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영성지수 높은 하내영의 특징 / 30회 머튼 영성 요약2_현대영성가 토마스 머튼과의 만남_박재찬 신부 해설

은가루리나 2020. 4. 8. 12:32



+찬미예수님.


성베네딕토 왜관수도원의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입니다. 지난 한 주간도 주님 안에서 평안하셨는지요?


오늘도 부산 성 분도 명상의 집 성전에서 여러분들과 함께 나눔을 하고자 합니다. 제가 이곳에 와서 이제 여러가지 토마스머튼 영성에 대해서 나눔을 하고 있는 중인데요.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많은 분들이 이제 이곳에 오셔서 피정을 하고 또 배움을 하고 있는데 많은 분들이 의문시 하고 있는 공통적인 요소가 "신부님, 너무 어렵습니다. 토마스머튼을 이해 한다는 게 참 알듯 하면서도 모를 것 같습니다. 또 토마스머튼이 이제 너무 앞서 나가신 것은 아닌가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까?"는 이런 이야기도 하는 분도 계십니다.


그런데 사실 , 토마스머튼의 이 영성을 우리가 살펴 볼때 저도 그랬습니다. 처음에 토마스머튼 책을 읽을 때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잘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눈으로는 읽고 있는데 분명히 글을 읽고 있는데 이게 글이 아니고 마음에 와 닿지가 않는거 있죠. 여러분들 가운데에도 그런 체험들을 하신 분도 많이 계실 겁니다. 그런 것들은 제가 생각할 때는 토마스머튼의 책을 읽기 위해서는 또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가 얼만큼 하느님과 가까워져 있는가! 또 내가 얼만큼 기도하고 있는가! 또 내가 얼만큼 하느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또 하느님을 체험했는가! 이런 것들에 비례해서 토마스머튼의 책도 이해할 수 있지 않겠나 생각이 듭니다.


토마스머튼의 책도 여러 단계가 있다고 그랬죠. 전기의 책,후기의 책이 있습니다.


그런데 처음부터 후기의 책을 읽게 되면 도대체 무슨 소리 하는지 이해가 안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고요, 그래서 여러분들께 권해 드리고 싶은 것은 토마스머튼의 영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여러분이 스스로 기도하십시요.


그리고 토마스머튼의 영성을 좀 더 깊이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가 예수님과 더 가까이 가기 위해서 주님을 찾는 작업. 이미 와 계신 주님을 만나는 작업 이런 것들을 해나가시고, 무엇보다 좋은 것은 성경을 많이 읽으시면 모든 것에서 소스는 성경에서부터 나왔고, 든 토마스 머튼의 글들은 자신의 영적인 체험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자주 하시다 보면은 '아!~ 그게 그 말이었구나. 예전에는 그냥 흘러간 그런 내용이었는데 아!~이렇게 깊이 있는 내용이었구나.바로 내 마음을 보여주는 나!' 라는 것을 느끼게 되실 것입니다.


오늘도 토마스 머튼의 영성을 지난 시간에는 영적인 성장이라는 부분, 변화라는 부분, 하느님 체험이라는 부분에서 나눴다면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토마스머튼의 영성을 좀 더 요약해 드리는 그런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기도로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직 저 자신에게서 저를 구해 주소서. 모든 것을 변화시키려 하고 정당한 이유 없이 행동하려 하며

움직임 자체를 위해 움직이려 하고 당신이 질서 지워 놓으신 모든 것을 흩어버리려 하는 저 자신의

사적이고 유해한 충동에서 저를 구해 주소서.


저로 하여금 당신의 의지 안에 쉬면서 침묵하게 하소서. 그러면 당신 기쁨의 빛이 제 삶을 따뜻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그 불길은 제 가슴 속에서 타오르며 당신의 영광을 위해 빛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사는 이유입니다. 아멘,아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저는 이 기도문을 접하면서 이 구절이 제 마음에 굉장히 와 닿았습니다.

 '저로 하여금 당신 의지 안에 쉬면서 침묵하게 하소서.'


그분의 의지에 모든 것을 내어 맡기고,그분 앞에 그분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침묵할 때 우리는 그분과 더 가까워 질 수 있고, 또 그분의 사랑을 더 느낄수 있게 될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모든 이유는 바로 하느님과 예수님과 일치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이 기도문이 보여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과 온전히 일치되었을때 하느님의 얼굴을 세상에 보여주는 그런 역할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예전에 제가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님이 쓰신 짧은 구절을 하나 읽어본 적이 있는데 나눠드리겠습니다.


"20살에 사람은 신이 주신 얼굴을 갖고 있으며, 40살에 삶이 준 얼굴을, 그리고 60살에는 스스로가 얻은 얼굴을 갖고 있다."


이걸 제가 좀 수정해서 여러분들에게 재미있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0대에는 하느님께서 주신 얼굴을 갖고 있으며, 20~30대에는 성형외과 의사가 준 얼굴을 갖고 있고,

40살에는 화장품 회사가 준 얼굴을, 50살에는 삶이 준 얼굴을, 60살에는 하느님께서 주신 마음의 얼굴을 가져야 한다." -by 박재찬 안셀모-


정말 우리가 세월이 흘러가면서 점점 하느님께서 공평하게 외적인 외모는 평준화시키셨죠. 그런데 영적인 부분을 키워놓아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얼굴이 하느님이 주신 얼굴로 변화되어 갈것입니다.


우리 얼굴이 예수님의 얼굴로 닮아가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느끼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통해 느끼게 될것입니다. 이런 영적인 얼굴을 갖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 분을 봐라 봐야 됩니다. 

영적인 얼굴을 갖기 위해서 거룩하신 하느님을 바라보고, 

사랑이신 하느님을 진정한 사랑의 눈으로 또 정말 간절히 바라는 마음, 

애절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그분의 얼굴을 닮아갈 때 우리가 그분과 같은 얼굴이 되어가지 않겠나. 

그래서 그분을 많이 바라보는 것,사랑으로 바라보는것, 그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제가 예전에 관상에 대한 강의를 할 때 말씀드렸었죠. 

사랑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는것 그것이 뭐죠? 

그것이 바로 관상기도라고 했죠.


토마스머튼의 전체의 삶의 여정은 처음에 <칠층산>을 쓰면서 시작되었죠. <칠층산>을 쓰기 전에 또 다른 책을 쓰셨는데 <관상이란 무엇인가>는 책을 썼습니다. 아주 소책자인데 이 책을 쓰면서 질문을 하기 시작했죠. 관상이란 무엇인가?


그런데 이 질문에 답을 해나가다 보니까 점점 관상기도에 대한 관심도 갖게 되고, 실제로도 관상을 하게 되었고, 그런데 그때 쓴 소책자에 보면 관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그냥 전통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라던지 십자가의 성요한의 영성에 비추어서 설명을 합니다. 그래서 수덕적인 관상,생덕적인 관상,주부적인 관상 이렇게 나누면서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토마스머튼이 이 질문이 바뀌어집니다. 

언제 바뀌냐면 1958년 루이빌 체험을 한 이후로~


관상이란 무엇인가로 질문으로 답을 찾아가기 시작했는데, 

하느님을 체험하고 더 관상적인 체험을 하고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시금 던지게 됩니다.


전에는 수도원 안에서 자신이 거룩한 존재, 관상적인 수도자라고 생각했는데 모든 사람이 관상에로 초대되었고,또 모든 인간은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고, 이미 와 있는 내 안에 있는 관상의 씨앗이 싹트고 자라고 성장해야 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죠.


이 루이빌 체험을 통해서  토마스머튼은 다시금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사람이란 무엇인가? 

로 우리가 서로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서로 서로 사람들 안에 있는 하느님을 발견하는 가운데 

우리는 더 하느님을 보게 되는 거죠. 


예전에는 고개를 올려서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느님을 하늘에서 찾았다면 

이제는 하느님을 사람들 안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거죠. 


아까 제가 사랑의 눈으로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이 관상기도라고 했습니다. 

이제 사랑의 눈으로 저 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기 시작한거죠. 


그러고 마지막 질문으로 이제 토마스머튼이 관상을 통해서 하게 된것은 무엇이냐 

우리가 다음 시간부터 살펴 보게 될 종교간 대화입니다. 


이 관상을 통해서 우리만 하느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만 사람들 안에 있는 하느님을 통해서 사랑과 자비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인들도 자기 안에 있는 어떤 영적인 것들, 존재의 근원적인 것들, 

자기 자신을 넘어서 초월적인 자아를 찾아가는 것, 하느님을 찾아가는 

그런 관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이 관상을 통해서 사랑의 눈으로 절대자를 바라보는 그런 삶을 통해서 

어떻게 우리가 서로 종교간의 대화를  할 수 있을까! 

그런 질문으로 넘어가는 거죠. 그런게 바로 토마스머튼이 1968년에 시도했던 거죠.

<관상적인 대화>


토마스머튼이 이런 하느님을 찾아가는 여정에서도 처음에 가졌던 질문에서 다른 질문에 답을 해가는 과정에서 하느님과 더 깊이 나아가는 일치, 또 사람들과의 일치, 다른 종교와의 대화 일치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치는 그냥 똑같이 되는게 아니죠.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과정들을 보게 되면 

토마스머튼이 처음에는 자기 자신에게만 갇혀 있었는데 

점점 자기 자신의 삶의 테두리가 영적인 영역이 더 확장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깨달은 사람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개방성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열려진 마음, 예수님께서 하느님께서 자비로운 마음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고 나누고 보편적인 구원 의지를 가졌던 것처럼 토마스머튼도 점점 개방된 마음,열려진 마음, 

너를 받아들이는 마음,너를 이해하려는 마음,너를 존중하려는 마음,

그런 마음들이 성장해 나갔죠. 

또 분리된 게 아니라 하나의 통합된 그런 마음, 

육신과 영혼이 분리된 게 아니라 하나로 통합하려는 것, 


수도원과 세속,수도원 밖을  분리된게 아니라 통합하려는 마음들

 이것을 비이원론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또 영적인 친교를 나누려는 의지들이 있었습니다. 

깨달은 사람들이 깨달은 사람들을 알아본다는 것인데 

영적인 친교를 통해서 다른 종교, 나와 다른 사람들과 찬교를 나눌 수 있는 단계에 가려면 

보다 더 자기 자신의 종교 안에서 더 깊은 일치와 영적인 성장을 이루어야 된다는 것을 

우리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토마스머튼의 영성에 있어서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일상을 살아가는 것이죠. 

매일매일 우리가 기도하고, 주어진 시간과 공간을 거룩하게 하며, 하느님의 뜻을 쫓으며 살아갈 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의 은총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토마스머튼의 영성을 조금 더 요약해 본다면, 

모든 것을 은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거죠. 

하느님의 은총이 없다면 우리들은 어떤 영적인 성장을 이룰 수 없습니다.


아오스딩 성인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이 은총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이제 

기도(관상),수행생활, 사랑의 실천을 이런 것들을 이야기했죠.



그러나 이것들의 실천에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게 하기 위해서 나를 비우고 버리는 것, 

또 그런 환경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침묵과 고독 

이런 것들이 필요하다고 그랬죠. 


또 중요한 것중에 하나는 

 letting go 흘러갈 것은 흘러가게 두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죠. 

내 안에 하느님께서 활동 하실 수 있도록,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게 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준비를 하는 겁니다.


이 준비를 하기 위해서 제가 말씀드린 것 기억하시나요? 열처녀 의 비유 말씀드렸었죠? 다섯 처녀는 이것을 가지고 있었고, 다섯 처녀는 이것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그랬죠. 이것이 뭔가요? 기름이라고 그랬죠.


모든 것은 신랑이신 주님을 내 안에 모시기 위해서 그 기쁨의 잔치로 들어가기 위해서 

그 많은 것을 통해서 보다 더 철저하게 예수그리스도의 고독과 만나기 위해서 

님의 음성을 잘 듣기 위해서 침묵과 고독의 시간이 필요하고, 

내 뜻이 아니라 이 비우고 버림도 뜻과 연관되어 있다고 그랬죠.  


순명(obedience)에 대한 이야기 했었습니다. 

나를 비운다는 것은 내 뜻을 따르는 게 아니라 내 뜻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에 순명한다는 것이죠. 

이것과 연관해서 성모님의 자기비움, 예수님의 자기비움에 대해서 설명해 드렸던 게 생각납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내 안에 거짓 자아, 표면적인 자아죠, 

경험적인 자아. 이 거짓 자아로부터 벗어나서 참된 자아를 회복하고 참된 자아를 찾아가는 것이죠. 

이 참된 자아는 무엇이라고 그랬죠?

하느님께서 주신 자아,본래 자아라고 그랬죠. 

하느님께인간, 아담을 창조할 때 본래 주신 그 어떤 자아를 회복는 것, 

그런데 그 자아를 우리 힘으로 회복할 수 없게 되었어요. 그런데 누가 오셨죠?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셨죠. 예수님께서 새 아담이 되셔서 우리를 본래의 자아를 찾을 수 있게끔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께 온전히 의탁하고 예수님과 하나되어 갈때 예수님의 그 사랑과 예수님의 그 신성으로 말미암아서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 속으로 들어가고, 하느님과 하나되어 갈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 참된 자아는 하느님께서 주신 이 본래의 자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온전히 일치할 때 우리는 본래 내 모습을 갖게 되는데 관상은 이 본래의 자아, 하느님과 지복직관이라고 말씀드렸었죠?


고린토 전서 13장에 나오죠.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1코린 13,12)


지복직관, 이 하느님나라에서 하느님과 영적인 깊은 축복과 깊은 만남, 행복함 이것을 지복직관이라고 그러는데 이 관상은 죽고 난 다음에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 영적인 일치, 천상의 행복을 지금 미리 맛보는 거라고 그랬죠? 그래서 관상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안에 있으면서 본래 나의 모습을 회복함으로써 하느님과의 행복을 미리 맛보는 겁니다.


그래서 이 관상의 기도는 어떤 특별한 수도승이라던지, 갈멜이라던지 이런 아주 특별한 사람들만 하는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해야 되는 것이라고 그랬죠.


아마 이 방송을 듣고 있는 분들 가운데 나는 천국 가고 싶지 않다. 나는 하느님을 만나고 싶지 않다. 이러 분 계세요? 아무도 없을 겁니다.



관상은 하느님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분과 온전히 일치하고 하나된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지금 여기에서 그분을 자주 만나고 자주 체험하고 그렇게 해서 그분과 하나되는 지복직관의 경험들을 하게 될때 우리의 영성은 우리의 마음은 더 하늘마음으로 변화되어 가고, 그것을 바로 제가 자기초월이라고 그랬죠. 나를 넘어서 하늘과 연결되는 어떤 자아의 상태를 초월된 자아라고 그랬죠. 자기를 넘어서 예수님과 일치할 때 우리는 관상을 통해서 지금 여기에서 하느님과의 만남,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를 체험할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하느님과 예수님과 일치를 가장 잘 보여주는 때가 언제죠? 특별히 성사를 통해서 그 가운데서도 미사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몸과 피를 내 안에 받아 모시게 되는 겁니다. 영성체 할때 그 어떤 때보다도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때도 많지만 하느님과 예수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미리 맛보게 되는 겁니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미사에 간다는 것은 예수님과 일치된 상태, 예수님과 하나된 상태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런 하늘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천국을 미리 체험하는 거죠. 그래서 마치 미사에 가지 마라 그것은 최악의 경우입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오지 마라로 비슷한 의미로 들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여러분들이 만약 미사가 무엇인지를 안다면은 아마 까무러칠 겁니다.' 이런 표현을 쓰시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토마스머튼의 영성을 배우면서 토마스머튼  영성이 아주 특별한 영성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교회에서 하고 있는 고해 성사라든지, 매일 미사를 바치는 것, 그리고 또 여러가지 성경을 통해서 배우고 느끼고 기도하고 하는 것을 더 잘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지 교회가 하는 모든 것에서  떨어져 있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토마스머튼 책을 읽기를 권하기 보다 그 전에 성경을 먼저 읽으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제 다른 어떤 영적인 시련이라든지 영적인 침체됨 런 것을 느낄 때  다른 방법으로 

나와 똑같이 쓰러지고 힘들어했던 그런 토마스머튼의 책을 읽으면서 

토마스머튼과 함께 기도하면서 나의 영성을 쇄신할 수 있고, 새롭게 할 수 있다는 그런 것일 겁니다.


그래서 토마스머튼은 끊임없이 하느님을 찾고자 했고, 하느님을 만나고자 했고, 하느님 안에 머물고자 했지만 마찬가지로 우리와 똑같이 실수도 하고 실패도 하고, 장상과 다툼이 있기도 하고, 여러가지 어려운 시간도 겪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토마스머튼에게서 더 매력을 느끼는 것이죠. 그분이 그런 과정들을 다 하나하나 글로 표현을 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어느때보다도 더 생생하게 토마스머튼의 삶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 볼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토마스머튼의 영성을 배우면서 토마스머튼의 성모님에 대한 사랑들,제가 성모님을 유리창에 비유했었죠. 성모님은 너무나 깨끗한 분이셔서 성모님을 바라보는데 성모님은 사라지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눈에 보인다고 했죠. 우리도 우리 마음 속에 순명과 비움,겸손과 사랑, 관상에 들어가기 위한 핵심 키는 바로 순종과 겸손이라고 그랬죠? 그런 순종과 겸손을 통해서 내 자신이 온전히 비워졌을 때 우리 역시 맑은 유리창이 되어서 우리를 바라보는데 우리는 사라지고 바로 예수님이 유리창 너머로 보이게 될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집과 이기심 집착에 사로 잡혀 있을 때 내 마음에 때가 가득할 때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자신만 바라보게 되 거울이 되어버린다고 말씀드렸죠. 지금 내가 내 마음의 유리창이 얼마나 깨끗한가? 내 마음의 유리창이 얼마나 지저분한가를 살펴보는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내 마음 안에는 유리창이 많이 있어요. 유리창 안에는 찌꺼기도 많고 죄도 많고 정말 치워버리고 싶은 것도 많이 있을 겁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더 하느님과 하나되기 위해서 예수님과 하나되기 위해서 필요한 게 3가지 라고 말씀드렸죠.기억나실 겁니다.


1.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

2.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

3.이웃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


내가 무엇보다도 그동안 살아오면서 내 안에 얼룩졌던 것이 많이 있을 겁니다. 토마스머튼 처럼 방탕하게 살고, 청년 시절에 하느님을 모르고 하느님을 거부하고 살아왔던 시간들. 또 어머님 아버님을 잃고 홀로 있으면서 정말  괴롭고 우울하고 좌절의 시간들. 여러가지 여러분들도 상처가 많이 있을 겁니다. 그런 것들을 상처들이  회복되고 치유되어서 오늘을 잘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과거의 상처에 계속 누르고 누르고 억누르고 두 얼굴로 사는 사람들도 참 많아요. 사람들 앞에서는 항상  밝게 웃고 있지만 자신의 가면 때문에 오히려 홀로 있을 때는 외롭고 비참하고 나 혼자 있는 것이 두렵고 이런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과거의 상처에 얽매여서 계속해서 불편해 하면서 또 다른 사람들한테 상처를 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아버지한테 상처를 받은 그대로 내 아들에게 상처를 주는 아버지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권해드리고 싶은 것 중에 하나가 나의 과거의 아픔과 상처가 떠오를 때 그것을 어떻게 하라고 그랬죠? 하느님께 봉헌하라고 그랬죠. '주님 제가 잘못했던 것들,죄스러웠던 기억들,지워버리고 싶은 많은 기억들 이제는 당신께 모두 봉헌합니다. 주님 그 많은 상처들을 당신의 십자가로 다 치유되었으리라고 굳게 믿습니다. 이제 앞으로 새로운 마음으로 살아가겠습니다.' 라고 기도드리면서 떠오를 때마다 계속해서  봉헌하시고 또 계속해서 주님께 올리시면 좋겠습니다. 그럴 때 과거의 나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now here)에서 하느님을 만나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도 좀 더 자유로워지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까지 나를 보살펴 주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성령을 통해서 더 큰 선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에는 내 눈에는 고통스럽고 아프게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더 멀리 내다볼 때 더 큰 일을 하시는 우리보다 더 크신 주님께서 더 좋은 곳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굳은 믿음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나의 부족함, 나의 장점, 나의 약함, 나의 미래, 나의 주변에 있는 어려운 환경들 그것을 있는 그대로 주님께 봉헌하며 바라볼 때 조금더 자유로워지실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 선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 그 믿음이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다는 것은 아까 말씀드린대로 하느님의 섭리에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내어 맡긴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보는 관점과 하느님이 보는 보는 관점이 분명히 다를 것입니다. 하느님이 보시는 관점이 더 크시리라는 것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내 방식대로 고칠려 하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느님의 자유로움,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실 수 있도록 내 의지를 온전히 내어맡기는 것 오늘 시작기도에서도 했듯이 내 의지를 주님께 온전히 맡겨드리는 것, 그래서 내가 아니라 하느님을 온전히 선택하며 사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일 것입니다.


여기에 또 같이 반복되서 강조하는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하느님께서 분명히 우리를 선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그런 믿음이 가득 차 있을 때 내 안에 서서히 예수님의 자리가 더 넓어지게 됩니다. 전에는 내가 내 삶에 일부였던 예수님, 가끔씩 생각나는 예수님이었다면 이제는 나의 전부이시고, 나의 모든 삶에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실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을 내 안에 모시고 있을 때 나는 어떻게 될까요? 이웃들도 예수님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지요. 이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좀 더 수월해 집니다. 전에는 이웃이 던졌던 말 한 마디 때문에 그 자매가 그 형제가 했던 그 말 한 마디 때문에 쉽게 말해서 속 시끄럽다고 그러죠. 앉아있어도 누워있어도 또 기도할 때도 늘 형제 자매가 생각나기도 하고 계속 이럴 때 이렇게 말할껄, 저럴 때 저렇게 말할껄~하며 속 시끄럽게 지냈던 것이 더 여유로워지는 겁니다. 내 마음의 연못이 호수가 되어서 같은 돌이 던져져도 아무렇지 않은 그런 느낌이 들때 영적인 자유로움에 들어간 거죠.


그래서 하느님께서 인도해 주신다는 것을 압니다. 실제로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누군가를 용는 것은 하늘 차원의 사랑이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처음 하늘 차원의 사랑을 배우기 위해서는 좀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여러가지 방법으로 용서에 대해서 말씀하시지만 용서가 내 안에 스며들고 받아들이기 까지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셨던 그 용서를 배워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셨던 것처럼, 아담이 지었던 그 죄를 용서해 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 하느님의 용서 방법을 배워야 되는데 사실 쉽게 이야기 하자면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가 보통 상징적으로 4000년이 지난 후에 예수님이 오셨다고 그럽니다.아담의 죄 이후로. 다르게 바꾸어 이야기 하자면 하느님도 인간을 용서하기 위해서 4000년이 필요했습니다. 긴 시간이 필요했다는 의미도 있을 수 있을 겁니다. 물론 하느님은 시간이 없기 때문에 하느님이 보실 때는 그 4000년이 한 순간 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 편에서 볼 때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기다림의 시간.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린 것처럼 우리도 그 사람이 오실때까지 받아들이고 용서하기 위해서는 그분 곁에 머물면서 기다리고 침묵하는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나도 가라앉고, 또 상대편도 가라앉을 수 있는 그런 여유가 필요합니다.


부정적인 감정이 막 일어날 때 제가 어떻게 하라고 했죠? 하늘로 자꾸 올리라고 했죠.하느님께 자꾸 봉헌하고, 주님께 자꾸 말씀드리는 습관을 들이라고 했죠. 그러다 보면 점점 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도 생기고, 하느님의 섭리에 뭔가 나를 맡길 수 있는 것도 생겨나게 됩니다.


리고 또 토마스머튼이 여러가지 그런 과정들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마음, 또 하느님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생겨났던 것처럼 그 사람들을 보면서 나 자신을 들여다보게 되는 힘도 생겨나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의 실수, 다른 사람들의 모습은 나를 보는 거울이다.' 이런 말도 있습니다. 내가 더 주님과 더 가까워지게 되고 더 주님의 마음 안으로 들어갈 때 용서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고, 내가 용서할 자격도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런 과정들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방법들을 배우게 되고, 하느님의 신비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토마스머튼의 영성들을 간략하게 요약을 했는데요,


결국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갈라2,20) 

내 안에 이미 와 계신 그 주님을 발견하고, 

주님과 함께 성장해 나아갈 때 나의 영적인 삶은 더 풍요로워지고,

지금 여기에서부터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맛보며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어갈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쓰러질 수도 있고, 물론 미운 사람이 생길 수 있고,물론 잘못도 할 수있습니다. 우리는 쓰러지고 잘못되고 하느님을 거부하고 그런 잘못된 모습으로부터 좀 더 자유로워 질 수 있는 은총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그래서 지금 하느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원망하거나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또 다른 은총의 선물을 통해서 그분을 바라볼 수 있고, 

그분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입니다. 

아버지의 집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그런 용기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뒤에 있는 렘브란트의 그림에서처럼 우리가 오늘 하느님 아버지께로 되돌아가고, 하느님 품에 안겨서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 앞에서 "저는 아버지 집에 살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저를 받아주십시요"라고 기도할 때 그분 품에서 그분과 함께하는 영적인 충만함, 기쁨을 맛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첫째아들처럼 저렇게 때때로는 교만하기도 하고 하고, 때때로는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성실하게 산다고 하면서도 때때로는 영적인 교만함에 살 때도 있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아버지의 품으로 되돌아갑시다. 

겸손한 마음으로 아버지와 함께 살아가고,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도 역시 그런 자비의 마음으로 이웃들과 함께 

나와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은총을 간구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기를 빕니다.


오늘 이 시간 토마스머튼의 영성에 대해서 큰 아웃 라인으로 요약해 드렸습니다. 다음 시간부터는 어떻게 토마스머튼이 종교간 대화를 시작했고, 종교간 대화에 관계된 여러가지 기본적인,기초적인 교리로부터 설명을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모쪼록 여러분들이 이 강좌를 통해서 이 나눔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의 마음,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을 배워 나가시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 모두를 사랑이 되기를 초대하신다는 것을 다시금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