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37회 대담 : 종교간 대화_현대영성가 토마스 머튼과의 만남_박재찬 신부 해설

은가루리나 2020. 5. 7. 02:23



37회 대담 : 종교간 대화_현대영성가 토마스 머튼과의 만남_

박재찬 신부 해설 (약 33분)




김남희 교수 : 찬미 예수님, 안녕하세요?
지난 시간에는 분도에 있는 분도 명상의 집에서 인사드렸는데요
오늘은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왔습니다.

오늘은 신부님과 종교 간의 대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부님 안녕하세요?
그때 신부님께서 말씀해 주셨던 그 기억들을 하나같이 되새기면서 살아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이 자리에서 뵙게 돼서 너무 좋습니다.

토마스 머튼 하면 가장 많이 떠오르는 게 사실은 종교 간의 대화였었거든요.
저희가 사실 이 주제를 하기 위해서 긴 시간을 관상이란 주제로 해왔었는데요.
사실 처음에는 관상이란 주제를 할 때 '왜 이렇게 길게 하지?'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돌이켜서 생각해 보니까 
'종교 간의 대화를 하기 위한 정말 중요한 토대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박재찬 신부 : 사실 토마스 머튼 신부님께서 마지막 말년에는
종교 간 대화에 굉장히 심취하셨고
다른 종교 안에 있는 관상 생활
또 다른 종교 안에서 어떻게 이 관상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고
또 다른 종교가 이 관상의 상태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느냐? 묘사하고 있느냐?
여기에 관심이 많이 갖게 되었어요.

그래서 마지막에 이 관상적인 대화를 나눠야 된다.
왜냐하면 이 관상이라는 것은 마치 모든 인간 안에 기본적으로
모든 종교 안에 스며들어 있는 공통적인 그런 부분이기 때문에
이것을 통해서 대화를 나누면 좋겠다.

그런데 이 관상이라는 단어를 굳이 다른 종교에서 쓰고 있지는 않지만
동양에서는 명상이라는 그런 표현들을 통해 가지고
이제 나를 넘어서 뭔가를 하려는 거죠.

자기 자아에 있는 내 안에 있는 영적인 그런 부분들이 깨어나서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표면적인 내가 아니라
정말 영적인 다른 세상 또 종교적인 그런 어떤 영역 안에서 나를 넘어서
나를 변형시켜서 뭔가 그 안에서 어떤 영적인 것을 찾으려는 그런 갈망들이
모든 종교 안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것을 토마스 머튼이 관상적인 대화로 표현하게 된 거죠.


김남희 교수 : 네 맞습니다.
토마스 머튼의 자기 초월을 향한 실천적인 행위가 바로 종교 간의 대화에서
나왔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종교 간의 대화가 한국 사회에서 중요한 이유가
한국이란 사회가 사실 종교 백화점이라고 할 정도로 다종교 사회이기 때문에
더 중요한 것 같거든요.


박재찬 신부 : 예전에 제가 지금 현재 수도승 측 종교 간 대화에
사무총장님 하시던 윌리엄 신부님께서 한국을 방문하시고 난 다음
이렇게 표현하셨어요.

내가 볼 때에는 이 한국은 참 희한한 나라다.
왜냐하면 다양한 종교가 이렇게 같이 어울려 있지만 실제로 이상할 만큼
평화롭게 지낸다.

물론 예전에 한동안은 어떤 다른 종교에서 다른 종교의 성상을 부순다던지
그런 일이 있었지만,
그래도 대체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서 서로 다른 종교가
불교라든지 그리스도교라든지 유교라든지 이렇게 공존하고 있지만
서로 다툼이 없는 좀 평화롭게 지내는 나라인 것 같아서 특별히 좋고.

특별히 또 이제 종교 간 대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게 뭐냐 하면
이 아시아 안에서 베트남이라든지 한국은 그리스도교가 원래 아시아에서, 
(물론 유럽에서 건너왔지만, 원래는 아시아죠. 그런데 아무튼
아시아 안에서 특히 이 두 나라는
그리스도교하고 불교가 서로 아주 비슷한 퍼센티지로 같이 공존하고 있어서
둘 간의 대화의 좋은 모델을 발견할 수 있을 거다.
뭐 이렇게 이야기도 많이 하셨어요.


김남희 교수 : 네 맞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실 일반 신자 분들도 처음부터 모태신앙으로 신자가 된 분들도 있지만
80년대에 들어오면서 저희 가톨릭 신자들이 급증을 한 계기가 되는 것도
사실 20대 30대 이제 직장 생활을 하면서
성인이 되고 나서 신앙을 갖게 된 분들도 많거든요.

그분들이 처음부터 신앙이 없었느냐가 아니라,
불교 신자였기도 한 경우도 있고 특히 저희가 예를 잘 드는 경우가
할아버지가 유교 분이셨고 어머니는 불교 신자고 아버지는 종교가 없고
대학 들어와 서울로 와서 종교를 갖게 되면서
예를 들어 가톨릭 대학교에 들어가게 되면 가톨릭 신자가 되어서
한 집안 안에 여러 종교가 공존하는 이런 사례들이 굉장히 많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신부님께 그냥 개인적으로 여쭤보고 싶은 건데,
신부님께서는 처음으로 타종교를 접한 계기가 언제였을지 궁금합니다.



박재찬 신부 : 재미있는 질문이네요.
왜냐하면 제가 예전에 강의할 때, 처음에 영적 성장에 대해서 얘기할 때,
처음 제 어머니 배속에 있을 때부터 안셀모였다고 말씀드렸는데,
저희 부모님이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저는 태어나서 70일도 못돼서 세례를 받고 모태신앙으로 자라왔는데,
실제로 생각해보니까 제가 처음으로 타 종교를 만난 건 누구냐 하면
저희 할아버지였어요.

할아버지는 아주 독실한 유교 신봉자였었고 유교를 믿으셨고
소위 말하는 선비셨어요.
그래서 아침에 할아버지가 일어나시면 의관을 정제하시고
그다음에 시조를 한편 읊으시고
그리고 저한테 천자문도 가르쳐 주시고, 지방 쓰는 것도 가르쳐 주시고
법도, 예의 이런 것들을 굉장히 강조를 많이 하셨습니다.
제가 할아버지한테 받았던 교육들은 제 일생에 거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어디 가던지 항상 인사를 잘해야 된다.'
이런 말씀을 많이 하시고 그러셨는데
그런 인사하는 법들, 뭐 이런 여러 가지 많이 알려주셨는데,
할아버지께서 6남 1녀 7남매를 두셨는데,
그 가운데 넷째가 가톨릭 사제가 되었어요.
그 당시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이 유교에서는 자식을 갖고 결혼을 한다는 게 굉장히 큰 인륜지대사죠.
그런데 결혼을 안 한다니까 할아버지는 너무 화가 나셨어요.

그래서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할아버지가, 나중에 주교님이 되셨는데
이 넷째 아들이 신학교에 갔다는 소식을 몇 년 후에 알게 되었어요.
왜냐하면 이 아들이 안 들어오니까.
큰 아버지는 신학생 시절에 숨어 다녔어요.
방학 때는 집에도 못 오고 다른 데 가서 숨어 지내시고 그러셨어요.
할아버지는 원래 엄격한 분이셔 가지고.

그런데 할아버지가 이제
이 서울 신학교-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그 당시에는!
계신 데를 알았어요.
그래서 할아버지가 이렇게 막 화가 나셔 가지고 막 서울로 올라오셨어요.
그런데 마침 서울에 왔는데,
신학교에서 신학생들이 까만 수단을 입고 줄을 지어 가지고
아무 소리 없이 질서 정연하게 내려오는데 그 장면을 보신 거에요.
그걸 보시고는 감동을 하셨나 봐요.
'아~ 이런 데면 우리 아들을 맡길만하다.' 이런 마음이 드셨나 봐요.

그래서 할아버지는 아들을 데리러 갔는데 실제로 데리고 오지도 못하고
그냥 집으로 오셨는데, 그 이후에도 계속 반대는 하셨지만
나중에 다른 신부님의 설득으로 세례를 받고
그다음에 아들이 사제라는 것에 대해서 자랑스러워하시고
나중에 12월 2일인가 그때 사제에서 주교품을 받았어요. 아들이.

근데 그다음 날 12월 3일에 돌아가셨어요.
많은 분들이 '기다리셨다.' 뭐 이런 얘기를 하시는데,
그런데 제가 할아버지에 관하여 재미있는 이야기를 드린 이유는
할아버지의 태도가 바뀐 거에요.

뭐냐 하면, 유교였을 때에는
할아버지께서 의관을 정제하고 시조를 읊고 막 그러셨어요. 아침에.
근데 세례를 받고 난 다음에는 어떻게 되셨냐면,
아침에 일어나셔서
똑같이 의관을 정제하시고 성호를 긋고 아침 기도를 바치는 거에요.

제가 늘 할아버지랑 잠자고 했기 때문에 또렷하게 기억이 납니다.
항상 아침 기도를 바치셨어요.
이 틀은 그대로 있지만 안에 내용이 바뀐 거죠. 알맹이가.
할아버지의 삶의 태도에서는 그런 게 느껴졌었어요.

그런데 이 종교 안에서도 다양한 수도승들이 있고
다양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안에 들어가 보면은 그분들이 어떤 수행 생활 같은 경우에도
세상을 떠나 수도원이라는 곳에서 살면서
독신을 지킨다든 지 아니면 가난하게 산다든 지,
여러 가지 종교 안에 많은 가르침들이
사실은 내용이 윤리적인 것들은 비슷한 것들이 많아요.

그래서 이런 안에서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게
토마스 머튼한테는 큰 핵심이었던 것 같아요.

그 이외에도 제가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다른 불교도 만나고
제가 ESL 할 때는 무슬림들도 만났는데,
무슬림들 만나 보셨는지 모르겠는데, 아주 친한 친구도 있었어요.
그런데 정말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이슬람 하면 부정적인 이미지를 많이 갖고 있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극단적인 진보주의자들이라든지 보수주의자들이 문제가 되는 거겠죠.



김남희 교수 : 네 맞습니다.
예를 들어 이슬람교도 같은 경우에 하루 다섯 번 기도를 하는데
그걸 - 제 친구는 시리아 친구였었거든요.
저를 초대해서 그 친구가 기도 시간이 되면
저에게 시리아에 있는 기독교 방송을 틀어주고요,
본인은 메카를 향해서 기도를 해요.
그러면서 저에게 항상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 주면서
'우리의 선지자이지만 너에게는 신인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한다.'
이렇게 아직까지도 카드를 받고 있거든요.

신부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사실은 이 종교 안에 종교 간의 대화를 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뭔가가 바뀌는 게 아니라 그 태도에 있어서는,
내가 지금까지 지켜왔었던 신앙으로서의 기본 태도는
크게 변하지 않는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신부님께서
2차 바티칸 공의회를 기점으로 타 종교를 바라보는 태도가 바뀌었다.
그래서 이방인의 종교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공존하고 있는 종교의 이미지로 저희가 바뀌었는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을 좀 더 공부하고 싶다고 한다면
어떤 책들을 봐야 할까요?


박재찬 신부 : 그 가운데 특히 사목헌장도 있겠지만
그 가운데 '노스트라 에타테(Nostra Aetate)'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문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다른 종교를 어떻게 대해야 되는지 구체적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 이후에도 '대화와 선포'라든지
'PCID 교황청 종교 간 대화 평의회'에서 나온 그 문헌들도
오히려 그 문헌이 더 '대화와 선포'라는 문헌이 있습니다.
( Pontifical Council for Interreligious Dialogue )

그 문현을 읽어보시면 종교 간 대화를 어떻게 해야 되는지에 대해서
1981년도인가요? 정확히 연대는 기억은 안 나는데 그 문헌을 보시면
-번역도 되어 있을 겁니다.- 가장 잘 이해하실 수 있을 겁니다.


김남희 교수 : 맞습니다.
그 내용을 읽다 보면 타종교, 이슬람교나
한국에서도 이제 외국인 노동자들이 늘어나면서
이슬람교에 대해서도 관심을 좀 가져야 될 것 같거든요.

불교신자라든가 타종교인을 만날 기회는 엄청나게 많고
저희가 수학여행도 불교 사찰로 가고
왜 가는지도 모르고 사실은 갔었잖아요?

그러다 보면 구원의 가능성이 그리스도인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타종교인에게도 열려있다라고 되어 있는데
잘못 해석을 하거나 이해를 하게 되면
'그렇다면 굳이 내가 가톨릭 신자가 되어야 하나?'라고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가톨릭 신자로써 굳이 교회 활동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어떤 정체성의 문제로 돌아오는데,
신부님께서는 어떻게 생각을 하시나요?



박재찬 신부 : 아주 좋은 질문이십니다.
그리고 또 아주 많은 젊은이들이 여기에 대해서 질문을 많이 합니다.

실제로 아주 근본 전제 중의 하나는
구원은 되고 안되고는 우리가 판단을 하는 게 아니죠. 하느님의 자유입니다.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시는 건데, 그 가운데 여러 가능성들이 많이 열려 있는 거죠.

특히 공의회에서 가르친 핵심 내용은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 의지'입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한다.
그럼 굳이 왜 우리가 가톨릭 신자가 되어야 되고 또 성사생활을 해야 되는가?
그것은 바로 이 '부르심'입니다.

많은 민족 가운데 유대민족을 택하셨지요.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그다음에 여러 예언자들을 부르셨고
이제는 성령을 통해서 교회로,
예수님께서 교회를 설립하셨잖아요. 성령을 통해서,
성령께서 내려오시면서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교회가 구원의 보편적인 성사라고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도 정의를 하는데
이제는 이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보여줘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해야 되는 거죠.
그래서 이 교회로 우리 각자를 다 불러주시는 겁니다.
가톨릭 성가 1면에 나오는 것처럼 교회로 불러 주셨고 우리를 뽑아주신 거죠.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아무나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잖아요.
그리스도 교인들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아들 딸이 되어서 그분의 일을 협조하는 거죠.
그분의 도구가 되어서!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물론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라.' 하셨는데
그 복음을 '성경을 들고 가서 선포하라.' 이런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 더 넓게 해석한다면, 복음이 기쁜 소식이라는 거죠. 기쁜 소식이 뭐에요?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희생함으로 인해 우리 모두가 구원받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구원받았습니다' 얼마나 기쁜 소식이에요?
'이 기쁜 소식을 너희들이 가서 전해라.'
그리고 '우리 신자들도 가서 전해라. 그 기쁜 소식을!'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구원받았다.'

그런데 제가 지난 시간에 강의하면서 그것을 '객관적인 구원'이라고 했죠!
아직 우리 각자의 구원이 완성되지 않은 겁니다.
우리가 이런 신앙생활을 통해서 우리 각자의 구원을 완성해 나가고
우리 각자의 구원을 완성해 나가는 가장 좋은 길이 사랑이라고 했잖아요.
사랑을 나누고 실천할 때,
사랑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사랑이신 예수님과 하나 되게 되고
그 사랑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서 뽑아주신 거죠.

그리고 또 한 가지 더 있어요.
그리스도 가톨릭 안에는 특별히 다른 종교에 없는 게 있어요.
성사가 있어요.

유대교에도 없고 개신교에도 없고 불교에는 더욱이 없고.
미사가 있고 고해성사가 있고, 성사가 있습니다.
교회가 성사이지만
이 일곱 가지 성사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선물을 주시는 거죠.

당신 자녀들에게 특별한 선물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 선물을 통해서 예수님과 더 가까워지고 하나 되고 일치되어서
세상 사람들에게 굳이 말은 많이 하지 않더라도
기쁜 소식을 온 삶으로써 전하는 그런 역할을 하는 그런 사람들인 거죠.

그래서 우리는 성당에서 미사를 하고 성사를 보고 여러 가지 활동을 하고
이 모든 것들을 통해서 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의 일?
바로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당에 나와서 그런 자세로 기쁘게 봉사하고
기쁘게 성사에 참여해야 될 것입니다.


김남희 교수 : '성사를 통해서 받은 은총을 교회 안에만 쓰지 말고
교회 밖으로 그 복음을 전하라.' 이렇게 해석해도 될까요?


박재찬 신부 : 네, 그렇게 해석하면 반쪽짜리 해석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은총은 교회 안에만 있는 게 아니죠!
'성령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는 말씀처럼 하느님의 은총은 모든 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은총들은 우리가 알아봐요.
'아, 저게 하느님의 은총이구나.' 우리에게는 보이죠.
그런데 하느님에 대해서 잘 모르는 분들은
그것이 하느님의 은총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죠.

또 항상 하느님의 은총이 항상 우리 눈에는 좋게 보이는 것.
그것만 은총이라고 생각했을 때에는
그것은 우리가 볼 때에는 고통의 눈으로 바라볼 때도 있는 거죠.

하느님의 은총은 때때로 우리 눈에는 아픔일 수도 있고 고통일 때도 있어요.
예를 들면, 어린 아기에게 엄마가 예방 접종을 맞추기 위해
큰 주사기를 엉덩이에 찰싹 꽂고.
그런데 그것은 아기가 더 아프지 않도록 건강해지도록 하는 거잖아요.

마찬가지로 우리 눈에는 때때로는 이것이 은총이 아닌 것 같고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를 버리신 것 같고, 예레미아 예언자도 그렇고
예수님도 심지어 겟세마니 동산에서 어떻게 했어요?
십자가 위에서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하셨을 만큼
우리 눈에는 때때로는 은총이 은총으로 안보일 때도 있죠!

마찬가지로 다른 종교인들이나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그것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보이지 않을 때가 있죠.
그러니까 여러 곳에서 작용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점점 더더
더 거시적인 안목으로 하느님의 마음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식별할 수 있는
그런 게 필요하지 않겠나 그런 생각이 듭니다.


김남희 교수 : 네. 반 채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신부님 강의를 들으면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그런데 아마 또 머리로 움직여지고 마음은 움직여지는데
소위 말해서 저희가 그걸 감동이라고 얘기를 하죠,
신부님 강의를 들으면, 아 감동을 받고 '해야 되겠다.'라는 생각이 드는데,
막상 미사를 갔다가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예를 들어서
불교 신자를 만난다고 했을 때 그 불교 신자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신앙에 대해서 특히 얘기를 잘 안 하려고 하거든요. 서로가.

왜냐하면 그 안에서 결국 교리에 관한 부분들이 부딪칠 수도 있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배타적이지는 않지만 방어적인 자세로 저희가 다가갈 때가 많아서요
다원화된 사회 안에서 타종교인을 만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복음의 정신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세요.



박재찬 신부 : 사실은 네, 굉장히 어려운 질문이기도 하고
아직 해답이 없는 질문이기도 해요.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포기하지 않고
다른 종교들이 서로 다양한 선에서 일치에 이르게 되기까지에는
굉장히 우리가 할 수 없는 영역이 있고    
또 하느님께서 해야 될 영역도 있는 거고
우리가 인간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영역도 많이 있습니다.

특히 불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하고
이 불자들이 얘기하는 구원관하고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물론 구원이라는 그 상태의 모습은 비슷할지 모르겠지만
개념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서 구원이 이르지만
불자들은 인격적인 관계 자체가 없어요.

그래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오히려
그런 종교 간 대화에서
특히 불교 그리스도교 대화에서는 이런 이슈가 옛날부터 있었어요.

왜냐하면 서양 사람들은 교리를 갖고 처음부터 우월적인 입장에서
'봐라, 우리 그리스도교 안에 너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게 있다.
우리도 명상도 하고 수행도 하고 수도원도 있다.
그리고 또 여러 가지 예불하고 종도 치고 우리도 다 있다.
그래서 너네가 가지고 있는 것 다 있으니까 너네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다.'
이렇게 표현을 하는 거죠.

그런데 그렇게 하다 보면 이 불자들 입장에서 볼 때는
'우리도 그리스도교에서 갖고 있는 것 반대로 다 갖고 있다.
전통이 있고 오히려 우리가 더 전통이 더 오래되었다. 그리스도교보다.'
이렇게 설명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리를 갖고,
뭐 예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 공사상에 대한 것
뭐 이런 것 서로 이야기 나누다 보면 계속 부딪치게 돼요.
물론 학자들은 지금도 그런 얘기 계속하고 있는데,
그래서 토마스 머튼이 이야기하는 것은 '아 그게 아니다.
점점 지적인 대화보다는 체험의 대화, 영적인 대화를 많이 나눠야겠구나.'
이런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나중에 말년에 가서는 불자들이 수행하는 곳에 직접 찾아가서
이야기도 나누고 수행 방법도 나누고
그래서 지적인 대화에서 영적인 대화, 경험적인 대화.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하느님은 초월적인 분이시기 때문에
하느님 체험에 대한 이야기는 인간의 언어로 다 담을 수가 없게 돼요.
인간의 언어로 다 담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언어에 담긴다면 하느님이 아니시지요.

근데 불자들도 나름대로 예전에는 수덕적인 관상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나름대로 자기의 노력을 통해서
나를 넘어서 뭔가 깨달음을 얻는 그런 기회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것을 토마스 머튼은 나중에
'모든 것이 다 그것마저도 하느님 은총이다.' 이렇게 표현을 하지만
그런 다양한 묘사들을 통해가지고
토마스 머튼도 또 그리스도교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고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또 사막 교부들이라든지
불교 선사들의 제자들을 두고 가르치는 모습도 아 참 유사하구나!
뭐 이런 것들을 배우게 되지요.

그래서 '아, 이제는 영적인 유대가 필요하다.'
불자들 만날 때 혹은 다른 종교인을 만날 때.
그 각자의 종교 안에서 충실히 사는 사람들은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각자가 다 그 교리 안에 나오는 개방성과 사랑, 자비
이런 것들이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아마 각자의 종교 안에서 그런 것이 없는 사람들은, 
아직도 미숙한 상태,

자기 종교만 생각하는  그런 미숙한 상태에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거에요.

그래서 만약에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한 사람이라면
또 불자로서 부처님의 마음을 간직한 사람들이라면
더 많은 자비와 나눔을 할 거에요.


서로 영적인 연대를 하자는 겁니다.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사실 더 많아요.

유대인들도, 유대인이 굉장히 열심히 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많은 80% 이상 되는 사람들이 유대교를 믿지 않고
그냥 세속적인 삶을 산다고 그러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마찬가지 우리 한국 사회 안에서도 50%가 넘는 사람들이
또 종교를 갖고 있지만 표면적으로만 갖고 있
실제로 종교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 50%이상입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혹은 또 불자들이 또 유교를 믿는 사람들이
각자의 종교 안에서 더 영적으로 깊이 들어가서 서로 유대를 맺고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더 깊은 사랑과 자비를 나누면서
살아야 되는 거죠.


사실 한국 사회 안에 교회도 많고 절도 많습니다. 성당도 많고.
정말 이곳에 사랑의 열매들, 연꽃이 피어나야 되는 그런
서로 유대를 하면서 그렇게 만들어 가야 되는 거겠죠.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종교인들끼리 함께 영적인 유대를 통해서
더 어려운 이웃들을 도와가면서 우리 한국 사회가
더 나아가서 아시아 세계가 서로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그런 것들을 키워나가야 되는데
종교인들이 서로 대화를 나눠야 되는 게 이래서 필요한 겁니다.


김남희 교수 : 네. 또 하나 질문드리고 싶은 점은
예전에 미국 유니온 신학교에 폴 리터 교수,
신부님께서 강의하셨던 그분께서 한국에 오셨을 때
여러 불교 사찰을 다니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거든요.

'불교와 그리스도교 간의 대화나 열린 자세를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리스도교 안에서
조금은 보수적인 그러니까 전통을 중요시하는 그리스도교인과
조금은 개방적이고 열려 있는 그리스도교인들 간에 대화도 중요하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박재찬 신부 : 네 좋은 지적입니다.


김남희 교수 : 저는 이 종교 간의 대화에 있어서 또 하나 저희가 돌아보아야 될 점이
관상을 중요시하고 관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면
전통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는데
사실 그것은 토마스 머튼이 생각하는 것처럼
더 한 발짝 예수님의 마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중요한 토대 주춧돌의 역할이잖아요.

그런 면에서 신부님께서는 그 종교 이외에 다른 종교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조금은 보수적인 신자분들에게 아니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분들에게
열린 자세로 다가갈 때
'아 저 사람들은 저 신자들은 믿음이 약하지는 않을까?' 하고
오해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단순히 전통을 지키는 것만이 믿음이 중요한 거냐 강한 거냐 아니면 미숙한 거냐
여기에 대해서 좀 덧붙여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박재찬 신부 : 네 좋은 질문이십니다.
그리고 또 꼭 필요한 질문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전통이 뭔가? 이것을 한 번 기억해 보셔야 될 겁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두 가지 모토가 있었죠.

원천으로의 회기. '예수님이 원래 어떻게 했는가?' 이걸 한 번 알아보자.
'사도시대에 사도들이 어떻게 했는가?' 이것을 한 번 알아보자.
그리고 '이것을 우리 시대에 어떻게 적용할 건가?'
이게 이 두 가지 아주 큰 모토였죠.

그래서 이 전통이 형성되어 오는 과정 중에는
그 시대의 문화나 역사 또 정치적인 배경 경제적인 여러 가지 것들이
다 연결되어서 오늘날 우리 시대의 미사라든지 그리스도교 안의 전승들이
이렇게 형성되어 왔어요.

그래서 이 전통 자체는 굉장히 아름답고 또 전통 자체가 틀린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과정에서 우리 시대에 안 맞는 전통이 있을 수 있죠.

예를 들면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면서
우리 시대에 맞지 않게 미사를 너무 제사 위주로 해서
벽을 바라보고 미사를 드리다가
'아니다. 미사는 예수님께서 친교의 잔치다, 파스카의 잔치다.'라고 얘기해서
신자들을 보고 미사를 하기 시작했잖아요.

앞의 것이 틀렸느냐?
그게 아니라 본래의 예수님의 의도를 다시금 재확인한 거죠.
그리고 또 옛날에는 이 제사라는 성격을 굉장히 강하게 했기 때문에
더 그런 게 있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 시대에 어떻게 하면 예수님께서 본래의 원하셨던 것.
본래에 하고 싶어 하셨던 의도가 무엇이었는가를 
전통의 흐름에 맞춰가지고 오늘날 우리 시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전달해 줄 건가.
이것이 굉장히 중요한 관건입니다.


그리고 전통적인 요소들을 잘 지켜나가면서도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신학자의 역할이기도 하고 우리 믿는 신자들에게도 마찬가지겠죠.

그래서 무조건 '작년에도 이렇게 했어. 그래서 올해도 이렇게 하는 거야.'
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작년에 이렇게 했는데, 그것이 올해에는 안 맞을 수 있잖아요.
청중이 다를 수 있고 또 주례하는 사람이 다를 수도 있어요.
여러 가지 과정이 있을 수 있을 거에요.
그래서 원래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를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것,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른 종교인들을 어떻게 대하셨는가?

제가 그래서 앞에 설명을 많이 드렸죠.
사마리아 여인의 비유라든지 이라든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나병 환자 열명 중에 한 명 치유받은 사람,
또 예수님께서 의도하셨던 것이 무엇이였는 지에 대해서
마태복음 25장의 내용들을 통해서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 세례를 받고 안 받고가 아니라, 
세례는 구원의 시작이지 완성이 아니고
정말 이 구원의 중심이 되는 것은
바로 당신의 이름으로 이웃들에게 선행을 베풀었느냐 안 베풀었느냐
이런 거였죠.
약자를 방문했느냐 안 했느냐 이거였습니다.

그래서 전통에 대해서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내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다른 종교인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그리고 또 무작정, 무조건 다 개방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 그리스도교의 고유한 면이 있기 때문에!
우리 그리스도교 안에서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특히 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모두 구원받을 수 있다고
예수님께서 직접 알려주셨기 때문에!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다는 이 말의 의미를 다시금 재해석 해 내는 건
신학자들의 역할이겠죠.

제일 중요한 것은 다른 종교인이든 종교인이 아니든
또 종교를 믿고 있는 사람들 안에서 서로가 보수든 보수가 아니든
모두가 다 한 명의 인간,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하느님의 인간이라는 거죠.
그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친구로 맞아들이고
그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때,
전통과 보수 안에서 서로 발전할 수 있게 되는 거죠.

꼭 진보적인 사람들이 발전적인 거고 전통적인 사람은 보수적이다.
이런 게 아니죠.

우리 그리스도교 안에서 이런 개념보다는 보다 더 진보적인 개념은
보다 더 예수님의 의도에 맞는 개념이라면, 진보냐 보수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그 마음을 닮아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그 정신을 우리 시대에 적용할 수 있을까?
여기에 마음을 쓸 때,
진정으로 그리스도교화되고 복음의 기쁜 소식이 전해지게 되는 거겠죠.
교회 안에 또 교회 밖으로도!


김남희 교수 :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어떻게 보여줘야 할 지에 대한 기준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에 대한 질문으로
귀결이 되는 것 같습니다.

현대 사회를 소위 말해서 조금 부정적으로 평가한다면,
사실 저희가 혐오라는 말을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다른 사람들을 비하하거나 언론에서도 그렇고 너무 쉽게 쓰고 있거든요.

그런 혐오 사회 안에서 진정으로 종교 간의 대화의 출발은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으로 부처님의 자비의 마음으로
같이 함께 나눠야 되겠죠.

오늘 이렇게 조금은 어려운 주제일 수도 있는데요,
종교 간의 대화의 시작이기 때문에 어려울 수 있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불교와의 대화나 타종교와의 대화를 보면서
신부님께서 말씀하시는 토마스 머튼의 정신을 조금씩 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신부님.

오늘 시간에는 종교 간의 대화에 대한
왜 필요한 지,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살펴봤는데
다음 시간에는 본격적으로 불교와의 만남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거기에 관한 이야기를 신부님과 재미있게 나누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