럼 우리와는 다른 뭔가 우리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뭔가를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황홀경에 빠지는거라든지 또 혹은 이상한 기적을 체험하는 거 이런걸로 설명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이런 것들이 이제 관상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것은 그릇된 관상에 대한 표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토마스 머튼은 

진정으로 사랑이신 하느님의 신비안으로 들어가서 거기에 참여하는 것이 관상의 체험이고,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열려있다고 표현합니다. 


관상을 현대화 시켰을 뿐만 아니라, 

아까 제가 설명해 드린 것처럼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 있다는 것을 다시금 이야길 하게 됩니다. 

전에는 어떤 특별한 수도자들의 모습이 관상이었다면 

토마스 머튼은 모든 사람에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모든 사람에게 

그 씨앗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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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토마스 머튼이 이제 관상의 현대화와 관련돼서 어떤 예를 하나 제가 설명해드리면 

좀 더 쉽게 이해가 되실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토마스 머튼은 십자가의 성 요한을 즐겨 인용을 합니다. 

그런데 초기에 쓴 작품에서 보면 

토마스 머튼이 이해한 성 요한의 '어둔 밤'은 굉장히 금욕주의적인거고

그리고 또 욕망의 통제를 강조했습니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금욕적인 밤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십자가 성 요한의 규칙들에 대한 감각의 핵심어는 

욕망이란 단어이다." 이렇게 어둔 밤을 설명을 합니다. 


그러나 이제 나중에 쓴  'a contemplative prayer' (관상적인 기도) 에 보면 

어둔 밤을 해탈과 완벽한 빛으로 설명을 합니다.


토마스 머튼의 글을 직접 인용해 보겠습니다. 

"지고하고 순수한 빛으로 사람들을 충만하게 하기 위해 

하느님께서는 어둔 밤 안으로 사람들을 데리고 간다. 

따라서 어두움은 동시에 해탈이다. 


이것은 십자가의 성 요한이 어둠은 엄청난 빛이라는 이 실제 안에 있다고 말했듯이 

신앙의 빛이 그 영혼에게 어둠이기 때문이다." 


어둔 밤을 전혀 새롭게 설명을 하고 있죠. 

옛날엔 어둔 밤을 금욕주의적이고 또 욕망의 통제를 통해서 

어둔 밤에 도달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완전한 빛안에 있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몰라본다는 거죠. 


그리고 완전한 빛 안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어둠으로 다가오지만 

실제로는 그 어둠이 해탈이요  어둠이 새로 깨어나는 길이라는 것을 

토마스 머튼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또 토마스 머튼이 관상에 있어서 공헌한 것중에 하나는 불교와의 만남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불교의 여러가지 선(禪) 체험에 대한 것, 공(空)에 대한 이해, 이런 것들을 통해서 토마스 머튼은 그리스도교의 관상의 체험을 더 풍부하게 이해하게 되고, 또 더 풍부하게 설명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이 여러가지 불교 용어들을 때때로 사용하기도 하는데, 그 불교 용어들을 통해서 그리스도교적인 어떤 그런 것들이 부족하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불교적인 용어안에서 오는 뉘앙스가 토마스 머튼이 체험한 하느님과 깊이 연관되어 있고, 그것을 통해서 본인의 체험이 더 풍성해짐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불교의 어떤 그런 체험과 자신의 체험이 더 충만히 만나서 새로운 오늘날 우리들이 이해하기 쉽게, 특히 아시아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관상에 대한 설명을 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에 대해서 바실 페닝톤이라는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동양의 사상은 우리의 신비가들이 시도해 왔던 매우 표현하기 어려운 모든 내적인 일치에 대한 표현을 하는데 머튼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앤 카르트라는 수녀님께서는 여성 신학자인데, 

"머튼은 동서의 관상적 전통들 안에서 증언된 단순함과 지혜의 목표를 

우리 시대의 언어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니까 토마스 머튼은 이 동양의 만남과, 동서양의 만남을 통해서 

우리 시대의 언어로 

새롭게 하느님에 대한 체험을 관상이라는 용어를 새롭게 설명하고 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토마스 머튼 책을 읽을 때, 무아(無我)라든지, 공(空), 깨어남, 뭐 이런 용어들을 우리가 볼 때는 토마스 머튼이 불교의 용어를 빌려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불교적인 개념을 통해서 본인의 그리스도교적인 그런 개념들을 더욱더 충만하게 하고 있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또 토마스 머튼이 이런 불교적인 용어를 사용한 것은 아까 설명드린 것처럼 도전적입니다. 아! 우리가 하느님에 대한 체험을 이렇게 설명하는데, 또다른 어떤 성령의 체험을 또 다르게 설명하고 있구나 라는걸 깨닫게 되면서 아, 또 새롭게 우리의 것을 바라볼 수 있는 도전이 되기도 하고, 또 상호충만함을 제공해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교적인 어떤 관상에 대한 체험이 부족한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열어보여 주시는 것은 하느님은 초자연적인 분이시고 초월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아무리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다 하더라도 하느님에 대한 체험은 우리가 모두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언어는 한계를 지닙니다. 그런데 이제 여러 사람들이, 나아가 여러 종교에서 체험한 하느님,  하느님은 우리 그리스도교의 하느님만이 아니쟎아요. 하느님은 모든 우주의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이 하느님에 대한 체험을 다양하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보여 주셨는데 그런 체험들을 나눔으로써 우리가 체험한 하느님이 더 풍성해지는 거죠.


우리가 토마스 머튼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는 이 이유도 토마스 머튼이 체험한 하느님을 통해서 우리가 더 풍성해지는 것처럼 토마스 머튼은 불교와의 만남을 통해서 본인의 하느님의 체험이, 관상적인 체험이 더 풍성해졌다는 겁니다. 아마 이 부분은 나중에 불교와의 대화를 할 때 이 분야는 또 제 전문분야이기 때문에 또 좀 더 설명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 두 번째로 또 토마스 머튼이 이제 관상에 있어서 어떤 공헌을 했는가? 

첫 번째는 

토마스 머튼은 어떤 지적인 그런 관상에 대한 이해로부터 경험적이고 체험적인 이해로 건너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이제 묵상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관상에 대한 이해, 머리로부터 가슴으로 내려왔던 것처럼 토마스 머튼은 그동안에 많은 신학자들이 또 영성신학자들이 관상에 대해서 지적인 이해, 특히 이제 토미즘(Thomism )에 의해서 굉장히 사변적(思辨的)으로 변하게 됩니다. 


근데 이 사변적인 관상에 대한 이해,  영성신학을 

직접적이고 체험적인 그런 단계로 새롭게 건너가게 만들어주는게 

토마스 머튼의 새로운 공헌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실제로 이 관상에 대해서 토마스 머튼이 관상적인 생활을 하지 않았을 때는 관상에 대해서 잘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본인도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칠층산'에서 처음에 이제 수도생활 시작하기 전에 "그 당시 내 수준으로는 도대체 관상 생활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명확하게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 생각엔 관상 생활은 다만 강론을 하거나 병자 방문을 하거나 하는 일 따위의 번거로움을 치를 의무 없이 하루의 여러 시간 성당에서 보내고 육체적인 노동을 하는 것 이상의 어떤 것이어야 할 듯 했다." 이 말처럼 토마스 머튼은 단순히 이제 관상적인 수도자들이 오랫동안 기도하는 것 그 이상의 관상의 개념이 있지 않을까 라고 추측을 했었는데 실제로 삶을 통해서, 또 관상적인 체험을 통해서 그것을 깨닫게 된 것이겠죠.


그래서 처음에는 토마스 머튼이 관상에 대해서 이해할 때 첫 번째 쓴 책이 바로 이 책입니다. "What is contemplation?" "관상이란 무엇인가?" , 토마스 머튼이 첫 번째 질문이기도 했습니다. 첫 번째 책이기도 했구요. 그래서 토마스 머튼의 이 수도생활의 여정은, 영적인 생활의 여정은 이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관상이란 무엇인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토마스 머튼의 이 질문은 변화됩니다. 뭐라고 변화되었을까요?  토마스 머튼이 처음에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시도할려고 했죠. 근데 이 답은 그저 그냥 예전에, 앞에 살았던 여러 영성가들이 했던 그 질문에 그들의 답을 답습하는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뭐 수덕적인 관상이라든지, 주부적인 관상 뭐 이런 용어들을 쓰면서 그냥 그저 그들이 한 말을 옮겨와서 이 관상에 대한 답을 할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수도생활 하다보니까 또 관상적인 여러 체험을 하다보니까 아, 이게 아니구나! 아, 이게 관상에 대한 답이 아니구나 라는걸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의 이 관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나중에 특별히 1968년 루이빌의 체험 이후에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관상으로 깊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본래 인간의 모습을 회복하는 거, 그게 관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아담이라고 표현을 하쟎아요, 새로운 낙원, 그래서 이제 아담이 낙원 에덴동산에서 벌거벗고 있으면서도 하느님을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고 그곳에서 낙원의 행복을 누렸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벌거벗고 이 세상에 오셨고 또 벌거벗고 십자가 위에 매달리셨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아담이라고 사도 바오로께서는 말씀을 하셨죠. 마찬가지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우리가 예수님 앞에, 

하느님 앞에 벌거벗은채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내어보여 드리며 

그분을 사랑으로 바라볼 때, 

우리는 온전히 그분과 하나되는 새로운 일치의 체험을 하게 되고, 

그럼으로 인해서 우리가 낙원의 삶을 회복하는 것, 


그것이 관상이라고 봤습니다.


본래 인간의 모습은 낙원에서의 사는 삶이었죠. 그래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바로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 딸로써 그분의 나라에서 새로운 삶, 낙원의 삶을 살아가는 삶, 그것이 본래 인간의 모습이고 인간의 삶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그런 질문을 하게 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 인간에 대한 그 답을 하게 되었고 토마스 머튼은 그 답을 통해서 관상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인간학적으로 완성되고 또 모든 사람이 관상에 열려있다는 것을 답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이 그런 관상적인 그런 이해를 통해서 나중에는 후기에는 진정한 관상적인 삶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다른 종교에게 다가갈 수 있고, 다른 종교와 대화할 수 있는가 라는게 이제 말년의 삶에서의 어떤 화두였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이 관상적인 대화, 관상적인 그런 종교간에 대화를 강조하게 된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씨앗을 받았다면, 모든 사람에게 관상적인 씨앗이 있다면 모든 사람들과 관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거죠.  제가 예전에 첫 방송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교황 프란치스코께서도 토마스 머튼은 관상적인 대화로부터 열려진 분이시다.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이 그런 관상적인 대화로 열매를 맺게 되었고, 그 열매는 이제 하나의 유산이 되어서 오늘날까지 종교간 대화에 있어서의 관상적인 그런 대화는 어떤 하나의 큰 화두가 되어서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유산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초기의 그런 모습에서 후기로 점점 건너가면서 관상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고 그리고 또 관상안에서 동서양의 만남도 체험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토마스 머튼은 관상을 통해서 어떤 영적인 치유에 대한 그런 설명도 합니다. 토마스 머튼이 쓴 마지막 article 중에 하나는 "Final integration Toward a Monastic Theraphy" 라는 article을 씁니다. 이곳에서도 물론 어떤 수도승적인 치유라고 볼 수 있겠지만 결국은 이곳에서 이야기하는 내용들은 관상적인 그런 치유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느님과 일치할 때, 또 진정으로 하느님안에 머물게 될 때 우리안에는 치유가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를 치유시켜 주시고 성장시켜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감쌀 때, 과거의 모든 아픔과 또 모든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고 또 우리의 삶은 보다 더 자연스러워지고 우리의 삶은 보다 더 주님안에서 영적인 자유로움을 누리는 그런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 자유로운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니까 저의 어머니께서 저한테 보낸 편지글이 생각이 납니다. 제가 올 해 1월에 한국에 귀국을 했는데 귀국하자마자 어머니께서 저를 무척 보고싶어 하셨고, 또 저도 며칠 후에 어머니를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잠깐밖에 시간이 안돼서 점심식사만 같이 하고 왔는데 그 다음에 한 주후에 어머니를 뵈러 갔을 때 어머니께서 저한테 편지를 한 통 써 주셨어요. 근데 그 편지도 그냥 편지지에 쓴 게 아니고 우리 왜 내의를 사면 그 안에 종이가 들었쟎아요. 그 안에다가 이렇게 손글씨로 적어주셨는데 이렇게 적어주셨습니다.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안셀모, 엄마 집에 찾아와서 고마워. 사랑하고 존경스러운 아들 공부한다고 고생 많았어. 신부님 아들 때문에 행복했고 신경도 썼지! 엄마에게는 자랑스러운 아들, 그러나 겸손해야 했어. 하느님의 뜻을 이행하는데 최선을 다해서 빛을 낼 수 있는 사람, 하느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겸손한 자가 되는 것이 중요해. 자연스런 사람이 되어야 성스럽게 살게 될거야. 어떤 처지에 있어서도 기쁘게 살려고 노력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살아가렴. 올해 2019년 첫 손님이 아들, 안셀모이어서 좋은 일이고 기쁜 일이야.' -엄마가-


자연스러운 사람이 되어야 성스럽게 살게 될거야!  저의 어머님은 이렇게 많은 교육을 받으신 것도 아니고 ,또 뭐 이렇게 특별한 기도에 대한 그런 교육을 받으신 분도 아니신데 마치 관상가처럼 말씀하신 것 같애서 너무 감동적이었습니다. 자연스러운 사람이 되어야 성스럽게 될거야. 사실 관상으로 깊이 들어간 사람이라고 해서 뭐 하늘에 공중에 붕 떠서 구름을 타고 다니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일상안에서 자연스럽게 주님을 찬미하고, 또 자연스럽게 하느님안에서 사람들을 사랑하는 삶, 그 삶이 바로 진정으로 관상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고 또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저의 어머니의 이 편지글을 보면서 다시금 또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뭐 수도복을 입고 제가 이렇게 있지만 특별한 사람들만이 관상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모두 관상으로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토마스 머튼은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자 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느님 나라로, 우리 모두가 하느님과의 일치에로 초대받았고 그것은 바로 저 멀리 사는 삶이 아니라, 바로 천국의 삶을 지금 여기에서부터 맛보게 해준다는 그런 의미일 것입니다.


네, 토마스 머튼의 관상에 대한 이해를 정리하면서 평가를 한 번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토마스 머튼이 공헌한 것중에 

하나는 관상을 오늘날 우리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불교와의 만남을 통해서 보다 더 관상에 대한 삶을 더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모든 사람이 관상으로의 삶으로 열려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토마스 머튼이 그리스도교에 충실하지 않았냐? 아닙니다. 누구보다도 충실히 기도했고, 누구보다도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이 다른 종교와의 만남을 통해서 더 본인의 종교에 충실했고, 또 보다 더 본인의 종교, 그리스도교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더 다른 종교를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보다 더 그리스도교안에 있는 영성을 풍부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토마스 머튼의 관상에 대한 이해를 평가해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제 토마스 머튼은 실제로 여러가지 방법으로 우리가 관상에 이르는 길을 알려주었는데 제가 나름대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실제적인 삶안에서 관상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또 관상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 이 부분이 여러분들이 가장 궁금해 하실거고, 또 알고 싶어하는 부분일 겁니다. 

우선 토마스 머튼이 거듭거듭 강조한 것중에 하나는 

'관상은 말로 설명해서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처음에 명상의 시간은 한글로 번역되어 있는데 '관상의 씨'죠. 

그 책에서 이제 관상에 대해서 설명하고 난 다음에 

'새 관상의 씨'(New seeds of Contemplation)라는 책을 쓸 때에는 머릿말에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지난 번 앞에 쓴 책에서 정말 큰 잘못을 저질렀는데 

마치 관상에 대해서 가르칠 수 있는 것처럼 썼습니다. 

그렇게 제가 글을 쓴 것은 마치 천사가 되는 법을 가르치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천사가 되는 법을 배울 수 없죠.


그래서 관상의 삶, 관상적인 기도, 

그리고 하느님을 지향하는 삶, 하느님을 갈망하는 삶을 실제로 삶을 통해서 

더 깊이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고 

토마스 머튼이 처음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무엇보다도 그것은 선물입니다. 

주어진 선물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삶에서의 어떤 관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실제로 내가 준비하는 삶을 매일매일 꾸준히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관상은 어떤 성취가 아닙니다. 

책을 많이 보고, 뭐 토마스 머튼의 책을 이 책 저 책 다 읽어본다 하더라도 

우리가 관상에 대해서 제대로 알 수 있는게 아니고 관상을 제대로 깨우칠 수 있는게 아닙니다. 

다만 준비할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신학적으로 많이 안다고 해서 모든 신학자들이 관상가인가? 아닙니다  그죠? 

심지어 저희 어머니도 이 글을 본다면은 

이미 깊이 하느님과 일치되서 살아가는 분이라고 저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관상은 성령안에서, 성령의 힘에 의해서 이끌려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관상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성령의 인도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바람부는대로 그분 안에서 그분의 사랑으로 들어가는 삶이기 때문에 

그분 안에서 늘 깨어 살아가는 삶이 필요합니다. 


설령 내가 잠시 하느님을 잊고 산다 하더라도 

하느님은 우리를 기억하고 계시고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래서 다시 그분께로 되돌아가면 됩니다. 

그래서 반드시 기도하는 시간만이 관상의 시간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시간, 모든 삶이 천국의 삶, 하느님을 바라보는 삶,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이 될 수 있도록

하느님의 현존을 늘 의식하며 살아가십시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의식가운데 살아가는게 중요합니다.


관상은 무슨 신비로운 체험이나 무아지경, 이런게 아닙니다. 설령 그런 체험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우리가 잘 이해해야 됩니다. 그 체험을 했을때는 하느님께서 아, 지금 나에게 뭔가 새로운 선물을 주기 위해서 나를 준비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선물을 주신 것이지 그것이 내가 뭐 특별하다고 해서 준게 아닙니다. 어떤 신비로운 체험이나 황홀경을 체험했을 때는 이렇게 여기십시오. 아! 주님께서 날 참으로 사랑하고 있구나, 그리고 이 체험을 통해서 보다 더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들을 사랑해야지 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 체험을 버리십시오. 그 체험에 집착하게 되면 또 다른 하느님을 만날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그 체험에 집착하면서 그 체험을 한 내가 마치 대단한 사람인양 여긴다면 그 사람은 교만이라는 그런 또 다른 하느님이 아닌 다른 영에 의해서 오는 잘못된 그런 체험으로 하느님을 가두게 되고 또 그 자신이 스스로 그 감옥안에 갇히게 되는거죠. 그래서 어떤 황홀경이나 신비체험을 했을때는 '주님 감사합니다' 라고 생각하고 주님께 더 깊은 사랑을 드리고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그 체험을 버리고 다시 또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렇게 될 때 좀 더 더 성숙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내가 알 수 있는 어떤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볼려고 하는 노력을 하십시오. 그냥 하느님을 하느님이게 내버려 두십시오. 하느님은 이런 분, 하느님은 저런 분이라고 자꾸 규정짓게 되면 우리가 관상의 깊은 단계에 들어갈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때때로 나에게 다가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때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을 때 주님 그분은 내가 아는 당신이 아닙니다 라고 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그분이 바로 주님이신 겁니다. 때때로는 내가 알 수 없는 분으로 다가오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항상 열려진 마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또 필요한 부분중에 하나는 

관상은 절대 내 삶과 분리된 게 아닙니다

관상의 삶은 바로 내 일상의 삶이고, 

내 일상의 삶이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찾는 삶이 될 때, 

나는 이미 이곳에서 하느님과 함께 하는 천국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겠죠. 


그리고 또 한 가지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 중에 하나는 

관상은 진정으로 이제,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낙원의 회복이라고 그랬쟎아요 그죠? 

주님과 진정으로 일치해서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 가운데, 특별히 신앙인의 삶 가운데 정말 관상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이 뭘까요? 뭐 특별한 관상기도 시간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제가 생각할 때 미사는 가장 깊은 관상기도이고, 관상의 체험을 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미사 그 자체가 이미 하느님이 주신, 예수님이 주신 선물이죠. 그래서 우린 이 미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듣게 되고, 또 그분께 응답의 소리를 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미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우리에게 당신의 몸과 피를 내어주십니다. 그래서 그분과 온전히 하나되고 그분과 온전히 일치되는 그 단계, 그래서 우리가 영성체를 할 때, 영성체를 영어로는 'communion' 이라고 합니다. 'com' 함께 하는 것, 'munion'은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communion'란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와 내가 온전히 성체와 성혈안에서 일치된 상태, 하나된 그런 상태를 가리키는 겁니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가 미사를 할때 또다른 측면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모시면서 깊은 관상적인 체험을 하는 시간이라는 다른 개념을 한번 가져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영성체할 때 무의식적으로 그냥 영성체 하지 않고, 아 정말 내가 내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주님과의 일치이쟎아요, 그 주님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주님의 몸이 내 안에 들어오고, 주님의 피가 내 안에 모셔지면서 내가 주님의 몸으로 변화되는 그 시간이 바로 관상적인 깊은 일치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영성체 후에도 정말 침묵가운데  깊은 관상가운데 주님의 일치를 느끼고 또 주님의 일치를 깊이 좀 머물렀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일상의 모든 시간이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지만, 특별히 미사의 시간 그리고 우리가 성체조배하고 하는 시간도 그 일치하는 그런 관상의 충만한 기쁨이 너무도 뜨겁기 때문에 성체앞에서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당신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주님, 당신과 함께 하는 것이 너무도 기쁘고 감사합니다. 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제 관상이란 용어를 들을 때, 

이건 전혀 다른 용어, 우리가 이야기하는 얼굴을 통해서 미래를 점치는 그런게 아니라 

정말 우리 삶에, 우리 신앙생활의 목표이고 신앙생활의 완성이 바로 관상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시금 설명하지만 하트 뿅뿅, 

눈으로 사랑을 그리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과 온전히 일치의 상태에 이르는 것, 

그래서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다 관상의 순간이요 

우리 삶의 모든 순간이 주님과 일치의 순간이고 

우리의 삶에 모든 마주오는 모든 사건들, 

사람들이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한 그런 은총이요 선물인 것입니다. 


때때로는 그것이 우리 눈에는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또 내가 이해하기 힘든 그런 모습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어두운 밤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깨어있는 마음으로 그분을 다시금 바라볼 때 

그 시간은 또다른 주님을 만나게 해주는 그런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도나 관상은 내가 전에 몰랐던 새로운 하느님을 만나게 해주는 그런 도구역할도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분이라고 이제 그만 만들어 놓으십시오. 주님은 우리 삶 가운데 다양하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내가 만들어놓은 하느님만을 생각한다면 더이상 영적인 성장이 있을 수 없을 겁니다. 새로운 하느님은 날마다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옵니다. 그분을 맞이할 수 있도록 내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특별히 내 안에 있는 , 내 마음속에 이미 와 계신 주님을 찾도록, 만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또 주님이 먼저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고개를

지난 한 주간 주님안에서 다들 편안하셨는지요? 지난 시간에 저희는 토마스 머튼이 이야기하는 관상에 대한 것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토마스 머튼이 정의한 또 우리에게 알려준 관상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관상의 세상으로 깊이 들어갈 수 있고, 또 자기 자신으로부터 깨어날 수 있는지 설명해 드리고 또 저 자신의 어떤 내적인 체험들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선 지난시간에 이어서 관상에 대한 토마스 머튼의 이해를 좀 더 계속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토마스 머튼은 관상을 통해서 우리 의식이 변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관상을 통해서 내안에 있는 참자아로부터 깨어난다는 걸 말씀해드렸습니다. 그리고 관상은 하느님을 찾는 삶이고, 또 우리는 관상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과 자연과 우주와의 관계를 새롭게 배운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관상으로부터 깨어난 이들은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고 또 하느님과 일치되어 있는 마음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