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새 인간 / 26회 머튼의 성령에 대한 이해_현대영성가 토마스 머튼과의 만남_ 박재찬 신부 해설

은가루리나 2020. 4. 4. 13:11


+ 찬미예수님

성 베네딕도 왜관수도원의 박재찬 안셀모 신부입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예수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와 또 아버지 하느님의 축복속에서 다들 건강하셨는지요? 지난 시간에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 그리고 그 앞 시간에는 예수님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성령께서 어떻게 우리 안에 활동하고 계시고 성령의 역할이 무엇인지 토마스 머튼은

이 성령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하고 또 어떻게 성령을 따르면서 살았는지, 또 성령께

기도하며 살았는지 또 성령과함께 기도하고 살았는지 이 시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제가 시작할 때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하니까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시고 또 좀 덜

지루하다고 하셔서 이번에는, 지난시간에는 어머니가 아들한테 보내는 편지였는데 이번에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제가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에게.


평생 살아도 전혀 닮지 않으니 포기해라.

난 아직도 짠 게 먹고 싶지만 네 엄마는 항상 싱겁게 요리한다.

난 아직도 온돌에서 자고 싶은데 네 엄마가 우겨 침대에서 잔다.

난 바다가 좋은데 네 엄마 때문에 매주 산에 간다.

아주 죽을 맛이다.


난 김치에 젓갈이 들어가는 것이 싫은데 아무리 이야기해도

네 엄마는 아직도 젓갈을 넣는다.

부부가 오래 살면 닮는다고 했는데

개뿔 하나도 닮지 않는다.

삼십 년 함께 살면서 배운 것은 포기하는 것이다.

그러니 포기하고 살아라.


결혼을 앞둔 아들에게 아버지가 보내는 편지 내용이었습니다. 정말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함께 살면 서로 닮는다는데 오히려 아버지는 포기하며 살라고 하는데, 예전에 어떤 자매님께서

결혼한 지 지금 15년 째 되었는데 15년 째 남편한테 샤워하고 난 다음에 수건을 침대위에

두지 말라고 지금 15년 째 이야기하고 있는데 15년 째 되어도 아직 안 고쳐지고 있다고, 이제는

남편이 남편같이 안 보이고 애기같이 보인다고 이런 이야기를 한 기억이 납니다.


모르겠습니다. 부부생활 하면서 여러 가지 각자가 서로 고집피우는 것도 있을거고, 서로 깨어지고

부서지는 것도 있겠죠. 근데 우리가 함께 살아가면서 서로 비우고 또 서로 포기하고 또 다투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며서 점점 둥글둥글해 지는 것이 결혼생활일건데 앞에서 살아가면서 특히, 결혼

초기에 살아가면서 서로 깨지고 부서지지 않으면 나중에 노년이 되었을 때는 서로에게 맞는 부분들, 또 서로에게 불편한 부분들을 계산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년이 되어서 많이 힘들어 하는 경우를

보게 되었습니다.


예전에도 어떤 부부가 저에게 부부상담을 하러 왔었는데 그분들은 결혼해서 60살이 될 때까지 거의 한 번도 싸운적이 없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나중에 60세가 되었을 때 아내가 내 인생은 내건데 그동안은 남편에게 늘 순종만 하며 살았기 때문에 싸울 일이 없었던거죠. 항상 남편을 중심으로 살았기 때문에!


그런데 노년에 접어들면서 아내는 내 인생을 살고 싶다 해서 성당에서 여러 활동도 많이 하고, 뭐

분주히 움직이니까 자연스럽게 남편에 대해서 신경쓸 수 없게 되고, 그러다보니까 남편은 내 아내가 바뀌었어! 하고는 아내에게 불평을 하게 되고, 또 아내는 고집을 피우게 되고 그래서 그때 많이 싸우게 되서 나중에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우리 부부가 문제가 많으니까 저희를 좀 도와달라고, 그래서 그분들과 면담을 많이 했습니다. 특히 자매님께서 우리 남편이 문제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 남편을 좀 고쳐주십시오 라고 저에게 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세월이 많이 흘러서, 몇 달이 흘러서 저한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 자매님께서.  '신부님~ 예전에는 제가 남편이 너무 문제가 많아서 남편을 고칠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이제 깨닫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문제가 많은게 아니라 제가 문제가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표현을 하신 기억이 납니다.


어쩌면 그 자매님도 또 남편도 서로 그런 과정에서 하느님을 알게 되고 또 서로를 알게 되고, 그러는 과정에서 더 깊이있게 사랑하는 법을 배워나가시는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일생동안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모든 것들이 자기안에서 하나의 어떤 더 큰 사랑으로 나아갈 수 있게끔 도와주시는 하느님의 성령! 그분의 역할이 큰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때가 되었을 때 그 사람이 변화되고, 우리 자녀들도 지금 성당에 안 나간다고 우리 어머니들이 많이 걱정하고 하시는데, 하느님의 때가 되고 또 부모님께서 좋은 사랑의 모범을 보여주실 때 그 자녀들은 또  하느님의 때가 되면 하느님의 자녀로써 더욱 충실히 살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될 겁니다.


그래서 모든 우리의 일상의 삶에서 이 부부의 삶에서 포기하며 살아라 라는거. 또 나중에 결혼을

해서 후회하며 막 싸우면서 서로 부대끼고 살았지만, 결국은 모든 것들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당신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작용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때때로는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느님이 아니 계신 것처럼 느껴지던 때도 있고 또

따뜻한 사랑의 하느님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경우도 있고 또 때때로는 정말 절망적이고 고통스러운 순간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마지막 결과는 당신께서 이끌어주시는 선이라는 것을 우리는 굳게 믿어야 할 것입니다.


토마스 머튼도 인생의 여정에서 보면 여러 많은 경험들을 했습니다. 때로는 넘어지는 경험 또 때로는 정말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의 체험도 하기도 하고, 또 외롭고 고독한 가운데 홀로 있는 하느님,

그래서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한 그런 두려움과 무서움 속에서 지내는 시간들, 또 유혹에 빠지는 시간들 , 여러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끝까지 하느님께 대한 믿음, 또 하느님께 대한 충실성, 또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충실하게 그분께 갈망하고 의탁했다는 것을 기억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이 하느님의 그 더 깊은 사랑에 도달하기 위해서 하느님에 대해서 너무 많이 막 집착하는 것, 이것도 포기하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하느님을 붙잡고 계속 잡고 있으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을 잃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예전에 만났던 그 하느님에 집착하게 되면 하느님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 새로운 하느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불고 싶은 대로 부는 바람과 같다.' 성령을 의미하는 거죠.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오셔서 다시 알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는 그분을

사랑해야만 한다.'


이 부분은 굉장히 많은 우리 신앙심을 성숙시켜 주기 위해서 많은 의미를 전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오셔서 다시 알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시는 그분을

사랑해야만 한다. 하느님의 자유이죠! 하느님은 자유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을 틀에 넣을려고 합니다. 하느님은 이런 분이라고! 이 틀에 맞지 않는 하느님, 그런 하느님은 믿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을 지니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자유로운 분이시고 하느님은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가십니다.


다시 이어서 이렇게 말합니다. " 그분이 가시는 곳이 어디든 그분을 따르기 위해서 우리의 영은

그분의 영처럼 깨끗하고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인간은 섬이 아니다>라는 책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그분의 영이 깨끗하고 맑은 것처럼 우리 역시 그분을 따르기 위해서, 그분의 영을 따르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이 깨끗하고 자유로워져야 된다고

토마스 머튼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자유로울 수 있도록, 하느님이 하느님이실 수 있도록 내버려두는 것, 이것도 필요합니다. 절대적인 신뢰가 있기 때문에 하느님에 대한 자유, 이 부분도 필요한 것 같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이어서 같은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하느님이 하고 싶은 대로 하실 수 있도록 그분의 자유를 존중해 드려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기도가 그분께 명령하고 그분을 자기 뜻에 맞출 수 있게 해 준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신앙의 영역이 아니라 마법의 영역에 살고 있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하느님의 권리에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는 사람들만이 하느님과 헤어지지 않는다."


참 오늘날 우리를 살아가는 우리 신자들에게 또 저를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참 경각심이 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신비의 영역, 하느님의 영역에 살지 못하고 때때로 내가 바라는 대로 하느님의 뜻을 바꾸기를, 마치 오늘 말씀하신 것처럼 마법의 영역에 마술사처럼 하느님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 뜻을, 내 뜻대로 하느님이 변하지 않으면 하느님이 안 계셔~ 라고 쉽게 판단하는 우리를 볼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신비의 영역속에서 하느님께 끝까지 믿음을 둘 때 하느님의 자유는 우리를 선으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 역시 자유로움을 가져야 합니다. 단순히 선과 악을 판단하고 선택하는 의미에서의 자유는 아주 낮은 단계에서의 자유입니다. 그리고 또 무엇 무엇으로부터의 자유, 그러니까

내가 감옥에 있지 않고, 혹은 또 내가 뭐 아내와 함께 있지 않고 ,내가 남편과 함께 있지 않고, 그것을 또 중년이 되신 분들은 자유로 생각하는 분도 계시더라구요, 근데 아무튼 좀 우스개 소리입니다.


무엇 무엇으로부터 억압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의 자유입니다. 진정한 자유로움 안에서의 자유! 그래서 하느님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내가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은총에 참여하는 것이고 하느님의 자유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또한 나의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또한 나의 상처로부터도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과거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혹은 과거의 상처 때문에 지금도 괴로워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과거에 지은 죄나 상처가 나를 옭아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하느님의 자유안에 들어갈 때 하느님은 그 모든 상처와 아픔도 낫게 해주시는 분이시고 또 그 상처와 아픔가운데 나와 함께 아파하시고 또 나와 함께 힘겨워 하셨다는 그 뜨거운 사랑을 느낄 때 우리는 그 상처와 아픔을 하느님께 봉헌할 수 있게 되어서 더 영적으로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우리 모든 자유로움, 또 모든 삶의 과정안에서 하느님께서는 함께 하시고 또 함께 하시는 과정안에서 당신 성령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부어주시고 또 우리를 돌보아 주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특별히 성령에 대해서는 성부와 성령께서 서로 상호 나누는 사랑이 바로

성령이시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토마스 머튼이 쓴 책에서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 성령은 성부와 성자 사이에 평화, 사랑, 합일이라는 깊은 일치의 유대이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서로 사랑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그 유대가 바로, 일치의 유대가 바로 사랑의 유대가 바로 성령이시다.


그러면 우리가 아버지, 어머니, 또 가족들 또 친구들과 서로 사랑의 유대를 나누며 살아갈 때, 그

안에 성령의 작용이 있다는 거겠죠.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 안에서의 새로운 삶은 바로 성령의 선물인 것입니다. 우리는 늘 새로운 삶은 바로 사랑의 삶이죠. 사랑의 삶을 살아갈 때 성령의 선물이 이미 우리에게 와 있음을 우리는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 삶을 모두 인도해주고 계시고 토마스 머튼은 자신이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는 그런 분이라고 믿었고 또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더 깊이있게 알 수 있게 되고, 성령을 통해서 우리는 그분과 하나되고, 성령을 통해서 용서할 수 있는 힘, 사랑할 수 있는 힘, 그리고 예수님을 알 수 있는 힘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죠. 성령을 받아라! 평화가

너희와 함께! 그리고 성령을 받아라! 그 다음에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그 다음에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특별하죠 그죠! 평화를 빌어주시고  성령을 부어주시고 그 다음에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우리는 성령의 은총으로 용서의 은총 또한, 선물 또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지금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면 성령께 은총을 청하고 성령의

힘으로 내가 할 수 없는 이 용서를 할 수 있도록 그분께 간청하시기 바랍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마음을 녹여주시고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용서할 수 있는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나를 먼저 용서해 주시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을 다시금 자비의 마음을 깨닫게 되실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선물을 주시고, 끊임없이 우리가 관상의 은총으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는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끊임없이 성령은 우리를 새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새로운 사람, 새로운 탄생을 할 수 있도록 우리를 이끌어주시는 그런 분이십니다.


그래서 성령은 우리에게 더 깊은 일치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안에 있을 때 우리는 파스카의 신비를 살 수 있게 됩니다. 파스카의 신비가 뭐죠?

건너가는 것,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묻히시고 돌아가셨죠. 근데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묻히시고 그 다음에 부활하시는 그 삶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마치 구약의 파스카에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떠나서 홍해를 건너가기 전에 열 번째 재앙을 내리셨죠 하느님께서. 재앙이 뭐였죠? 네, 그렇죠. 맏배, 이집트에서 태어난 모든 맏배를 다 죽이셨죠. 근데 이 집만은 그냥 지나갔어요. 그 집은 어떤 집이었죠? 네, 양을 잡아서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랐죠. 그래서 대신 맏아들이 혹은 맏배가 죽어야 하는데 대신 어린양이 죽었죠. 그래서 죽지 않고 대신 어린양이 죽었다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양에 비유합니다.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 세례자 요한이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 이렇게 이야기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의 죄 뿐만 아니라 또 우리 인류의 모든 죄, 그 전에 예수님전에 살았던 모든 사람의 죄를 다 짊어지셨고 또 살고 있는 사람들, 앞으로 지을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그 십자가가 무거우셨겠어요.


근데 그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돌아가시고 묻히셨고 그 다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든

이를 다시금 살게  만들어주셨죠. 그래서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그 부활을 통해서 우리가

새로운 신약의 시대, 새로운 구원의 시대, 하느님 나라의 시작, 종말의 시작을 알린다고

말씀드렸었죠.


그래서 이 여정 가운데 성령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을 때부터 해서 돌아가시고 묻히시고 부활하셔서 그 다음에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셨죠. 그래서 이 파스카의 여정이 끝나고 난 다음에 성령의 시대가 우리에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 신부님은 이 성령의 시대, 이 파스카를 인도해 준 이 성령의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고, 이 성령의 시대 성령안에서 우리는 더욱더 충만해진다는 이야기, 성령안에서 새로운 인간이 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성령의 선물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안에서 흘러 넘치며 그리스도인들이 이 죽음과 부활안으로 참여하도록 이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그 예수님의 파스카의 신비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는 분이다 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모든 잘못과 또 과거의 모든 악습으로부터 죽고 다시금 새롭게 태어날 때, 우리는 이 파스카의 신비를 사는 거겠죠. 그렇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라는 겁니다.


그리고 또 " 성령은 단순한 파스카의 신비를 기억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일어나게 한다." 우리가 파스카의 신비를 기억하는 것 뿐만 아니라 파스카의 신비가 실제로

일어나도록 한다 했는데, 이 일어나는 장소가 어디겠습니까? 일어나는 때가 언제일까요? 바로 미사입니다. 그죠. 미사는 단순히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묻히심과 부활하심을, 또 예수님이 옛날에 했던 말들을 기억해서 다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화 하는거죠. 아남네시스(Anamnesis) 라고 합니다.


현재화! 지금 오늘 예수님의 파스카의 신비가 다시금 우리에게 현재가 되는 것, 이것을 의미합니다. 이 현재화되도록 이끌어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입니다.


그래서 사제가 빵과 포도주를 예수님의 몸과 피로 축성하기 전에 성령을 청하는 기도를 바치게

됩니다. 손을 얹고. 그래서 이때 성령을 청하는 기도가 내릴 때 우리는 아, 지금 단순히 옛날 것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피땀을 흘리시고 몸과 피를 내어주신다는 것을 다시금 기억하시면서 지금 여기에서, 이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는 것을 다시금 기억하면서 그분을 정말 사랑의 마음으로, 감사의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또 성령의 일은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며 

육화된 말씀인 그리스도와 각 개인이 하나되게 한다. 

리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아들 딸들이 된다고 그랬죠.

아무나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않습니다. 그죠? 


근데 성령께서 세례성사 안에서 활동하시면서 우리를 하느님의 아들 딸이 되게 합니다. 토마스 머튼 신부님께서도 1938년 11월에 세례를 받으면서 진정으로 다시금 태어나는 이 세례성사에 대해서

주님께 감사드리는 감사의 기도를 드리면서 정말 하느님의 아들 딸로 태어남에 대해서 큰 축복으로 여겼습니다.


우리도 오늘 이 성령에 대한 토마스 머튼의 가르침을 배우면서 나누면서 여러분들이 세례 받았을 때를 다시금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세례 받을 때 성령의 은총이 우리에게 충만히 내려졌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하여지고 우리는 새로운 인간, 세례가 완성이 아니죠. 세례는 구원의

시작입니다. 흔히들 우리는 세례받으면 구원받았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건 객관적인 구원을

의미합니다.


근데 아직 나의 구원이 완성된 게 아니죠. 

그래서 '세례 = 구원'이 아니라 세례는 구원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느님의 그 사랑으로 온전히 일치되어 나갈 수 있도록 

나를 비우고 버리면서 점점 하느님의 사랑을 닮아가는거죠.


그런 닮아가는 신앙의 여정에 

세례성사, 견진성사 , 성체성사, 고해성사 등 이런 여러 가지 교회의성사들은 

우리의 그 신앙의 여정에서 정말 더 잘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하늘이 주신 도구인거죠. 

그래서 우리가 특별히 다른 여러 교회나 다른 종교와 달리 우리 가톨릭 안에는 성사가 있기 때문에 더욱더 값진, 예수님이 직접 주신 그 성사가 있기 때문에 더 값진 또 더 깊은 종교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세례성사를 다시금 기억하면서 우리 역시 아직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아들 딸로 불리움을 받았다는 것을 전할 수 있는, 또 단순한 어떤 개종이 아니라 그 하느님의 사랑받은 아들 딸로써 내가 이웃들에게 그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복음화, 우리 지역의 복음화, 우리 시대의 복음화가 이루어지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토마스 머튼의 종교간 대화를 나눌 때, 좀 더 더 깊이있게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삼위일체의 하느님에 대해서 정리하면서 다시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토마스 머튼은 성부, 성자, 성령의 유대임이, 

성령의 사랑으로 이끌려나가면서 더 깊은 사랑의 일치를 추구했었고

 또 성부 성자께서 나눈 이 사랑속으로 들어가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신비의 하느님, 하느님의 신비속으로 들어가 삼위일체가 나눈 그 사랑속으로 들어가서 진정한 나를, 내 안에 있는 신성을 다시금 신성이 깨어나게 만들고, 

그래서 내가 예수님으로 변화되어 가고, 내가 하느님화되어 가는 그런 과정이 

바로 영적인 여정이요, 그런 과정이 바로 신앙의 여정이라는 것을 또 영적인 성장이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진정으로 하느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다시금 부활로 이끌어지고, 새 아담으로 되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영적인 죽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계속해서 끊임없이 강조합니다.


이런 영적인 죽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침묵과 고독, 또한 나를 내려놓는 것, 또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초연함, 

또 무엇보다도 깊이 하느님 현존속에 머무는 것, 

또한 그 다음 단계에서는 이런 외적인 것 뿐만 아니라 그냥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듯한 일상을 묵묵히 걸어가는 것, 

이것도 역시 하느님 사랑으로 들어가기 위한 하나의 도구이고 과정이라는 것을 

끊임없이 강조를 했습니다.


토마스 머튼의 삶의 여정에서도 보면 여러 가지 외적으로 고독을 갈망하고 또 관상을 찾고, 처음에는 갈등을 많이 했죠. 내가 정말 더 깊이 하느님과 만나기 위해서는 혼자 있어야 되겠다. 그래서 장상한테 찾아가서 고독한 삶을 살고 싶고, 수도자로 살기 위해서 은둔처를 살게 해달라고 허락을 받기도 하고 또 가말돌리회나 카르투시오회로 가서 수도회 이전하고 싶기도 하고, 그런 이야기도 장상한테 애원을 하기도 하고 부탁을 하기도 했습니다. 청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깨닫게 되죠. 

그런 외적이고 지리적인 그런 공간이 아니라, 

정말 완벽한 고독한 장소는 그런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 내면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관상 혹은 일상의 그런 특별한 그런 삶이 아니라 

일상보다 다른 또 초월적인 뭐 여러 가지 이런 것들이 아니라 

내 일상 안에서, 내 삶 안에서 하느님을 깊이 만나고 

또 때로는 이런 거창한 그런 신비적인 차원을 너무 지나치게 추구하다 보면 

그 안에서 오히려 딜레마에 빠져서 더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일상의 삶 매일 매일 내가 밥 먹고 기도하고 미사하고 또 성경을 읽고 가족들을 만나고, 

또 어려운 이웃을 만나고 봉사하고 

또 조용히 홀로 가만히 주님 곁에 머무는 그런 소소한 일상안에서, 

또 열심히 하루하루 일을 하는 그런 일상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체험하고 

또 하느님의 눈으로 다가오는 고통들을 새롭게 바라보고 할 때,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신비속에서 하느님과 함께 살아감을 체험하게 될 거라는 것도 강조합니다. 

그래서 일상의 중요성을 토마스 머튼은 거듭 강조하면서 살았습니다.


토마스 머튼이 켈커타에서 바치는 이 기도문은 토마스 머튼이 얼마나 하느님을 더 깊이 사랑할려고 했고 또 더 깊이 온전히 일치할려고 했는지를 잘 드러내 주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기도문을 함께 바치도록 하겠습니다.


"오, 하느님, 온 마음으로 충만하게 완전하게 다른 사람을 받아들임으로써 

저희는 당신을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당신을 흠숭합니다.

우리의 온 존재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존재는 당신의 존재안에 있고

우리의 영은 당신의 영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당신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소서.

다양한 길을 가고 있는 우리를 사랑으로 묶어주소서.

세상에 현존하고 있는 당신의 영안에서 하나되게 하소서.

사랑의 궁극적인 실재의 증인인 당신의 영안에서 하나되게 하소서."


토마스 머튼이 한 이 기도문 안에는 정말 그동안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온, 이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을 찾아오며 살아온,  모든 하느님을 향한 그 사랑의 마음,  또 사랑을 전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 응축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기도문은 1968년 토마스 머튼이 마지막 두 달 동안에 인도와 방콕 또 플룬나누와 체험이 있었던 스리랑카도 방문을 했었죠. 그 두 달의 여정가운데 켈커타, 우리 마더 데레사 성녀께서 활동하셨던 켈커타에서 그 종교간 대화를 위한 그런 회합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한 연설 가운데에 기도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바친 기도문에서는 정말 이 성령안에서, 그리고 여기 보면 '복수'를 씁니다. '저희는' '우리는'. 토마스 머튼은 더이상 이제 나의 기도가 아니라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하나되어서 우리라는 표현을 쓰면서 우리 모두가 온 존재로 온 마음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존재는 당신의 존재안에 있고  또 우리의 영은 당신의 영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내가 하느님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내가 나의 영이 하느님 사랑안에, 예수님 사랑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를 넘어서 이제 우리가 모든 우리의 인류가 하느님의 존재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하느님 사랑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진다는 겁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그 사랑안에  하느님안에 더 깊이 머물고 그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을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내가 의지하지 않더라도 그 사랑을 그 사람들에게 나눌 수 있게 되고 사랑으로 충만해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다양한 길을 가고 있는 우리들, 뭐 우리 그리스도교 뿐만 아니라 여러 종교들이 다양하게 어떤 하느님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고 또 진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고 또 진정한 절대적인 어떤 그런

사랑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랑으로 나아가고 있는, 진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가 당신안에서 하나로 묶어달라는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안에 현존하고 있는 그 영안에서 성령안에서 하나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은 불고 싶은대로 불고, 성령은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의 능력을 초월해서 또 우리가 생각하는 그 너머에 더 큰 선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다양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그런 성령의 작용을 거대한 불상앞에서도 보기도 하고, 또 성령의 작용을 다른 종교안에서 보기도 하고 또 성령의 작용을 정말 고통받고 핍박받는 사람들안에서 무엇보다도 성령의 작용을 고요히 하느님안에 머물면서 자기 자신안에서 먼저 발견한 분이셨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는 분리된 분이 아니라 하나인 분으로 우리안에 성령을 통해서, 그 다음 성부의 그런 큰 축복속에서, 성자의 사랑안에서 우리를 끊임없이 당신의 충만한 신비속으로 초대해주고

계십니다.


오늘도 내가 만나는 그 사람들안에 성령께서는 활동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내가 나를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 또 내가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 또 나를 잘 받아들이지 못한 그 사람들 안에도 그런 가능성이 존재해 있는 거겠죠. 그래서 우리의 삶 안에서 나누는 그런 사랑의 충만함 안에서 우리는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 내가 비록 부족하지만 나를 내어주는 그런 사랑을 할 때,  더 충만한 삼위일체의 사랑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다시금 기억하면서 토마스 머튼 신부님께서는 우리에게 오늘도 그 사랑으로 우리가 나아가고, 또 그 사랑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나를 비우고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라고 우리를 초대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 모두가 그 사랑의 초대에 '예' 라고 응답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합니다. 다음 시간에영적 치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함께 뵙게 되겠습니다. 그 전에 우리 교수님과 함께 대담을 해야죠.  교수님과 함께 다음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