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성숙한 신앙인, 하느님 마음/34회 종교간 대화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1_현대영성가 토마스 머튼과의 만남_박재찬 신부 해설

은가루리나 2020. 4. 13. 22:04

 

† 찬미 예수님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의 박재찬 안젤모 수사 신부입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도 우리 교우 여러분과 또 시청자 여러분들 주님 사랑 안에서 다들 평안하셨는지요?

 

오늘부터는 새로운 테마로 주제로 토마스 머튼의 영성에 대해서 배워보고자 합니다.

우선 제가 이야기 하나 들려 드릴게요.

 

6살 난 꼬마 아이가 8살 난 형한테 질문을 했습니다.

"형아, 예수님이 나이가 많아, 부처님이 나이가 많아?"  형이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 그야 부처님이 나이가 많지. 부처님은 4월생이고 예수님은 12월생이잖아~"

 

그렇죠? 형의 사고 안에서는 12월 달에 태어나신 예수님이 4월에 태어난 부처님보다도 나이가 적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예수님은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계셨던 분이었기 때문에 사실 엄밀히 따져보면 또 부처님보다 더 먼저 계셨던 분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제가 먼저 꺼내드리는 이유는 오늘날 우리 시대 안에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가르침 또 여러 다른 다양한 종교 안에 있는 가르침들을 서로 비교하는 비교 종교학이라든지 또 다원화된 세상 안에서 종교들끼리 안의 관계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그런 여러 가지 연구들도 있고 또 종교적인 대화도 하는 경우도 있고, 그 가운데에서 선교는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선교가 이제 개종의 개념을 넘어가야 되지는 않겠는가 이런 이야기들까지 합니다. 그쵸?

 

그래서 오늘 이 시간부터는 종교간 대화라는 것이 무엇이고 종교일치 운동이란 것은 또 무엇이고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세상 끝날까지 나는 너희와 함께 할텐데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라~라고 지상명령을 주셨는데 마태복음 28장이죠? 그런 것들과 오늘날 우리 다양한 종교들이 함께 모여 살아가는 세상 안에서 서로 종교간의 충돌없이 평화롭게 지내기 위해서 어떤 자세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지녀야 하는지 여러 가지 다양한 이야기들을 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사실 전반부에서 토마스 머튼의 영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참 많이 나눠 드렸습니다. 다양한 주제를 가지고 토마스 머튼의 영성을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께로 더 가까이 갈 수 있는지 또 예수님과 일치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영적인 면에서 충만한 이야기를 나눴는데 저는 여기에서 딱 그만 두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는데 피디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구요, 신부님, 아직 우리 평화방송에서 종교간 대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주고 종교간 대화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강좌를 한 것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부님께서 이것을 처음으로 해 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부탁을 하시더라구요,

 

근데 생각해보면 처음은 항상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종교간 대화라는 문제는 아직도 계속해서 해결방안을 찾아가고 있는 중에 있고, 여러 가지 교회 안에 보수적인 경향을 가진 사람들, 또 진보적인 경향을 가진 사람들, 아직 영적으로 미숙한 사람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 그 사이에서 어떤 공통된 이야기를 혹은 또 교회의 가르침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때로는 민감한 사항일 수도 있을거구요, 때로는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는 사항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예전에 한 번 보여 드린대로 제 논문 주제가 토마스 머튼이 어떻게 불교와 대화를 했는지에 대한 논문을 썼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이 종교간 대화에 있어서 불교 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교와도 만남을 가졌었는데 거기에서 토마스 머튼의 영성이 어떠했는지를 여러분들에게 소개하면서 종교간 대화가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고 교회가 어떤 입장으로 다른 종교들을 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나눌 수 있다면은 여러분들이 앞으로 다양한 다른 종교인들을 대하는 태도라든지 또 다른 종교의 어떤 여러 가지 뭐 명상법 이런 것도 있잖아요? 뭐 기수련이라든지 요가라든지 이런 것들을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는가 또 가톨릭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말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되는가 또 다양한 종교 안에 서로  분쟁이 일어나고 다툼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런 것들을 어떻게 평화롭게 해결해 나가야 되는가, 세상 안에서 종교의 영역보다는 세속적인 영역이 더 커져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안에서 종교들끼리 어떻게 서로 화합할 수 있는가 이런 문제들에 대한 답을 줄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처음이지만은 그렇다고해서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이 처음이 아니라 이미 교회에서 많이 연구되어 왔었고 그리고 지금도 끊임없이 이 문제에 대해서 거론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는 만큼 또 제가 배운 만큼  여러분들과 나누기 시작한다면은 이 나눔이 또 다른 나눔과 더해져서 좀더 더 종교간 대화에 대해서 바른 이해를 하고 또 실천에 옮겨 줄 수 있는그런 시발점이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서 이제  이번부터 해서 한 20여회 동안에 여러분들과 종교간 대화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 특별히 토마스 머튼을 많은 분들이 종교간 대화에 있어서 개척자, 파이어니어, 선구자라고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왜 토마스 머튼을 종교간 대화에 있어서 개척자라고 이야기 하는가, 또 어떤 분들은 토마스 머튼이 다양한 종교와 대화를 시도하면서 가톨릭의 변절자다 이렇게 표현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과연 토마스 머튼이 변절자였는가 혹은 토마스 머튼이 진정 불교신자 불자가 되고 싶어했는가 뭐 이런 부분에 대해서도 여러분들이 의문을 이 강좌를 통해서 풀어 나가시면 좋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 우선 토마스 머튼이 아시아에서 바쳤던 기도문을 시작으로 이 종교간 대화의 문을 열어보고자 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 하느님, 우리는 당신과 하나입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과 하나가 되도록 만드셨습니다.

당신은 우리가 서로 마음을 열면 당신이 우리 안에 머무르시겠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개방성을 보존하고 우리의 마음을 다해 이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도록 도와 주소서.

서로 거부하는 곳에는 이해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도록 우리를 도와 주소서.

 

오, 하느님, 우리는 서로를 온 마음으로, 온전히, 완전히, 받아들임으로써 당신을 받아들이게 되고,

당신께 감사드리게 되고, 당신을 찬미하게 되며, 우리의 존재를 다해 당신을 사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존재 안에 있고 우리의 영은 당신의 성령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사랑으로 가득 채우시고, 

우리로 하여금 각자 다양한 길을 가면서도 사랑으로 결합되고, 

이 한 분의 성령 안에서 하나 되게 하소서.

이 성령이 바로 당신을 이 세상에 현존하게 하고, 

당신으로 하여금 궁극적인 실재가 곧 사랑임을 증거하게 만드십니다.

사랑이 모든 것을 이겨냈습니다. 사랑이 승리합니다. 아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이 기도문을 여러분들이 얼만큼 이해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이 기도문을 온전히 이해한다면 앞으로 할 20여 시간 동안에 20여회 동안에 이 강좌를 다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토마스 머튼의 종교간 대화를 아주 집약해 놓은 그런 기도문이기도 합니다. 토마스 머튼이 이제 <아시아저널> 이라는 책의 부록편에 보면 이 기도문이 나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한 번 이 기도문을 보시면서 왜 제가 이런 말을 하게 되었는지 나중에 차차 차차 이해하시게 될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면 여기에서 첫 표현으로 '우리'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동안 토마스 머튼이 한 기도를 보면 대개 다 저를 너를 주님을 부르는데 여기서는 우리를 우리가 당신과 하나입니다. 이런 표현을 씁니다. 왜 우리라는 표현을 썼을까요? 그리고 개방성에 대한 얘기도 나오고요, 서로를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이야기, 다양한 길을 가면서도 사랑으로 결합되어 토마스 머튼에게 있어서 이 종교간 대화는 결국 어떻게 하면 서로가 하느님 사랑 안에서 결합하고 다양성 안에서 서로가 하나되어 가는가 이런 것들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이 기도 안에서 결국은 사랑 안에서 모두가 다양함을 가지고 있지만 그 안에서 서로가 연결되고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이런 말씀들을 기도문을 통해서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앞으로 차차 머튼의 그 종교간 대화를 배워가면서 이 기도문도 차츰 차츰 이해해 나가시게 될 겁니다.

 

자 그러면은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우선 전체 대화에 있어서 제가 나눌 이야기에 있어서 서론 부분에 해당하는 부분을 조금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자 우선 종교간 대화 뭐 에큐메니즘이라고 하는데 뭐 종교일치 운동이라고 그러지요? 그런데 흔히들 많이 혼란스러워 합니다.

 

종교간 대화는 그리스도교하고 다른 종교들 그리스도교 이외의 다른 종교들, 불교라든지 유대교라든지 힌두교라든지 이슬람이라든지 그리스도교 이외의 다른 종교들과 만날 때는 이것을 보통 대화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리고 에큐메니즘, 종교일치 운동은 그리스도교 안에서 서로 대화하고 협력하고 화합하고 나눔을 할 때 이것을 에큐메니즘 종교일치 운동이라고 합니다. 그 차이를 여러분들이 이해하시고 저의 이 나눔을 들으시면 도움이 될 겁니다.

 

근데 이제 많은 분들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니 우리 그리스도교 안에 충만히 좋은 것들이 많은데 그죠 영성적인 면 성경이라든지 전례라든지 성사론 여러 가지 우리 가톨릭 안에 좋은 것이 참 많은데 그것으로 이미 충만한데 왜 굳이 다른 종교와 대화를 해야 되고 일치를 해야 되는가 충만한데 그죠. 이런 질문들을 하십니다. 

 

그리고 이 종교간 대화가 본격적으로 이슈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특별히 북미에서 이 주제에 대해서 연구를 시작한 것은  9.11 사태 이후입니다. 종교 때문에 물론 종교라는 것을 앞에 내걸고 뒤에 정치적인 거 경제적인 게 물론 있겠지만 종교로 말미암아 충돌이 일어났습니다. 평화가 깨졌죠, 그래서 세계평화를 위해서는 종교간의 화합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 겁니다.

 

사람들이 많이 적대감을 갖게 되었어요. 그리스도인들도 무슬림에 대해서 적대감을 갖게되고 무슬림들도 그리스도교에 대한 적대감 이거는 하루 아침의 일이 아니죠. 옛날부터 중세때부터 십자군 원정부터 해 가지고 계속해서 교회 안에 있어왔던 것입니다. 또 유대교를 박해하던 그리스도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처형했기 때문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들을 박해하기도 했죠. 근데 사실은 그게 아니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니라 어쩌면 우리가 예수님을 죽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조금 다른 각도로 새롭게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충돌들이 역사 안에 계속 있어 왔습니다. 이런 종교간 충돌들을 어떻게 해결해 나가고 어떻게 미리 예방할 수 있을까 이런 문제들이 종교간 대화와 연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항상 모든 종교 뭐 정치도 마찬가지겠지만 종교 안에도 진보적인 성향을 가진 분이 있는가 하면 아주 극단적인 보수적인 경향를 가진 분들도 계십니다. 전통을 중요시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을려는 분들이 계시고 또 전통을 무시하고 지나치게 새로운 것들만 받아들이려고 하는 그런 경향이 있죠.

 

근데 두 경향 모두 그것이 극단적일 때는 그것이 문제가 된다고 봅니다. 그리스도교 전통이 우리 시대에 새롭게 해석되어지고 우리 시대 사람들에게 새롭게 적용되어지고 그래서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 나가야 되는거죠. 그것이 바로 2차 바티칸 공의회의 모토이기도 했죠. 아즈라멘토, 현대 세계로의 적응 그리고 원천으로의 회귀였습니다.

 

처음에 예수님이 어떻게 했는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셨던 구원의 진리의 말씀들 또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셨던 그 복음을 우리 시대에 어떻게 우리 시대 사람들이 우리 문화 안에서 알아들을 수 있게끔 해석해 내는가 이것도 하나의 관건일 것입니다. 그래서 극단적인 보수 극단적인 진보가 아니라 중도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무엇이었는가 이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는데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보수주의자들은 다른 종교를 받아들일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부분들도 말씀드리고 싶구요~.

 

오늘날 우리 시대를 보면 예전에는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고 통신 수단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 지역 안에서 그걸로 충분했습니다. 종교도 한 지역 안에서 그냥 자생적으로 발달해서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고 그 안에서 생활을 했었죠. 종교생활도 하고 사회생활도 하고.

 

근데 오늘날 우리 시대는 여러 가지 대중매체도 발달해 있고 서로 문화도 교류하고 또 쉽게 이동하면서 서로가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많이 이해하게 되었고 또 아시아에는 아시아의 종교만 있는게 아니고 그리스도교가 지금 들어와 있고 그죠? 또 유럽이나 북미에 가도 그곳에는 아시아의 종교들이 이미 많이 활성화되어 가고 있는 중입니다.

 

제가 예전에 겟세마니 인 카운터라고 겟세마니에서의 종교간 수도승들이 하는 종교간 대화모임에 참석하였는데 미국 사람인데 불교 스님이 되셔서 혹은 비구니가 되셔 가지고 승녀 복장을 하고 오셨어요. 왠지 모를 어색함이 있었지만은 아마 그분들이 제가 서양 수도복을 입고 있는데, 아시아 사람이 그리스도교 수도승이 되어서 수도복을 입고 있는 모습하고 서로 매치가 되지 않겠나 생각도 됩니다. 그래서 많은 서구인들이 지금 불교에 관심도 많이 갖고 있고 또 여러 가지 다른 아시아의 종교에 관심도 많이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문화와 종교 이런 경계가 점점 지역이라는 곳을, 울타리를 넘어가고 있는 그런 추세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추세에 있을때 우리가 어떻게 서로가 종교 안에 서로 협력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가 이런 의문도 가져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양한 종교가 한 지역 안에 한 나라 안에 한 문화 안에 공존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것을 오늘날 종교 다원주의의 시대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각각의 종교는 나름대로 자기의 구원에 대한거 자기 나름대로의 교리를 펼치면서 세상 안에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다양한 종교가 서로 협력해서 지낼 수 있는지. 그러면 우리 종교 안에 구원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럼 다른 종교를 믿고 있는 사람들은 구원이 없는가 혹은 또 예를 들면 개신교에 다니는 사람들이 가톨릭을 믿고 있는 사람들과 구원의 개념이 차이가 나기도 합니다. 그죠. 그래서 꼭 그 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는가 혹 불교신자들은 혹 무슬림들은 그 안에는 구원이 없는가. 하느님은 그 안에서 활동하지 않으신가. 하느님은 가톨릭 안에서만 활동하시는가 하는 의문들을 던져볼 수 있겠죠.

 

그리고 자신의 종교 이외에 다른 종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 우리 종교가 최고의 종교야 우리 종교만 믿어야돼 하고 생각하는 거 그것은 종교적인 미숙함인가 아니면 종교에 대한 굳은확신이고 절대적인 믿음의 표현인가 이런 의문도 가져볼 수 있을 겁니다.

 

우리 가톨릭에만 구원이 있는가 아니면 다른 종교에만 구원이 있는가 결국은 여러 가지 종교간 대화에 대한 공부를 하다 보니까 이 종교간 대화라는 것은 결국 타인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나와 다른 타인을, 나와 다른 그 타인이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거죠. 그런데 결국은 나와 다른 타인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런 문제와 연결되는 것 같더라구요.

 

우리 이웃에도 같은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나와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어요. 그들을 어떻게 받아들일건가 우리는 그들과 함께 살면서도 서로 다투기도하고 내 뜻을 고집하면서 그 안에서 내 뜻대로 움직이길 바라고 그렇지 않을 때는 서로 싸움이 일어나고 서로 갈라지기도 하고 질투하고 미워하기도 하고 그런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근데 좀 더 확장 시키면 종교와 종교 사이에서도 다른 종교를 우리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타인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또 종교간 대화라는 것이 그 사람이 우리 종교로 개종하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종교를 믿고 있는, 다양한 종교를 믿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종교안에 흡수되는 것인가 그게 일친가 진정한 종교간 대화를 통한 일치라는 것은 무엇인가 라는 의문도 가질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만약에 이제 그리스도교 안에서 모든 종교가 일치된다면 불교가 사라지는건가 그걸 지향해야 되는가 이런 의문도 가져볼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이런 여러 가지 질문들을 통해 가지고 우리가 왜 앞으로 이런 주제들이 점점 확장되어서 나중에 토마스 머튼이 이야기하는 결론 중의 하나는 영적인 성숙입니다. 영적인 성숙에 대해서 말년에 굉장히 강조를 합니다.

 

종교간 대화를 하는 사람들, 종교간 대화를 위해서 힘쓰는 사람들은 먼저 자신의 종교 안에서 성숙해져야 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만약에 자신의 종교안에서 자신의 정체성 또 자신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확고한 신념이 없을 때에는 아직 미숙한 단계에 있기 때문에 종교간 대화에 나서지 말라는 그런 표현을 씁니다. 

 

왜 영적인 성숙을 강조했을까 이런 의문도 던져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토마스 머튼이 종교간 대화에 있어서 그런 영적인 성숙을 왜 강조하게 되었고 처음부터 그렇게 되었는가 하는 것도 앞으로 강좌를 통해 가지고 여러분들이 공부하게 되실 겁니다.

 

그래서 우선 다른 종교들을 대할 때 내가 어떤 태도로 대해야 되는가. 요즘 분위기는 종교간 대화에 대해서 어떤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단순히 저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교회에서 이미 공의회 문헌에서 부터 계속 이런 대화의 필요성에 대해서 말씀을, 가르침을 주시고 계시고 그 가르침들을 이 강좌를 통해서 나누게 될 겁니다.

 

자, 그럼 이제 제가 앞으로 할 강좌에 있어서 결론부터 먼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보통 우리 한국에서는 공부를 할 때 논리적으로 논리정연하게 설명을 하고 마지막에 어떤 결론을 냅니다. 그것을 귀납법이라 그러죠. 이러이러 했기 때문에 이거다 이렇게 표현을 하는데 제가 처음 캐나다에 공부하러 갔을 때는 글쓰기부터 배웠는데 그 글쓰기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핵심을 먼저 이야기하고 그 다음에 쭉 이어서 왜 그런지에 대해서 설명을 하라고 글쓰기를 다르게 배웠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적응하는데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왜냐하면 핵심을 먼저 말하는게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핵심을 말해야지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갖고 그 글을 읽는다는 거죠. 아무튼 이 핵심을 다 말씀드리는데 아마 여러분들도 다 아는 걸 겁니다. 그런데 이 아는 것을 발견하기까지 저는 굉장히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자, 종교간 대화 어떻게 할 것인가! 다른 종교인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그리고 나와 다른 타인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제가 잊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글로 쓰겠습니다.

 

종교간 대화 어떻게 할 것인가! 너무 단순합니다. 

그렇지만은 굉장히 이런 마음을 갖기가 힘듭니다. 

종교간 대화, 예수님의 마음으로!

참 단순하고 쉽게 느껴지지만 사실은 굉장히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나와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을 받아들이거나 그들을 대한다는 것은 

사실 내가 예수님의 마음이지 않으면 

그들에게 항상 내 마음 내 뜻 

혹은 그동안 기존에 있었던 기존의 체제 안에서 그들을 바라보게 되기 때문에 

문제들이 굉장히 많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어떤 마음을 지니셨는가 예수님이 타 종교 또 다른 사람들 어떻게 대하셨는가 이것을 배워야 합니다. 결론부터 이야기 드리는데 보편적인 예수님의 마음 또 조건없는 예수님의 사랑 이런 것들이 우리 마음안에 자리할 때 종교간 대화는 아주 수월해집니다.

 

그래서 제가 영적인 성숙에 대해서 토마스 머튼이 강조한 이유도 바로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 때 그 예수님의 마음으로 다른 종교를 대하다 보면은 좀 다른 길이 열립니다. 다른 대화의 방법들이 보이게 되죠. 그래서 이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가 어떻게 간직할 건가에 대해서 앞 시간에 길게 거의 30회에 걸쳐서 설명을 해 드린 겁니다.

 

토마스 머튼이 관상을 그렇게 강조하고  침묵과 고독 또 여러 가지 기도에 대해서, 초연함, 영적인 체험을 통해서 하느님과 하나되어 가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과 하나되어 가는 과정들을 강조한 이유 또 그렇게 하느님과 하나 됨으로 인해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종교를 성령을 통해서 어떻게 만날건가 나중에 이어지게 되고 개방성을 갖게 되고 또 다른 모든 종교 다른 모든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대할 수 있는 그런 은총을 받게 되었죠.

 

그것을 예전에 Trans-cultural consciousness 초문화적 의식 이렇게 표현을 했었습니다. 기억이 나실 겁니다. 그죠. 모든게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 시간에 그 부분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빠졌네요. 예수님의 마음으로 종교간 대화를 하거나 예수님의 마음으로 다른 종교를 대하지 않을 때 항상 오류가 발생합니다. 항상 자기 방식대로 혹은 자신의 뜻대로 또 우리 종교만이 유일하다는, 토마스 머튼이 초기에 빠졌던 그릇된 오류였죠? 자기 우월주의에 빠지게 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이제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예수님이 그럼 어떻게 하셨는가, 

예수님이 어떻게 다른 종교를 대하셨는가 한번 봅시다.

 

우선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복음 말씀에 한번 살펴볼게요.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 가운데 굳이 많은 유대인들 가운데 굳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비유로 들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을 통해서 경계없는 사랑을 말씀하셨죠.

 

그리고 또 한 여인이 사마리아 여인이 와 가지고 우리 자녀를 낫게 해 달라고 청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처음엔 거부하셨죠. 자녀들, 유대인들에게 치유를 해야 된다. 그렇지만은 사마리아 여인이 떨어진 부스러기를 개들이 핥아 먹지 않느냐 그래서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청했죠.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적이 없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치유시켜 주시죠.

 

또 요한 복음에서도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나누시면서 생명의 물을 그녀에게 줄려고 하십니다. 또 열 명의 나병환자 비유에서도 치유받고 돌아온 사람은 누구였어요? 네, 사마리아 사람이었죠. 예수님 앞에 엎드려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그렇게 했을 때 예수님께서 나머지 아홉 명은 어디 있느냐 나머지 아홉 명은 유대인들이 마련해 준, 세상이 마련해 준 그런 치유를 얻었습니다.

 

그러니까 육적인 육신의 치유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치유를 얻었지만 그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님께 엎드려서 새로운 성전인 예수님께 와서 감사의 인사를 드림으로 인해서 예수님께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표현을 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경계없는 사랑을, 경계없는 구원에 대해서 선포하기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25장에 보면은 최후의 심판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때 양과 염소를 양쪽에 두고 양의 편에 있는 사람들은 병자를 방문하고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와주고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준 그런 사람들에게 구원의 길이 열릴 것이다. 염소 편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 사람들일 거라고 말씀하셨죠. 

 

여기서 보면 구원의 기준이 세례가 아니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 그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한 사람에게 구원이 있을거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세례가 기준이 아니었죠. 그렇지만 세례는 그래서 구원의 완성이 아니라 구원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본다면 말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의지를 예수님이 선포하셨습니다. 더 이상 이제 예수님은 유대인들만의 예수님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이미 살았던 많은 우리 선조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짓고 있는 많은 죄들을 짊어지시고 십자가를 지고 가신거죠. 그리고 그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고 묻히셨고 부활하셨습니다. 그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구원된거죠. 그것을 제가 예전에 객관적인 구원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주관적인 구원은 우리 각자의 구원은 아직 완성된 게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죠.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되길 바랬고 그래서 모든 사람들에게 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례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고 살 수 있는 시작인 것입니다. 세례가 구원의 완성이 아니라 세례는 나의 구원의 시작인 것입니다. 나의 구원이 이제 완성될 수 있도록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이 되어가야 되는 것이죠. 그것이 제가 이제 앞부분에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율법학자에게도 심지어 이렇게 말씀하셨죠. 하느님 나라는 이미 너희 가까이에 있다. 그래서 제자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율법학자 바리사이들도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한테는 다 받아들였습니다. 뜻을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바리사이한테도 불행하여라, 너희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아~ 이렇게 표현을 하셨지만 뜻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당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이셨죠.

 

그래서 우리가 앞으로 종교간 대화를 쭉 살펴볼텐데 이 종교간 대화를 살펴 보다보면 많은 신학들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교 안에 과연 구원이 있는가, 그렇다면 다른 종교들은 구원이 없는가, 그리스도론과 연관이 되고요. 성령은 불고 싶은대로 분다는데 성령론과도 관계가 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교 안에만 있는가 그런 질문을 해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또 구원론 구원은 있는가 과연. 그리고 여러 가지 하느님관에 대한 신론으로도 이어지구요. 선교학 뭐 다양한 주제들이 이 종교간 대화 안에 집약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앞으로 차차 하나 둘 살펴 보면서 종교간 대화에 관한 토마스 머튼의 영성을 배우다 보면은 그리스도교의 신학의 집약을 배울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앞으로 여러분들이 이 방송을 하나도 빼지말고 하나 둘 차차 들으시면서 나의 타인을 대하는 태도, 내 안에 과연 예수님의 마음이 있는가, 예수님의 마음을 키우기 위해서 토마스 머튼은 어떻게 우리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지 함께 나눠 보도록 하겠습니다.

 

종교간 대화 어떻게 하라했죠? 예수님의 마음으로!

타인을 어떻게 대하라고 그랬죠? 예수님의 마음으로!

 

 

 

다음 시간에 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