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25회 머튼의 하느님에 대한 이해_현대영성가 토마스 머튼과의 만남_박재찬 신부 해설

은가루리나 2020. 4. 3. 11:35



+  찬미예수님

성 베네딕도 왜관수도원의 박재찬 안셀모 입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도 주님 사랑안에서 다들 평안하셨는지요?


네, 지난 시간에 저희가 신부님들 사제상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교우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또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 토마스 머튼이 어떻게 하느님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 모두에게 친구이자 또 우리 모두에게 형제이신

예수님, 또 그런 형제님을 보내주신 성부 하느님에 대해 살펴보게 될텐데

그런 예수님이 지금 어디에? 우리 안에 이미 살고 계신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를 많이

해드렸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이미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갈 때 우리는 작은 예수님이 되어서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기도문을 같이 함께 바치면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아버지, 당신이 저를 오직 당신하고만 살도록 부르셨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만약에 당신이 보시기에 제가 한낱 실수와 악을 저지를 수 있는 인간,

유혹에 쉽게 넘어가고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면,

당신의 자녀가 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배우도록 저를 부르셨다는 것을 압니다.


당신은 제 마음의 사랑을 갈망하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아들 성자 역시 당신을 인간의 마음으로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이는 저의 마음과 그이의 마음이 하나의 사랑으로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게 하려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나고 움직이는 인간적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제가 인간적 사랑과 인간적 단순함과 있는 그대로의 저 자신

되고자 하는 겸손으로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저는 당신이 아버지로서 베푸시는 감미로운 자비를 결코 맛보지 못할 것이고,

제 삶이 이렇게 이어지는 한 당신 아들의 죽음도 헛일이 되고 말 것입니다.(T.M)


아버지 하느님, 저희가 당신의 사랑을 깨우치고

당신의 사랑안에서 저희의 부족함을 맡겨드리며 온전히 하나되어

당신의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 시간 인도해 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우선 하느님 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루기 전에 어느 어머니께서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들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아!

나는 널 배고 낳고 키우느라 평생을 바쳐 사랑했기에

이제 널 위해서 당장 죽어도 하나 서운할 게 없단다.


아들아! 이름만 불러도 아련한 내 아들아!

네 아내가 이 어미에게 효도하기 바란다면

네가 먼저 네 장모에게 잘 하려무나.

네가 고른 아내라면 너의 고마움을 알고 나에게도 잘하지 않겠니?

난 내 아들의 안목을 믿는다.


내 아들아! 피 눈물 같은 내 아들아!

내 행복이 너의 행복이 아니라, 너의 행복이 내 행복이거늘,

혹여 나 때문에 너희 가정에 해가 되거든 나를 잊어다오!

이건 네 어미의 모정이란다.


너를 위해 목숨도 아깝지 않은 어미인데

너의 행복을 위해 무엇인들 아깝지 않겠니.


물론 서운 하겠지, 힘들겠지.

그러나 죽음보다 더하랴.


아들아! 사랑한다. 목숨보다 더 사랑한다.

네가 나를 미워하고 원망하고 나를 아프게 하더라도

나는 너를 영원히 사랑한다.'


이 어머니의 편지를 읽으면서 정말 인간의 단순한 이성적인 논리를 넘어서 어떤 초월적인

하늘스러운 그런 하느님의 마음, 하느님 어머니의 마음을 닮은 그런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잘해주는 사람한테 잘 해주게 되고, 손익을 따져서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아픔을 받은 이에게는 아픔을 되돌려 주고 싶고, 나에게 상처준 이에게는 상처를 되갚아

주고 싶은게 인간의 마음인데, 어머니의 마음은 또 다른 인간안에 있는 하늘의 마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를 아프게 하더라도 그 아프게 한 아들을 기다려주고, 또 그 아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어머니의 마음! 그 어머니의 마음은 아마 그 아들이 아버지가 되고, 아들이 또 나중에 세월이

흘러야지만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아무리 우리가 헤아릴려고 해도 헤아릴 수 없는 그런 어머니의 마음, 그 어머니의

마음안에는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 하느님 어머니의 마음이 담겨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가 흔히 성부, 성자 해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많이 부르는데, 사실 하느님은 성이 없으시죠.

여성, 남성이 없으시기 때문에 하느님 안에는 모성과 부성이 함께 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어머니라고 제가 부른다 하더라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선 토마스 머튼이 하느님을 어떻게 이해했는지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토마스 머튼에게 있어서 초기의 삶에 있어서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은 수도승(Monk)이

하느님을 찾는다고 삶을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후기에는 어떻게 바뀌냐하면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찾는 삶을 살아야 된다. 이렇게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초기에는 수도승은, 수도자들은 더 거룩한 사람이고, 그래서 특별히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의 사랑을 전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후기에는 모든 사람들이 하느님의 사랑에 열려있고, 하느님을 찾아야 하고, 또

하느님을 만나서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행복을 누려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게 됩니다.


토마스 머튼이 이렇게 하느님을 찾아가는 사람의 대상이 바뀐 것은 또 한편으로는 하느님에

대한 그런 생각도 바뀌었습니다. 어떻게 바뀌었는지 이제 설명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토마스 머튼이 첫 번째 가졌던 하느님관은 이성의 하느님이었습니다.

기억나시는지 모르겠는데 토마스 머튼 신부님께서 처음 그리스도교에 관한 책을 읽었던 때가

있었는데 그 때 책 제목이 뭐였죠? 네, 에띠엔느 질송의 <중세 철학의 입문>이었습니다.

그 책을 사서는, 동전을 다 써버릴 요량으로 샀다가 '교회인가'라는 그 표시를 보고는 그 책을

기차 차창 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었다. 그런 말씀 제가 드렸었잖아요. 기억나시죠?


그 때, 그 책을 읽고 난 다음 토마스 머튼은 아, 그리스도교는 그냥 무대뽀 혹은 그냥 이상한

신비적인 그런 것들만 강조하고 비논리적인 그런 종교가 아니라 합리적이고 체계적이고

철학적인 그런 종교이구나. 라는 것을 깨우치게 됩니다.


그래서 굉장히 그 당시에는 특히 젊은 시절에는 토마스 머튼이 굉장히 이성적이고 또 논리적인

그런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개 젊은이들이 다 그렇잖아요. 논리적으로 따지는

하느님을 많이 생각하잖아요. 그래서 토마스 머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가지고 합리성을 가지고 있는 종교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이성의 하느님을 처음으로 만납니다.

그리고 이 처음으로 만났던 하느님은 나중에 수도원에 입회를 해서도 한동안 지속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에 대한 그런 논리적인 것들을, 그리고 전통적인 그런 신학들을 배웠습니다.

수도 신학도 배우고 중세 철학들도 배우고 또 고대  초기 교부들의 그런 삶의 모습들도

신부가 되기 위해서, 또 수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배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성의 하느님, 머리로 생각하는 또 배워야 하는 그런 하느님으로 앎의 하느님이었죠.



그런데 두 번째 다가 온 하느님은 체험의 하느님이었습니다.

토마스 머튼이 관상생활을 하는 수도승이었기 때문에 기도생활 가운데 또 전혀 엉뚱하게

루이빌이라는 그 도시에서, 월러시(Wallasey)라는 그 거리에서 하느님을 체험하기도 하고,

또 다른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관상중에 체험하기도 하고.


그래서 체험의 하느님을 통해서 단순히 머리로 알던 하느님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살아계신

하느님을 체험하게 됩니다. 깨닫게 되죠.

그래서 이성의 하느님은 머리의 하느님이었다면, 

체험의 하느님은 가슴으로 느끼는 하느님

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정말 내가 뜨겁게, 내 마음이 뭔가에 압도되어서 어쩔 수 없이 뭔가에 휩싸여서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뜨거움에 이르렀다. 이런 표현들을 많이 씁니다.

영적인 체험을 표현할 때, 그래서 이런 체험의 하느님 그리고 또 다양한 일상 가운데 옆에

동료 수도자들이 함께 기도하면서 그 삶 속에서 늘 함께 살아가는 일상의 하느님!


일상의 삶 속에서 체험하는 그런 하느님도 함께 느꼈을거라고  토마스 머튼은 트라피스트

수도승이었기 때문에 매일 기도의 삶, 공동체로서 함께 식사를 하고 함께 노동 하면서

그 안에서 그런 영적인 분위기 안에서 살았었고, 다양한 일상의 체험들이 다 하느님께

집중되는 그런 삶을 사셨던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토마스 머튼이 갖게 된 하느님은 바로 신비의 하느님이었습니다.

신비의 하느님은 내가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내가 전혀 몰랐던 새로운 신비적인 영역,

하늘의 영역속에 계신 하느님을 느끼고 체험하게 된거죠. 그리고 깨닫게 된 겁니다.

깨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내 안에 있는 신성이 더 커지는거죠. 그래서 내 안에 있는 그런 예수님의 자리가

더 커지다 보니까 더 신비로운 영역으로, 하느님의 영역으로 뛰어넘어서, 나를 넘어서

인간의 머리나 단순한 어떤 감정적인 이성적인걸 뛰어넘어서 또 다른 하늘의 영역속에

있는 하느님을 체험했고 또 그 영역속에서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 하느님에 대한 앎이,

또 하느님에 대한 느낌이 더 커져나갔던 거죠.


그래서 토마스 머튼의 이런 변화를 거치면서 점점 더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의 상태에 도달

하게 됩니다. 어쩌면 이런 건 우리 모두가 또 이렇게 나아가야 될 방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젊은 시절에는 하느님을 논리적으로 따지죠. 세상에 이런 고통을 주시는

하느님, 그런 하느님이 계신다면 나는 믿지 않겠어. 뭐 그렇게 이야기하는 젊은이들도 많이

있죠.


그렇지만 우리는 압니다. 예수님께서 그 고통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선과 악의 구분과 하느님이 생각하는 선과 악의 구분이 다릅니다. 이사야서 58장에

나오는 대목처럼 우리의 생각은 하느님의 생각보다 클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논리적으로 하느님을 머리로 우리가 다 알 수가

없습니다. 알 수 있으면 , 따지고 보면 다 알 수 있으면 하느님이 아니시죠.

하느님은 우리를 초월해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다 알수 있는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알려주셨죠. 

이게 바로 계시이죠.

그래서 계시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 특별히 지난 시간에 살폈죠. 그 하느님을 더

많이 알 수 있게 된거죠.


하지만 이 앎의 하느님은 항상 한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머리로 아는 것, 여러분들 많이

하느님에 대해서 아는 신학자들이 다 훌륭한 성인인게 아닙니다. 그죠?  많이 안다고 해가지고

하느님을 많이 아는게 아닙니다. 하느님은 머리로 아는 분이 아니라 하느님은 말씀드렸었죠.

하느님은 요한1서에 보면 사랑이십니다. 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가, 사랑은 앎으로써 이루어지는게 아닙니다. 아까 그 어머니의 편지에서처럼

어머니가 아들을 사랑한다 라고 말만 한 것이 아니라, 애기를 낳고 키우고, 온 정성을 다해서

아기를 위해서 아들을 위해서 희생했죠.


그런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이 없을 때는 그 사랑이 아닌 것처럼,

마찬가지로 하느님에 대해서 하느님을 머리로 안다고 해서 다 아는게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해 나갈 때 하느님을 더 깊이있게 알게 되고 더 깊이 있게 만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체험, 사랑의 체험도 중요합니다. 성체를 영하면서, 또 기도하는 가운데 

그분 앞에서 홀로 하느님과 깊은 사랑의 체험을 나눌 때 

우리는 신비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거죠.

이 신비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은 내 힘으로 되는게 아닙니다. 이건 바로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선물!  다른 말로 은총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점점 더 깊이 깊은 하느님의 사랑, 사랑도 레벨이 있습니다.

단순한 이기적인 사랑이 있고 그죠! 또 이타적인 사랑도 있죠.

내가 잘해주는 사람들한테 잘해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뭐라 그러셨어요?

너에게 잘해주는 사람한테만 잘해준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나에게 잘해주지 못하는 사람들, 또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나눌 때

더 초월적인 사랑으로 건너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하늘사랑을 배우기 위한

도구들인 것입니다. 용서가 단순히 내가 하는게 아니죠. 용서는 하느님의 힘으로, 하느님의

은총으로 내가 할 수 있게 되는거고 하느님의 힘이 없다면, 나는 그냥 내 힘으로 했다고

생각하지만 내 안에 평화가 찾아올 수 없습니다.


하늘의 평화는 하느님이 주시는 그 은총을 받아들여서 그 하느님의 마음으로 그 사람을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할 때 더 큰 하늘사랑으로 나아가게 되고 우리의 사랑의 레벨은

더 한 단계, 두 단계 더 높아질거고 또 우리의 사랑은 더 깊어질 겁니다.


이게 바로 초월적인 사랑이죠.  아까 그 어머니께서 아들을 위해서 온 마음,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싶어하는 그런 마음의 단계로 나아가는 거겠죠.

그래서 역시 이런 사랑의 어떤 체험을 통해서 더 깊이 더 깊은 레벨의 어떤 사랑을 나누면서

하느님과 하나되어 가는 우리였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도 하게 됩니다.




자, 그러면 좀 더 구체적으로 이성의 하느님, 체험의 하느님 다른 말로 계시의 하느님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또 신비의 하느님, 우리가 알 수 없는 영역의 하느님, 그 하느님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이성의 하느님은 어떤, 이성의 하느님은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체계적으로 알고

배우고 토마스 머튼도 여러 책들을 통해서 책 읽기, 글쓰기에 중독될 사람인만큼 책을 많이

봤습니다. 다양하게! 토마스 머튼이 쓴 책들을 읽어보시면 정말 많은 책들을 인용하고 있고

그 책들에서 느낀 것을 글로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그런 토미즘의 그런 책들도 많이 읽었었구요

그리고 또 십자가의 성요한과 같은 그런 신비주의적인 그런 경향의 책들, 또 사막 교부들,

또 수도승이었기 때문에 수도승 전통에 관련된 그런 서적들을 많이 보면서, 또 실존주의

철학에 관계되는 책들, 또 나중에는 동양의 종교들에 대한, 동양사상에 대한 그런 책들도

많이 읽고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더 풍성한 그런 영적인 또 외적인 것들을 ,신학적인 체계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초기에는 더 특별히 이성의 하느님, 머리로 생각하고 따지고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그 대표적인 책중에 하나가 <진리의 산길>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은 토마스 아퀴나스와 십자가의 성 요한의 신학과 신비신학을 이렇게 요약해서 어떤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에 대해서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체계를 가지고 기록하게 됩니다.


그런데 나중에 <진리의 산길>을 쓰고 난 다음에, 몇 해가 지나고 난 다음에 토마스 머튼은

굉장히 후회를 합니다. 저 책은 내가 쓴 책 가운데 너무 못 쓴 책중에 하나이다. 내용이

너무 풍부하지 못하고 너무 머리로 따질려고 했다. 그래서 그 시간들을, 그렇게 쓴 책들에

대해서 그 시간에 대해서 좀 후회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토마스 머튼이 깨달은 거는 단순히 머리로 내가 아는 거하고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체험하고 또 살면서 우러나오는 것들, 이런 것들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 이후에 쓴 여러 <새 명상의 씨>라든지 아니면 <내적 체험>이라든지 이런 책들을

보면 그 예전에 앞에 썼던 것을 내가 고쳐 씁니다. 그래서 그 전에 썼던 책들은 좀 부끄럽지만

새롭게 더 고쳐써서 더 풍성하게 하고싶은데 그것은 바로 저의 체험을 나누고 싶기 때문입니다.

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제 체험이, 

그러니까 여러분들에게 영성생활에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라는 마음으로

이성적인 하느님에서 체험적인 하느님으로 건너오게 됩니다.

그래서 특별히 더 격려가 되는 책이 바로  'internal experience '

한국말로는 번역이 되어 있는지 모르겠는데 개신교에서 번역을 한 것 같애요.

그런데 그 '묵상의 방법' 인가 이렇게 번역이 되어 있는데~~~


전혀 다른 제목으로 번역이 되어 있는데 

내적인 체험 'internal experience'라는 책이 있습니다.

1959년에 주로 기록이 되었고 출판은 그 후기에 기록되었는데, 

전기의 어떤 하느님관하고 후기 하느님관을 나누어 준 

하나의 어떤 경계가 되는 책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계시의 하느님, 체험의 하느님에 대한 것을 점점 더 강조하게 됩니다.

특별히 관상생활에, 관상적인 체험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더 체험을 위주로 하느님을

이야기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보면 성경도 체험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죠? 바오로 사도가,

베드로 사도가, 또 마태오, 마르코, 요한 그리고 루카 복음사가가 체험한 하느님, 그 당시에

처음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교를 하기 시작했어요.

당신네들이 죽인 예수 그리스도는 사흘만에 부활했소. 라고 선포하기 시작했죠.


그리고 이런 예수님께서는 이런 기적도 하셨고 또 이런 가르침도 하셨습니다. 라고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의 세대가 점점 흘러가고 또 말을 했지만 잊어버릴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 기록이 모이고 모여서 나중에 4 복음사가가 자신의

어떤 신학적인 관점에 따라서 자신의 청중들에게 독자들에게 맞는 복음서들을 전하게 된거죠.


그래서보면 체험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죠! 부활 체험이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성경이 기록

되었어요. 그 이후에 여러 이단들이 막 생겨나니까 교회에서는 이제 신학적인 체계를 세우기

시작합니다. 이 성경을 바탕으로 해서 이 신학이 나중에 나온거죠.


그리고 또 나중에 세월이 흘러가면서 여러 철학들과 접목이 되어가면서 또 다른 신학체계가

그 시대에 맞게끔 형성되기 시작했죠. 그래서 결국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렸을 때는 좀 더

최초의, 초기의 예수님께서 의도했던 바가 뭔가해서 원천으로의 회귀라고 그러죠.

그래서 원천으로 돌아가서 예수님의 본래의 의도가 무엇인가 이것을 알자. 그리고 또

그런 예수님의 본래의 의도를 우리 시대에 지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할 것인가!


이걸 현대세계로의 적응이라고 표현을 하죠.

그래서 우리 시대에 맞는 방법으로 예수님의 본래의 의도를 잘 전해주는 것,

그리고 잘 설명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신학자들의 역할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성경말씀, 

그리고 예수님이 본래 하셨던 그런 의도들을 항상 염두에 두고

거기에서부터 출발해 나가야 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 시대는 계속 변화되지만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뜻은 절대 변화될 수 없는거죠.

그래서 그것을 어떻게 우리 시대에 해석해 내는가 하는 것이 또한 하나의 관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약하자면 체험이 먼저 있었다는 겁니다. 체험의 하느님!

토마스 머튼도 이 체험의 하느님에 대해서 여러 가지 표현들을 많이 했고 또 글로 적었습니다.

<요나의 표징>에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저는 수도승의 영적인 삶을 어떤 이성적인 사고에 의해 드러내려고 시도했습니다."


아까 말씀드렸었죠. <진리의 산길>을 통해가지고 이성적으로 사고(思考)에 의해서 하느님을

드러낼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체험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 기도를 통해서, 영성생활을 통해서 체험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요나의 표징>이 언제 적힌지 알죠? 기억나시죠? 네, 미성숙한 머튼에서 성숙한 머튼으로

건너가는 과도기에서 고래의 뱃속에 있는 요나 표현, 기억나시죠? 네!





그 다음에 토마스 머튼이 마지막에 더 깊이 있게 하느님을 만나게 해 준것은 바로 신비의

하느님이었습니다. 신비의 하느님! 사랑의 하느님이라고도 저는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 내 일상의 체험을 넘어 계시는 하느님, 내가 알 수 없는 하느님,

초월적인 하느님, 그래서 아무것도 없는 듯한 하느님, 그 하느님에 대해서 믿음을 갖고,

바라보고 그래서 그 신비속에 내가 빠져들어서 새로운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바로 토마스 머튼에서의 하느님관이었고 또 한편으로 하느님께 대한

기도의 정의이기도 했죠.


제가 관상과 기도에 대해서 강의할 때, 여러분들에게 토마스 머튼이 생각하는 기도는

이것이었다 그랬죠. 기억나십니까?

기도는 이미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의 신비속으로 들어가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렇게 표현을 했었죠.


그래서 하느님의 신비속으로 들어가는 것, 그 신비의 하느님을 만나는 것!

이것이 바로 기도요 관상이라는 것을 토마스 머튼은 강조했습니다.


또 성경에서 하느님을 보는 것은 단순하게 그냥, 우리가 하느님 보는 사람은 다 죽는다

그랬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또 성령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종말론적인 체험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종말론적이라고 표현을 하면 굉장히 마치 말세, 세상의 끝 이런 느낌이 드는데 사실은

'eschatology' 라고 그러는데,  이 종말이라는 표현은 조금 다르게 설명하자면

제가 여기에다 설명을 좀 해드리겠습니다.


종말이란 표현은 '현재화'라는 표현하고도 같이 이어질 겁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심으로 인해가지고 우리 모두는 객관적으로 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 모두는 종말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종말(eschatology) 이 시작되었습니다.


왜그러냐 하면 하느님 나라가 이제 시작되었고 완성이, 앞으로 우리 삶이 끝나고 난 다음에

완성되겠죠. 그런데 이 하느님 나라가 예수님의 부활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부활로 인해서 종말이 시작되었다는 말중에 하나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어디로 가셨죠? 저승에 가셨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셔서 어디로 가셨죠?


네, 사도신경에 나오잖아요.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어~ 이렇게 나오잖아요.

이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셨다는 겁니다.

제가 예전에 예수님 설명하면서 역사의 예수님과 우주적인 그리스도를 설명하면서 말씀을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본래의 자리, 천지창조 이전으로 돌아가셨고 

하느님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시공을 초월해서 계시는 분이라고 말씀드렸을 겁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현재만 계십니다.


현재만 계시는 이 하느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구원을 계속해서 끊임없이 주고 계시고

지금 바로, 지금 오늘이 바로, 여기가 바로 하느님을 만나는 장소이고, 하느님을 만난다는

것은 다른 의미로는 여기서는  종말이라고 표현을 하는데, 그 하느님의 만남과 이어지는거죠.

다른 말로 종말은 또 한편으로는 심판이면서 구원인거죠.


조금 어려운 용어이지만 아마 여러분들은 다 똑똑하시니까 잘 이해하셨을거란 생각이 듭니다.

종말은 지금 현재 하느님을 만나는 그 순간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현재화' 이걸 이해하시면 종말이라는 의미를 이해하실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느님을 본다, 하느님을 만난다는 것은 바로 신비의 하느님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사랑의 하느님을 만나서 구원된다는 것을 함께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신비의 하느님과의 체험은 바로 깊은 하늘사랑과 만나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과 완전히 일치한 상태, 하느님과 온전히 하나된 상태,

더 깊은 그 사랑으로 하나되어 가는 것,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사랑이 없는 저를 사랑이 하느님과 일치시켜 주지 않는 한 저는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저와 제가 하는 모든 일 안에서 활동하시고 사랑하시기 위해

당신 자신인 당신의 사랑을 보내 주신다면 저는 변화될 것이고

저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며  

하느님 안에서 저 자신을 잃어버림으로써 저의 참된 정체성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하느님을 만나고 또 사랑의 하느님과 하나되어 가는 것,

이것이 바로 신비의 하느님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의 부재에 대해서 설명을 해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하느님이 안 계신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토마스 머튼은 이것은 우리를 비난하는 부재라고 그랬습니다.

우상을 섬길 때 하느님은 거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두 번째 의미에서의 하느님의 부재!

이것은 뭐냐하면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는 하느님의 부재라고 토마스 머튼은 표현했습니다.

이것이 뭐냐하면 하느님이 아니계시는 것 같다는 느낌은 무엇이냐 하면,

내가 그동안 만나지 못한 하느님을 지금 만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만난적이 없는 하느님, 예를 들면 하느님은 선하시고 사랑이시고 좋은 것만 주는걸로

생각했는데 십자가로 다가오는 하느님이 왔을 때 하느님이 아니라고 생각할 때 하느님의

부재를 느끼는거죠.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속으로 깊이 들어가서 그 십자가의 고통을 깨우치게 되었을 때

그 십자가의 하느님은 전에는 하느님의 부재였지만 이제는 더 충만한 하느님으로 변화되어

가는 겁니다.

그래서 그 하느님의 부재는  'Nothingness',  무의 의미에서의 부재이기도 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그 無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제가 설명을 드렸었죠.


그래서 그 하느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다가오십니다.

그래서 신비의 하느님이 우리에게 다가왔을 때, 처음에는 그 하느님을 잘 몰라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 하느님의 선물로 우리가 그 하느님을 깨우치게 될 때, 하느님은 우리에게 또

더 충만한 은총을 베풀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초기에 시작할 때, 이 '성령'까지 할꺼라 생각했는데 성령까지 하지 못하고 성부 아버지

하느님만 했네요. 다음 시간에 성령을 계속해서 이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도 하느님의 자비로운 마음, 하느님의 사랑의 마음, 그리고 설령 지금 하느님이 안 계신다

하고 느껴지고 메마른 사막과 같을 때에라도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다만 내가 그것을 아직은 눈을 뜨지 못해서 못 알아볼 뿐입니다.

하느님의 현존가운데 하느님의 자비가운데 하루하루 기쁨과  감사한 삶이 되시기를 빕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