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헉슬리 2간 무주열반 여환삼매 / 23회 대담 : 집착과 초연함_현대영성가 토마스 머튼과의 만남_박재찬 신부 해설

은가루리나 2020. 4. 1. 13:15



김남희 교수 : 찬미예수님, 안녕하세요!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요? 지난 강의에 신부님 강의를 들으면서 분도 명상의 집이 생각이 났습니다. 부산에 있는 분도 명상의 집 입구에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너희는 멈추고 하느님 나를 알라"


하느님을 알기 위해서 저희가 먼저 해야되는게 저희가 멈추어야 되는 일인것 같습니다. 그 멈추는 것에 대한 중요한 키워드가 바로 초연함인 것 같습니다. 오늘은 그 초연함에 대해서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누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부님 안녕하세요? 네, 잘 지내셨는지요?


박재찬 신부 : 안녕하세요. 네, 3주만이네요. 반갑습니다.


김남희 교수 : 네, 잘 지냈습니다. 지난 시간에 초연함을 들으면서 그 구절이 정말 와 닿았었거든요. 분도 명상의 집에 왜 그 글귀가 있을까! 딱 맞아떨어진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재찬 신부 : 네, 제가 3월 1일날 부산 분도 명상의 집에 갔을 때에는 거기에 벽으로 장식이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근데 저랑 같이 지금 가톨릭 평화신문에서 토마스 머튼 영성에 대해서 기고를 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아주 투박하면서도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주시는 하삼두 선생님께서 저희 분도 명상의 집에 자주 미사참례 하십니다.


그때 같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런 모습으로 이렇게 분도 명상의 집에 어떤 그런 앞으로의 영성, 나아 갈 영성에 대해서 설명하는 그런 모습으로 너희는 멈추고 하느님 나를 알라. 시편 46편에 나오는 구절이죠. 이 구절을 넣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선생님도 그 구절을 좋아하시고 저도 그 구절을 참 좋아하는데, 제가 언제 그 구절에 감동을 받았냐 하면 제가 서품 받기 위해서 수정 트라피스트 수도원,  마산에 있는 수도원에서 피정을 했었는데 그때 계단을 내려가는 계단 바로 앞 부분에 이렇게 액자에 '너희는 멈추고 나를 알라.' 그 구절이 탁 있는데 제가 거기서 뭔가 굉장히 큰 울림을 얻었습니다.


아, 내가 정말 앞으로 사제로 살아가면서 내가 나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서 정말 나 자신으로부터 좀 더 자유롭고 하느님께로부터 더 믿음을 가져야 되겠구나, 또 하느님을 알아가야겠구나, 아, 하느님을 사랑해야겠구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근데 그때 당시에는 그 구절이 감동적이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저를 멈추지 못했던 것 같애요. 그래서 예전에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는데 제가 스스로 못 멈추니까 하느님께서 멈추게 하실려고 아마 저를 산산조각낸 그런 체험도 했습니다.


그래서 정말 멈추게 되었고 그 이후에 정말 주님께서 저한테 토마스 머튼을 보여주셨죠. 그래서 아마 '너희는 멈추고' 라는 그 부분에서 어떤 저 자신이 초연해 지는 것 뿐만 아니라, 저 자신이 산산조각이 나는 그런 체험도 함께 기억나기 때문에 멈춰 섰을 때 하느님께서 나에게 뭔가를 메세지를 전해준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구절을 거기에 넣으면서 저도 굉장히 새롭게 이제 다시금 나 자신이 멈추고 이 명상의 집은 하느님을 알게 하고 하느님을 사랑하게 하는 그런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으로 그곳을 아름답게 장식해 놓았습니다.


김남희 교수 : 아마 그래서 방문하시는 분들이 자기를 많이 멈추기 위해 오는 것 같아요. 그 멈추기 위해서, 사실 초연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되는게 바로 신부님께서 강의하셨던 집착이라는 주제를 다룰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요, 그 집착은 현대인들이 집착을 하긴 하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집착을 하는지 사실 자기 스스로 인지를 못 할 때가 있거든요. 어떤 면에 집착을 많이 하는 것 같으세요?

신부님 보시기에.


박재찬 신부 : 글쎄요. 우선 가장 큰 집착이라고 본다면 요즘 현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사실 재물에 대한 집착이 많겠죠. 그리고 자기 자리에 대한 집착, 뭐 요즘은 직장을 갖거나 막상 일을 하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려우니까 그렇죠. 그런 것도 있지만, 요즘 또 젊은이들 가운데에서는 세상이 주는 어떤 그런 관습을 벗어나서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며 살아가는 젊은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근데 이제 그 어떤 집착이든간에 가장 근본이 되는 집착은 자아에 대한 집착인 것 같애요. 나를 돋보이게 할려는 것, 드러내게 할려는 것, 혹은 또 내 뜻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게 할려는 것, 그래서 자기 생각대로 모든 것을 움직일려고 하는 것, 그리고 또 그 집착하는 것은 분명히 사람마다 조금씩 조금씩 다르잖아요 그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어린 시절의 영향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주변의 환경의 영향도 있고 또 기질적인 영향도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면 제가 아는 어떤 신부님은 굉장히 물건에 대한 집착이 강하세요. 그래서 왜 그렇게 물건에 대한 집착이 강한지, 그만큼 수도생활 했으면 좀 더 영적으로 나아가셔야 되는데 왜 그러신가 의문을 가졌는데 근데 알고 봤더니 그분은 어릴 때 너무너무 가난하게 사셔서 수도원에 들어와서 수도생활을 하지만 그래도 물건에 대한 집착이 아직도 남아있는 경우도 있구요.


그리고 또 시간이 흘러가면서 집착의 단계가 변하기도 하는 것 같아요. 뭐 세상 사람들은 좀 다르겠지만 수도원에 처음 들어오면 젊을 때니까 어떤 그 정결에 대한 그런 것  굉장히 어려운데 갈수록 그 시간이 지나면 순명에 대한 내 뜻을 관철시키고자 하는 그런 집착, 그 다음에 또 나이가 들면 관계에 대한 집착, 또 자기가 소유한 것에 대한 집착, 이런 것들이 걸림돌이 된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걸림돌이라는 것은 또 다른 의미로는 디딤돌이거든요. 가장 자기의 약한 부분이기도 해요. 그래서 집착하고 있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심리학적으로는 자기 방어 기재를 만들어 놓은거죠. 그래서 이거를 하면은 안전해요. 근데 이걸 하지 않을 때는 불안해요. 초조해요. 그래서 늘 그걸 할려고 하는거죠. 그래서 그걸 늘 할려고 하다보니까 다른 발전이 성장이 없는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어제 한 걸 오늘 또 할 때는 늘, 물론 좋은 것도 있지만 안 좋은 것들도 계속 거기에 집착해서 하게 되면 그 안에서 어떤 고착화되고 그러다보면 성장이 없어지는 것 같아요. 아마 교수님도 나름대로 집착하는게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김남희 교수 : 아주 많습니다. 지금 신부님 말씀 들으면서 많이 찔렸는데요, 저 같은 경우에는 이제 공부를 하다보니까 책에 대한 집착, 근데 책이라고 하는게 사실은 물건인데 또 신부님 말씀하신 대로 외적인게 내적으로 가게 되면 저 같은 경우에는 지식에 대한 집착일 것 같애요. 네.


그러면 저처럼 자기가 집착을 한다고 하는 것을 인식은 했거든요. 그러면 그 외적인게 내적으로 간다는 것까지는 이제 알았는데 거기에서 까지만 한다면 일반 상담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이게 종교인으로서 가톨릭 신자로서 이 내적인 집착에서 더 한 발짝 나아가는 단계는 어떤 것일까요 신부님?


박재찬 신부 : 우선은 다 같이 봐야 됩니다. 외적인 것, 우리가 늘 그리스도인이라고 해가지고 항상 공중에 붕 떠서 사는게 아니고 발을 땅에 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육신도 가지고 있고 정신도 가지고 있고 마음도 영혼도 가지고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통합적으로 이루어져 있죠. 그래서 그 물질에 대한 집착안에는 또 마음이 있는 곳에 그 사람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그 마음이 있는 곳에, 그 어떤 집착이 있다는 것은 그 마음뿐만 아니라 외적으로도 재물의 집착도 하나의 마음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그런거죠.


근데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연함이나 집착을 다루는 이유는 그 집착하는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하느님이 주시는 참된 행복으로 건너가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그걸로부터 분리되어 나가는 거죠. 네, 분리시켜서 좀 더 하느님께 집중하는 거죠.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멈추어서 하느님을 바라보는 거죠. 그런 멈추어서 하느님을 바라보는 과정에서 이런 차단이 필요한 거죠. 분리, 집착.


근데 이거 자체는 나쁜 게 아니죠. 하느님께서 주신 창조물은 다 아름다운 겁니다. 하느님께서도 창조하시고 그 다음에 항상 반복하셨죠. 보시니 좋았다. 다 아름답고 좋은 것입니다. 근데 그것에 집착해서 하느님을 볼 수 없을 때, 또 하느님을 섬기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할 때 이것들을 버려야 되는거죠.


근데 이런 버림과 비움의 과정은 연속적인 것 같애요. 예를 들면 내가 어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재물에 대한 집착이 있다가 또 세월이 지나서 사람에 대한 집착, 혹은 물건에 대한 집착, 또 내 마음에 대한 집착, 과거에 내 삶에 대한 집착, 뭐 이런 여러가지 관계되는 집착도 형성되구요. 그래서 집착을 하나 버렸다고 해가지고 그것이 다시 새롭게, 처음부터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또 집착거리가 생겨나고 또 그로부터 초연해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는 완전히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그런 여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정말 여러가지 집착이 있지만 특별히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모든 사람이 집착이 없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자기 자리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면,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면 봉사활동을 한다든지 해서 그 집착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을 거구요 그리고 또 타인에 대한 집착이 있는 경우에는 어떤 자유에 대한 그런 묵상, 타인의 자유를 존중해줄려는 그런 마음을 갖는 것, 그리고 자아에 대한 집착이 심한 사람들은 보다 더 마음을 비우는 기도 또 겸손함을 추구하는 그런 기도들, 뭐 그런 영성들을 배워나가는 것도 도움이 될 겁니다.


김남희 교수 : 네, 그러면 젊은이들 같은 경우에는 오히려 어떤 자신의 자유로움이나 자아를 찾는 방법으로 여행이나 이런 데를 많이 가면서 찾고 있는데요, 그런 젊은이들 같은 경우에는 어떻게 어떤 그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거, 아니면 껴안으면서 가는 것, 어떻게 해야 될까요 신부님?


박재찬 신부 : 글쎄요. 젊은이들도 여러 층이 있겠죠. 방금 여행에 대해서 이야기 하셨는데, 여행은 피정도 마찬가지고, 일상으로부터 분리되어서 새로운 공간으로 가는거죠. 그리고 일상의 시간으로부터 분리되어서 새로운 시간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환경안에서 새로운 음식도 먹고 새로운 것도 보고 하는데 그런 과정에서 단순히 여행에서 새로운 경험을 쌓는다는 의미는 어떤 초연함과는, 모르겠어요. 조금 분리된다는 개념에서는 영향을 미칠 수도 있겠죠.


왜냐하면 그 동안은 늘 하던 걸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보지 못했는데 이제 다른 곳에서 다른 시간속에서 다른 곳을 보다 보면 자기 자신을 또 새롭게 바라볼 수도 있고, 자신의 또 살고 있는 공간도 새롭게 볼 수 있겠죠. 그래서 조금 더 분리되면서 조금 더 여유로운,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그런 걸 할 수 있다고도 봅니다. 


그런데 그런 여행도 물론 좋지만, 성지 순례라든지 그 다음에 피정이라든지 이런 그리스도교 안에서 오랫동안 흘러내려온 그런 영적인 그런 도구들이죠. 이런 피정이라든지 성지 순례를 통해서 하느님께 집중하는 시간, 그게 바로 초연함에 있어서 우리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초연함이 하느님께 집중하고 하느님이 주신 참된 행복, 하느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그런 기쁨을 맛보는데 방해되는 것들로부터 분리되는 거니까 여기서 조금 더 하느님께 집중하기 위해서 피정의 시간을 갖는다든지 아니면 또 성지 순례를 통해서 그곳에 있는 거룩한 공간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난다든지 그런 시간을 가지면 아마 좀 더 우리 시대안에서 초연함을, 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초연함,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로움을 느끼는데 도움이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김남희 교수 : 그래서 그런지 요즘 가톨릭 신자들 뿐만 아니라 일반 현대인들도 전 세계적으로 지금 산티아고 길을 가는 것도 아마 더 그게 하느님을 향하거나, 자신의 어떤 영적인 걸 지향하기 위해서 우선 멈추는 행위를  하기 위해 가는 거라고 볼 수 있을까요 신부님? 또 다른가요?

박재찬 신부 : 네, 아마 그것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겁니다. 모든 길은 하느님께로 통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던 것처럼, 길 위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또 길 위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만나기도 하고 또 목적지에 도달했을 때 그곳에서, 보통은 자기가 가져온 걸 다 태우잖아요. 태우면서 새롭게 시작하고자 하는 그런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이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여러가지 목적을 가지고 갑니다. 어떤 분들은 뭐 다이어트 하러 가는 분도 계시고 또 어떤 분들은 정말 자기 자신을 좀 더 비우고 정화하기 위해서 가는 분들도 계시고 또 한 번 갔던 분들은 여러번 되풀이해서 가는 경우도 많이 봤습니다.


근데 저는 이런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어떤 영성이라든지 또 어떤 여러 좋은 방법들 가운데에서도 그것도 하나의 집착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그게 뭐냐하면 여러 차례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오신 분들 가운데 한 분은 자기가 조금 힘들고 어려우면 산티아고로 가요. 거기 가서 또 걷고 오시고 걷고 오시고 하는데, 저는 아마 그 분이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예수님을 만나신 것 같애요.


근데 제가 그 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거는 그 산티아고 순례길을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좀 들었어요. 왜냐하면 그 분은 현실안에서 그것을 또 극복해내고 또 다른 방법으로 하느님을 찾아가야 되는데 그것이 유일한 방법인거죠. 지금 현재로서는. 하느님은 산티아고에만 계시는 게 아니잖아요. 그죠. 모든 곳에 계시잖아요

그래서 그런 의미에서 그것도 하나의 집착이 되는거고, 그게 아마 토마스 머튼이 말하는 영적인 레벨에서의 집착이죠. 그러니까 거기에서 오는 달콤함, 기쁨, 그것도 포기하라는 거죠. 그럴 때 진정으로초연해지고 진정으로 그 무미건조하고 맹물과 같은 그런 영성생활에서의 그런 내면의 기쁨, 내적인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된다는 거죠.


김남희 교수 : 아, 지금 자연스럽게 단계별로 말씀을 해 주셨는데 저희가 외적인 집착에서부터 내적인 집착으로, 그 다음 영적인 집착까지도 이제 다 버릴 줄 알아야 된다. 라고 하셨는데 정말 맞는 말씀이신 것 같은데요, 정작 그렇다라고 한다면 신부님은 정말 그 단계를 거치셨을 것 같거든요. 어떤 집착들을 하셨었고 신부님을 좀 알고 싶습니다.


박재찬 신부 : 마치 제가 아무 집착도 없이 초연한 것처럼 말씀드리는 것 같지만 제가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집착, 저도 똑같이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예를 들면 착한 수도자가 되어야 된다는 거, 혹은 잘 살아야 된다는 거, 혹은 또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낙제하지 않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도 해야되잖아요. 그런 어떤 지적인 집착, 그리고 또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에게 더 하느님의 사랑을 잘 전하기 위해서 열심히 살아야 된다는 거, 그 다음에 예를 들면 저희 분도 명상의 집에 여러 수사님들도 계시고 또 직원들도 있습니다. 그분들 정말 행복하게 해 드리고 싶어 한다는 거, 그리고 뭐 여러 가지 제 안에 나름대로는, 많은 제 안에는 어떤 잘 해야 된다는 그런 집착 같은게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 같애요. 근데 제가 토마스 머튼을 공부하면서 또 많은 시간을 지나면서 제 안에는, 예전에는 그런 집착이 강했다면 지금은 조금씩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그런 느낌이 듭니다.


특히 토마스 머튼의 영성 가운데 이 초연함의 영성을 제가 보면서 아, 그냥 이렇게 주님께서 나를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을 알기 때문에 내가 잘 한다 하더라도 그건 내가 잘 하는 거고, 하느님께서 나보다 더 잘 하실 수 있다.


내가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맡겨드리라는 그런 말처럼 그렇게 제 나름대로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하고 나머지는 주님께서 채워주실 거라는 그런 뭐랄까, 믿음!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그런 신뢰 이런게 저한테 강하기 때문에 제가 너무 약하고 집착하는 것도 많고, 사람에 대한 집착, 뭐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려야 된다는 그런 마음들, 또 여러 가지 제 안에서 오는 물건을, 가난하게 살아야 된다는 것도 하나의 집착이라서 버릴려고 하는 것, 여러 가지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집착들로부터 초연해지기 위해서는 믿음이 커져야 되는 것 같애요. 그러니까 내 믿음이 크고 내가 주님께 대한 신뢰가 강하면 강할수록 하느님께서 선으로 인도해 주신다는 그런 걸 믿기 때문에 지금 당장 어떤 결과가 안 좋게 나오더라도 거기에 연연하지 않게 되는 그런 마음이 생겨나는 것 같애요.


예를 들면 요셉 성인 아시죠? 그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 창세기에 나오는 그 요셉 성인도 처음에 결과는 어땠어요? 형제들이 다 자기를 팔아 넘겨서 이집트로 갔잖아요. 결과가 너무 안 좋은 거잖아요. 절망속에 있었겠죠. 나중에는 어떻게 됐어요? 그죠. 완전히 이스라엘 백성들, 자기 형제들, 아버지를 다 구하는 그런 결과를 냈잖아요.


그래서 하느님의 섭리에 모든 것을 맡길 줄 아는 그런 마음이 이 초연함의 영성을 발전시키는 그런 큰 역할을 하는 것 같애요. 저도 부족하지만 계속해서 저의 약함을 하느님께 봉헌하고 또  때때로는 예전에 집착했던 거하고 지금 집착했던 게 달라지고 있어요.


그래서 그런 집착하는 마음들로부터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 그런 은총을 간구하며 살아가고 있는 거죠. 매일 매일이 수행이요, 매일 매일이 토마스 머튼처럼 초보자처럼 그렇게 새롭게 시작하는 여정인 것 같애요.


김남희 교수 : 짖궂은 질문이긴 한데, 캐나다에서 유학하실 때 낙제 안 받으셨나요 신부님! 점수 못 받았을 때 완전 절망이었을 때 어떻게 그 감정들이 올라왔고, 어떻게 하셨을지 좀 적나라하게 말씀해 주신다면?


박재찬 신부 : 아, 안타깝게도 저는 낙제한 적이 없습니다. 하하하하. 근데 제가 이런 체험은 있어요. 제가 저희 대학(college) 도서관에서 직원을 뽑는 일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직원이 되면 용돈도 벌고 그 다음에 또 거기 오시는 사람들하고 이야기도 하면 영어도 늘고,  또 이런 도서관 시스템을 배워가면 좋잖아요. 그래서 신청을 했어요. 도서관 직원 사서(司書)가 되겠다고, 근데 첫 회에 떨어졌어요.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낙방한거예요.


근데 그 다음에는 되겠지 하고 또 신청을 했어요. 근데 그 다음에는 거의 될 것 같았어요. 인터뷰도 해야 되고 또 추천서도 받아서 올려야 되고 여러 가지, 몇 시간 일 안 하는데도 까다롭더라구요. 근데 application 했는데 또 떨어진 거예요.


거기 책임하시는 도서 관장님께서 아, 이분이 널 뽑을려고 했는데 갑자기 아프리카에서 온 학생이 자기가 경제적으로 너무 어렵다고 자기 와이프도 있고 자녀도 있으니까 좀 해 달라고 부탁해서, 인종의 비율도 있어야 되잖아요. 그래서 아시아인은 이미 한 명 있기 때문에 이 사람을 뽑았다고 미안하다고 그러는 거예요. 굉장히 절망했습니다.


김남희 교수 : 하하하하, 그날 저녁 잘 드셨나요~? ^^


박재찬 신부 : 근데 그 사건을 통해서 제가 좀 새로운 거를 느끼는 게 있었는데, 그게 뭐냐하면 그 때 즈음 해 가지고 토론토의 한인 본당에서 신부님께서 여기 한인들이 많이 있는데 제가, 한국 사람이 귀하잖아요.  한국 신부가. 그래서 와서 좀 도와 주면 좋겠다. 와서 미사도 해 주고 성사도 좀  보고 해주면 좋겠다 했는데 제가 계속 거절을 했어요.  


왜냐하면 제가 공부를 해야 되고 또 계속 거기 한인 본당에서 왔다갔다 하다 보면 시간도 많이 빼앗기기 때문에 거절했는데 신부님이 계속 오라고 그러시는 거예요. 심지어 오라 해서 밥도 사 주시고, 그렇게 해서 계속 오라고 하는데, 한 곳에서는 내가 가고 싶어도 못 갔잖아요. 두 번이나 떨어졌는데, 이곳은 저를 계속 오라고 하는 거예요.


그 때 제가 문득 깨달음을 얻었어요. 아, 내가 사제이고 신부가 있어야 될 데는 성당이다. 도서관이 아니고!  그래서 내가 하고 싶어하는 거하고, 하느님께서 하고 싶어 하는 게 다르다. 저는 이 방송을 하고 싶지 않지만 하느님께서 하고 싶어 하세요. 그래서 제가 지금 하고 있는 건데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걸 할 때, 하느님께서는 저를 통해서 더 큰 일을 하시는 거야.


아마 교수님께서도 교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그런 가르치는 일을 통해 가지고 학생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고 예수님의 교리를 또 나눠주시고 하시는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 않나요?


김남희 교수 :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고 저의 집착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고 아까 갈등하는 신부님이 말씀하신 대로 저희는 이제 지적으로 이 초연함을 생각을 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안에서 이 초연함이라는 단어를 잘 쓰지 않기 때문에 신부님의 강의를 통해서 이 초연함이라는 단어가 더 많이 살려져야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관상으로 가기 위한 정말 첫 단계 가장 중요한 게 멈추고 초연함을 찾을 줄 아는 것, 그거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거든요. 네, 신부님의 캐나다 유학 얘기 들으니까 재미있는데요.  신부님 사생활을 더 알고 싶은데~^^


박재찬 신부 : 계속해서 다음 기회에 더 알려드리겠습니다.


김남희 교수 : 네, 신부님, 그러면 토마스 머튼이 영적인 집착에 관한 것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했거든요. "기도할 때 기쁨이나 평화도 찾지 말아야 한다."  이런 말씀을 하셨는데 과연 누가 이렇게 초연함에 도달할 수 있을까!  사실 너무 어려운 과제이기도 하거든요. 이런 표현이 사실 좀 너무 추상적이거나 사변적이지 않을까 라고 생각이 드는데 어떻게 해석을 하거나 어떻게 우리가 실천을 할 수 있을까요?


박재찬 신부 : 네, 아주 좋은 지적이십니다. 사실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한테는 이 이야기가 사실 조금 뭐 기도하면서 굉장히 영적으로 기쁨을 찾고 그 힘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기도하는 이유중에 하나가 되지 않느냐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사실 토마스 머튼은 단순한 그런 피상적인 기도가 아니라 더 깊은 하느님과의 일치를 추구했고, 또 그 깊이 도달했기 때문에 단순히 기도의 첫 단계에서 오는 그런 어떤 내적인 평화로움이라든지 어떤 그런 기쁨은 지나가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그게 어떤 맥주나 자동차나 혹은 포도주에 비유했잖아요. 그것처럼 창조물인 것처럼 그 기쁨도 하느님이 창조해 준 건데 그 기쁨이 마치 하느님인 것처럼 생각한다는 거죠. 그래서 그 기쁨을 버리라고 이야기 하는 거고 그것은 마치 그 기쁨, 사탕만 먹으면서 살 수 있는게 아니잖아요. 밥을 먹어야 됩니다. 혹은 뭐 서양인들은 빵을 먹겠죠.


그래서 우리가 맛없고 무미건조하지만 그곳에 더 하느님이 더 깊이 현존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감미로움에 집착하지 않고 영적인 감미로움 너머에 있는 것은 추구해 나갈 때, 그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기쁨이나 평화를 찾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죠. 그것을 흔히들 저한테 와서 성사를 보거나 면담하시는 분들이 옛날엔 참 열심히 했는데 요즘은 신앙이 식었는지 기도도 잘 안 되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옛날로 되돌아가고 싶어하는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해서 광야를 걸어가면서, 그 옛날 이집트에서는 고기도 먹었는데 뭐 빵도 먹었는데 여러 가지 참외도 먹었는데 이야기하는데 옛날을 회상하는 거죠. 근데 그 곳에 다시 돌아간다는 것은 다시 속박된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그곳에 집착하지 않고 기쁨이나 그 다음에 평화를 집착하지 않고 오히려 더 나아갈 수 있도록 그것을 버리는 작업, 그것을 계속 해 나가는게 중요합니다.


김남희 교수 : 네, 맞아요. 그 말씀 들으면서 그때 하셨던 강의가 떠올랐는데, 토마스 머튼이 그 비유로 하신 말씀이 정말 와닿았었거든요. 포도주로 생각하고 맥주로 생각하고 자동차로 생각하고, 왜냐하면 하느님의 사랑은 영원한데 제 해석이 맞는지 모르겠어요. 신부님께서 봐 주세요.


하느님의 사랑은 영원한데 그 내가 바라보고 있는 그 영적인 만족은 사물처럼, 사물은 변하잖아요 그쵸! 변하는 것이니까 그 변하는 것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으로 해석해도 될까요 신부님?


박재찬 신부 : 아, 이제 하산하셔도 되겠습니다. 하하하하


김남희 교수 : 신부님 강의를 열심히 들으면 네!


박재찬 신부 : 맞습니다. 네, 그렇게 모든 것들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디딤돌도 될 수 있지만 걸림돌이 될 수 있는 거죠. 그래서 그것에 집착할 때 그게 걸림돌이 되는 거죠. 그래서 여러 가지 모든 것들로부터 좀 더 자유로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토마스 머튼은 그것들을, 기쁨조차도!


이런 것도 있습니다. 그 결과에 우리가 집착하지 말라 이런 표현을 했는데 영적으로 내가 막 뜨거워지고 뭐 이런 결과를 바라는 사람이 많아요. 기도했을 때는 내가 기도하는 것이 이루어져야 돼. 우리 아들이 수능시험 치는데 그 수능시험 치는게 이루어져야 되요. 안 이루어지면 하느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제가 이렇게 열심히 기도했는데, 그리고 또 내가 영적으로 막 열심히 살았는데 계속해서 끊임없이 죄를 짓기도 하고 또 우리가 열심히 노력을 했는데 나쁜 결과가 나오기도 하고 그렇게 될 때 믿음을 잃기도 하고 하느님께 실망하기도 하고 막 그러하기도 합니다 그죠!


근데 그 초연함을 갖는다는 것은 뭐냐하면 그게 끝이 아니라는 것, 그것에 대한 희망을 갖는 거죠. 무슨 말이냐하면, 그러니까 예를 들면 베드로 사도가 세 번이나 배반을 하고 그 다음에 눈물을 흘리면서 도망갔죠. 근데 유다 사도도 배반을 했어요. 근데 베드로 사도는 회개하면서 다시 예수님께로 돌아갔죠. 그래서 예수님께 사랑을 고백하고 다시금 용서를 받고 새로운 시작을 했어요.


그치만 유다는 어떻게 했어요? 유다는 잘못했다는, 그 잘못된 결론 결과, 예수님이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거기에 멈춘 거예요. 새로운 시작이 있다는 걸 믿지 못했던 거죠. 그래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짓고 잘못 될 수도 있고 그리고 또 결과가 또 잘못 나올 수도 있어요. 물론! 그리고 우리가 볼 때는 커다란 시련이 닥칠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그 마지막과 같은 순간에 그것이 마지막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을 믿고 하느님께 의탁하고 희망을 둘 때, 여기에 초연함이 들어가는 거죠. 초연함의 영성이 드러나는 겁니다.


김남희 교수 : 아, 네! 좋은 말씀 정말 감사드리구요, 그러면서 한 가지만 마지막으로 여쭤보겠습니다. 초연함과 세상을, 왜냐하면 그 초연함이 하느님을 향한 시점을 찾는 건 중요한데, 현대인들은 가끔씩은 신부님이 강의 때에 말씀하신 것처럼 뒷짐 지고 있고 그냥 세상에 무관심한 것처럼 보이고 감정에 변화가 없는 것 같은 걸로 착각할 수가 있거든요.  그래서 다시 한번 거기에 대해서 신부님께서 강조해 주시면?


박재찬 신부 : 아, 네!  초연함은 절대 무관심하거나 방종하는게 아닙니다. 그냥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도사처럼 그냥 아, 그럴수도 있지~! 하고 이런게 아니라, 초연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하느님의 진리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진리에 집중하기 위해서 방해되는 모든 것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워지는거죠. 분리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초연함을 간직하고 그 영성을 사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에 집중하기 때문에 불의를 보고 외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또 외쳐야 하구요. 토마스 머튼도 깨달은 사람의 책임감에 대해서 강조를 많이 했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그 마음, 예수 그리스도의 그 사랑의 마음으로 제가 지난 시간에 신비로운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했잖아요. 신비적인 죽음!


그래서 거기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온전히 그 자유로움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그 마음으로 세상을 향해서 책임을 가지고 외치고 또 부르짖고 또 그렇게 해서 세상 사람들에게 그 모든 다른 부질없는 것들에 연연하지 않고 오롯이 하느님께 집중하라고 가르칠 수 있고 그래서 '너희는 멈추고 하느님 나를 알라!' 그 말씀을 세상에 전파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초연한 사람이고 또 그렇게 내 사랑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에 충만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랑은 초연함에 비례합니다.


그래서 사랑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 초연해지고 내가 더 깊이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일수록 더 초연함으로 가까워지고, 그리고 내가 더 자기 희생적인 사랑, 조건없는 사랑, 아무 판단없는 사랑을 하는 사람일수록 더 초연함으로 나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방송을 보시는 분들도 정말 내가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지, 또 무엇에 얽매어 있는지 또 예수 그리스도의 그 자유로움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좀 더 깊이 묵상해 보시고, 버리고 가벼워지고 또 좀 더 이제는 정말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그런 삶의 모습들을 배워나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남희 교수 : 네, 정말 좋은 말씀 감사드리구요 신부님,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1968년에 토마스 머튼이 토마스 메토넬이라는 사람과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데요, 그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가톨릭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자신이 하나의 신화가 되지 않을 권리가 있다." 라고 얘기를 했다라고 하는데요, 그 말 안에는 토마스 머튼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의 우상이나 하나의 모범이 될 만한 모델이 안 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안에는 자신을 보지 말고 하느님을 보라고 하는 하나의 메세지로 들립니다. 오늘 저희가 신부님과 토마스 머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이 방송을 보시는 시청자 분들은 토마스 머튼을 보시면서, 신부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하느님을 향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이상 마치겠습니다. 신부님 감사드립니다.


박재찬 신부 : 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