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36회 종교간 대화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3_현대영성가 토마스 머튼과의 만남_박재찬 신부 해설

은가루리나 2020. 5. 2. 14:27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성 베네딕도 왜관수도원의 박재찬 안셀모 수사 신부입니다.


지난 시간에 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에 나타난 종교간 대화에 대한 것,

또 다른 종교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것,

그리고 그 구원의 문제에 대한 것들 이런 것들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아마 여러분들도 평소에 모호하고 또 관심도 있으셨고, 혹은 다른 종교를 대할 때

많이 궁금하셨던 부분일거기도 할겁니다.


예전에 어떤 청년이 저한테 전화가 왔어요. 그래서 반갑다고 인사를 나누고, 근데

그 청년이 저한테 울먹이면서 말했어요.


신부님, 제가 아주 정말 친한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가 저한테 너무너무 울면서 저한테

이런 전화를 했어요. 난 지금 너무 안타깝다. 왜냐하면 나는 너를 너무너무 사랑하는데

네가 우리 교회에 나오지 않아서, 네가 구원받지 못하게 될까봐 나는 너무너무 슬프고

마음이 아프다. 제발 우리 교회에 나와서 나랑 같이 구원받자.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물론 저한테 전화 온 그 청년은 가톨릭 신자였고 그 청년의 친구는 개신교 신자였나 봅니다.

여기에 모순이 뭘까요?

왜 그 교회만 다니면 구원을 받고 그 교회를 다니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는 걸까요?


많은 사람들이 의문시 합니다.

그 객관적인 구원하고 또 주관적인 구원에 대해서 또 혼란스러워하기도 하구요.

구원 받는다, 구원 안 받는다. 이 자체가 그렇게 딱 결정될 수 있으면 마치 그 교회만 가면

다 구원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좀 의아하지 않는가요?


야고보서에서도 보면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그랬습니다.

근데 그냥 그 교회 다니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맞지 않죠.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기준으로, 지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죠.

세례를 기준으로 구원 받고, 안 받고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세례는 구원의 시작이라고 그랬죠. 완성이 아니라!


지난 시간에 제가 객관적인 구원은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서

예수님의 그 수난으로 말미암아서 파스카의 신비로 모든 사람이 구원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게 바로 객관적인 구원이죠.


그래서 모든 사람이 구원받았기 때문에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이미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미!

그렇지만 아직 나의 구원이 완성이 안 되었다고 그랬잖아요 그죠!


구원을 완성하는 것을 교회에 와서 배워나가고 또 교회에 와서 그 하느님 나라를 사는 법을

익히는 거죠. 그래서 제가 사랑을 배우는 곳이 바로 교회라고, 또 성당에 다니면서 우리가

진짜로 해야 될 것은 뭐 교리를 많이 배우고 지식이 늘어나고 이런 것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방식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성당에 나온다. 이런 말씀을 제가 드렸었죠 그죠!

기억나실 겁니다.


그래서 정말 말씀드리건데 이건 꼭 기억하십시오.

구원되고, 구원 안 되고 하는 것은 우리가 결정할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일이십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느님이 우리를 심판하십니다.


우리가 구원되고 안 되고는 마지막까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공의회 문헌에서 구원의 가능성이 있다. 구원 될 수도 있다. 이렇게 표현을 한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원되고 안 되고를 우리가 결정할 수 없는데, 그 개신교 친구는 우리 교회에

안 나오면 구원 못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 보편적인 구원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죠!

그리고 하느님 나라는 죽고 난 다음에 가는 게 아니라, 이미 우리 가운데 있다 그랬잖아요 그죠!

구원된다는 것은 이미 내가 여기에서 예수님을 만나는 것과 연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미 내가 우리 가운데에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그 안에서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거죠.

그러니까 구원받고 안 받고 하는 것들은 내가 사랑이 점점점 되어가고 있음을, 점점점 만나고

예수님과 일치해서 예수님의 마음이 되어갈 때 우린 그 안에서 구원이 무엇인지 조금씩 조금씩

깨어나게 될 겁니다.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것이 바로 토마스 머튼은 관상적인 깨어남이라고 그랬잖아요 그죠!

다 연결되잖아요, 앞에 했던 게. 다 연결이 되고 있습니다.


근데 우리가 한 가지 명심해야 될 것은 제가 한 가지 일화를 들려드리면,

예전에 토론토에서 대학교 다닐 때, 대학원 박사학위 코스할 때 그 '문화와 믿음'이라는 그런 코스,

과목이 있습니다. 그 과목에서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막 하는데, 저는 예전에 한국 신학교에서

배운대로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다양한 종교가 있는데 그 가운데 가톨릭은 너무 좋은 종교라서 마치 부산에서 서울 가는데 제일

빠른게 비행기잖아요. 비행기처럼 제일 빨리 갈 수 있고 제일 잘 갈 수 있는게 가톨릭이고, 다른

종교들은 뭐 기차가 될 수도 있고, 뭐 버스가 될 수 있고 또 자전거가 될 수도 있을거다'


이렇게 설명을 했더니 교수님이 그것은 설명이 부족하대요.

왜냐하면 구원의 은총은 거저 주어지는 거기 때문에 마치 가톨릭은 되게 좋은거고 그 다음에 다른

종교는 좀 나쁜거고 이렇게 설명한다고 하면 그것은 가톨릭 우월주의에 빠질 수 있다는 거죠.

물론 가톨릭이, 저도 가톨릭이 최고의 종교라고 믿고 있지만 다른 종교에 대한 존중을 못 한다는

겁니다.


공의회에서는 분명히 다른 종교를 존중해주라 그랬잖아요 그죠!

그러면 또 그리스도교 안에서 이런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는 거하고 또 나아가서 그 구원관이

점점 확장되어서 신, 하느님을 통해서 구원받는 걸로 이렇게 확장되어 가기도 하고, 나중에는

다른 구원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다원주의라는게 생겨나고 또 뉴에이지라는게 생겨나면서

점점 그 구원에 관계돼서 좀 더 다른 해석들을 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다원주의가 그런 경향을 띄게 됩니다. 그런 부분들을 오늘 살펴보게 될 겁니다.

오늘은 서론이 좀 길었네요.


자, 우선 지난 시간에 제가 시작기도를 안 했더니 어떤 분께서  왜 기도안하고 했냐고 그러시던데

오늘 기도 다시 시작하면서 하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좋으신 주님, 저희가 당신과 또 다른 사람들과  만남을 통해서 당신을 찾고자 하고

특별히 다른 종교와의 만남을 통해서 당신의 마음을, 당신의 복음을 전하고자 합니다.

이 배움의 시간을 통해서 저희 마음안에 당신의 사랑의 마음을 부어주시고 다른 종교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는 마음도 심어주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네, 우선 제가 복음 말씀을 하나 먼저 읽어드리겠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에 대한 설명을 조금 해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요한 복음 3장 6절 이하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하였다고 놀라지 마라.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한 말씀이시죠.

성령께서는 불고 싶은 대로 분다.

이런 표현을 쓰셨고 또 영으로부터 다시금 태어나야 된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래서 니고데모가 다 큰 어른이 어떻게 태어납니까! 이런 말씀을 하죠.


그렇지만 영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죽었다가 다시 아기로 태어나는게 아니죠.

예수 그리스도로 다시 새롭게 태어난다는 거죠.

그래서 갈라디아서 3장을 읽어보면 이런 구절도 나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여러분은 다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없고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새롭게 태어나서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며

살아갈 때 구분이 없어지는거죠. 유다인도 그리스인도 남자도 여자도 종도 하인도!


그래서 토마스 머튼도 나중에 후기에 쓴 글에서는 유럽인도 아시아인도 이렇게 확장되어서

이 구절을 설명하는 구절이 나옵니다.

점점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하게 되면 경계를 넘어서게 되죠.

경계를 넘어서서 더 개방성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성령에 따라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사람들은 좀

다른 삶, 제가 아까 요한 복음에서 읽어드렸던 것처럼 영에서 태어난 이도 이와 같다.

그래서 영에서 태어난 이는 이제는 새로워졌기 때문에 좀 다른 모습으로 산다는 겁니다.


특별히 성령의 활동에 대해서 강조하는 이유중에 하나는 그 다른 종교안에도 성령이

활동할 수 있다는 겁니다. 다른 종교 안에서도 성령이 활동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예전에 제가 한국에 왔을 때, 제가 이런 비유를 자꾸 드리는 이유는 굉장히 딱딱한 내용

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에게 재미있게 설명해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제 논문 지도교수님과 같이 한국의 여러 사찰이라든지 또 가톨릭 수도원을 방문하면서

이렇게 시간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무당, 샤머니즘의 굿하는 것을 같이 봤습니다.

7시간 정도 되는 굿이었는데 그 가운데 4시간 정도 굿을 옆에서 지켜봤습니다.


근데 그 무당이 굿할 때 돈이 되게 많이 들잖아요. 되게 많이 드는데 , 경주에서 굿을

했었는데 그곳을 마치고 왜관에 있는 저희 수도원으로 같이 오는 길에 차안에서 교수님이

저한테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저렇게 작은 영이 내리는데도 돈이 저렇게 많이 드는데

진짜 성령이 내리는 우리 가톨릭의 미사는 그에 비하면 공짜다.'

뭐 이런 표현을 하셨습니다. 그렇죠!


근데 그 표현들 안에는 교수님께서는 아, 다른 종교안에서도 어떤 성령이, 때론 악령이

활동할 수도 있겠죠. 악령은 여러 곳에서도 활동하기도 합니다.

근데 성령, 어떤 영적인 것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다른 종교안에서도 어떤 진리를 찾아나가고 또 어떤 선을 찾아나가고

사랑을 찾아나가는 그런 다른 종교안에서도 하느님의 영은 활동하실 수 있다는 겁니다.


방금 들었죠 그죠! 불고 싶은 데로 분다. 필요한 곳에!

그래서 그 선교사가 하기 전에 이미 하느님은 그곳에 계셨다. 이런 표현을 쓰죠.

하느님의 영은 이미 그곳에 계셨다. 이런 표현을 씁니다.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니라 그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의 <교회의 선교사명> 그회칙이죠. 그 선교사명의 회칙 22항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성령의 임재와 활동은 개인 뿐만 아니라 사회의 역사, 민중 종교에 영향을 준다.

하느님은 여러 방식으로 개인들 뿐만 아니라 그 영적 부유함으로 전체 민중들에게

전체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드러내는데, 여기에 그들의 종교는 주요하고 근본적인 표현이다."



라고 그렇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종교간 대화에 있어서도 성령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시면서

그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1986년 10월 27일 세계 기도의 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모든 순전한 기도자는 성령에 의해 부름을 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 성령은 신비한 방식으로 모든 이의 마음 속에 있다."


모든 이의 마음 속에 성령이 있다.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교황님께서 특별히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다양한 종교를 믿는 분들, 지도자들 또 종교에

관계되는 타종교에 관심이 많으셨고 종교적인 그 대화에 관여를 많이 하셨죠.

그래서 이 분은 한국에도 방문하시면서 아시아에 있는 이런 종교들이 앞으로 큰 역할을 할꺼다.

이런 예언적인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다른 종교적 전통에 있는 기도, 고행, 단식, 전례, 순례 등은 하느님을 향한 신을 향한 창이다."


창문이다 이런 표현도 쓰셨습니다.

다른 종교에 있는 여러 가지 고행법들에 대해서도 존중해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다양하게 활동하실 수 있다는 것을 또 전제하셔야 됩니다.


그 다음에 이어서 공의회 이후로 이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활동은 계속해서 더 확장되어

가는데 1988년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교황청 종교간대화 평의회를 설립합니다.

약자로   'PCID'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교황청 종교간대화 평의회를 설립합니다.


자, 종교간에 서로 대화하기 위해서 교황청이 직접 나서기 시작하신 거죠.

그래서 이때 <대화와 선포>라는 문헌을 발표하셨는데 이건 91년에 발표하셨습니다.

발표하셨을 때 네 가지 종교간 대화법에 대해서 설명을 합니다. 이 문헌에서.


첫 번째는 삶의 대화, 두 번째는 행동의 대화, 세 번째는 신학적 교환의 대화,

네 번째는 종교적인 체험의 대화 이 네 가지를 합니다.

그런데 이 네 가지가 토마스 머튼이 한 그 종교적인 대화의 방법과 아주 긴밀히 연관이

되어 있습니다. 나중에 후기에 또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 <대화와 선포>라는 문헌에서는 이 다원주의 세계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증언은

서로 다른 종교와 문화를 지닌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를 포함한다. 이렇게 대화를 해야된다는

것을 강조하게 됩니다.


특별히 사도행전 17장 이하에 22, 28절을 인용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또 이어서,


"그리스도인들은  끊임없이 다른 종교인들과  신뢰와 존중의 관계를 쌓아가며,

더 깊은 상호 이해와 화해 그리고 공동선을 위한 협력을 증진해야 된다."

이런 표현을 하면서 점점 종교간 대화에 대한 어떤 불을 지피게 됩니다.


물론 2000년에 발표한, 교황청 신앙교리성에서 발표한 선언문에서는 너무 지나치게

종교간 대화를 강조하다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해서 놓치게 되는 것을

우려해서, <주님이신 예수님>이라는 문헌에서는 다원주의를 경고합니다.


그래서 신앙의 종교적인 상대주의에 빠지는 것을 우려해서 타종교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자이시며 타종교에는 어떤 결정적인

결함이 있다.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중대한 결함이 있다.


그래서 다른 종교간 대화를 열심히 하는 사람들한테는 이 문헌에 대해서 비판을

많이 합니다. 뭐 그래서 타종교에 상처를 입혔다. 이런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제가 한 말이 아니라 다른 종교간 대화를 나누는 분들입니다.


자, 그러면 여기에 우리가 하나의 딜레마에 빠지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했는데 근데 또 하느님은 보편적인 구원

의지를 가지고 있어요.  근데 여기에서 종교다원주의에 대한 설명을 조금 해야되겠습니다.

그죠. 종교다원주의!


오늘날  그리스도인으로써 타종교를 보는 입장에는 4가지 입장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배타주의, 아까 공의회 이전의 모습이었죠 그죠!

두 번째는 뭐였죠? 포괄주의. 그렇죠. 역시 여러분들은 공부를 잘하셔서 기억을 잘 하시네요.

포괄주의! 그리고 또 다른 입장이 하나 뭐냐면 다원주의입니다. 다원주의!

그리고 네 번째는 상호대화와 협력,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네, 이걸 상호관계 모델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자, 앞에 배타주의, 포괄주의는 설명을 했습니다 .그죠!

근데 다원주의는 뭐냐! 다원주의는 쉽게 이야기하자면 종교들이 똑같다. 다 비슷하다.

그래서 이런 설명도 합니다. 빛이 비치고 프리즘이 있습니다.


그러면 프리즘에서는 빛이 몇 가지 색깔이 있죠? 일곱 가지 색깔이 있죠.

그래서 하느님이 프리즘을 통해 빛을 비치면 다양한 종교가 이렇게 색깔, 빨주노초파남보

를 가지고 다양한 종교를 비치고 있는거다. 다 똑같다. 결국은 다 빛에서 오는거다.

좀 그럴듯 하죠? 그죠!


지금은 다원주의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리고 또 이 이야기를 하기전에 제가 재미난 일화 하나를 설명드릴께요.

지난 9월에 제가 네델란드에서 열렸던 종교간 대화 국제회의에 참석을 했었는데 그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이 네델란드에 북부에 있는 젠 리버라는 불교 사찰이 있습니다.

거기를 방문했어요. 거기에는 네델란드 사람들이 일본에서 불교를 배워와가지고

절을 짓고 거기에서 수행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거기는 일본 불교는 결혼을 하기 때문에 결혼한 분들이 있었지만 그 승려복장을 하고,

어떤 스님은 3일은 자기 아내랑 3일은 가정에서 지내고 4일은 절에 와서 지낸대요.

스님으로 살면서 이렇게 가정생활도 하시는 그런 특이한 케이스를 보게 되었는데

그때 그 윌리브로드 수도원에 살고 계시던 요셉 수사님께서 운전을 해주시면서 가셨어요.


그리고 그 사찰에서 예불하는 것을 같이 봤습니다. 보고는 또 수도원 그 불교 스님들이

사는 모습을 다 보시고는 같이 차를 마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아, 너무 똑같다. 우리 수도원에서 가톨릭 수도자들이 사는거랑 이 스님들이 사는거랑

결혼하고 안하는 것 빼고는 거의 똑같다.


기도하고 예불을 드리고 또 어려운 이웃을 돕고 명상을 하고 하는거 보면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결국은 이 산꼭대기에서 다 하느님을 만날꺼다.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길은 다르지만 결국은 다 산을 오르다 보면 결국은 다 한 꼭대기에 올라갈꺼다.

이런 말씀을 탁 했어요.


그래서 제가 빙긋이 웃으면서 이런 말씀을 드렸어요.

수사님, 그거는  힉(John Hick)이라는 영국의 장로회 목사님이신데,

존 힉이라는 신학자가 이야기한 종교다원주의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더니 흠칫 놀라시더라구요.


그리고는 옆에 계셨던 다른 신부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아마 내가 볼 때는 같은 산에

오르지 않고 어쩌면 다른 산에 오르지 않을까! 이런 표현을 썼어요.  자기는  결국은 같은

산에 오를 것 같지만 꼭대기가 다 다르지 않을까!  이런 표현을 쓰면서 같이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자, 여기에 보면은 이 다른 종교가 다 같다.

이렇게 설명을 했는데 그러면 결국은 다 하느님께 만날꺼다. 일리가 있죠? 그죠!

그런데 왜 여기에 모순이 있을까요?

가톨릭 교회에서는 이 다원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하느님은 보편적인 분이시고 하느님을 다 믿으면 그죠, 뭐 불교를 믿든, 힌두교를 믿든, 아무튼

진리를 찾아가면은 결국은 하느님을 만날꺼다. 이렇게 설명을 했습니다.

그럴싸하지 않나요? 오늘날 많은 종교인들 가운데서도 이 다원주의를 믿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가톨릭에서는 이 다원주의를 배척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 상대주의, 상대주의라 그러는데 뭐냐하면 그러면 불교를 믿든, 그리스도교를 믿든,

힌두교를 믿든,  뭐 이슬람을 믿든, 종교의 차별이 없어집니다. 차등이 그죠?

모든 종교가 다 같아져요.


그리고 예를 들면 심지어 종교 아닌듯한 그런 이상한 종교도 많아요. 그죠!

뭐 사이비 종교도 있고, 그 종교에 빠져가지고 재산을 다 날리고 이런 분들도 계시잖아요.

그런 종교를 믿어도 결국 하느님께로 가는 걸까요, 그죠? 의문이 들죠?


그리고 또 이렇게 따진다면 이 이론이 맞다면 그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필요없어요. 그죠!

예수님을 믿을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종교 믿어도 되니까.

다 하느님께로 간다면서요!


우리는 그러면 그리스도교라는 정체성이 상실됩니다. 그리스도교가 필요 없습니다.

그냥 다 하느님께로 가니까. 그래서 이 그리스도인으로써 내가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 다원주의 이론은, 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그 정체성이 완전히 사라지기

때문에 그리고 또 심지어는 혼합주의라고도 표현합니다. 혼합주의!


다 종교를 그냥 뭉뚱거려서 하나로 보는거죠. 다 비슷비슷하니까 어떤 걸 믿든지간에 상관없다.

그래서 혼합주의! 혼합주의도 그리스도교에서는 배척을 합니다.

다원주의도, 상대주의도 아닙니다. 다원주의도 더구나 아니고 그죠!

다원주의도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 그리스도교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 현재로써는 상호대화 협력, 상호관계 모델

이런 것들이 좀 강조되어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받는 것, 그리스도안에 구원이 있다는 것, 이것을

놓치지 않고, 그리스도의 고유함, 유일성, 이 유일성을 놓치지 않고 하느님의 보편적인 그런

구원의지 안에서 상대방 종교를 인정해주고 존중해주면서 서로 대화를 나누고 또 서로 배우고

나누는 이런 상태, 지금 이 상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이것을 받아들이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우리가 나중에 좀 더 살펴보겠지만 지금 조금 이야기해 볼까요!

시간이 있으니까.


이제 구원론의 관점에서 보면은 특히 나중에 뉴에이지 운동에 대해서 또 설명하겠지만 이

구원론의 관계에 대해서 계속해서 새로운 개념을  갖게 되면서 문제들이 발생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안에 그 안에 구원이 있다고 보는거죠.

예수 그리스도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러면 우리가 가톨릭이라든지, 로마 가톨릭,

뭐 성공회, 그 다음에 다른 개신교들, 뭐 프로테스탄트라든지 이런 개신교들, 장로교라든지

뭐 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안에 구원받기 때문에 우리끼리 서로 지금 갈라져 있기는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서로 대화할 수 있고 서로 그리스도교 안에서 하는 대화를,

종교간 대화가 아니라 종교간 대화안에 또 다른 거라고 말씀을 드렸죠. 기억나시죠?

그죠! 종교일치운동, 에큐메니즘(ecumenism)이라 그랬습니다.


그래서  대화가 가능합니다. 그리스도안에 있기 때문에.

근데 다른, 그리스도교 안에, 예수님 안에 구원이 있다고만 계속 주장을 하다보면

다른 하느님을 믿는, 예를 들면 이슬람이라든지, 그 다음에 힌두교에도 하느님이 있죠.

그죠! 뭐 다른 여러 자이교도 있고 그죠! 뭐 이런 여러 다른 종교들,  이런 종교들은

그래도 신(神)을 , 유대교도 있죠. 유대교도 다 하느님, 알라 이렇게 표현을 하니까

신이라고 표현을 하죠.  신 안에 구원이 있다. 이렇게 보는거죠.


그러니까 우리도 가톨릭안에도, 뭐 성공회, 개신교 안에도 우리  성부 하느님에

대한 개념이 있고, 뭐 예를 들면 유대교에서 구약을 믿잖아요 그죠!

또 이슬람에서도 아브라함까지 다 믿습니다. 그죠!

아브라함 이후에 이스마엘이죠. 이스마엘로부터 갈라져 나온 거라고 생각하죠.


그리고 힌두교에서도 절대자 신을 갈구하고 또 예를 들면 유교에서도 뭐 상재,

하늘의 주인이신 상재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다 대화가 가능해요.

그래서 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서로 대화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근데 하나가 빠졌어요. 불교, 그쵸!

불교는 신의 존재에 대해서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그냥 있는 겁니다. 그래서 믿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뭐 그걸 하지 않습니다.

신에 대해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불교랑은 신이라는 개념, 예수 그리스도라는 개념을 가지고 이야기하면

대화가 잘 안됩니다. 그래서 이 구원을 이야기하는 분 중에는  자연안에 구원이 있다.

이런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제 대화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다 창조했기 때문에. 창조! 근데 여기에도 모순이 있습니다.

이게 뉴에이지적인 그런 생각입니다. 구원론에 있어서 모순이 되는 게 많습니다.


그리고 또 그리스도교안에 구원이 있는데 그럼 물론 예수님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다른 종교안에 있는 그런 선지자들,  혹은 다른 종교안에 있는

훌륭한 사람들, 이런 사람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그냥 한 명에 불과한 그런 분으로

여길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도 굉장히 딜레마가 생깁니다.


예를 들면, 모하메드랑 예수 그리스도랑 같은 분인가요? 우린 달라요 그죠!

우리가 볼 때는 예수님은 누구예요? 하느님이세요.

그리고 다른 분들은 뭐 훌륭한 분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죠.

존중을 해서 할 순 있겠지만 예수님이 우리가 하느님이심을 부인할 수가 없잖아요. 그죠!

우린 그걸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아직 저를 가르쳐주시던 교수 신부님께서 수업시간에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아직 그리스도교의 유일성을 유지하면서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의지를 정말 요약해서

잘 설명하는 그런 이론이 아직 개발하지 못했다는 거죠.


그리스도교안에 포괄주의도 나중에 종교간 대화에서는 어떤 문제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중에 설명해드리겠지만, 근데 이런 만약에 그리스도교의 예수님을 통한 구원과 그

다음에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의지, 이것을 다 아울러서 잘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만약에 개발하고 발전시킨다면 아마 여기 계신 여러분들은 밀리언 달러의 돈을 벌게

될꺼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막 웃었는데 아직 교회에서 계속해서 이 부분에 대해서

연구중입니다.


그래서 여기까지 뭐 다 자세하게 알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앞으로 전개해 나가는

이런 배움을 통해가지고 우리가 다른 종교를 어떻게 이해하고 또 어떤 부분은

받아들여야 되고, 어떤 부분은 받아들이지 말아야 되는지 식별을 해야 됩니다.


다원주의라든지 또 심지어 그 뉴에이지 운동 있잖아요 그죠! 뉴에이지 운동!

이런 부분들도 우리가 그 종교혼합주의죠.  그러니까 종교의 시대는 끝났다.

이제 영성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런 겁니다.


그래서 뭐 예를 들면 물고기 자리는 끝났고 이제 물병 자리가 시작되었는데 이제는

어떤 다양한 영성을 통해서 뭐 기 수련이라든지 명상, 요가 뭐 이런 걸 강조하죠.

어떤 제도적인 교회를 거부하는 겁니다.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그런 시도를 하죠 그죠!

뭐 템플스테이를 가고 하면서 명상에 젖어들기도 하고 하는데, 다 좋은데

많은 젊은이들이 나는 영성(靈性, Spirituality)은 좋다.

그치만 시스템(system), 제도적인 교회는 싫다.


매일 주일 나가야 되고, 의무를 지켜야 되고, 그 다음에 뭐 소속되어야 되고~

뭐 이런 게 싫다. 영적인 게 좋다. 이 안에는 뉴에이지 운동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기존 종교의 어떤 교의라든지 또 어떤 제도를 영성으로 대체할려는 운동이 바로 그런

뉴에이지 운동인데,  이 뉴에이지 운동은 종교혼합주의의 하나의 일환입니다.


모든 종교를 다 싸잡아서 다 폐기시킬려는 그런 경향이 있는거죠.

뉴에이지 운동을 우리가 피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실 뉴에이지 운동은 그 현대인들이 어떤 영적인 갈망, 고갈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안에 또 우리 종교안에 굉장히 영적으로 풍성한 것들이 굉장히

많이 있는데 너무 지나치게 어떤 활동중심으로 또 어떤 제도중심으로 교회가 움직여

지다보니까 어떤 영적인 빈곤을 느껴서 찾는 그런 성향이겠죠.


오늘날 뉴에이지 운동은 조금은 가라앉았어요.

왜냐하면 교회안에서도 영적인 운동이 새롭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기도하는 분들도 많이 늘어났고.

그래서 우리가 정말 영적인 부분, 또 활동하는 부분들을 정말 영적인 그것을 기초로

해서 앞으로 해 나갈 때 나중에 다른 종교를 만날 때도 힘이 있는거죠.


그러면 제가 한 가지 더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좌선, 혹은 요가 혹은 기이한 명상법, 기수련 이런 것들 해도 될까요?

그쵸! 금방 강의를 들은 분들은 안 됩니다. 하겠죠.


물론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안에 이미 충만한 좋은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근데 한편으로 되기도 해요. 되기도 하는 것은 특별한 사람들이라고 생각이 되요.

왜냐하면 어느 정도 자기 종교안에서 성숙하고 자기 종교의  영적인 그런 훈련을

충만히 한 사람들은 다른 종교의 어떤 명상이라든지 뭐 이런 것들을 통해가지고

우리안에 지금 우리가 몰랐던 것들을 더 충만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주 초보적인 단계, 그리스도교에 입문한 사람들에게는 이런 다른 종교의

어떤 그런 명상법에 대해서 제가 추천해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우선은 우리 그리스도교 안에 있는 것들을 충만히 깊이 묵상하고 또 깊이 배우십시오.

그리고 또 실제로 수행을 하십시오.


그렇게 할 때 내 안에 어느 정도 예수님의 자리가, 깊이 할 때 예수님과 그분의 일치를

체험하고 그분 안에서 충만해질 때 다른 종교의 어떤 그런 명상법이나 이런 것들을

조금씩 섭렵해 나가다 보면 그동안 내가 하지 못했던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그런 은총도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발타샬 같은 경우에는 신학자였죠. 그분 같은 경우에는 다른 종교의 수행은 그

다른 종교의 세계관과 윤리관, 진리관을 같이 겸비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빠질 수 있고

그래서 배신자라는 이런 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부분을 할 때는 굉장히 신중해야 되고 조심해야 됩니다.


그리고 또 깊이 어떤 관상적인 차원의 명상에 들어간 분들은 어떤 종교적인 시스템의

차원, 제도적인 차원을 넘어갑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할 수 있게 되는데 그 부분은 나중에 그 초월적인 자아에 대한

토마스 머튼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설명을 계속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래서 오늘 여러 가지 많은 부분들을 살펴봤는데  서론격이 될 겁니다.

결국은 그 토마스 머튼이 이야기하는 종교간 대화로 가기 위해서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바로 나를 넘어가는 겁니다. 나를 넘어서!


그러니까 아까 제가 그랬죠~ 종교간 대화는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는,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만날 것인가, 그래서 내가 너에서 너에서 우리로, 우리에서 타인으로 제가

간다고 그랬죠. 기억나실 겁니다. 영적인 성숙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래서 종교간 대화는 결국 내가 몰랐던 그 타인, 그 타인이 우리가 되어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더 확장되어 가는 거겠죠.

그럼 또 다른 타인이 만났을 때 다른 타인을 만나서 서로 우정관계를 맺으면서 또 다른

우리가 생겨나는거죠. 점점 확장되어 가는 겁니다.


그렇지만 나와 똑같이 되라는게 아닙니다. 다양성안에서의 일치를 요즘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그렇게 되어야 됩니다.

남을 존중하면서 그 안에서 어떤 일치되는 부분을 찾아가는 거죠.


이 방송을 들으시는 많은 분들 또 시청하시는 많은 분들께서 지금 나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얼마나 열려있는가, 영적으로 얼마나 성장해 있는가 한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관대해지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들을 대할 때, 우리 안에는

다른 종교를 향한 개방의 마음, 열린 마음도 생겨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해주기를 원하십니다.


또 우리를 초대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초대해주고 있고, 그 초대에

우리를 도구로 제자로 쓰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의 마음으로 열려진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하면서

오늘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