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32회 머튼의 성령에 대한 이해 2_현대영성가 토마스 머튼과의 만남_박재찬 신부 해설

은가루리나 2020. 4. 10. 10:50



+ 찬미예수님

성 베네딕도 왜관수도원의 박재찬 안셀모 수사 신부입니다.

지난 한 주동안 주님안에서 다들 평안하셨는지요?

지난 시간까지 저희는 토마스 머튼의 예수님에 대한 그런 생각들, 또 가르침들,

그리고 하느님 성부에 대한 그런 가르침에 대해서 함께 나눔을 가졌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삼위일체 제3위이신 성령에 대해서 함께 다루고 싶습니다.

먼저 시작기도 함께 바치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당신은 제 영혼을 아십니다.

제 영혼에서 일어나야만 하는 모든 일을 다 아십니다.

그 일을 당신 나름의 방식대로 하소서.


오, 하느님.

저를 당신께로 이끄소서.

저를 오직 당신의 순수한 사랑으로 채우소서.

제가 당신 사랑의 길에서 결코 빗나가지 않게 하소서.


저에게 그 길을 명확히 보여주시고

저로 하여금 결코 그 길에서 떠나지 않게 해 주소서.

그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저의 모든 것을 당신의 손에 맡깁니다.


당신은 실수 없이 위험하지 않게 저를 이끌어 주실 것이고,

저는 내내 당신을 사랑할 것입니다.

저는 당신에게 속해 있을 것입니다.


저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당신의 손 안에 남아있을 것이며

결코 당신을 떠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제가 성령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고 하면서 방금 토마스 머튼의 사랑에 관계되는 기도를

토마스 머튼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고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는 그런 사랑의 고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기도로 바쳤습니다.


왜 그러했을까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제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마트에 가서 시장을 보러 갔습니다.

마침 그곳에 예쁜 강아지들이 나열되어 있는 그 진열장 앞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동물 코너였죠, 동물 병원이었어요.


아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 여보, 저 강아지 너무 예쁘다 그지? 우리 강아지 한 마리 살까?"

그랬더니 남편이 당황해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내가 좀 더 개처럼 살테니까 그냥 사지 말자." 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집안 형편을 먼저 생각하는 남편의 그 마음에 무안한 생각이 들어서였든지 아내가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여보, 당신은 나한테 꼭 복권과 같아."

남편은 다시 기분이 좋아져서 "나를 만나는 게 그렇게 큰 대박이었어?"

그랬더니 아내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 맞아도 너무 안 맞아."


네, 부부가 서로 함께 살아가면서, 서로 맞춰가고 깎여나가고 또 서로 알아 나가고,

서로 양보하고 때때로는 서로 싸우기도 하면서 사랑을 영글어가고 또 사랑을 배워가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결혼은 사랑의 완성이 아니라 사랑의 시작인데 많은 분들이 또 완성이라고 생각해서

서로에게 대해서 실망하거나 또 힘겨워 하는 그런 경우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심지어 서로 갈라지기도 하지요.


근데 항상 명심해야 될 것은 사랑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되어가는 그런 과정입니다.

또 완성되어 가는 과정이구요.

그 과정에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배우게 되는데, 특별히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써  하느님의

사랑, 하늘 사랑을 배워나가야 하는데 성령은 바로 이 하느님의 사랑, 성부와 성자의 사랑의

유대라고 토마스 머튼이 말을 합니다.


우리가 영적 생활을 할 때 ,제가 지난 번에 한 번 말씀을 드렸었는데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해 나가기 위해서 제일 먼저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 안에서 많이 말해 왔던 것 중에 하나가,

많은 영성가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첫 번째 단계에서는 정화입니다.

'purification'이라고 그러죠.


정화! 내 마음을 치워내고 또 내 삶을 정리하고 내 안에 여러 가지 욕심들, 욕망들, 또 집착들을

치워내고 그렇게 해서 내 삶을 정화하는 것, 이게 영적인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아주 기본적인

첫 걸음이죠.


그리고 이런 정화의 단계가 지나고 나면 하느님의 빛, 조명이라고 그러죠. 조명!

이런 열심히 나를 정화하고, 나를 치워내고 있을 때, 어느 날 갑자기 하느님의 빛이 나에게

다가오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그 뜨거운 체험으로 말미암아서 이 조명을 받아서, 그리고 또

내가 스스로 정화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정화할려고 하는 그 마음이 일어나는 것,

내가 단식하고 기도하고 고행하고, 아, 기왕 살아가는 인생 한 번 열심히 살아보자.


이런 마음을 들게 해 주시는 그것도 바로 하느님의 은총이고 그렇게 나를 불러일으켜 세워

주시는 분, 그분도 바로 성령이신 겁니다.


그럴 때 우리 마음속에 하느님의 이 다가옵니다.

그리고 또 빛이 다가옴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이 빛이 나에게 다가왔을 때 나는 하느님과

일치의 상태에 도달하게 되는거죠. 일치!


아, 내 안에 그분이 살고 계시고 그분이 내 안에 살고 계시는구나!

그래서 그분과 온전히 하나되어 있다는 그런 깊은 일치의 체험을 느꼈을 때 우리는 영적으로

한 단계 더 성장하게 되고 또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런 힘을 받는다고 제가 여러

차례 말씀을 드렸었습니다.


근데 이런 모든 과정에서 결국은 우리가 이런 정화로 다시 일치했지만 이것이 끝인가요?



아니죠. 또 다시 새로운 단계의 어떤 정화가 일어나야 됩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내 안에 있는 자기 자아를 먼저 생각할려는 이기적인 마음, 또 나를 중심으로

살고자 하는, 나를 보호하고자 하는 그런 본능이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우리 안에는 많은

유혹들이 또 찾아옵니다.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유혹들이 또 찾아옵니다.

그전에는 그것이 유혹이 아니었는데, 내 영혼이 점점 맑아지고 깨끗해질 수록 또 다른 차원의

유혹들이 또 다가옵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유혹을 받으셨다는 것을 기억할 때 우리 삶의 여정에서 끊임없이 많은 부분에

유혹들이 또 죄들에 노출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금 또 기억하시면 좋겠구요, 그래서 또 정화가

일어나고 또 빛이 다가오고 그래서 조명,  뭐 이런 과정을 계속 거치게 되는거죠.

또 일치로 나아가고.


그래서 점점  주님과 더 깊은 일치로 나아가게 하는 이런 과정들을 일생동안 거치게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결국은, 이런 과정들을 통해서 우리가 배워야 되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 그죠? 그냥 인간적인 사랑,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사랑방식,

어떤 방식이죠?


나를 내어주고 또 조건없는 사랑, 자기 희생적인 사랑, 예수님이 그것을 보여 주셨죠.

근데  이런 모든 과정들을 이끌어주고  인도해주고 하는 모든 것들이 바로 성령의 작용이라는

것입니다. 

성령! ' holy spirit '


어떤 힘을 주시고, 은총을 베풀어 주시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성령은 우리 영성 생활에 있어서 또 우리의 이 세상 삶에 있어서 우리를 사랑으로

묶어주는 분, 또 사랑으로 일치시켜 주는 분, 또 사랑이 제가 누누히 강조했죠. 'becoming love'

사랑이 되게 해 주는 분! 이분이 바로 성령의 역할이고 또 성령이십니다. 사랑이십니다. 성령은!


그래서 토마스 머튼이 어떻게 성령에 대해서 이해를 했고 또 성령의 역할이 무엇인지, 또 성령과

함께 하는 그 삶이 어떤 삶인지를 오늘 이 자리에서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상호 사랑의 표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표현을 썼는데

"성령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평화, 사랑, 합일이라는 깊은 일치의 유대이다."

일치의 유대이다. 사랑의 유대이다.

그래서 "교회의 일치를 이끄는 끈이고 또 세상의 재창조와 또 변형의 역동적인 힘이다."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단순한 에너지 이런 게 아니라 이 성령도 하나의 위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차원하고

또 다른 거죠.  그래서 성령께서는 삼위일체 중에 한 위격이시면서 동시에 또 우리를 일치

시켜 주는, 그런 사랑으로 일치시켜 주는 그 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미사를 시작할 때 성령에 대해서 묘사할 때, 성부, 성자, 성령 그 다음에 성령에

대해서 묘사할 때,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성령은 갈라진 우리, 하느님과 우리 사이, 또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 또 교회와 교회

사이에 일치를 이끌어주는 영적인 유대이고 사랑입니다.


그래서 일치가 있는 곳, 그곳은 바로 성령이 있는 곳입니다.

딱 예를 들자면,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불혀 모양으로 내려왔죠.

그럴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났습니까?


여러 나라 사람들이 다양한 자기네 언어로 말을 하고 있는데 서로 다 알아들었죠.

서로 통교가 이루어졌습니다. 서로 'Communion' 친교가 이루어진거죠.


서로 잘 알아들을 수 있게 되어서 일치를 이루는 거죠. 우리가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때때로는 한국말을 하는데도 서로 못 알아들어서 서로 싸우기도 하고 또 서로 다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근데 다른 언어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서로가 사랑으로 엮어져 있을 때는 내 안에 또 예수님의

사랑이 있을 때는 그 나와 맞지 않는 사람들을 일치로 이끌 수 있는, 받아들일 수 있는 힘도

생겨나는 거죠.


그래서 성령은 무엇보다도 토마스 머튼이 말하는 성령은 사랑의 일치를 이끌어주는 유대입니다.

사랑의 힘입니다.



그리고 성령은 또 새로운 삶을 살게끔 만들어주는 게 바로 성령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재 창조의 힘을 불러 주시는 분, 또 우리가 토마스 머튼 영성에 있어서

새로운 재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었죠 그죠?  'rebirth' 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었는데

새롭게 태어난다는 것, 이것은 내가 죽어야지만 내가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거죠.


영적인 의미에서는! 그래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이런 힘을 주시는 분, 재창조의 힘을 주시는

이 분도 바로 성령이라고 토마스 머튼은 이야길 합니다.




그리고 또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 주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라고  토마스 머튼이

< 새 명상의 씨>에서 표현합니다. 제가 조금 읽어드리겠습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를 형성해 주며

또 우리를 제2의 그리스도로 만들어 주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제2의 그리스도로 만들어 주시는 분, 그리스도를 알게 해 주는 분, 그분은 내가 아니라

성령께서 나를 통해서 또 내 안에서 그렇게 작용하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 우리는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인해 하나가 된 모든 사람들로 구성된 신비체입니다."

이런 표현을 씁니다.


성 바오로의 그 가르침에 유사하죠 그죠!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비체이다. 이런 표현을 썼었는데 성령으로 모두 하나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토마스 머튼이 이야길 했습니다.


근데 제가 책을 읽다 보니까 이 토마스 머튼의 이 성령에 대해서 아주 너무 잘 표현 해 준 글이

있어서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이 글 안에는 토마스 머튼이 성령에 대한 그런 개념, 또 성령과 어떻게 함께 했는지 그런

이끌림의 어떤 그런 삶을 너무 잘 묘사하고 있어서 읽어드리겠습니다.



토마스 머튼이 40년대에 쓴 <Entering the silence>라는 그런 책에 나오는 일기중에 하나입니다.

"성령은 제 안에서 생활하시는 사랑이시며"

제가 아까 사랑이야기 했죠. 그죠! 성령은 제 안에서 생활하시는 사랑이시며,

"제가 수도승으로서 성대서원을 할 수 있도록 이 날까지 인도해 주신 분입니다."

내 삶과 함께 해 주시고 나를  인도해 주신 분이라는 '인도자' 라는 표현을 씁니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은 제가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그분은 장차 훨씬 놀라운 일들을 보여

주시기 위해 준비하고 계십니다."

은총을 베풀어주실 준비를 하고 계신다.  너무도 가깝게 성령을 느끼고 있는거죠.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심을 이미 알고 있는 듯 한 느낌이 듭니다.


"무한히 평화로운 사랑이신 분"

무한히 평화로운 사랑이신 분이 바로 성령이시고,


"말과 감정과 지력을 초월해 계시는 이분말고는 그 어떤 존재를 위해서도 우리가 살아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말과 감정과 지력을 초월해 계시는 분,  그렇지만 이분이 있기 때문에, 또 이분 말고는 내가

살아 갈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삶의 목적, 원인 그 무한하고 평화로운 사랑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를 초월해 계시지만

또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이시다. 사랑이신 성령이시다. 라고 표현을 합니다.


계속해서 기도합니다.


"성령이시여, 당신의 짙은 은빛 구름으로 저를 달래주시고, 제가 말을 하고 판단을 하고

생각을 하면서 흥분하지 않도록 보호해 주소서.

위로와 욕망, 그리고 욕망에서 솟아나오는 두려움과 슬픔 같은 역겨운 것들을 물리쳐 주소서.

당신께서 진흙으로 빚어진 이 몸을 온통 정화하고 씻어 내시도록,  저는 당신께 저의 의지를

바치겠습니다."


네 이곳에서, 마지막 구절에서는 제가 아까 앞서 말씀드렸던 이 정화의 개념이 나오죠. 그죠!

우리를 정화시켜 주시고 깨끗하게 만들어 주신 분도, 내 힘이 아니라 누구? 성령께서 하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고 했습니다.

짙은 은빛 구름에서 저를 달래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그리고 또 흥분하지 않도록 나와 다른

사람이 내가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다가왔을 때, 화내지 않고 흥분하지 않고 정말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그런 인내력, 또 겸손한 마음을 달라고 청합니다.


보호해 주시는 분, 보호자 라는 것, 그리고 위로와 욕망, 또 이런 욕망이 솟아나는 두려움을

물리칠 수 있도록 저를 도와주소서. 협조자 성령, 협조자라고 그러죠. 성령을 그죠!

그래서 성령에 대한 이런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또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 세상과 교회 모든 사람이 원하고 뜻하는 것들, 관상생활 하는 이들과 저의 친구들과

제가 지금까지 알고 지내던 모든 사람이 원하는 것을 당신께 맡기고 나서, 내일은 아무

걱정없이 두려움이나 욕망 없이 말 또는 침묵을, 일 또는 휴식을, 빛 또는 어둠을, 동반자

또는 고독을 찾지 않고 저 자신을 당신께 드리고 싶습니다."


온전히 저 자신을 당신께 내어맡기고 싶습니다.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비움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서 합니다.


" 왜냐하면 제 안에 모든 것을 비울 때 비로소 저는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될 것이고,

또 당신은 제 안에서 모든 것을 한 순간에 비우시고, 당신 자신으로 살아있는 모든 것의

생명이시며 존재하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존재이신 당신 자신으로 저를 채우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아름다운 이 비움과 채움에 대한 표현이죠. 

당신께서 제가 저 자신을 비울 힘이 없습니다.

당신께서 당신 영을 통해서 성령을 보내서 저를 비워주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사랑이 제 안에 채워지겠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성령의 작용이라는 것입니다.


사랑이신 성령이 내 안에 사랑하지 못했던 그런 얼룩진 마음들, 내 안에 고집부리고 있는

마음들, 집착하고 있는 마음들, 또 상처들 그 모든 것들을 내가 움켜 쥐고 있는데 이 모든 것들을

당신의 성령의 힘으로 비워주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다른 사랑, 당신의 더 크신 사랑으로 저를 채워주십시오. 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은 

성령은 우리의 영적인 삶에서 영적인 성장에서 우리를

이끌어주시고 기도할 줄 모르는 우리를 위해서 대신 기도해 주시는 분.


우리를 건너가게 해 주시는 분, 

다시 말해서 파스카의 신비를 살 수 있게 만들어 주신 분은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 없이는 우리가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오스딩 성인도 모든 것이 다 은총이라고 그렇게 표현을 썼잖아요 그죠!


그래서 하느님께로 갈 수 있는 거, 기도해야겠다. 아, 이 사람을 용서해야겠다.

혹은 저 사람을 정말 사랑해야겠다. 아, 그리고 내가 좀 더 앞으로 열심히 살아봐야겠다.

이런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 것도 성령이시라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성령께 마음을 내어드리고 온전히 의탁하는 자세를 토마스 머튼은 가져야 된다고

이 기도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또 다른 역할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아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또 견진성사를 통해서 더욱더 굳세어지고

성장해져, 성인이 된다고 그러잖아요 그죠, 견진성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군사가 된다.

이런 표현도 씁니다.


그래서 단순히 어린 아이였던 우리가 영적으로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서 더 끊임없이

성장해 나가는 과정에서 성령의 역할은 너무도 크시고 성령이 모든 것을 우리를 대신해서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모든 거를 다 해 주시겠다고 하시는데 고집부리고 있는 거죠.

조금 있다가 할께요. 조금 있다가. 요거 하고 나서 다음에 할께요. 라고 미루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성령께 마음의 문을 여는 자세 가질 필요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일치시켜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그리스도와 일치뿐만

아니라 사람들과도 일치시켜 주는 분, 그분도 바로 성령이시다 라고 표현합니다.

토마스 머튼이 <인간은 섬이 아니다>  'No Man Is an Island' 책에서 이런 표현을 합니다.


"그리스도의 성령, 그리스도의 영을 충만히 받을수록 우리는 사람들을 더욱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충만히 받으면 받을수록 우리는 사람들을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영을 받았다고 하면서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영으로부터 온 게

아닐 겁니다. 악한 영일지도 모르죠. 자기 교만에 빠지게 하는 그런 영일 겁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성령을 충만히 받았다면 반드시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열려진 마음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반대로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더욱더 사랑할 수록 우리는 성령을 더욱더 받을 수 있습니다."

상호작용을 한다는 거죠. 우리가 성령을 받을수록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고, 또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면 사랑할 수록 그 안에는 성령의 작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충만한 성령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토마스 머튼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성령의 역할중에 하나는 바로 우리가 관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는 겁니다.

지난 번에 제가 기도에 대해 설명하면서 우리가 기도, 묵상, 뭐 여러 가지 렉시오 디비나, 이렇게

여러 가지 모든 것들, 염경기도 하는 거, 묵상기도 하는 거, 모든 것들이 뭐라고 그랬죠?

관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그런 도구라고 그랬죠.


근데 이 관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도구에 있어서 관상을 우리가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을

사랑함으로, 하느님께 사랑을 속삭이고 하느님과 일치 된 상태를 만들어주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신거죠. 성령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혼자서 열심히 기도한다 하더라도 성령께서 우리를 이끌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느님을 만날 수 없는 겁니다.


그래서 지속적인 이런 성령의 활동은 

성령께 머무는 사람들 안에서 성령의 활동이 계속해서 일어난다는 표현을 씁니다.


그렇지만 성령은 또 불고 싶은 대로 분다. 이런 말씀을 요한복음에서 우린 듣게 되는데

성령은 하느님의 때가 되었을 때, 우리에게 불어옵니다.

하느님의 때가 되었을 때, 그 때가 언젠지는 모르죠. 하느님은 항상 현재만 있으신 분이라고

제가 거듭 거듭 강조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볼 때는 10년, 20년, 30년, 40년이 걸리는 것 같지만 하느님 보시기에는 그 때가

가장 좋은 때, 하느님 당신의 때에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주시고, 그 성령이 움직이는 곳에는

사랑이 충만해지고 변화가 일어납니다. 뭔가 모를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제가 예전에 토마스 머튼 영성 강좌를 하고 난 다음에 어떤 분께서 이런 변화에 대한

후기를 남겨주셨는데 이 변화에 대한 후기를 읽으면서 아, 정말 성령께서 이 자리에 함께

하시는구나 라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7월 달에 토마스 머튼 영성강좌 피정을 분도 명상의 집에서 참여를 했었는데,  그 모임

후에 또다시 그 다음에 새로운 모임에 또 그 다음 10월달인가요, 그때 참여를 했는데 이런 변화를

표현을 했습니다.


"7월에 토마스 머튼 영성 배움 첫 피정 참가 후 나에게도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신앙생활이 살짝 지루해지고 밋밋해지려고 할 때에 우연히도  분도 명상의 집 피정 일정을

알게 되었고 아무런 기대없이 참가했다가 참으로 많은 것을 받아 왔고 그것들로 다시 불을

지펴 신앙 생활을 좀 더 열심히 해 보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였는지 거의 2년동안 고민만 하고 주저하던 미사 반주봉사에 용기를 내어 시작하게 되었고

늘 혼자 외롭게 성당에 오고 가고 하다가, 봉사를 하면서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게 된 것 같아 참

좋았다. "


뭐 이후로 주욱 자기 강좌, 또 영성 피정 내용들을 그리고 느낀점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었는데

그 이후에 항상 우리 머튼 영성강좌 피정을 하고 나면 마지막은 파견미사로 끝나는데 그 미사

후에 영성체할 때 그때 체험을 이렇게 적어 놨습니다.


" 눈을 감고 배운 내용을 생각하며 묵상을 했다.

사실 나는 눈을 감고 묵상을 해도 곧 분심이 들어 집중이 잘 안 된다.

그런데 이 날은 진짜 분심이라고는 하나도 안 들고, 신부님이 묵상해 보라고 하는 내용도

떠오르지 않고 내가 어디론가 계속 빨려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도 잊어버리고 눈을 뜨고 싶어도 떠지질 않았다.

그 순간은 오늘 배운 내용은 하나도 없고, 그저 하느님만이 내 안에 계시는 것 같았다.

양형 영성체를 한 후에 눈을 감고 신부님의 기도를 들으면서 묵상을 했고, 파견성가를

부르는데 나도 모르게 그냥 막 눈물과 콧물이 쏟아져 나왔다."


이렇게 후기를 남겼습니다.


"그 이후로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그런 하루였다. 라는 고백을 하면서 기쁨과 충만,

감사, 깨달음과 반성 등등, 하느님으로부터 참으로 많은 선물을 받았다.

그러나 이전과는 달랐다. 이런 감정들과 생각들은 하느님 이외의 창조물이기에 이런 것들에

집착하지 않기로, 하느님의 선물과 은총이 하느님 그 자체가 아니기에 그것에 초연하기로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살기로, 정성을 다해 하루하루를 살되, 결과와 나 자신에 대해

자유로워지도록 그렇게 노력하기로 했다."


뭐 이렇게 그날 강좌가 초연함에 대한 것이였기 때문에 아마 이런 표현을 쓴 거 같습니다.




이 자매님의 표현처럼 많이 배우고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배움과 앎을

통해서 하느님과 일치에로 나아가는 것, 그래서 내 삶이 변화되는 것, 그것이 바로 성령의

작용이고 성령의 역할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또 그 다음으로 성령이 우리에게 어떤 활동을 하는가 또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성령은 우리 교회안에서 활동을 합니다. 여러 가지 성사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끌어주시는데 또 그리스도인들의 진정한 체험을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체험은 성령을 받고 지금 우리 시대를 변형하고자 하는 성령의 일에

협조하는 것이다."

성령을 받고 지금 우리 시대를 변형하고자 하는 성령의 일에 협조하는 것이다.


성령이 우리 시대에 어떤 활동을 하고자 하는가!

여기에 우리가 귀를 기울이고 기도 안에서 성령의 소리를 듣고 그 안에서 성령께서 하시고자

하는 것에 협조하는 거,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내가 하는 일이 아니라 성령께서 하시고자 하는 것, 때때로는 사실 저도 이런 방송을 하는 게

조금 부담이 됩니다. 많은 분들 앞에, 시청자들 제가 얼굴은 볼 수 없지만 그분들에게 이런

나눔을 한다는 것이 굉장히 저 개인적으로는 부담이 되지만 제 안에서 끊임없이 그런 울려

지는 소리는 '안셀모야, 네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있으니 편안하게 그리고 네 생각을

하지 말고 내 마음을 내 사랑을 전해라.' 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그래서 저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저에게 토마스 머튼을

일깨워주셨고 또 토마스 머튼을 통해서 종교간 대화라든지 영적인 그런 저에게 변화를 주셨기

때문에 제가 이것을 나누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어떤 영적인 그런 힘을 느끼게 됩니다.


그게 바로 어떤 성령의 일에 협조하는 게 아닌가! 내가 하고 싶지 않지만 하느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또 성령께서 하시고자 하는 그 일에 내가 함께 동참함으로써 내가 아니라 성령께서 내 안

에서 활동하시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로 토마스 머튼이 1960년대에 여러 가지 사회에 관련해서 사회정의를 위해서

또 전쟁 반대를 위해서 활동한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겠죠.

자기는 깨달은 자의 책임감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지 않을 수 없었죠.

그리고 하느님의 정의를 선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종교간 대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가톨릭 안에만 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곳에서

하느님의 창조물 안에서 또 하느님의 창조물인 모든 것, 뭐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들 사람들안에

모든 것들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나름대로 활동하고 계십니다. 성령을 통해서!

그래서 우리는 그 성령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또 성령의 활동에 협조해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성령께서는 우리를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시켜주는 역할을 한다고 아까 말씀드리면서

성령께서 우리가 좀 더 더 영적으로 이끌어 성장해 나가고 우리의 삶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성령의 움직임을 느끼게 해주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얼굴, 우리의 삶이 성령에 충만해질 때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먼저 보고 느낄 것

입니다. 아, 성령께서 지금 저 사람과 우리와 함께 하고 있구나!  이것들을 느끼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정리하자면 

결국은 성령께서 우리의 안에서 활동하시고자 하는 것은 사랑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또 사랑으로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진정으로 거룩한 영께서 우리에게 다가왔을 때, 우리의 삶이 거룩해지게 되고 또 거룩한 성령이

함께 할 때  우리 삶은 변화로 이끌어집니다.


어떻게 변화되는가요?

결국은 나를 내어주는 사랑, 또 조건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래서  그리스도의 그 신비체와

하나가 되어가는 거겠죠.


우리는 사도 바오로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있는 이 신비로운 신비체이죠.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의 신비체이면서 동시에 하느님의 백성이면서 또한 보편적인 구원의 성사

라고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회에 대해서 정의했던 것처럼 교회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서로 사랑의 유대를 맺고 있는 바로 성령이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우리가 분열이 일어나고 또 서로 갈라지고  싸우고 다툼이 있는 곳에, 우리가 사랑을

가지고 성령과 함께 다가갈 때, 그곳에 일치의 사도로써의 역할을 우리가 해야 되는 거겠죠.

그렇지만 일치하라! 일치하라! 한다 해가지고 뭐 싸우던 사람이 금방 일치되는 건 아닙니다.


사랑은 또 일치는 우리 내면으로부터 와야 합니다.

우리 내면 안에서 그리스도와의 어떤 평화, 성령이 주시는 그런 은총안에서의 어떤 기쁨, 이런

것들이 내 안에 충만할 때 다른 사람들에게,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갈 때, 내 주장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내 고집이 아니라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나눌 수 있게 되고 ,그러다보면

그 안에서 자연스럽게 일치하지 말라 하더라도 자연스럽게 일치가 이어지는 걸 겁니다.


그래서 사랑의 일치가 점점 확장되어서 우리의 모든 삶이, 우리 나라가, 우리 가정이, 또 우리

교회가 정말 평화의 일치, 사랑의 일치로 이끌어갈 수 있도록 우리는 끊임없이 성령과 함께

성령을 통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지금 여러분들 삶 가운데 늘 함께 하신다는 것을, 사랑이 있는 곳에 성령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을 다시금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토마스 머튼 신부님께서 인도 켈커타에서 바치신 이 기도문 안에는 정말 성령을 어떻게 우리가

이해해야 되는지 또 받아들여야 되는지 너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기도문을 마지막으로 함께 바치면서 성령에 대한 배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오, 하느님, 온 마음으로 충만하게 완전하게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저희는 당신을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당신을 흠숭합니다.

우리의 온 존재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존재는 당신의 존재 안에 있고

우리의 영은 당신의 영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당신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소서.


다양한 길을 가고 있는 우리를 사랑으로 묶어 주소서.

세상에 현존하고 있는 당신의 영 안에서 하나되게 하소서.

사랑의 궁극적인 실재의 증인인 당신의 영 안에서 하나되게 하소서. 아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