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결과에 초연/ 신비의 죽음/22회 머튼의 하느님 이해와 영적 치유 2_현대영성가 토마스 머튼과의 만남_박재찬 신부 해설

은가루리나 2020. 3. 31. 11:49


찬미예수님

성 베네딕도 왜관 수도원의 박재찬 안셀모 신부입니다지난 한 주간 동안 하느님의 자유로움 안에서 그리고 초연한 마음으로 편안하게 잘 지내셨는지요사실 토마스 머튼도 그렇게 말씀하셨고 저 역시 이 초연함의 영성은 굉장히 도달하기 힘든 영성이면서 동시에 우리의 믿음의 표현인 것 같습니다.

 

하느님께 깊은 신뢰를 두고 그분께서 우리를 선으로 인도해 주신다는 굳은 믿음이 있다면 다른 모든 지나가는 것들에 얽매이지 않고또 얽매어 있던 것들을 주님의 사랑으로 풀어내고 또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그 모든 것들을 봉헌할 때우리는 외적인 것들로부터 또 내적인 거심지어 또 영적인 이런 것들로부터 좀 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 그런 은총을 받을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굉장히 또 어려운 레벨에서영적인 레벨에서 영적인 쾌락이라고 머튼은 표현했는데 기쁨평화하느님 현존에 대한 그런 체험그것마저도 버리라고 표현을 했습니다사실 그것들이 바로 더 큰 하느님을 만나는 데 걸림돌이고 방해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 우리가 본당에혹은 또 교회 안에도 여러 부류의 교우들이 있습니다영적으로 뛰어난 사람도 있고또 영적으로 더 깊이 들어간 사람아직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혹시 이 방송을 보시는 분들 가운데에는 아직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잘 모르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제가 우연히 어떤 책을 보다 보니깐 거기에 여러 교우들의 유형이 이렇게 쭉 나열되어 있는 게 있었는데 예전에 이것들을 우리 교우들한테 나누었을 때 굉장히 재미있어 하셨습니다그래서 교우들의 유형별로 나누어진 이 교우들에 대해서 한 번 나누어 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교우들 중에는 달구지라는 교우가 있답니다이분들은 혼자 못가요그래서 이분들은 누가 끌어줘야지 만이 전진할 수 있는 교우가 달구지 교우라고 합니다그리고 냄비 같은 교우도 있다고 합니다냄비는 쉽게 끓고 쉽게 식죠그래서 쉽게 끓고 쉽게 식는 교우를 냄비 교우라고 합니다.

 

방패연 교우방패연 교우는 방패연은 실이 있어야지만 날아갈 수 있는 것처럼 실을 붙들고 있지 않으면 소리 없이 그냥 사라져버리는 교우를 말한다고 합니다풍선 교우불만으로 잔뜩 부풀어 언제 터질지 알 수 없는 교우종이 교우비만 오면 축 처져서 안 나오는 교우벙어리 교우기도만 시키면 벙어리가 되는 교우우리 가톨릭 신자 가운데는 이런 교우들이 많습니다.

 

카더라 교우남의 말을 이리저리 옮기는 교우도 많습니다나팔꽃 교우는 주일 미사만 나오는 교우를 나팔꽃 교우라고 한다고 합니다비나이다 교우자식과 가족만을 생각하며 성당에 나와 기도하는 교우를 비나이다 교우라고 합니다문어발 교우뭐 성당 단체활동에 안 낀데 없이 이 모임에도 저 모임에도 항상 볼 수 있지만 정작 자신은 외로운 교우라고 합니다.

 

손가락만 보는 교우사제나 수도자 혹은 교우들에게 실망하여 달이신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그런 교우를 손가락 교우라고 합니다그다음에 시험 감독관 교우강론 때 강론 시간 때 신부님 강론 점수 매기는 교우그다음에 줄행랑 교우파견 성가 안 부르고 도망가는 교우좀 더 심하면 영성체 후에 줄행랑치는 분들도 계시죠.

 

자동차 교우미사 참례하거나 레지오 하는 아내를 자동차 안에서 기다리는 교우라고 합니다묵상 교우평상시에 안 하다가 강론 때만 되면 졸기 시작하고 고개 숙이는 교우그다음에 명예욕 교우단체에 감투 받기 위해서 얼굴을 알리는 그런 교우도 있다고 합니다공주병 교우자신의 기도나 영성 외에 다른 것은 일체 인정하지 않는 교우.

 

그다음에 보상 교우자신의 활동에 대한 보상이나 인정을 기대하는 교우그다음에 따로국밥 교우믿음 따로 신앙생활 따로 사목 위원 따로 분리된 생활을 하는 교우마지막으로 국회의원 교우도 있다고 합니다이 교우는 한 가정에 대표로 한 사람만 나오는 교우가 바로 그런 교우라고 합니다물론 모두가 함께 하면 좋겠지만 어쩔 수 없는 그런 사정도 있을 수 있겠죠한 명이라도 나와서 가족을 위해서 기도하고또 가족을 위해서 함께 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여러 유형들의 신자들을 보았는데이런 유형들의 신자들도 모두가 다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그 과정 중에 여러 가지 쓰러지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또 새롭게 시작하기도 하는데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런 영적인 생활에서 교우들이 더 깊이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기도를 통해서 나 자신을 봉헌하고기도를 통해서 그분을 만나고그래서 비워진 마음으로 온전히 그분과 하나되는 그런 일치의 시간을 많이 갖는 것이 좋습니다그래서 우리도 오늘 초연함에 대해서 공부를 시작하면서 기도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우리는 허무한 것들 속에서 자신을 소모하다가 죽어가는데,

시련은 이 허무한 것들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습니다.

그러므로 시련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우리는 시련을 사랑합니다.

죽음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생명을 사랑하기 때문에 시련을 사랑합니다.

 

그렇다면 저로 하여금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허망한 것들,

작가로서 독자들에게 널리 읽히고 칭송받고 싶은 욕망,

학생들에게 호평받는 성공적인 교사가 되고 싶은 욕망,

또는 어떤 아름다운 곳에서 편히 살고 싶은 욕망 등으로부터

저의 모든 사랑을 거둬들이게 하소서.

그리고 모든 것을 오직 당신 안에만 두게 하소서아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이 기도문에 보면은 토마스 머튼도 사실 작가로서 사람들에게 많은 호평을 받고 싶어하는 그런 마음들또 선생님으로서 사람들에게 학생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그런 나름대로의 어떤 집착이 있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그런 기도문인 것 같습니다.

 

사실 토마스 머튼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 초연함의 영성에 도달한다는 것은 결코 쉽진 않지만이 영성에 도달하려고 여러 가지 노력들을 많이 했습니다그래서 오늘 이 시간에는 이 초연함의 영성(Detachement)에 도달하기 위해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토마스 머튼이 알려 준 두 가지 이야기를 좀 더 나눠드리고 싶습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외적인 레벨내적인 레벨심지어 영적인 레벨까지 이야기를 했었고또 가장 버리기 힘든 것은 바로 뭐라고 그랬죠자아라고 그랬죠사실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굉장한 은총이 필요하고 굉장한 수행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랜 시간 수행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을 온전히 비워내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체험을 하시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이 자아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이것을 굉장히 강조를 많이 했었는데 그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과 평화 가운데 머물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초연할 때 뿐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부터 초연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그리고 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운명은 위대하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 위대해지는데 관심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는 그것을 획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스스로 하찮아지는 것은 매우 위대한 일이다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하찮아지는 것은 매우 위대한 일이다자기 자신을 비워내는 거죠그렇게 해서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위대함바로 하느님과의 일치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토마스 머튼은 이야기 했습니다.

 

그래서 초연함에 이르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는 또 가장 근본적으로자아로부터의 집착에 좀 더 초점을 맞추시면 도움이 되실 겁니다




그리고 토마스 머튼은 그다음에 또 이야기한 것 중에 하나는 

초연함에 도달하기 위해서 결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된다이런 표현을 합니다.

 

얼마 전에 저희 명상의 집에 피정 오신여러분들 요즘 많이 개인 피정 오고 계신데 그 가운데 수녀님 한 분께서 저한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신부님제가 여러 가지 수도 생활을 해 나가는 데 있어서 버려야 될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답을 해주었습니다. ‘잘 살아야 된다는 것그것을 버리십시오그러면 좀 더 자유로워지실 겁니다.’

 

그 수녀님은 처음에는 좀 이해를 못 하시는 것 같았는데 또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서로 면담하는 가운데 그 의미를 깨달으시고또 스스로도 잘 살아야 된다는 것들로부터 좀 더 자유로워졌다는 그런 표현을 했습니다왜 잘 살아야 된다는 것들로부터도 자유로워져야 될까요그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고 싶습니다.

 

사실 수도자들이나 열심하다는 사람들열심히 신앙생활 할려는 사람들한테는 그런 게 있습니다이렇게 교회에서 원하는 것그리고 복음 성서가 알려주는 것그리고 여러 가지 영적인 서적들을 많이 읽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책이나 서적이 자기 체험이 아닌데 마치 자기 것인양 여기게 됩니다그래서 그런 자기가 도달하지 못하는 이상임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도달하지 못하는 이상을 자기 것이기 때문에 마치 다른 사람에게도 그것이 자기가 체험한 것인양 이렇게 이야기하는 그런 오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러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보면서도 마치 그런 것처럼 이렇게 이야기할 때도 있습니다그리고 자기 자신이 굉장히 열심히 살아야 되고다른 사람들에게 실망 시켜서는 안되고또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쳐야 된다는 것들 때문에, 그 잘 살아야 된다는 것에 대한 집착 때문에, 오히려 진정으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되고 가면을 쓰고 사는 경우도 보게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잘 살든못 살든죄를 짓든죄를 짓지 않든 우리에게 똑같이 사랑을 베풀어주십니다그런데 우리가 그 받은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 그분께서 원하시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고 또 그분께서 바라시는 복음을 선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행업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를 구원한다고 

바오로 사도께서 말씀하셨죠.


그래서 우리가 여러 가지 좋은 일들, 착한 일들, 선한 일들을 하면서 

거기에 따라나오는 결과에 집착할 때 

우리는 초연함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 일상을 살아가면서 과정도 중요하고 물론 결과도 중요합니다. 좋은 결과를 얻으면 좋죠. 하지만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을 때에도 그 너머에 있는 하느님의 섭리, 하느님의 때를 기다릴 수 있을 때 우리는 더 초연함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초연함이란 어떤 바라는 결과가 나오지 않아 실망을 느낄 때 이를 감추는 것이 아니다. 

토마스 머튼이 말합니다. 

"자기 존재의 고요 속에 침잠하기 위해서 

우리는 활동의 결과로부터 초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통제할 수 없는 결과들에서 적당히 물러서야 하고, 

선의와 내적 생활의 고요한 표현 활동에 만족해야 한다.

자기 삶을 바라봄없이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즉각적인 보답을 기대함 없이 일하는 것에서 만족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사랑하고 특별한 인정을 받음없이 존재하는 데 만족해야 한다."


우리가 하다보면 때로는 인정받지 못할 때도 있고 또 때로는 사람들에게 무시당할 때도 있고, 또 때때로는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하느님의 때, 하느님의 섭리를 기다리면서 그냥 그것을 했음에 만족해야 하는 그런 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초연함의 첫 발, 첫 걸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우리는 좋은 결과를 내면 좋죠.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결과하고 또 하느님이 생각하는 좋은 결과가 다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분이 자기가 직장에 들어가서, 그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서 굉장히 많은 노력을 했고 근데 결국은 그 직장에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근데 나중에 그 사람은 다른 직장을 얻었고 거기에서 좀 더 더, 비록 그 직장보다는 다른 형태의 직장이었지만 자기 자신을 더 잘 펼칠 수 있었습니다. 근데 나중에 그 직장이 여러 가지 정치적인 문제 또 여러 문제에 연루되어 가지고 그 직장에 있던 사람이 다 해고되는 그런 결과를 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원했던 그 직장에 들어갔으면 나중에 해고됐었겠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때와 방법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근데 우리가 흔히들 초연한 그러면 마치 세상 일에는 관심이 없고 마치 도사처럼 그냥 미소나 지으면서 '그럴수도 있죠.' 하고는 다 '그또한 지나가리라' 하면서 도사처럼 그렇게 있는게 초연함이 아닙니다.


초연함은 세상의 불의에 대해서 방조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위해 몸과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라고 토마스 머튼은 이야기 합니다. 

진리를 위해서 몸과 마음을 집중하는 것, 이것이 초연함입니다. 

진리! 곧 진리는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고 말씀하셨죠. 

그래서 진리이신 하느님께 집중 할수록 결과에 대한 관심이 줄어듭니다. 

진리에 대한 하느님, 하느님께서 인도해주실 거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결과가 어떠했든지간에 거기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게 되는 것이죠.


초연함을 유지하면 우리는 낙담하는 가운데에서도 신실하게 행동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제가 삶을 살아가면서 아주 큰 모토중에 하나가 '최선을 다하라. 그리고 나머지는 하느님께 맡겨드려라' 입니다. 최선을 다하자. 그리고 나머지는 하느님께 맡겨드려라!  하느님께서 나머지는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갈 때, 좀 더 초연함에 가까워지고 결과에 연연하지 않게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토마스 머튼이 짐 포레스트 라는 분이 계시는데 이분은 토마스 머튼이 살던 수도원의 수련장으로 언제까지 살았는지 정확하게는 잘 모르겠는데 그 수도원에 조금 살다가 토마스 머튼에게 직접 공부도 하고 교육도 받고 계속해서 연락도 했지만, 나중에 다른 성소를 찾아서 수도원을 떠난 분이십니다. 근데 그 이후에도 토마스 머튼에 대해서 연구를 많이 하고, 토마스 머튼 그 학회에서도 굉장히 큰 역할을 하고 계시는 분이신데 짐 포레스트(Jim Forest)라는 분이십니다. 이 분이 쓴 전기도 있죠. 한국말로도 번역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삶' 해서 이렇게 번역되었습니다. 분도출판사에서 나와 있죠. 그래서 그 책에도 보면 토마스 머튼이 가졌던 초연함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짐 포레스트라는 분이, "머튼은 초연함이 평화를 위한 연대보다 강하게 해줄 거라고 확신했다."  초연함이 평화를 위한 연대보다 더 강할거다. 이렇게 확신했다고 합니다. 

"초연함은 결과를 얻는 데 무심한 채 혼란스러워 하는게 아니라 

이루어지기 바랐던 것과 전적으로 다른 결과가 나올지라도 

선한 행동은 없어지거나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결과를 얻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혼란스러워 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이루어지기 바랐던 것과 전적으로 다른 결과가 나올지라도 선한 행동은 없어지거나 소멸하지 않는 거, 우리가 생각했던 거와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더 큰 선으로 우리를 이끌어 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초연할 때 우리는 어떤 평화를 위한 연대보다 더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짐 포레스트는 토마스 머튼을 통해서 배웠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근데 정말 지금 이야기 드릴거는 좀 더 더 깊이 들어가는 겁니다. 

토마스 머튼은 내 영혼이 지옥에 있을지라도 절망하지 말라는 

그 러시아 수도자의 계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 초연함을 더 깊이 설명을 합니다. 

1938년에 돌아가신 러시아의 한 수도자가 이런 계시를 받았다고 합니다. 

"너의 영혼이 지옥에 있을지라도 절망하지 마라."


아니, 우리가 천국에 가야 되는데, 지옥에 있을지라도 절망하지 말라.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 말씀은 처음에는 너무도 가혹하게 들리고 아무리 좋게 들으려고 해도 기이하게 다가옵니다." 그쵸! 내 영혼이 지옥에 있더라도 절망하지 말라. 아니 오히려 원망할텐데 그죠!


"그러나 저에게는 이 말씀이 기이한 방식으로 위로를 줍니다. 

이는 겉모습을 유지하려 열중하거나 우리의 그릇된 확신을 봉합하려 애쓰느라고 

가짜 영성을 진짜라 우기며 굴복하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진정으로 두려움과 마주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의기양양하게 전진하고 이것이 잘되어간다. 

과연 잘 되어 간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또 잘 되고 있을까요? 라고 여깁니다."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움, 그러니까 지옥에 있는 두려움, 

그것마저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거라면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초연함이 있을 때, 

우리가 가짜 영성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느님께 더 깊이 나아갈 수 있고, 

하느님의 그 자유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옥에 있는 두려움 마저도 하느님께 맡겨드릴 수 있는 용기, 이 용기를 토마스 머튼은 이 러시아 수도자가 받은 계시를 통해서 깨달았다고 표현을 합니다.


정말 우리가 주님의 뜻에 온전히 순명하고 

또 주님의 뜻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최악의 결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모든 목표가 바로 천국가기 위한 거잖아요. 

근데 최악의 결과는 지옥인데 그 지옥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하느님께 신뢰를 두라. 

이 말은 온전히 두라는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실제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지옥에 보내시거나 혹은 실제로 하느님께서 우리가 천국, 지옥 하면서 나누지만 실제로 우리가 선한 삶을 살았을 때, 착한 사람들에게 상을 주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이건 역설적인 표현이시죠. 

지옥이라는 그런 결과를 냈을지라도 우리는 하느님을 신뢰하라. 

더 하느님을 신뢰하라는 그런 표현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런 깊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도 물론 살짝 듭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정말 결과에 초연해야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건강한 초연함은 하느님께서 자유로우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자유롭게 모든 것을 하셨을 때 모든 것이 선으로 이끌어지고, 우리를 당신 나라에 천국에 살게 해 주신다는 그런 믿음을 갖게 되는 것처럼 우리도 그런 마음으로, 

좀 더 비워진 마음으로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정말 우리가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할 수 있는 그런 영성이 바로 초연함의 영성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근데 이 초연함에 도달하기 위해서 토마스 머튼은 신비적인 죽음이 필요하다. 

이런 표현을 씁니다. 


그래서 결과에 연연하지 말라, 


두 번째는 바로 신비적인 죽음이 필요하다.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합리적인 중용의 덕, 우리는 보통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모든 것이 이제 합리적으로 이것 아니면 저거일때는 가운데 중용의 덕을 통해서 적절하게 자제하고 또 자기 자신을 잘 다스려서 하느님과 일치해 나아가야 된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근데 그 다음 단계는, 토마스 머튼이 이야기하는 단계는 완전한 영적인 순수성에 도달하기를 이야기합니다. 제가 관상 이야기 하면서 그 새 아담 이야기를 했었죠. 그래서 아담이 가졌던, 새 아담이 누구죠? 그쵸, 예수 그리스도이시죠. 예수님!


예수님의 그 아담이 가졌던 순수한 최초의 순수성, 

그 순수성은 왜그러냐 하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입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어떤 거짓 된 물건도 없었고, 순수한 그대로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그 새 아담이 되셔서 인간성을 회복하셨잖아요.


근데 이 인간성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냥 인간 세상에서의 합리적인 중용의 덕에서, 본래의 인간의 모습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또 초월하기 위해서는 이 가운데 토마스 머튼은 심연을 뛰어 넘는, 

심연을 가로지르는 영적인 죽이 필요하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모든 것을 맡기고 그 심연속으로 자기 자신을 던져 넣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런 표현도 씁니다. 

그래서 이 영적인 죽음, 

신비적인 죽음 안에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대표적인 예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합리성을 넘어서 죽음을 통해서 부활로 건너가신 분이시죠. 

그래서 온전히 피조물로부터 분리되어서 창조의 본래의 모습으로 가셨고, 

어두운 밤을 거쳐서 새로운 빛을 발견하셨고 부활의 빛이 되셨고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죽기까지 자기 자신을 낮추셔서 

케노시스의 신비를 우리에게 일러 주셨죠.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그 십자가의 신비, 케노시스의 신비, 십자가의 죽음의 신비 

그 신비속에 자기 자신을 던져 놓을 때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아주 순수한 본래의 영, 그 본래의 영으로 되돌아 갈 수 있는거죠. 

이것이 바로 초연함의 길이라고 토마스 머튼이 우리에게 가르쳐 줬습니다.


그런데 이런 진정한, 

우리가 죽음의 어떤 영적인 죽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건너가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함으로써 

진정 새롭게 우리가 순수한 영적인 존재로 다시금 태어난 것, 이게 영적인 태어남이죠. 


이 영적인 태어남과 더불어서 

우리가 우리 생애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태어나서 살아가면서 이 여정 가운데 

마지막 초연함의 단계가 있습니다. 

이것이 뭘까요?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 앞에서 초연해져야 됩니다. 

그리고 이 앞에서 초연할 때는 살아온 삶을 다 보여주는 겁니다.


이 앞에서 초연할 수 없는 사람은 살아 온 삶이 초연하지 못했고 살아 온 삶이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럴겁니다. 살아 온 삶이 하느님 앞에 두려웠기 때문에 초연하지 못할 겁니다. 이것이 뭘까요? 이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우리 삶에서의 마지막 초연함은 바로 죽음 앞에서의 초연함입니다. 

마지막 자기 포기라고 볼 수 있겠죠.


제가 함께 사는 우리 명상의 집, 분도 명상의 집에 세 명의 사제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할아버지 신부님이 계십니다. 그 신부님은 오랜 암투병을 하셨고 그러다보니 굉장히 육신의 고통이 뭔지도 많이 아시고, 또 그러면서 어느 날 강론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막 너무너무 아파서 고통스러울 때는 하느님을 원망할 때도 있지만 지금 당장 죽어도 이제는 여한이 없다. 이런 마음으로 잠자리에 든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일 내가 눈을 뜨지 못할지 모르지만 지금 당장 내가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런 마음으로 하느님께 기도드리며 잠자리에 든다고 그러셨습니다. 죽음 앞에 초연한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정말 수도생활 오래하신 분들은 다르구나 하는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얼마전에 어떤 할머니께서 저에게 전화가 왔는데 신부님, 방송 잘 보고 있습니다. 근데 신부님께 부탁드리고 싶은게 있습니다. 제가 지금 88세인데 이제는 정말 하느님 앞에 초연하게 하느님 앞에 선종할 수 있는 그런 은혜를 저에게, 다른 사람한테 피해주지 않고 그냥 조용히 어느 순간 하느님께서 불러주실 때 언제든지 예 하고 갈 수 있는 은총을 주십사고 저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라고 부탁을 하는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분도 죽음 앞에 좀 더 초연해지기를 갈망하는 모습이겠죠. 이 죽음 앞에 초연한 모습은 정말 사랑의 마지막 자유로운, 완벽한 행동이라고 토마스 머튼은 표현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만드신 하느님의 손에 자신의 온 존재를 맡겨드리는 것이 바로 죽음 앞에 초연함이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래서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새로운 시작이죠. 그런데 우리가 죽음 앞에 초연하지 못할 때 새로운 시작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삶의 목표가 아니라, 죽음의 목표는 완벽한 삶을 시작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초연함을 간직하기 위해서는 아까 제가 사랑의 완벽한 자유로운 행동이다. 라고 말씀드렸던 것처럼 사랑이신 예수님을 사는 동안 자주 만나고, 자주 체험하고 또 그분의 사랑을 자주 나눌 때, 우리는 그 하느님을 이미 자주 만났기 때문에 내 생애의 마지막 죽음 앞에도 초연하게 사랑이신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던져넣을 수 있는거겠죠.


그래서 하느님과 함께 완전한 사랑속에서 그리고 하느님과 하나되는 그런 삶을 시작하는 것이 바로 죽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은 지금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사랑의 삶을 살 때, 죽음은 그 사랑을 완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더 깊이 나누고 또 사랑을 더 깊이 해나갈 때 우리는 보다 더 나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더 깊은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처럼 

기를 내어주는 사랑, 마음을 비우는 사랑, 조건없는 사랑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을 나눌 때,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눌 때, 우리는 더 초연한 마음을 간직할 수 있게 되고, 자기를 내어주는 자기를 비우는 사랑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진정한 관상은 

모든 만족과 모든 체험을 초월해서 순수하고 꾸밈없는 믿음의 암흑 속에서 쉬는 

사랑의 작업입니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사랑의 작업! 사랑의 작업을 충실히 할 때, 

우리는 더 깊은 초연함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여러분들을 위해서 쓴 시를 하나 낭독해드리면서 이 나눔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제목은 '마음을 비워내니' 입니다.


마음을 비워내니 근심이 사라지고

고요히 기도하니 평화가 찾아오네

용서를 베푸오니 은총이 가득하고

날마나 사랑하니 내 삶이 천국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