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38회 토마스 머튼과 불교의 만남1_현대영성가 토마스 머튼과의 만남_박재찬 신부 해설

은가루리나 2020. 5. 16. 15:11


38회 토마스 머튼과 불교의 만남1_현대영성가 토마스 머튼과의 만남

_박재찬 신부 해설 (약 31분)



† 찬미 예수님


성 베네딕도 왜관수도원의 박재찬 안셀모 수사신부입니다.

시청자 여러분, 그리고 교우 여러분, 지난 한 주간 동안도 주님 축복 속에서

다들 평안하셨는지요?


지난 시간까지 우리가 교회에서 어떻게 종교간 대화에 대해서 그리고 또 

다른 종교들에 대해서 어떻게 대하는지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을 해 드렸었습니다.


여러가지 다른 종교에 대한 이 질문들은 오늘날도 계속해서 여러 분야에서

질문이 계속 되어지고 있는 과정이기 때문에 정확한 어떤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교회에서는 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서 공식적인 가르침을 밝혔죠. 


그리고 이제 또한 앞으로 어떻게 더 발전되어 나가고 어떻게 더 이 종교간 대화를 

성장시켜 나가야 하는 가는 이제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과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간부터는, 그럼 토마스 머튼이 어떻게 이 종교간 대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가또 종교간 대화에 대해서 가르침을 주었는가, 또 어떻게 종교간 

대화를 했는가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토마스 머튼 신부님께서 하신 기도문을 함께 바치면서 

이 나눔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주님, 당신은 제가 가슴으로 외치는 소리들을 들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제 가슴 속에서 외친 이는 바로 당신이셨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은 침묵하면서 당신께서 제 안에 현존하시게 하려고

애써온 저를 용서해 주소서. 


정작 침묵 중에 저를 창조해야 하는 이는 바로 당신이십니다. 

새로운 창조만이 저를 맹목적 우상숭배에서 구해낼 수 있습니다. 


주님, 저를 당신으로, 당신의 사랑으로, 

크신 당신의 마음으로 새롭게 창조해 주소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마스 머튼이 「인간은 섬이 아니다라는 책에서, 

결국은 내가 뭔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애써서 주님께서 내 안에 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와 계신 주님의 그 마음으로 깨어나야 함을 일깨워 주고, 

또 그 깨어난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새로운 창조를 해 나가야 하는지,

또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 기도문이 잘 보여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종교간 대화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여러분들에게 그 결론을 말씀드렸습니다. 

기억나시죠? 어떻게 하라구요? 그죠. 

우리가 다른 사람들, 그리고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대하는 것,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하느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에게 한 명의 인간으로서 

사랑의 마음, 또 한 명의 인간으로서 자비의 마음을 베풀어야 하는 것, 

이것은 바로 누구의 마음이시죠? 그렇죠. 예수님의 마음이시죠.

그래서 제가 결론을 말씀드렸을 때도 예수님의 마음으로 타인을 바라보는 것, 

이것이 종교간 대화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고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또 다른 측면에서 이제 영적인 성정의 과정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면서 

제가 네 단계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다시 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영적인 성장이 필요하다고 그랬죠.

이 영적인 성장의 과정은 토마스 머튼이 잘 보여 주었습니다.

기억나시죠? 처음에는 나, 자기 중심적인 삶에서 이제 너를 생각하게 되죠, 그죠? 

그리고 너에서 이제 우리가 함께 사는 법을 배웁니다.


런데 우리만 사는 것이 아니죠? 

우리 삶의 영역 속에는 또 다른 나와 다른 타인이 다가옵니다.

그런데 이제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은 이 타인에게 어떻게 대하죠?

사랑과 자비로 대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용서도 베풀고, 그죠? 


서로 이해하고 때로는 인내하고 이런 과정에서 타인이 어떻게 변해요? 

그렇죠. 점점 이 타인이 더 넓어져서 '우리'가 되어가는 것이지요.

이런 점점 보편화 되어가는, 보편적인 더 넓은, 사랑의 범위가 더 넓어지는 거죠. 

그래서 제임스 파울러(James Fowler)가 이야기 할 때 이것을 유니버셜 라이브

(Universal Live) '보편화된 믿음이다.' 이런 표현을 썼던 기억이 납니다. 그죠?


그래서 점점 우리의 영역이 확장되어 가는데 이런 타인을 대하는 관계에 있어서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인 거죠. 다른 종교를 대할 때도 이제 다른 종교가 여러가지 

이유로 우리가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또 다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종교로서 어떤 기본적인 공통점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사랑하고 또 자기 자신을 수양하면서 더 높은 단계의 영적인 길을

찾아가는 그런 모습들을 보면서 우리는 이 종교 안에서 각자의 고유한 면이 있지만 

또 다른 공통적인 모습도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서로 다른 차이점을 서로 이야기 하면서 대화를 나누면 서로가 

성장해 나갈 수도 있고 또 도전해 나가는 부분도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부분들을 앞으로 조금씩 더 다루어 나가는데, 

이렇게 해서 우리가 점점 종교간 대화에 있어서 이런 영적인 성장이 필요하다, 

또 타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되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면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의 어떤 그런 종교간 대화에서 우리가 교회에서 갖고 있는 

공식적인 입장에 대해서도 설명을 드렸었지요?


기억나시죠, 그죠? 그래서 지금 현재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는 포괄주의적인 다른 종교 

안에 있는 진리를 찾아가는 모습들, 살아가는 모습들, 이런 모습들, 그 다른 종교 안에 

있는 다른 여러가지 모습들, 정말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그런 모습들이 이제 우리 

가톨릭 안에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자기 탓 없이 혹은 또 자기도 모르게 

혹은 다얀한 방법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그런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는 

구원을 배제하지 않으실 거다."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래서 이제 다른 종교들과의 연대, 유대 이런 것들이 앞으로의 세계 평화에 기여할 

수 있고 이런 연대와 유대를 가져야 된다는 말씀들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리고 또 "다른 종교 안에도 진리의 빛을 반영할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 교회는 계속해서 다른 종교와의 어떤 만남, 또 다른 종교와의 

어떤 교류를 통해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이고 또 그 안에서 

서로 배워 나가는 그런 과정들을 갖기를 계속해서 노력하고 있고 그런 과정 가운데 

교황청에서는 종교간 대화 평의회 PCID(Pontifical Council for Interreligious Dialogue)

는 기구를 설립해서 다른 종교와의 대화를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지난 시간까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면서 이제 앞으로 우리 가톨릭 교회가 또 다른 종교에 나아갈 때 가톨릭 교회 

고유함을 잃지 않고 다른 종교에게 어떻게 다가가서 그들에게 서로가 교류하면서 협력할 

수 있는 길을 찾아가는 것, 이것도 앞으로 우리가 해야할 숙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전에는 배타적이고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했지만 점점 이제 

성숙한 모습으로 다른 종교들을 만나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제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들을 넘어서서 또 다른 한편으로 아직도 좀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족한 부분을 우리 신학자들이, 또 일선에서 종교간 대화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숙제로 주어져 있다고 했죠.


그래서 무조건 다른 종교를 그냥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그랬습니다. 

이것을 '다원주의'라고 그랬습니다. 그죠. 그래서 이 다원주의는 상대주의라고 표현을 

했었지요. 그래서 그냥 다른 종교를 차별 없이 대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교의 고유한 

면을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다원주의는 교회에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그랬습니다. 

그렇지만 상호 관계의 모델, 서로 관련성 안에서, 관계 안에서 서로 대화하고 나눔을 하는 

이런 모델들은 앞으로 계속 발전되어져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토마스 머튼이 다른 종교에 대해서 어떻게 대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토마스 머튼은 자기 종교에 충실했습니다. 

누구보다도 트라피스트 수도회의 수도승으로서 삼위일체 하느님이신

성부 성자 성령의 믿음에 충실했었고 그 안에서 수도 생활뿐 아니라 신앙생활, 

종교간 대화도 그것을 기본으로 바탕으로 해서 합니다. 그렇지만 이제 또 한편으로는 

개방되어 있었습니다, 다른 종교를 향해서. 


어떻게 이 충실성과 개방성이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이것이 바로 토마스 머튼이 우리에게 주는 커다란 도전이요, 또 배워야 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자, 우선 토마스 머튼의 의식의 성장의 과정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토마스 머튼의 생애를 다루면서 또 영적인 성장을 다루면서도 말씀을 드렸었는데

처음에는 이제 이 도표와도 비슷합니다. 


오직 나(Self centered Consciousness)

오직 나의 교회(Exclusive Consciousness)

그래 너도 한 번(Indusive Consciousness)


처음에는 나 자신, 오직 나만 생각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요.

그래서 무신론자, self-centered라고 그러죠. 자기가 중심이 되어 있는 그런 마음. 

그런데 이제 영세를 받고 교회에 입문해서 어떻게 되죠? 

토마스 머튼은 점점 교회, 우리 교회, 가톨릭 교회에 대해서 아주 긍정적으로 

생각했고 또 심지어 가톨릭 교회에 대해서 우월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죠.


그래서 다른 종파라든지 다른 종교를 좀 배척하기도 하고 했습니다. 

칠층산」을 읽어보시면 그런 부분들을 찾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그런 우월감,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다르게 말한다면 첫 번째 단계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지요. 

Exclusive, 배타적인, 오직 우리 교회만, 배타주의라고 그러죠.


그런데 점점 이제 토마스 머튼이 영적으로 성장해 나가면서 조금씩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했습니다. 또 자기 자신의 어떤 모습들, 영적인 체험들을 통해서 

점점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면서, 저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래도 너도 한 번." 어떻게 보면 Inclusive에 해당되겠지요? 

포괄주의적인, 내재적인, 받아들인다는 뜻이지요?

Exclusive는 다른 사람들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점점 이제 너를 받아들이면서 지금 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들이 반영은 되었는데 

토마스 머튼은 점점 영적으로 더 많은 체험들을 하면서 이렇게 나와 교회, 너 이것을 

넘어서서 이제 또 다른 차원의 어떤 의식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을 이제 윌리엄 샤논(William Shannon)같은 토마스 머튼 학자는 Trans-cultural 

Consciousness라고 표현을 했습니다. 이것은 뭐냐하면 나와 너를 넘어서, 오늘 좀 

어려운 얘기들을 지금 하고 있네요, 그래도 좀 쉽게 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Trans-cultural Consciousness, 초문화적인, 다른 한편으로는 '초종교적인'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을 겁니다. 문화와 종교를 넘어서서, 나와 너를 넘어서서, 왜냐하면 

참된 자아를 찾음으로 인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내가 간직함으로 인해 가지고 

이런 의식들은 점점 더 발전해서 이제 보편적인 하느님의 의식 속으로(Universal or 

Cosmic Consciousness), 하느님 의식, 이 의식이 Cosmic ConsciousnessUniversal 

Consciousness그러니까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의식, 그러니까 이젠 예수님께서 

내 안에 살고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으로 점점 더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세상을 살아가게 되면, 이제는 '다른 종교' 이것을 넘어간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또 배타적이지도 않게 되고 모든 것들 안에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또 그 안에서 서로 대화도 나눌 수 있게 되고 또 서로 이제 더 하느님에 대한 

사랑들을 보편적으로 실천하게 된다는 거죠. 경계가 없어지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이제 Openness 개방성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점점 더 열려가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다른 종교를 향해서.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우리 종교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모든 우주의, 모든 인류의 

하느님이시잖아요. 그죠. 모든 창조물의 하느님이시고


그래서 이런 토마스 머튼의 영적인 성장 과정과 종교간 대화는 아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토마스 머튼의 영성의 핵심이 제가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라고 

그랬지요.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내 안에 사는 그리스도와 함께 그분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하고 또 사람들을 만나는 거죠. 

그러다보면 거기에는 이제 하늘 사랑, 하느님의 사랑, 초자연적인 사랑이 그들에게 전해질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떤 경계나 담이 없는 거죠. 그리고 또 우리가 보지 

못했던 또 다른 것을 볼 수 있게 하는 문이 열리게 되는 그런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의 이 의식의 성장 과정과 종교간의 대화의 과정은 아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다시금 강조해 드립니다.


교황님께서도, 지금 현재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토마스 머튼의 이런 성숙된 모습들, 

대화를 향해서 성장해 나가는 모습들을 굉장히 강조를 하셨고 또 특별히 미국 의회에서 

2015년 토마스 머튼에 대해서 소개를 하면서 토마스 머튼을 "Contemplate Dialogue"

그러니까 관상적인 대화를 하는 사람이지만 특별히 더 "영적인 레벨에서, 관상적인 

레벨에서 대화를 할 수 있는 그런 대화의 사람이었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토마스 머튼은 무엇보다도 기도의 사람이었고 또 자신의 시대의 확실성에 도전하였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면 그 시대에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 거기에 도전을 했다는 겁니다. 

교회에서 말하는 것, 혹은 또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다고 믿었던 그것에 대해서 도전을 

했습니다. 새로운 메세지를, 또 새로운 아이디어를, 새로운 생각을 던졌다는 것입니다, 

그 시대의 확실성에


그리고 영혼들을 위해 교회를 위해서 새로운 지평을 연 사상가였습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르쳐 주신 것들이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못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직 교회에서도 그렇고. 

그만큼 토마스 머튼이 했던 말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오늘날에 와서 토마스 머튼의 글을 보면서 "아, 토마스 머튼의 생각이 

바로 이런 거였구나." 그래서 교회의 여러 문헌들에서도 머튼 신부님의 이런 생각들이 

반영되어서 가르침을 펴고 있고 또 그분이 했던 여러가지 가르침들이 지금 일선의 

종교간의 대화에서 굉장히 큰 영향을 미쳐가고 있고 또 어떤 뿌리, 토대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진정으로 영적인 레벨에서 대화할 줄 아는 사람, 

또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 개척자였다고 교황님께서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토마스 머튼의 이 종교간 대화의 기본 원리가 되는 것이 뭘까요? 

어떤 원리를 가지고 토마스 머튼이 종교간 대화를시작하게 되었던 걸까요? 

여러가지 토마스 머튼이 쓴 책이 많이 있는데 그 가운데 토마스 머튼이 인도 

캘커타에서 한 연설문을, 연설을 하기 위해 적은 노트를 보면 그 안에 네 가지 기본을, 

토마스 머튼의 생각을 우리가 뽑아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토마스 머튼은 종교간의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성숙해야 한다

자신의 종교 안에서 충분히 수행을 하고 충분히 어떤 영적인 훈련을 통해서 단련되고 

성숙한 사람, 그런 사람들이 종교간 대화를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이런 수행 생활하는 수도승들은 종교간 대화에 있어서 반드시 해야 

되는, 마치 소명과도 같은 그런 거다, 이런 말씀을 빗대어서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두 번째는 잘못된 혼합주의를 피해야 된다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그냥 단순히, 뭐 예를 들면 불교랑 그리스도교랑 서로 섞여서 함께 

공유해서 그냥 너도 좋고 나도 좋고 이런 단순하게 서로 종교를 다 혼합해서 나중에 

결국에 다 만나게 될 거다, 다원주의와 같은 그런 이론을 펼쳐서는 안된다. 우리 각자 

종교의 고유성을, 또 전통을 잃어버려서는 안된다. 자기 종교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대화한다는 것은 그것은 대화가 아니라 그냥 통합인 거죠. 그죠. 뭐 '제설통합주의' 

이렇게 이야기 하는데 그런 혼합주의에 빠져서는 안된다. 


그 다음 세 번째는 다른 종교간에는, 전통적인 종교간에는 서로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차이점을 서로 존중해 주어야야 된다는 것입니다. 

나와 다르다고 해 가지고 그게 틀린 것이 아니지요. 

그런데 우리는 흔히들 인간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가다보면 나와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다른 사람의 

다른 의견에 대해서 쉽게 나와 다르다고 틀렸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틀린 것이 아니지요. 다른 겁니다. 

그래서 그 다름을 존중하고 세심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는 또 다른 성장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다음에 네 번째 종교간 대화의 원리는 바로 2차적인 문제들, 예를 들면 뭐 어떤 

시스템이라든지, 제도적인 것, 그 다음에 규칙, 규율, 이런 것들을 따지는 것, 

이런 것이 아니라 여기 집중하기보다는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 뭘까요? 

영적인 문제인 거죠. 영적인 문제들,   


자기를 어떻게 하면 초월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나를 넘어서, 

아까 제가 말씀드렸지요. 나를 넘어서 어떻게 하면 하느님의 의식 속으로, 

물론 불교에서는 하느님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나를 초월해서 

혹은 나를 벗어나서 또 다른 영적인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진정으로 깨어나는 삶, 깨달음의 삶을 살 수 있는가, 

또 진정한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런 것들에 집중하자는 것이지요.


그래서 특별히 깨달음의 체험을 토마스 머튼은 강조를 많이 합니다. 

깨달음의 체험, 그러니까 나를 넘어서 또 다른 하느님과의 만남, 혹은 절대자와의 만남, 

이런 만남을 통해서 우리는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이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가는 이 영적인 체험을 굉장히 강조를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런 체험을 통해서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부분은나중에 좀더 집중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토마스 머튼의 캘커타 연설문 노트에서 볼 수 있는 이 네 가지 원리들을 통해서 제가 

나름대로 정리를 좀 해봤습니다. 또 다른 부분에서도 이런 여러가지 토마스 머튼이 

종교간 대화에서 필요한 여러가지 요소들을 많이 말했었는데 그런 것들을 주욱 요약해 

보면 



첫 번째는 어떤 영적인 깨달음, 관상적인 깨어남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성숙해지고 나를 넘어가는 자기초월의 어떤 단계, 그리고 또 어떤 

지적인 대화가 아니라 체험을 통한 대화, 그 다음에 영적인 체험에 대한 깊이 있는 나눔을 

통해서 우리는 종교간에 서로가 더 깊은 연대와 공감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열려진 개방성은 토마스 머튼의 종교간의 대화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너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너에게 활짝 열려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이제는 내가 더 

성숙해졌고 내가 너를 받아들일 준비 더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또 비이원론적인 생각을 토마스 머튼은 종교간 대화에서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육신, 영혼, 또 교회 안, 또 교회 밖 이런 이원론적인 생각, 주체 객체 

이런 이원론적인 생각이 아니라 통합을 하는 그런 모습으로 다른 종교를 대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또 나중에, 이제 후반부에 제가 다루겠지만 출발점은 항상 참된 자아를 

찾는 것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우정관계, 다른 종교와 우선 교회를 이야기 하거나 

그것을 넘어서 서로 인간 대 인간으로서, 사람 대 사람으로서 서로 친밀한 우정 관계를 맺고 

서로 배려하고 나눌 수 있는 그런 우정 관계, 그리고 또 나아가서 그 다음 단계로 

토마스 머튼이 강조한 것은 바로 영적인 가족, 영적인 가족이 되는 것, 그래서 

이제는 모두가 '우리'가 되는 것, 제가 아까 밀씀드렸죠. 그죠. 

모두가 함께 한 가족으로서, 그런데 그냥 우리 혈육의 가정이 아니라 영적인 면에서 

가족이 되는 것, 이것을 강조했습니다.

이것도 나중에 후반부에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또 자비로운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 자비로운 사랑은 무엇보다도 모든 종교의 공통적인 요소기도 합니다.

사랑이 없는 것, 사랑의 열매가 없는 종교는 결국은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요.

사랑의 열매가 있는 종교, 모든 종교의 보편적인 요소이면서 동시에 어떻게 하면 

이웃에게 또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을 넘어서서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부처님의 자비를 나눌 수 있는가. 이들은 공통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이 사랑을 통해서 

협력하고 연대하고 또 대화하는 것, 이것은 기본적인 원리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오늘 이 시간에 좀더 강조하고 싶은 것 중의 하나는 영적인 친교입니다. 

영적인 친교, 'Spiritual Communion',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인데, 

이 Communion이라는 단어는 물론 불교에는 없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이제 여기에서 강조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이 Communion이라는 용어는 

우리가 성체를 영할 때 이것을 Holly Communion이라고합니다, 영어로는. 


영성체 하는 그 모습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과 우리가 성체를 통해서 하나가 되는 것, 온전히 일치가 되는 것, 

그런데 일치했을 때는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Communication은 소통인데 Communion은 진정한 Communication을 통해서 

토마스 머튼은 영적인 친교, 단순한 대화, 말을 넘어간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말을 하지 않지만 서로 통하는 것이지요.

말 하지 않지만 서로가 이미 서로를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도에서 한 켈커타 연설문의 마지막에 이런 부분이 나옵니다.

굉장히 감동적이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나눠 드리고 싶습니다.

토마스 머튼의 종교간 대화의 어떤 핵심 원리를 전해주고 있다고 봅니다.

잘 한 번 들어보십시오. 여기에서 소통은 Communication을 이야기합니다.   


"소통의 가장 깊은 차원은 소통이 아니라 영적인 친교입니다. 

Communion입니다. 그것은 말이 없습니다. 말을 넘어갑니다.

그리고 그것은 언어를 넘어서 있고 개념을 넘어서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일치를 발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새로운 일치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이미 오래된 일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미 있었던 일치를 발견합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이미 하나입니다.

("We are already one."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것은 본래의 원초적인 일치입니다.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은 이미 되어져 있는 우리 자신입니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굉장히 뭔가 새로운 도전이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미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입니다.

왜 이런 표현을 했을까요? 그렇죠.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물로서 이미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의 씨앗을 

모두 가지고 있고 우리는 이미 다른 종교를 초월해서 하느님 안에서 

모두가 이미 하나입니다.(27:25) 

그런데 이 하나임을 잊고 살고 있는 것이지요.

   

낙원에서 처음에 아담이 창조되고 그 아담으로 말미암아 아마 그 낙원에서의 삶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었죠. 그런데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서 그 낙원에서의 삶을 

살 수 없게 되었지만 예수님을 통해서 다시 그 낙원의 삶으로 회복 되었지요. 


그래서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서로 나누고 예수님 안에서 살아갈 때, 

예수님이 내 안에 살 때,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도 그런 모습들을 발견하게 되고 

그들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게 되고, 그래서 이미 예수님 안에서 회복된 

그 본래의 자아를 회복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영적인 의미에서의 친교이고 영적인 의미에서 

어떤 대화이고 이 대화는 결국은 말을 넘어가는 대화, 이미 하나임을 다시 회복하는 것, 

이것이라는 것입니다.


출발점부터 다르지요. 

서로 다른 나와 너가 만나서 서로 대화를 통해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는 하나인데 그것을 잊고 살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이를 다시 회복하자, 이것이 바로 토마스 머튼에 있어서는 

종교간 대화의 기본 원리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자, 오늘 이 시간에는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서 토마스 머튼의 종교간 대화의 원리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 각자가 영적으로 하느님 안에서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장되어 있지 않을 때는 종교간 대화는 좀 뒤로 하고 

보다 깊이 있는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그 만남을 가졌을 때, 또 예수님 안에서 깨어났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종교를 넘어갑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우리 종교 안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모든 인류의 주님이시기 

때문이지요. 그죠.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타인을 대하고 다른 종교를 

대할 때 우리는 그 안에서 어떤 장벽이나 벽을 넘어서서 서로가 통하는 부분이 

있을 겁니다, 분명히. 


다른 종교인을 만났을 때 부딪힘이 있다면 아직 내 안에 그분의 마음, 

그분의 사랑의 마음이 부족하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제 구체적인 현장에서 종교간의 대화는 굉장히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랑의 마음으로 서로 다가갔을 때, 또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영적으로 성숙한 상태에서 서로 만났을 때는 굉장히 깊은 Speechal Communion

영적인 친교를 만나게 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토마스 머튼이 티벳 관상가 샤트랄 린포체(Chatral Rinpoche)를 

만났을 때 굉장히 근원적인 친교를 이루게 됩니다.


자, 이제 오늘 새롭게 나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로운가? 

나는 정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마음으로 너와 또 다른 종교를 만나고 있는가? 

한 번 살펴보는 한 주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샤트랄 린포체와 머튼의 만남(196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