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24회 머튼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 1_현대영성가 토마스 머튼과의 만남_박재찬 신부 해설

은가루리나 2020. 4. 2. 12:17




+ 찬미예수님

성 베네딕도 왜관수도원의 박재찬 안셀모 신부입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도 주님 축복속에서 모두들 잘 지내셨는지요?  지난 시간에 저희는 초연함에 대해서 다루었습니다. 'detachment' 그래서 결과에 초연하고 마지막에 죽음으로부터도 초연해져서 온전히 하느님께 내 모든 것을 의탁하는 그런 마음자세가 필요하다고, 또 이 덕목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참 도달하기 힘든 덕목이지만 또 꼭 필요한 덕목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느님께서 자유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내적으로 더 영적으로 자유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토마스 머튼이 하느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또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는지 토마스 머튼의 성부, 성자, 성령의 하느님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기도로 시작하도록 할께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 하느님. 저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것은 오직 제가 당신을 사랑하기를 원한다는 것 뿐입니다.

저는 저의 의지가 당신의 의지 안에서 사라지기를 원합니다.

저는 당신과 하나의 영이 되기를 원합니다.

저는 당신이 열망하고 생각하시는 모든 것이 되기를 열망합니다.

저는 삼위일체이신 당신의 한 가운데에서 살며

당신의 부르시는 찬미노래의 불꽃이 되어 당신을 찬미하기를 원합니다.


오, 하느님. 이 모든 것을 아시면서 왜 당신은 저를 당신 사랑의 한복판으로

끌어들이지 않으시고 이기심과 허영과 오만 속에 내버려 두십니까?

하느님 더 이상 지체하지 마시고 저를 성인으로 만드시며

당신과 하나되게 해 주소서.

그리고 지체하지 마시고 제 안에서 사소서.


만약 그렇게 하는 데에 희생이 요구된다면

당신은 모든 희생을 감내할 수 있는 용기를 저에게 주소서.

당신의 가없는 사랑 안에서 저를 소진시켜 주소서.


오, 하느님. 당신은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으시니 저의 나약함을 걱정하지 마소서.

저는 무엇보다도 큰 당신의 사랑을 믿습니다.

저는 다른 모든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당신이 저로 하여금 당신의 사랑을 위하여 살도록 해주소서. 아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토마스 머튼이 한 이 기도문은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봉헌하면서, 그렇지만 또 동시에 자신의 나약함, 또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면서 그 부족함과 나약함 마저도 하느님께 의탁한다는 그런 기도가 담겨져 있습니다.


저도 사제로 살아가면서 참으로 주님과 온전히 일치하고 싶지만 때로는 이기심이 또 때로는 허영심이 또 때로는 정말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것에 집착하는 바람에 또 중요한 하느님의 자리를 잃어버릴 때도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정말 당신 닮은 사제로써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음을 또 많이 체험하게 됩니다. 제가 예전에 공부를 마치고 토론토를 떠나올 때, 어느 교우분께서 저에게 교우들이 바라는 사제像 이라고 해서 저에게 이렇게 리스트를, 주욱 적혀있는 용지를 주셨어요. 그때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그 용지 안에요.


 

[교우들이 바라는 사제像]

영성이 깊은 사제, 신자들을 따뜻이 보듬어주는 사제, 아마 이 방송을 보고 계시는 신부님들도 계시면 한 번 나는 어디에 해당되는가 한번 생각해 보시면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혹은 우리 본당 신부님은 어떠하신가 한번 생각해 보시면 좋을 것 같애요. 


권위를 잘 지키지만 권위의식이 없는 사제, 자신을 낮추는 사제, 늘 기도하며 정진하는 사제, 인자하고 다정하신 사제, 친근하고 부드러운 사제, 어린이들이 잘 따르는 사제, 근엄하시고도 절제있는 사제, 기도하시는 사제, 신자들의 작은 일에 관심을 가져주는 사제, 항상 웃고 인사를 잘 받아주는 사제, 아버지같이 자상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지닌 사제,


술을 많이 안 마시는 사제, 신자들과 대화를 잘 하는 사제, 모든 신자가 우러러볼 수 있는 사제, 힘없고 보잘 것 없는 가난한 이들을 따뜻한 눈과 말씀으로 다독거려주는 사제, 쾌활하고 명랑하며 모든 사람을 한 마음으로 대하는 사제, 항상 공부하는 사제, 조금은 인간적인 따뜻한 사제, 마음이 넓고 이해심이 많은 사제, 신자들이 신앙심을 갖고 영적인 성장을 위해 도움을 주는 사제, 강론을 정성껏 준비하고 마음에 와닿게 잘 하는 사제,


친절하고 상냥하고 온유하며 순수하고 순진한 표정을 짓는 사제, 동료 사제와 수도자들에게 섬세한 배려를 해주는 사제, 고해성사를 잘 들어주고 화를 내지 않으며 면담이 가능한 사제, 보이지 않는 수고를 칭찬하는 사제, 미사집전을 온 정성을 다해 하는 사제, 모든 일에 자신이 있고 사랑이 많은 사제, 항상 변함이 없고 신자들의 작은 실수도 너그럽게 넘길 수 있는 사제, 신자들과 잘 어울리면서 말이 적은 사제, 신자들의 작은 정성에도 감사할 줄 아는 사제 등등등 이렇게 나옵니다.


제가 이걸 처음 받았을 때, 이대로 다 지킨다면 아마 성인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데 한편으로는 제가 사제로서 인간적인 저의 능력으로 이걸 하겠다면 아마 불가능할 겁니다. 여기에 있는 한 두가지도 못 지킬 것 같애요. 근데 사제들의 마음안에 있는 예수님, 그 예수님께서 사제들을 통해서 신자들을 돌봐주고, 또 사제들이 자신의 마음을 비우고 온전히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께서 사제들을 대신해서 성령을 통해서 신자들을 그리고 자기 자신, 그리고 동료 수도자들을 대한다면 아마 이것은 또 가능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사제들은 예수님의 대리자이고 또 예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고 예수님을 위해서 자기를 다 버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부족하고 또 인간적인 약함이 있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힘으로 살아가는 저희들이기에 예수님께 더욱더 의탁하는 기도를 바치게 됩니다.


제가 마지막 이 강론을 그때 토론토에서 하면서 이 대목을 읽어드리면서 동시에 사제들만 하면 좀 부족하니까 억울하니까  우리 교우분들한테도 사제들이 바라는 교우 해서 제가 나눠드린 적이 있습니다.


[사제들이 바라는 교우像]


 

위의 말한 희망사항대로 사제들이 살지 못하더라도 성모님의 마음으로 따뜻이 보듬어주는 그런 신자. 하느님을 중심에 두고 사는 신자, 가장 기본이 되는 미사와 매일 아침기도, 저녁기도, 묵주기도를 충실히 하는 신자, 미사에 늦지 않게 미리 도착해서 미사 준비를 잘 하여 미사 시간동안 온 정성을 다하는 신자, 강론 시간에 졸지않고 귀 기울여 잘 듣고, 들은 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신자,


고해성사를 정기적으로 잘 보고 고해소에서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지 않는 신자,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제들을 사랑하는 신자, 사제들을 비교하지 않고 뒤에서 뒷담화 하지 않는 신자, 조용히 기도하고 묵묵히 사랑을 실천하는 신자, 매일 성경을 읽고 성경을 묵상하며 신심서적을 읽어 늘 공부하는 신자, 정기적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 신자, 자주 피정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돌보고 성지순례를 통해 자신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 노력하는 신자, 자신이 속한 단체나 소공동체에서 늘 성실을 다하고 분열을 일으키지 않는 신자 등등등.


아마 사제들이 바라는 신자, 혹은 교우들이 바라는 사제상에 대해서 아마 하루종일 이야기해도 끝이 없을 것입니다. 아마 각자가 다 바라는 바가 원하는 바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자신이 바라는 대로 공동체가 바뀌길 원한다면 아마 그 공동체는 분열되고 말 것입니다.




철학자 탈레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것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말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이 무엇인지 아느냐? 그것은 바로 남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실 우리가 사제이든 신자이든 평신도이든 마찬기지로 똑같이 우리는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사랑을 닮아가고, 예수님의 사랑과 하나되어 가는 것일 겁니다. 그런 마음이 있을 때, 서로가 부족한 것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보듬어 주고 아껴주며 우리가, 우리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 예수님께서도 그러셨죠. 너희가 나누는 사랑을 통해서 너희가 바로 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세상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내가 바라는 사제상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바라는 나의 모습, 또 예수님께서 나에게 매일매일 어떻게 주변사람들을 보듬어주고 사랑하기를 원하시는지 염두에 두고 살아가시면 좋겠습니다. 토마스 머튼도 진정으로 예수님의 사랑을 갈망했고 또 하느님의 사랑을 닮기를 갈망했습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토마스 머튼이 하느님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또 하느님의 사랑을 닮고자 했던 건 아니었죠. 처음에는 하느님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제가 아주 초기에 강의했을 때 기억나시죠. 그 학교에서 기숙사 생활할 때 미사에 참례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사도신경을 막 바치고 있었는데 토마스 머튼은 마음속으로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라고 이렇게 고백했다는 그 이야기, 제가 드렸었습니다.


그만큼 토마스 머튼은 자기 자신,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았었고, 또 하느님과는 무관한 삶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냥 여느 어떤 그 당시에 사춘기의 소년으로써 또 평범한 청년으로서의 삶을 살았죠. 그냥 뭐 즐기면서 자기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미사에 가라는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하느님을 따르게 되고, 그리고 더 깊이, 더 충실히, 더 철저하게 하느님을 찾는 삶을 살기 위해서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입회하게 되죠.


하지만 늘 토마스 머튼에게 있어서의 하느님관은 좀 더 고정되어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아직 그때까지는요. 그 이후에 점점 더 깊은 영적인 체험, 또 하느님 체험을 통해서, 그 위에 있는 하느님의 사랑이 점점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하고 나중에는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하는 신비로운 관계에까지 이어집니다.

 

그래서 먼저 성부, 성자, 성령가운데 토마스 머튼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는지 한번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제가 토마스 머튼의 영성의 두가지 축이 있다고 예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기억나세요?

토마스 머튼에 있어서 두 가지 큰 영성의 아주 큰 축은 첫 번째는 '자기 초월'입니다

제가 이콘을 가지고 설명을 해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또 자기 초월과 동시에 '자기 변형'입니다.

'self transcendence' 혹은  

혹은 'self transformation' 

혹은 'transformation of human consciousness' 라고 제가 설명을 드렸었습니다.


변형이라는 단어가 'transformation'인데 

이게 변형이라는 이 말이 조금 어감이 'transformation'의 모든 의미를 전달해 주지 못하지만 

그래도 변형이 전환이라든지 이런 것보다는 좀 더 의미가 있습니다. 

내가 더 변화되는데 조금 더 어떤 형태, 

내 마음에 있는 것들이 더 깊이 변화되는 걸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 째 큰 축이 뭐라고 그랬죠? 네, 그렇죠. 

관상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일치에 있습니다. 

'union with god'  관상이 결국은 하느님과 일치하는 거라고 말씀을 드렸었죠. 

근데 이 자기 초월과 자기 변형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일치를 가능하게 해주는 분이 누구실까요? 

바로 토마스 머튼에게 있어서는 아니,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또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우리가 하느님과 일치를 위해서 내가 초자연적인, 하느님은 초자연적인 분이시쟎아요 그죠. 우리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온전히 다 알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과 일치하게 되고, 하느님을 알 수 있게 되고 또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게 되고 하느님과 하나 되어서 살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래서 토마스 머튼에게 있어서도 예수그리스도는 바로 나를 넘어서 하느님과의 일치를 가져다 주시는 그런 분이셨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관상이죠. 토마스 머튼에게 있어서의 관상. 사랑의 마음으로 지그시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바로 관상이라고 제가 말씀을 드렸었죠.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는 토마스 머튼에게 있어서는 참된 빛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그 빛을 세상에 전해주는 그런 역할을 하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명상의 씨, 새 관상의 씨에서 이렇게 예수님을 비유합니다. 예수님을 돋보기에 비유를 합니다.



돋보기가 

햇빛을 작은 점에 한데 모아 마른 나뭇잎이나 종잇조각에 불을 붙이는 것과 같이 

복음서에 담긴 그리스도의 신비도 

하느님의 빛과 불을 한데 모아 사람의 영혼에 불을 지핍니다. 


그리스도께서 태어나 세상에서 사시고 죽으시고 죽음으로부터 부활하시어 

하늘에 계시는 당신 아버지께 올라가신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빛과 그 불을 한데 모아서 사람들에게 전해주어서 사람들에게 불을 지피는 역할! 성령 또한 불의 역할이라고 표현을 했죠. 그런데 그 예수님은 그 불을 지피기 위한 돋보기와 같은 그런 비유를 썼습니다. 저한테는 참으로 와 닿는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사제도 마찬가지죠. 

사제도 예수님을 닮아서 

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 하느님의 빛을 받아서 

그것이 돋보기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불이 될 수 있도록 또 사랑의 빛이 될 수 있도록

 불이 붙어서 사랑이 활활 타오를 수 있도록 도구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사제인 것입니다.

 

그러면 토마스 머튼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과연 누구이셨을까요

우선 아까 제가 말씀드린것처럼 

인간과 하느님을 연결시켜주는 다리와 같은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진리와 사랑과 신비를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토마스 머튼에게 있어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느님과 사람은 갈라져 있지도 않고 서로 멀리 있지도 않습니다. 

천상적이며 초자연적인 모든 것은

그리스도안에서 여인에게서 태어난 모든 사람

아담의 모든 후예의 수준에서 접근이 가능해졌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께로 나아가게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토마스 머튼에게 있어서,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지만 예수님은 친구이자 예수님은 우리 형제였습니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우정으로 그리스도와 일치하면,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우리의 형제인 그리스도께서 

이제는 인간의 수준에서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는 하느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허락하십니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는 더 이상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고 벗이라고 부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친구이신 예수님, 우리가 세례를 통해서 우리의 신분은 변화됩니다 그죠? 다른 종교는 우리 가톨릭 같은 경우는, 우리의 그리스도교는 계시의 종교이죠.

그리고 하느님께로부터 하느님이 어떤 열어 보여주신, 펼쳐주신 그 계시에 의해서 우리가 하느님을 믿게 되고, 따를 수 있게 되었고, 알 수 있게 되었고 또한 세례를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 딸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관계의 종교라고 그러죠.

 

흔히 많은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착하게 살면 되지 굳이 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되는지, 천주교 신자가 되어서, 가톨릭 신자가 되어서 성당에 다녀야 되고, 여러 가지 뭐 지켜야 될 것도 많쟎아요 그냥 착하게 살면 되지 굳이 성당에 다녀야 되느냐!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런데 착하게 사는 것은 윤리생활이죠. 그리고 종교인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새로운 단계로, 새로운 신분을 얻는다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윤리생활하고 종교생활하는건 다른 겁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착하게 사는 거지. 착하게 살아야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인인 것은 아닌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들 착각하거나 오류를 범할 수 있는 게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성당에 나왔다가 성당 다니는 사람들은 다 착한 줄 알았는데 성당에 나왔더니 이런사람, 저런사람, 미운사람, 마음에 안드는 사람, 뭐 조금 부족한 사람들을 만나자, 뭐 성당에 나와도 다 똑같네 하고 사람들에게 실망하고 사제나 혹은 수도자들에게 실망하고 성당을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분들은 이 윤리생활과 종교생활을 구분하지 못한 사람들일 겁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선하신 분이시고, 선 자체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 딸로서 착하게 살고, 또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면서 선을 베풀고 예수님과 같은 그런 사랑의 마음으로 살려고 애쓰는거죠.


여기에서 우리가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 딸들이 된다는 것, 그런데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의 좋은 친구, 또 예수님이 나중에는 예수님과 온전히 일치하면서 작은 예수그리스도가 되어 가는 것, 이것이 바로 나중에 토마스 머튼이 하느님과 하나되는 길로써의 예수그리스도와 일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다시 말을 좀 정리하자면, 

토마스 머튼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단순히 친구, 형제를 넘어서서 온전히 내 안에 사시는 나와 하나 된 분, 나와 일치하는 분, 

그분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의 말을 자주 인용하죠. 

이제는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라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을 토마스 머튼은 자주 인용합니다. 

자신의 글에서.

 

그래서 내 안에 사는 그리스도, 

그리고 나아가서 이제 토마스 머튼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새 아담! 

나또한 새 아담이 되어야 한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래서 <뉴 맨>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아담이 지은 죄를 온전히 그 모든 죄를 십자가에 짊어지고 돌아가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셨죠. 그래서 우리에게 새로운 아담이 사는 낙원, 하느님과 지복직관의 관계에 놓일 수 있는  하느님을 사랑으로 마주 볼 수 있는 그런 깊은 일치의 관계, 사랑의 관계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고, 새 아담은 바로 예수님 일 뿐만 아니라, 나 역시 새로운 사람이 되어서, 새롭게 태어나서 그 낙원에서의 삶을 시작해야 된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 낙원에서의 삶의 시작을 열어주는 것이 뭐라 그랬어요? 

, 제가 계속 강조해왔던 관상, 

관상이 바로 새로운 낙원에서의 삶. 

이 낙원, '파라다이스' 하면 좀 거리감이 느껴지는데 천국, 

또는 하느님 나라라고 표현해도 됩니다.

 

천국에서의 삶을 우리에게 열어주신 분, 

내가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과 하나 되었을 때, 

하느님과 하나될 수 있도록 이어주는 예수님과 하나되었을 때 

성부 하느님과 하나될 수 있도록 이어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렇게 토마스 머튼은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관상의 길로, 낙원의 길로 들어갈 수 있도록 열어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관상하고 

또 예수님의 모습을 우리 기억에 떠올리는 진정한 이유는 

사랑을 통해서 예수님과 보다 밀접한 관계를 갖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불붙기 시작하면 

우리의 상상력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사랑을 온전히 우리가 일치하고 그분 사랑안에서 불붙기 시작하면, 

아까 돋보기 비유 들었었죠 그죠? 

그 돋보기를 통해서 우리안에 사랑이 불타오를 때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과 일치되고 관상의 상태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게 된다

는 그런 말씀이십니다.

 

그리고 또한 토마스 머튼은 우리가 그릇된 예수님의 像을 갖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우리가 이제 예수님에 대해서 항상 선입견을 가지기도 합니다. 예수님하고 성부, 성자, 성령 그 사이에서 어떤 미묘한 사랑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때는 예수님은 마치 예수님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완벽하게 하시고, 어떤 감정도 없는 그런 로봇과 같은 그런 분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렇지만 사실 예수님은 우리 인간과 똑같은 분이셨습니다. 죄 이외에는 모든 면에서 다 똑같은 분이셨다고 사도 바오로께서 말씀하셨죠.

 

그래서 예수님 안에는 신성이 있었지만 동시에 인성이 있었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를 위해서, 예루살렘을 향해서 우시기도 하시고 또한 화도 내셨어요. 어디서 내셨죠? , 성전에 들어가서 상인들이 막 성전을 더렵혔을 때 , 환전상들이 성전을 더렵혔을 때 채찍을 드시고 화를 내시면서 이 아버지의 집을 더럽히지 말라고 경고하십니다.


또 라자로의 죽음에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셨고 그죠. 그래서 너무도 인간적이고 연민에 가득차서 굶주리고 있는 오천명을 먹이시기도 하시고,  제자들에게 측은한 마음을 가지기도 하시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제자들을 정말 안타까워 하면서 그렇게 돌봐주시고, 또 배반을 알면서도 끝까지 사랑해주시는 그런 정말 사랑 지극한 우리 친구이고 또한 스승이셨습니다. 또한 우리 형제이셨구요.

 

그래서 그런 예수님이 계시는데, 우리는 그런 예수님을 실제로는 좀 멀리 느낄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어떤 분들은 성당 앞자리에 앉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저 뒤에서 이렇게 멀리 바라보고 싶어하는 마음이 좀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고 가까이 와서 안아주시기를 바라시는데, 

성당 뒤에 멀리서 그냥 마치 미사에도 구경꾼처럼 그렇게 있는데 

앞으로는 그런 분들이 많이 줄어들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성당에 가서도 

예수님께 사랑의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인사하고 고백하고 사랑을 속삭이고 

그런 시간들을 많이 가지시면 좋겠습니다.

 

사제가 제단에 미사드리기 위해서 제단에 나와서 깊은 절을 하고 그 다음에 제단 앞으로 나아가서 그 제대에다가  입을 맞춥니다. 그래서 정말 예수님께 입을 맞추면서 사랑의 표현을 합니다.

 

어떤 수녀님이 우스개 소리로 나는 정말 제단앞에 놓인 꽃이었으면 좋겠다. 그 제단을 활짝 꽃피우는 제단을 아름답게 가꾸는 꽃이었으면 좋겠다 하는 이런 표현을 하니까, 그 옆에 있던 다른 동료수녀님께서 저는 제단을 덮는 제대보였으면 좋겠어요. 신부님이 매일 오셔서 미사 때마다 입맞춰 주니깐요. 이렇게 우스개소리를 했던 그런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정말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향해서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우리가, 편안하게 나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신부님 저는 죄가 많고 저는 그분 앞에 나갈 자격이 없습니다. 라고 표현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죄가 많기 때문에 그 앞에 나아가는 것을 두려워하기 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부족하기 때문에 그분의 사랑을 간구하고, 그분께 용서를 청하기 위해서 더욱 그분 가까이 나아갈 때 그분은 우리에게 죄를 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용서와 사랑으로 우리를 안아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두려워하지 마시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여러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가 예수님을 더 깊이 알고, 예수님안에 살아간다는 것은, 결국 하느님의 신비를 우리에게 알려주신 분이 예수님이쟎아요. 그래서 예수님안에 산다는 것은 결국은 하느님의 신비속에 산다는 그런 의미도 같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예수님이 내 안에 살아갈 때 우리는 매일 매일의 삶 속에서 신비롭게 작용하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깨우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것들을 예수님께서 나를 통해서 하고 계시는구나 라는 것을 깨달으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부족하고 불완전하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더욱더 큰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가 예수님께로 나아가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그렇게 걸어가셨던 것처럼 토마스 머튼은 우리가 새로운 아담이 되기 위해서, 

새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자아의 죽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또 한번 더 강조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죽음을 거쳐서 부활하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게쎄마니동산에서 정말 피땀 흘리시면서 그 고통속에서 이 잔을 거두어 달라고 할만큼 힘겨운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에 순종과 겸손한 마음으로 그 십자가를 받아들입니다. 그죠?


그것은 바로 거짓 자아의 죽음, 그리고 새로운 자아로서의 탄생을 위한, 참 자아를 위한 우리의 죽음을 보여주는 모델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내 뜻에 대해서 죽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삶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두려울 것도 없고, 또 걱정할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내안에 사시니까 그죠? 예수님께서 또한 내 안에 사시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믿음을 바탕으로 해서 예수님 안에서 기쁨과 감사의 삶, 사랑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정말 우리 신앙인의 삶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두려움이 없는 삶, 또 기쁨의 삶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이 말씀을 마지막으로 방송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진정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면 

지나가는 고통과 쾌락, 희망과 불안, 

그리고 즐거움과 슬픔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그런 것들은 나의 삶이 아니며 

나의 삶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나에게서 하느님을 빼앗아 갈 수 없는 것들을 

내가 왜 두려워해야 합니까?


나를 하느님께로 인도하지 않는 것을 

왜 바라야 합니까?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그런 것들에 

왜 신경을 써야 합니까?


내가 영적인 생명을 가지고 있고 

또 내가 원하지 않으면 

잃을 수 없는 신분을 가지고 있는데 

어차피 잃어버릴 육신 생명에 대해서 

걱정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진정한 ‘나’가 되었는데

‘나’ 아닌 ‘나’를 포기하기를 

두려워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영원한 기쁨이신 하느님을 

내가 이미 모시고 있습니다.”



 

내 안에 하느님을 모실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서,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우리안에 오셨습니다.

그분을 기쁜마음으로 오늘도 반기고 그분과 미사를 통해서 늘 그분과 하나되어 가면서 그분의 몸과

마음이 되어서 그분의 사랑이 되어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빕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