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성가정/ 17회 대담 성모마리아 영성_현대영성가 토마스 머튼과의 만남_박재찬 신부 해설

은가루리나 2020. 3. 26. 12:39


김남희 교수 : 찬미예수님, 시청자 여러분! 그동안 건강히 지내셨는지요? 지난시간에 토마스 머튼의 성모님의 영성에 대해서 저희가 살펴보았는데요, 아마도 시청자분들도 궁금한 점이 많고 또 더 많이 이해하고 싶은 부분도 많을 것 같습니다. 신부님 안녕하세요? 네, 오랫만에 뵙습니다.


박재찬 신부 : 네,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김남희 교수 : 네,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2주동안에 성모님의 영적여정에 대해서 보면서 저도 개인적으로도 참 많이 감동을 받았고 저희 어머니 생각도 나고 또 어렸을 때 늘 성당 가기전에, 성당에 들어가기 전에 저희가 성모님한테 한번 또  화살기도하고 했었던 기억이 정말 많이 남았습니다. 사실 성모님의 일생은 순탄치 않았잖아요. 음. 사실 동정녀 잉태라고 하는 것, 그리고 이집트 피신을 갔어야만 하고 사실 지금도 먼 거린데 그곳으로 일일이 다 걸어서 가셨을 것 같은데요. 그 다음에 또 남편 요셉이 일찍 세상을 떠났고, 이런 점들을 생각해본다면  더군다나 아들을 먼저 보내면서 십자가 그 죽음앞에서의 어머니의 고통은 이루말할 수 없을거란 생각이 드는데요, 그런데도 왜 예수님의 가정을 저희가 성가정이라고 하는지 의문이 갔어요. 네 어떤가요? 


박재찬 신부 : 문제 가정이라고 해야 된텐데 그죠!^^.


김남희 교수 : 그렇죠. 오늘로 얘기하면 정상적이지 않은~~~네!


박재찬 신부 : 성모님도 처음 태어났었을 때 사실 미혼모이셨죠 그죠? 아버지 없는 상태에서. 물론 우리식으로 따지면 아버지는 하느님이시지만. 그러니까 남편 없는, 그리고 또 이집트로 떠나가면서 난민이 되셨죠. 다른 민족들 가운데 사셔야 되었었고, 또 과부가 되셨죠. 요셉 성인이 일찍 돌아가셔가지고. 또 사형수의 어머니이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에 사형당하셨으니까요.


그래서 예수님과 함께 성모님에 요셉 성인과 함께 하는 성가정을 우리가 성가정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순탄치도 않았고, 또 성모님이 예수님 만나러 갔을 때, 공생활 중에 갔을 때도 예수님께서 누가 내 어머니요 내 형제냐,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형제요 어머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물론 성모님을 만나긴 하셨겠죠.


그런데 이제 왜 그렇게 이야기하셨을까! 그리고 또 왜 그렇게 우리가 그 성모님의 가정, 예수님의 가정을 성가정이라고 할까! 문제가 없기 때문에, 문제가 없어야 성가정이라는 것이 아니라 성가정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셔야 됩니다. 성가정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뜻을, 하느님께 순종하는 가정,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가정,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인, 끝까지 하느님께 순종하는 가정을 바로 성가정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처음에 가브리엘 천사가 처녀의 잉태사실을 이야기했을 때 성모님이 '네'라고 하셨죠. 또 이집트로 떠나라고 했을 때, 또 요셉 성인과 함께 성모님도 '네'라고 하셨죠 그죠! 그리고 내 뜻을 실천하는 사람, 성모님은 누구보다도 예수님의 뜻을 실천했고, 예수님을 품고 예수님을 중심으로 예수님안에서 사셨죠 그죠. 그리고 마지막에 예수님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 순명하셨고, 그래서 그런 하느님을 중심으로 사셨던 가정, 하느님의 뜻에 순종했던 가정이기 때문에 성가정이라고 그러는 겁니다.


우리 흔히들 많은 교우분들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아, 우리 가정이 성가정이 되어야 되는데 아직 우리 남편이 세례를 안받았어요. 마치 세례를 받고 안 받고를,  성가정이고 아니고를 판단하기도 하는데 사실은 좀 더 더 넓게 보면 좋겠어요. 우리 가정이 비록 남편이나 혹은 자녀들이 여러가지 이유로 세례를 안받았다 하더라도 하느님은 사랑이시잖아요. 그래서 우리 가정에 더 많이 사랑이 넘치고, 또 더 하느님의 뜻에 따라 서로 화목하게 살아가고 서로 위해주고 할 때, 그 가정도 비록 세례는 안받았지만은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고 실천하는 그런 거룩한 가정이 될 수 있는거죠.


김남희 교수 : 아, 그 말씀 들으니깐 신부님께서 강의 때 이렇게 말씀하셨거든요. 왜?라고 묻지 않고 네! 라고 할 수 있는 상황 그죠? 저희가 가정안에 여러가지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데, 그런것들을 하느님의 순명으로,  그 하느님께서 불러주신 순명대로 '네'라고 할 수 있고  받아들이고 살아갈 수 있는 그죠?


박재찬 신부 : 네,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는 거죠. 그래서 제가 책을 한 권 썼는데 그 책의 제목이 뭔지 아세요? 보세요.


김남희 교수 : 아! '예수님의 가정은 아무 문제가 없었는가'.


박재찬 신부 : 저는 원래 이런 제목을 할려곤 안했는데 그 인쇄소에 계시는 우리 제 동기 수사님이 책임자이신데 그 수사님이 제가 처음에 '일치' '비움' 이런 걸 했더니, 그렇게 하면 아무도 안본다고, 소제목 중에 하나가 '예수님의 가정은 아무 문제가 없었는가'인데 여기에서도 조금 그런 내용을 다루었어요. 왜 예수님의 가정이 성가정인가에 대해서 다루면서 결국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하느님 중심의 가정, 바로 사랑이 넘치는 가정 그런 가정이 성가정인거죠.


김남희 교수 : 그러면서 사회적인 잣대를 대지 말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했어요.


박재찬 신부 : 요즘 사실 오늘날 사회, 가정의 부부관계도 마찬가지고 굉장히 가정이 붕괴되어 가고, 가정이 위기에 처져 있고, 많은 가정이 경제적인 논리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많은 이혼율도 있고 하니까 정말 우리가 신앙의 가정들이 모범을 보여줘야 될 그런 시기가 특별히 오늘날 사회인 것 같습니다. 성모님이 아주 큰 모범이 되는 것 같습니다.


김남희 교수 : 네, 맞습니다 신부님. 그러면서 생각해 본다면 토마스 머튼도 그렇게 유복하고 또 결핍되지 않은 가정이 아니잖아요. 예를 들어서 6살 때 이미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또 10대 때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시고, 이렇게 부모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자란 소년 토마스 머튼이었다고 할 수가 있는데, 그렇다라고 한다면 6살 때 그 어머니를 여의고 모성애를 느끼지 못한 부분을 신자가 되고 관상생활을 하면서 그 성모영성으로 거듭나지 않았나 이런 생각이 들거든요. 어떻게 보시나요?


박재찬 신부 : 네, 좋은 지적입니다. 토마스 머튼의 책을 이렇게 쭉 읽어보시다 보면 토마스 머튼이 성모님께 굉장히 많이 의탁하고 또 성모님께 간구하고 있는 대목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만큼 어린시절에 채워지지 않았던 그 여성성의 요소 또 모성애 이런 것들이 토마스 머튼은 언제나 항상 뭔가 채우고 싶어하는 갈망으로 와 있었겠죠. 그런 것들이 이제 수도원에 들어와서, 수도원에도 다 남자들만 살잖아요. 그러니까 특히 더 모성애에 대한 갈망, 또 여러가지 그 따뜻함에 대한 갈망, 이런 것들이 토마스 머튼은 있었고 오히려 그게 결핍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걸 채우기 위해서 성모님께 더 의탁했는지도 모르죠. 굉장히 그 기도문들을 읽어보면 너무 아름답고, 또 아! 정말 나의 기도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기도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을 접하시면서 성모님에 대한 토마스 머튼의 특별한 영성들, 또 성모님에 대해서 그림도 많이 그리셨어요. 그래서 그런 그림들도 보시면서 토마스 머튼이 나름대로 그 어머니를 통해서 채우지 못했던 것을 성모님을 통해서 채우면서 신앙이 더욱더 깊어졌다는 거, 또 성모님에 제가 강조했던 것중에 하나가, 성모님을 가까이 가면 갈수록 성모님은 사라지고 예수님이 나타난다고 그랬잖아요 그죠! 그만큼 성모님의 그 정말 투명하고 맑은 창문과 같은 그런 깨끗한 신앙을 통해서 토마스 머튼은 성모님께 갔지만,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께 도달할 수 있게 된 거죠. 그러니까 어쩌면 성모님께서 토마스 머튼을 인도해 주었다고도 볼 수 있을겁니다. 토마스 머튼이 '나를 통해서 내 아들 예수를 만나거라'  이렇게 초대해 주신걸 수도 있을 겁니다.


김남희 교수 : 네, 그럼 그 과정을, 그 길을 토마스 머튼은 비워내라고 했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정말 매 번 제가 질문을 드리고 있는데, 토마스 머튼은 할 수 있는데 정말 우리는 할 수 있나. 이런 고민을 많이 하게 되는데 어떻게 해야 자기를 비워낼 수 있을까요 신부님?


박재찬 신부 : 아, 굉장히 실천적으로는 어려운 질문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가 이제 흔히들 마음을 비워야 되는데 그런 말을 많이 표현을 하지만 실제로 이 마음을 비운다는 거는 상당히 어려운 것 같아요. 그리고 마음을 비웠다고 해서 그게 비워진 걸 표시가 드러나는 것도 아니구요, 아마 교수님께서도 학생들을 만나면서 여러 또 일상안에서 살아가면서 정말 나와 맞지 않는 사람 만날 때 아, 정말 이렇게 화가 나는데 그래도 마음을 비워야지라고 생각하고 실천에 옮길려고 하지만 사실 잘 안되잖아요 그죠! 사실 오랜 수련과정이 필요한 거 같애요.


근데 무엇보다도 우리 그리스도교 안에서의 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내 뜻을 포기하는 것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나를 맡기는거죠. 그래서 좀 초연해질 수 있는 그런 마음 그런 훈련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난 시간에 고독과 침묵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도 흘러갈 것은 흘러가게 내버려 두는 마음 그런 마음도 마음을 비우는데 중요하구요, 그리고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공부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좀 가만히 있는 것, 머물러 있는 것, 특별히 침묵하는 것, 결국 이것도 마음을 비우는데 굉장히 큰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 아무리 흙탕물이라도 가만히 놔두면 이게 맑은 부분이 드러나잖아요. 그것처럼 우리가 마음이 어지럽고 힘들 때는 그냥 조금 침묵가운데 하느님 곁에 머물러 있는 시간, 이런 시간들도 마음을 비우는데 좋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내 뜻에 집착하는 것, 내가 이렇게 되고 반드시 이렇게 되야 된다는 그 생각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이게 마음을 비우는데 좋은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김남희 교수 : 아, 네! 많이 참고하도록 하겠습니다. 저 스스로 많이 비워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신부님! 음, 그 다음에 또 하나 성모마리아 영성에서 하나 중요한 점이 순종이잖아요. 저희가 첫 번째 '가정'이라는 주제를 다룰 때도 마찬가지였고, 왜?라고 묻지 않고 '네'라고 대답할 수 있는 순종, 그런데 사실 그 단어가 참 좋은 의미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사회에서는 그 순종이라는 단어를 조금은 다르게 보거나 또 순종하는 사람을 보면 무기력하거나 약하거나 아니면 비굴하거나 이렇게 보는 경향이 있는거 같아요. 그렇게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과연 이렇게 살아가는데, 순종적인 삶을 살아간다라고 했을 때 일반 사람들은 바보같이 사는거 아니냐 이렇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애요. 어떻게 보세요 신부님?


박재찬 신부 : 네, 맞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도 스스로를 바보라고 칭했을 만큼 이제 그리스도교의 어떤 가르침이라든지 사랑의 실천을 그대로 따라간다면 세상 사람들은 바보라고 하겠죠. 그렇지만 하느님 보시기에는 그게 바보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사는 모습이고 또 나를 온전히 내어놓는 모습, 내 뜻을 포기하고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서 온전히 하느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삶은 분명히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바보같고 또 내 것을 그냥 공짜로 내어주는 것, 이건 사랑의 표현이잖아요. 사실 이건 굉장히 일반 경제적인 논리로 볼 때는 말도 안 되는 거잖아요. 더 많이 가져야되 고 더 많이 누려야 되는 세상 안에서 신앙을 간직하고 살아간다는건 정말 영웅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게 우리 시대의 순교자적인 정신이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정말 우리 교회가 더욱더 그런 사람들이 한 두명 더 늘어날 때, 예를 들면 정말 바보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실 그게 정상의 삶인데, 하느님 나라의 삶인데, 오늘날 세상은 바보처럼 살아가는 사람, 복음의 정신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적기 때문에 오히려 그 사람이 바보 취급 당하는 거지만 점점 한두 명씩 그렇게 복음의 정신에 따라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사람,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날 때 우리 사회는 정말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도래하는 나라가 되겠죠.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정말 세상 사람들의 잣대에 내 자신을 맞추기 보다는 오히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삶,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삶, 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것, 이게 바로 신앙의 용기이고 그게 바로 이제 우리 신앙의 성숙에도 큰 영향이 있는거겠죠.


김남희 교수 : 네, 그러고보니까 김수환 추기경님이 나는 바보야 라고 했던 맥락이 토마스 머튼에게도 이어지는것 같아서 토마스 머튼도 나는 바보야! 이렇게 하지 않았을까, 오히려 그걸 통해서 드러내지 않음이, 사실은 저희가 바보란 단어가 드러내지 않음이고, 순종이고,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것, 그런 거 같습니다. 이렇게 토마스 머튼의 그 드러내지 않는 영성, 순종하는 그 영성을 보면서요 짖궂은 질문이긴 하지만 신부님은 어떠셨을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거든요. 신부님은 그 토마스 머튼처럼 혹시 그런 영성의 체험변화나 이런 게 있었을지 궁금하거든요. 성모님의 영성에 대해서!


박재찬 신부 : 짖궂은 질문 하셨습니다. 네, 물론 저도, 토마스 머튼은 아마 부재된 어머니의 사랑으로부터 더 충만한 성모님의 사랑으로 이어졌다면은 저는 아마 조금 다른 시작이었던것 같애요. 저는 태아때부터 어머니께서 저를 너무너무 사랑해 주셨고 물론 중간에 어머님과 떨어져 사는 시간이 있었지만 지금도 어머니 아버지는 늘 항상 저에게 정말 당신의 삶의 모범을 통해서, 또 기도를 통해서 저에게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계시는 분들이시기 때문에, 오히려 결핍된 게 아니라 충만함이 더욱 충만해졌다. 이렇게 표현해 드리고 싶습니다.


김남희 교수 : 네, 좋은 표현인데요 신부님!


박재찬 신부 : 근데 한편으로는 수도원 들어가서는 아무래도 마리아론에 대해서 이론적으로도 배우게 되고 또 성모님에 대해서 조금 타성에 젖는다 그래야되나? 늘 기도하는 묵주기도, 끝 기도 후에 이제, 수도자들은 끝기도 후에 성당에 불을 다 끕니다. 그때부터 대침묵에 들어가는거죠.


성모상 앞에 가서 오늘 하루 성찰을 하며서 성모님께 자기를 봉헌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침묵가운데, 근데 이제 그 기도를 하는 가운데 저희 왜관수도원에 성모상을 보면 목각으로 되어있는데, 이상하게, 제가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 성모상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 성모상이 저를 향해 환하게 웃고 계신 때가 많습니다. 저만 느끼는건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가면 성모님께서 오늘 하루 수고했다 안셀모야, 이렇게 말씀해 주신다는 느낌! 그러니까 좀 인격적인 대화를 나누는 그런 성모님이었는데 그래도 아직 성모님에 대한 어떤 영성은 아직 많이 부족한 편이기도 합니다.


근데 제가 그 수도원을 입회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중에 하나도 성모님의 이끄심이 있었어요. 그게 뭐냐하면 고등학교 다닐 때 신학교 갈려고 관심을 가지면서 성음악에도 관심을 갖게 되고, 그래서 이제 그 서점에서 그때 그 당시에는 카세트 테잎이니까 그걸 사서 듣는데 그 음악이 너무 좋은 거예요. 성모님 찬송가였어요. 그래서 아, 음악이 참 좋다. 계속 반복해서 들었어요. 듣고 또 듣고 듣고 하는데 왜관수도원에 견학조로 가서 끝기도를 바치는데 마지막 성모찬송가를 주일 저녁에 하는데 그걸 하고 있는거예요. Salve Regina(살베 레지나)를 하고 있는 거예요.


그때 그 감동은 제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뜨거운 감동이었어요. 너무 그 음악, 그 곡을 좋아했는데 그 곡을 이 수도원에서 하고 있으니까, 아 나는 여기에 입회해야 되겠다는 마음이 막 자연스럽게 들었었어요.


김남희 교수 : 회심인걸요. 회심! 그 음악이 무슨 음악인지 궁금해요. 짖궂은 질문이긴 한데 앞 소절만 조금 해 주실 수 있으신지?


박재찬 신부 : 그 Salve Regina(살베 레지나), 그레고리오 성가로 부르는 건데 부탁하시니까 잠깐만 해 보겠습니다. 웃지 마십시오.^^ Salve~~~Regina~~~~Mater misericordiae~~~.  뭐 이렇게 하는 겁니다.


김남희 교수 : 아, 굉장히 좋아질 것 같아요. 오늘 가서 당장 들어봐야 될 것 같습니다. 네, 그런 면에서 신부님게서는 잊을 수 없는 체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음, 그렇다라고 한다면 조금 전에 말씀하셨던 토마스 머튼의 결핍에 대한, 모성애에 대한 성모님의 어떤 영성의 길을 걸었는데 또 신부님께서는 오히려 충만한 어머니의 사랑을 더 충만하게 하셨다는 측면에서 대개 많이 와 닿았거든요. 제가 부모님께 잘해야 되겠다. 이 생각이 들면서 신부님께는 어머니가 어떤 존재인지 한 번 꼭 들어보고 싶습니다.


박재찬 신부 : 아~네, 저희 어머니는 저한테 친구같은 처음엔 그런 분이셨어요.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해서 혼자 살았으니까 가끔씩 집에 갈 때마다 항상 이렇게 안아주셨어요. 그래서 어머니께서 저를 안아주시면서 안셀모야~왔나? 이렇게 이야기할 때 늘 어머니가 편안했고, 성모님도 저한텐 항상 친구같은 그런 존재로, 어머니이지만 친구같은 내 마음을 있는 그대로 다 열어보여 드릴 수 있는 그런 어머니, 사실 저희 어머니는 시골에서 생활하셨고 저희 아버지가 6남매 중에 여섯 째였는데 뭐 집안 사정에 의해서 병환중에 있는 할머니를 모시기 위해서 시골로 제가 어릴 때 들어가셨고, 어머니도 덩달아 같이 들어가셔가지고 어머니 병환드신 시어머니 모시고 또 할아버지도 모시고, 농사도 지으시고 그렇게 살아가셨기 때문에 정말 고생을 많이 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고생을 하면서도 어머니께서는 항상 기도하시고 또 늘 가족들을 위해서 몸소 어려운 이웃들을 돌보시는 그런 실천을 하시고 아버지도 마찬가지셨구요. 그래서 그런 어떤 사랑이 충만한 모범이 어머니가 많은 말씀을 하시지 않더라도 저한테는 굉장히 큰 영향을 미쳤던 것 같애요. 그리고 예전에는 이제 저한테 관심이 많았어요. 왜냐하면 동생들은 장가를 갔지만 저는 장가를 안 갔기 때문에 힘든 일 있으면 저한테 자주 전화를 하셨는데 요즘은 이제 손주들이 생겨가지고 관심이 이제 그쪽으로 가셨어요.


근데 이제 어머님이 점점 갈수록, 옛날에는 조금 말씀을 많이 나눠주셨는데 요즘은 그냥 지켜봐 주는 사랑, 그러니까 멀리서 이렇게, 성모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예수님을 향해서, 예전에는 직접 하나 둘 일일이 다 케어했잖아요 그죠?  돌봐주고 했지만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을 향해서 멀리서 지켜봐 주는 그런 사랑을 하지 않았나 하는 그런 생각이 드는데, 지금 어머님도 저한테 그렇게 하시는 것 같애요. 지켜봐 주시는 사랑, 그리고 기도해 주시는 그런 사랑을 베풀고 계시는 것 같애요. 그리고 오늘날 뭐 여러가지 육신의 힘듦도 있으시지만 그래도 어머님은 늘 변함없이 그 곳에 계시는 분, 저한테는 그런 분이십니다.


김남희 교수 : 네, 정말 가슴 뭉클해 지는데요, 요즘 어머니들이 사실은 바쁘고 또 맞벌이도 해야 되고, 육아에 지치고 또 사회생활에 지치고 이런 어머니들이 굉장히 많거든요.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신부님께서 그 어머니들에게 어떤 말씀을 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용기를 주었으면 좋겠는데요.


박재찬 신부 : 네, 맞아요. 토마스 머튼 신부님께서 수도생활하는 여정에서 모든 수도자의 어머니가  바로 성모님이시고, 또 수도원 안에 성모님이 계신다. 라고 표현을 자주 하셨어요. 근데 이제 그 우리 어머님들한테도 우리 가정에 성모님이 계신다. 그런 마음을 먼저 가지시면 좋겠습니다.


성모님은 우리가 성모님을 믿는 게 아니라 성모님을 통해서 이제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거잖아요. 그래서 성모님은 우리에게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 전구자가 되어 주시고, 또 성모님은 누구보다도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숨어서 드러나지 않게 사시는 그런 사랑을 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 각자 이제 우리 어머님들도 성모님의 그 마음으로 자녀들을 사랑하는 마음, 이런 마음들을 배워가고 키워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성모님도 아까 이 방송 초반부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굉장히 외롭고 힘드시고 쉽지 않으신 그런 삶을 사셨죠. 그렇지만 성모님은 늘 하느님 중심으로 예수님과 일치된 마음으로 사셨기 때문에, 성모님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성모님은 온전히 아들과 일치한 삶을 살으셨습니다. 근데 이제 우리는 사실 성모님처럼 그런 신앙을 못 갖는다 하더라도,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자녀들과 또 남편 혹은 또 다른 가족들과 함께, 하느님을 통해서 그 가족들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 가족들을 대할 수 있는 그런 훈련들을, 수행들을 하시면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또 성모님의 그 마음안에 있는 그 자애로운 마음, 또 사랑의 마음이 결국 예수님의 마음이잖아요 그죠. 그 마음을 내가 예수님을 통해서 좀 더 배워내고 또 예수님과 함께 가족들을 대할 수 있을 때, 성모님의 사랑도 같이 느낄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여러가지 방법으로 우리 성모님이 사랑하셨지만 다 큰 자녀를 둔 어머님들께서는 이제는 지켜봐 주는 사랑, 아까 저희 어머니가 그러신 것처럼, 성모님도 그러셨던 것처럼 지켜봐 주는 사랑, 그 사랑도 큰 사랑이라는 것을 깨우치시면 좋겠습니다. 많은 잔소리를 하면 자녀들이 이렇게 듣고 이렇게 다 흘려버립니다. 네.


김남희 교수 : 그쵸~네.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본다면 신부님 강의에서 그 성모칠고(聖母七苦 )라는 말이 있었고, 그 다음에  성모칠락(聖母七樂)이라는, 사실 저희 세대에서는 굉장히 낯선 단어거든요. 그런 면에서 칠고와 칠락의 차이가 무엇인지 조금 간단하게 설명해 주세요.


박재찬 신부 : 아~네, 뭐 그건 교리적인 내용인데요, 앞 부분에 성모님이 여러가지 고난 받았던 이야기를 제가 조금 했잖아요. 성모님 칠고는 처음에 이제 성모님이 그 시메온을 만났을 때 성전에 봉헌했을 때, 예리하게 가슴이 찔리는 그런 고통을 이제 앞으로 받을꺼라는 그런 예언을 들었잖아요. 그 때가 첫 번째 칠고라  그러고요, 두 번째 칠고는 그 헤로데의 눈을 피해서 이집트로 탈출했죠. 그때  몰래 가야하는 그런 어려운 상황을 칠고라고 그럽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그 소년 예수님을 성전에서 잃어버렸을 때, 이제 한 동안 갔는데 사흘인가 갔을 때 아들이 어디 갔지? 아들을 잃어버리고는 성전으로 막 달려갔을 때 얼마나 마음이 애탔겠어요 그죠? 우리 어머님들도 그런 경험하신 분도 계실 겁니다. 그리고 이제 그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 때가 네 번째 고통이라고 그럽니다. 아들이 그 십자가를 지고 갔을 때, 우리가 십자가의 길 할 때 성모님과 예수님이 만나심을 묵상합시다. 하잖아요 그죠! 그래서 그 고통, 그리고 그 다음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셨겠죠.


그리고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시신을 내려서 안고 계실 때, 피에타(Pieta)라고 그러죠. 그 때 그 고통, 그 다음에 그 아들을 이제 무덤에 묻어야 했을 때 그 고통, 그 얼마나 정말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게 불효라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아들을 무덤에 묻어야 하는 그 어머니의 고통은 얼마나 크셨겠어요. 그래서 성모님의, 우리는 막 천상의 모후이시고 뭐 하늘의 여왕이시고 이렇게 노래하지만 사실은 굉장히 그 엄청난 심장이 찔리는 그런 고통가운데 사셨던 분, 그래서 오히려 더 우리에게는 낯설지 않은 분이시라는 것을 다시 한번 더 기억하시면 좋겠구요.  


대신 또 이제 성모님이라고 해서 고통만 있는 게 아니라 기쁨도 있었잖아요. 그게 성모칠락(聖母七樂)이라 그러는데 첫 번째는, 가브리엘 천사가 찾아왔을 때 그죠! 제가 왜? 네. 이야기한 것처럼 주님의 종이오니, 천사가 나타나서 얼마나 기쁨이 충만하셨겠어요. 또 두렵기도 하셨겠죠 물론!


그리고 이제 두 번째는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그 만남, 그 만남이 이제 자기가 원해서 갔죠. 천사의 그 소식을 듣고는 가서 엘리사벳 성녀를 만나서 그 '성모찬송가'가 거기서 나오잖아요.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니~ 하고 막 이렇게 노래하잖아요 그죠. 엄청난 기쁨이죠.


그리고 이제 세 번째는 물론 고통 중이지만 성모님께서 아기 예수님을 낳으셨을 때, 그 새 생명을 안고 이제 목동들이 찾아오고, 천사들이 환호하고 그 대목에서 얼마나 기쁨에 넘치셨겠어요 그죠.  그 다음에 성모님의 기쁨 가운데 하나는 또 동방 박사들이 예물을 들고 찾아 왔을 때, 근데 제 생각에는 이 때는 조금 더 의아해하지 않았을까. 이 아들이 도대체 누구길래 이 동방에서 세 명의 박사들이 찾아왔을까 의아함을 가졌었기도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제 아까 잃어버렸을 때에 고통스러워 했는데 성전에서 찾으셨을 때, 그때도 굉장한 기쁨을 얻으셨을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그때 이제는 모든 게 다 이루어졌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제 이 기쁨은 성모님께서 승천하셨을 때, 저는 이 성모님의 승천은 그 눈에 보이는 하늘이라기 보다는 하느님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김남희 교수 : 네, 지난 번에도 그 강의 때 말씀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박재찬 신부 : 하느님의 영역으로 들어갔다는게 어떤 의미일까요?


김남희 교수 : 어떤 의미일까요 신부님!


박재찬 신부 : 하느님은 사랑이시잖아요 그죠.  그래서 성모님은 신비로운 하늘의 영역으로 들어갔는데 그 신비, 초월과 그 다음에 자연이 만나는 신비, 그 신비는 바로 이거라고 제가 예전에 말씀드렸었습니다. 이거는 바로 사랑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성모님은 이제 진정한 하느님의 신비의 영역, 바로 사랑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가 더 많이 사랑하고 또 더 많이 사람들을 용서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바로 성모님의 마음을 간직할 때, 예수님의 사랑과 만나게 되고, 또 예수님의 사랑과 만날 때 우리는 바로 하느님과 일치하는 그런 경지 거기에 도달하게 되는거죠.


그래서 성모님의 그 승천을 통해서 우리도 이제 더 큰 기쁨의 어떤 예고죠. 미리 이제 보여주시는 거죠. 우리가 진정으로 사람들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사랑하며 살아갔을 때, 성모님께서 그 신비로운 사랑의 영역, 하느님 영역으로 들어간 것, 하느님 나라 천국에 도달한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될꺼다. 이걸 미리 보여주신거죠.


김남희 교수 : 네, 맞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희가 더욱더 사실은 다른 종교에 비해서 가톨릭이 갖고 있는 정말 좋은 신앙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성모님에 대한 신심이요. 그러면 신부님께서 조금 전에 그 수도원에서 그 성모신심에 관한 대침묵을 한다고 하셨는데 그건 보통 얼마나 하는 건가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실 수 있으세요?


박재찬 신부 : 네, 대침묵은 그 날 저녁 끝기도가 끝나면 저희 왜관 같은 경우에는 8시 끝기도를 해서 8시 20쯤 되면 끝납니다. 그러면 이제 성모님 앞에 가서 기도드리고 대침묵이 시작되고, 그 다음 날 아침에 이제 독서의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 때 이제 기도 시작을 이렇게 합니다. '주님, 제 입시울을 열어주소서'라고 세 번 이야기하면서 입술에 십자가를 긋습니다. 그래서 대침묵이 해제가 되는거죠.


이 대침묵은 결국 이제 하느님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소리를 잘 듣고 순종하신 분이 바로 성모님이시죠. 성모님께서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라고 겸손한 모습으로 그분의 소리에 응답을 하셨죠. 그래서 우리도 끊임없이 우리 일상가운데 우리가 침묵하고 있을 때 특히 더 잘 듣게 됩니다. 주님의 소리를!


그래서 성모님처럼,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왜?라고 묻지 않고 '네'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결단력을 갖기 위해서 자주 침묵에 들어가고, 또 자주 고독속에서 하느님을 찾는 시간을 자주 가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말보다는 그냥 조용히 그분 곁에 머물러 있음으로써 그리고 성모님이 결국은 드러나지 않는 삶을 사셨죠. 그래서 성모님께서 감추어져 있는 그런 삶, 멀리서 지켜보는 사랑을 했지만 누구보다도 예수님과 온전히 일치한 삶을 사셨죠.


그래서 성모님의 그 영성을 통해서 토마스 머튼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성모님과 따뜻한 그런 일치 가운데에서 성모님의 가르침에 따라서 그 삶의 모범에 따라서 당신도 수도원에서 감추어지고 또 침묵하고 고독가운데에 사셨기 때문에 더 깊은 관상의 단계,  성모님의 관상의 단계에 도달하게 된 거죠. 


그래서 교수님과 저를 포함해서 이 방송을 보고 계시는 많은 분들께서 드러나지 않는 감추임 가운데에 계시는 그 성모님의 사랑과 또 성모님의 하느님을 향한 그 사랑, 관상의 삶을 함께 배워나가실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남희 교수 : 네, 오늘 신부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토마스 머튼은 마리아의 영성에 대해서 유리창문에 비유를 했는데요, 그 유리창문이 정말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맑고 투명한 유리창문일지 아니면 나의 창문은 불투명해서 다른 사람들을 비추고 아니면 나를 비추면서 나만을 생각하는 유리창문인지 우리모두 각자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상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대담 때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