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머튼

39회 토마스 머튼과 불교의 만남2_현대영성가 토마스 머튼과의 만남_박재찬 신부 해설

은가루리나 2020. 5. 23. 16:40

 

 

 찬미예수님

 

성 베네딕토 왜관수도원의 박재찬 안셀모 수사 신부입니다.

지난 한 주간 시청자 여러분들,또 교우 여러분들 다들 주님 사랑 안에서 건강하셨는지요.

 

지난 시간까지 우리가 여러가지 토마스 머튼의 영적인 성장의 과정을 통해서 

어떻게 종교간 대화로 이어지게 되었는지, 또 종교간 대화에 기본 원리가

토마스머튼에게 있어서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살펴 드렸습니다. 기억나시죠?

 

무엇보다도 토마스마튼에게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무엇이라고 그랬어요?

영적인 성숙, 영적으로 성장한 사람들이 종교간 대화에 나아가야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에 관련해서 제가 캘커타에서 토마스 머튼이 했던 연설문 가운데 하나를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부분은 계속해서 여러분들이 좀 더 주의를 해서 집중을 해서

이 부분들을 기억하고 계시면 앞으로 계속해서 종교간 대화를 풀어갈 때

좋은 원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관상적인 대화는 반드시 긴 침묵과 오랜 기간의 명상을 통해

진지하게 영적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유보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이 관상적인 대화는 자기 자신의 수도승적 전통 안에서 온전히 성실하며,

자기 자신의 종교적 공동체의 과거와 진지하게 접촉하며,

나아가 그 전통과 다른 공동체들에게 속한 영적 체험의 유산들을 향해

열린 존재들에게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영적인 성숙을 이룬 이들이 종교간 대화를 해야 되는데

특별히 관상적인 대화,영적인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성숙해져야 된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 안에 계속해서 머물면서 영적인 수행을 해 나가면서 기도하는 가운데 

먼저 내 안에 계신 주님과 끊임없이 대화해야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것입니다. 

오늘도 기도를 통해서 이 나눔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제 가슴 속에서 잠드신 당신은 말을 통해서는 만날 수가 없지만, 

생명 속에서 태어나는 생명의 출현과 지혜 속에서 나오는 지혜의 출현을 통해서는 만날 수 있습니다. 더 이상은 당신과 더불어 어떤 대화도 어떤 경쟁도 어떤 반대도 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친교 속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제 안에, 저는 당신 안에, 당신은 그들 안에, 그들은 제 안에 있습니다.

박탈 속에는 박탈이, 냉정 속에는 냉정이, 공허 속에는 공허가, 자유 속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저는 혼자입니다. 당신도 혼자이십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저는 하나입니다. 

주님, 당신과의 말없는 사랑의 친교 속에서 당신의 사랑이 되어

나와 너와 다른 이를 만나게 하소서.아멘!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저는 이 기도문 속에서도 토마스머튼의 종교간 대화의 기본 원리들이

아주 깊이 담겨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고독 속에서 홀로 주님과의 만남 안에서 내가 그분의 마음으로 그분의 사랑으로 변화되어 있을 때

진정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참되게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이 기도문 속에서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자 이제 오늘 이 시간에는 계속해서 지난 시간에 이어서 토마스 머튼이 종교간의 대화에 있어서 

영적인 깨어남에 요성에 대해서 말씀을 좀 더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깨어남에 있어서 어떤 '하느님 체험'은 토마스머튼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 삶 속에서도 여러가지 하느님을 체험하기도 하고 하느님을 만나기도 하고, 

때때로 하느님이 안 계신거 같은 그런 부재를 체험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하느님 체험'이 어떻게 토마스 머튼에게 있어서 종교간 대화로 나아가는데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려 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제가 재밌는 이야기를 하나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내의 사진을 지갑에 항상 넣어다니는 친구에게 물었습니다. 

"자네는 중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아내를 무척 사랑하나봐.

그렇게 큰 아내 사진을 지갑에 넣어 다니는 것을 보면."

그러자 친구가 답을 했습니다. 

"난 힘들 때마다 아내 사진을 꺼내 보며 이렇게 다짐을 한다네. 

내가 이 여자하고도 살았는데 앞으로 뭔들 못하겠어. 그래 힘내자 힘!"

아내 역시 남편의 사진을 가지고 다니며 힘들 때 꺼내보며 이렇게 속으로  말한다고 합니다. 

"내가 이 사람도 인간을 만들었는데 뭔들 못하겠어.그래 힘내자 힘!"

 

서로 이제 사진을 가지고 다니는 이유가 물론 대개의 경우 자녀들의 사진, 아내의 사진, 

남편의 사진을 가지고 다니면서 본래의 관계를 한번 더 생각해 보자~ 

이런 뜻으로 가지고 다니는 것 같습니다. 

내가 이 아이의 엄마이고, 또 이 아이의 아빠이고, 이 사람의 남편이고 또 아내인데, 

본래 우리는 너무너무 사랑하는 사이였는데 힘들 때는 내가 본래 이 아이를 위해서 

혹은 또 내 아내와 남편을 위해서 정말 열심히 살아야 되는데 그것을 잊고 

나 자신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다시금 본래의 관계를 한번 더 되짚어 보자. 

그래서 우리 힘내자! 하면서 흔히들 우리는 사진을 넣고 다닙니다. 

 

또 소중한 사람을 기억하면서 보고 싶을 때 꺼내 보면서

혹시 또 가족이 이별해 있으면 다른 나라에 있거나 또 가족이 없을 때 가족이 곁에 있지 않을 때 

사진을 보면서 우리는 본래 관계를 다시금 생각하고 그리움을 달래며 또 힘을 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우리는 하느님을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이 사진은 아니겠지만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그리고 또 십자가를 넘어서 

이 모든 세상 안에 함께 계시는 성령을 통해서 함께 계시는 그 주님을 바라보는 것, 

 

제가 그것을 뭐라고 그랬죠? 주님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 

하트 이렇게~ 그리면서 설명을 드렸죠. 그게 바로 <관상>라고 그랬죠. 

그래서 주님을 많이 바라보고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고 

주님 사랑 안에서 내가 변화되고 성장하는 그런 체험들을 통해서

우리는 새롭게 다른 사람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고 그랬습니다. 

 

특별히 토마스 머튼에게 있어서는 두 번의 '하느님 체험'이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사람들을  바라보는 눈을 새롭게 가져다 주었고, 

다른 종교를 바라보는 눈을 새롭게 해 주었습니다. 

 

첫 번째는 뭘까요?

그렇죠. 마치 아내가 남편의 사진을 놓고 남편이 아내 사진을 꺼내 놓고 "힘내자 힘!" 했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겁니다. 

루이빌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 안에서 예수님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사람들 안에 있는 예수님을 사랑해야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

 

그래서 이 루이빌에서의 체험은 토마스 머튼의 이원론적인 생각, 

수도원 안과 수도원 밖을 나누는 생각,

또 인간의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않은 것을 분리해 놓은 차별하는 그런 생각들,

그리고 또 이제 수도원 안에 사는 사람들과 수도원 밖에 사는 사람들을 분리해서 보는 생각들을 

다르게 만들었죠. 이런 생각들을 통합시켜 주었습니다. .

 

그래서 이 체험을 통해서 토마스 머튼은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 되는지 깨닫게 되었죠.

그 전에는 자신은 아주 거룩하고 다른 사람들보다 더 우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타인들 속에 있는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과 내가 다르지 않다는 것,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죠.

 

그래서 토마스 머튼의 루이빌 체험은 종교간 대화에서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타인을 향한 사랑을 새롭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전에는 내가 우월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사랑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베푸는 사랑이 아니라 함께 하는 사랑,

또 그들을 존중하는 사랑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다른 사람들과 친교 맺는 법도 다르게 배웠죠. 

수도원 안에 있는 사람들과만 친교를 맺는 것이 아니라 수도원 담장이 무너졌죠. 사라졌죠. 

그래서 토마스 머튼은 이 체험 이후에 '수도원은 더 이상 저의 집이 아닙니다.'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모든 세상이 수도원이 된다고 제가 말씀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토마스 머튼의 루이빌 체험을 통해서 좀 달라진 토마스 머튼을 마주하게 됩니다. 

더 이상 대상은 대상이 아니고 하느님도 대상이 아니고,

주체와 객체의 일치라는 면도 토마스 머튼은 이 체험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그리고, 다른 종교인들도 더 이상 타인이 아니고 더 이상 이교도인들이 아니고

다른 종교인들은 존중되어야 될 대상, 더 나아가 한 형제요 한 자매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예를 들면 팅나탄 스님 아시죠? 그 스님이 겟세마니 수도원에 방문을 합니다.

그때 이 스님을 향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토마스 머튼은 팅나탄 스님을 "He is my brother" 나의 형제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굉장히 큰 차이죠. 그 전에는 이교도인이라고 표현을 했는데

이제는 형제라고 표현을 한 거죠.

그래서 이 루이빌 체험은 토마스 머튼에게 다르게 종교인을 바라보는 다른 눈을,

다른 시각을 갖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11;06

그리고 두번째 토마스 머튼이 다른 종교를 좀 다른 시각으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는 결정적인 체험이 있었는데 그게 뭐죠?

 

1968년 있었던 폴론나누와 스리랑카에서 있었던

불상 앞에서의 성령의 체험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토마스머튼이 1968년12월2일 이 폴론나누와를 방문했을 때

거대한 불상 앞에서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그 때의 체험을 다시금 기록해 놓은 부분들을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상들을 바라보면서) 저는 사물들에 관한 습관적이고 반쯤 지친 듯한 환영으로부터

갑자기,너무도 강력히, 거의 내칠 수 없을 정도로 잡아 당겨져 (저의 자아가)소멸되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내면의 깨끗함, 명료함이 마치 바위들로부터 폭발되어 나오는 것처럼

분명하고 확실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비움이요 모든 것이 자비입니다."'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비움은 순야타(sunyata) 'emptiness'를 말하는 거죠.

자비는 불교용어로는 가루나 (Karuna) 이렇게 표현을 하는데,

불교 용어들을 통해서 자기자신의 종교적인 체험을 묘사를 합니다.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자기자신의 체험들을 표현할 수 있는 용어들이 있었을 텐데

굉장히 불교적인 냄새를 주는 용어로 표현을 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토마스 머튼은 여러 이전에 1960년대 불교에 관한 책들을 접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느님 체험을 다른 종교의 용어를 빌려와서도 표현할 수 있구나~

인간의 언어는 부족하고,  인간의 언어는 초월적인 하느님을 충분히 묘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다른 종교에서 언어적으로 표현되어진 것들을 통해서 

보다 더 하느님을 좀 더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다는 것을 깨우치게 됩니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나타납니다.

 

또 폴론나누와에서의 체험이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종교를 가로지르는 어떤 영적인 체험이 가능하다.이것을 보여줍니다. 

내 종교를 가지고 있지만  다른의 여러가지 불상이라든지 다른 종교의 영적인 요소들을 통해서 

의 종교에 있는 하느님을 새롭게 표현할 수 있고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을

이 폴론나누와의 체험은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또, 이 폴론나누와의 체험을 잘 분석해 보면 십자가의 성요한의 종교적인 체험하고도

아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게 됩니다. .

 

예를 들면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든 것을 비움(sunyata)이요, 모든 것은 자비(Karuna)이다.

'(Everything is emptiness, everything is compassion)는 이 표현은

십자가 성요한의 (the All and the Nothing, Todo Y Nada)

자기 비움을 통해서 충만함으로 나아가는 이 모습들,

자기 비움을 통해서 완전한 사랑으로 나아가는 그 모습과 굉장히 연결이 많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토마스 머튼이 그리스도교 안에서 충분히 전통 안에서 영적인 체험을 했습니다.

이 영적인 체험이 바탕이 되어서 불상 앞에서 체험을 했을 때

불교적인 표현을 빌려 와서 영적인 체험을 묘사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기본에 바탕을 둔 것은 그리스도교의 영적인 체험이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거죠.

그러나 더 아름답게 더 충만하게 묘사가 되어진 거죠.

 

그래서 거기에 보면 아주 명료하다고 그럽니다.

보통 신비 체험이라고 그러면 아주 말할 수 없는 그런 이렇게 뭔가 표현할 수 없는

모호함이 곁들어져 있는데 이 폴론나누와에서의 체험은 다릅니다.

모든 것이 분명하고 모든 것이 깨끗하고 (no mystery) 신비로운 것이 없고 아주 분명해졌다.

이런 묘사를 씁니다.  마치 불교의 해탈 체험과 비슷하다.

 

여기서 좀 더 집중해서 이 분야에 대해 연구한 토마스머튼 학자인 

요셉 라브(joseph Raab) 같은 분은   이 머튼의 불교와의 대화는

그 전통에 대해서 자신이 집중한 분명한 선택이었으며, 

특별히 폴론나누와에서의 이 종교적인 체험은 자신이 그 동안 그리스도교 안에서의 전통적인

 많은 연구와 많은 영적인 체험들의 영향을 받아서 이것을 더 촉진시켰다.

촉진되는 것을 도와줬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가 내 종교에서 영적인 체험을 했어요.  다른 여러가지 영적인 공부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 다른 종교들을 만나서 자극이 되었어요. 그런데 또 다른 영적인 체험이 다가왔어요.

그런데 이 두가지가 복합되어서 또 하나의 새로운 영적인 체험을 하게 되었다는 거죠.

변증법적인 성장을 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토마스머튼의 이 폴론나누와에서의 체험은 종교적인 체험이

얼마나 관상적인 대화 종교적인 대화에 영향을 미치는지 또 가치로운지 보여줄 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의 이 영적인 체험에 대해서 좀 더 정리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토마스 머튼이 루이빌에서 종교적인 영적인 체험을 했습니다. 

루이빌에서 예수님을 사람들 안에서 보는 체험을 했죠.

그 이후에 다른 종교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갖게 되는데, 

특히 불교에 대하서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디키 스즈키라는 분과 대화를 하고 서신을 왕래하고 교황님께도 편지를 써서

자기는 관상가이지만 수도원을 떠나지 않고도 이제는 다른 종교랑 다른 관상가들이랑

사도직을 할 수 있는  방법을 터특하게 되었다는 말씀도 하죠.

 

다른 여러 많은 서적들을 연구하고 많이 직접 만나기도하죠.

직접적인 만남 서신교환을 많이 합니다. 팅나탄 스님도 만나죠.

불교와, 다른 종교와의 만남( Cross religions experience)을 통해 가지고

토마스마튼은 이제 폴론나루와에서는  종교를 가로지르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또 다른 새로운 종교적인 체험이죠. 이 체험 과정에서 보면은

의식의 변화가 점점 더 확장되어 갑니다. 

 

루이빌 체험에서 개방되었죠.다른 종교를 향해서 개방되었습니다.

폴론나누와에서는 성령 안에서 또 다른 더 큰 개방성을 갖게 됩니다.

모든 것이 비워져 있고 모든 것이 자비라는 표현을 통해서

다른 타 종교의 불교 용어를 통해서 종교적 체험을 표현합니다. 많이 달라졌죠.

 

이 때는 그리스도교 용어를 많이 사용하지만 점점 갈수록

다른 종교를 만나면서 다른 종교의 도전을 받게 됩니다. 

다양한 불교의 체험이 있구나~ 용어가 있구나~를 알게 되면서 도전을 받게 되고

이 도전을 통해 더 충만해 집니다.

 

서로 새로운 종교를 만나서 여러가지 대화를 하는 가운데 더 영적으로 더 풍부해지는 거죠.

그래서 종교간 대화에서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이 영적인 상호 도전과 상호 충만함

이런것들이 상호 풍부해짐,이런 것들이 중교간 대화에서 얻을 수 있는 열매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또 한가지 토마스 머튼의 관상적인 체험을 통해서

다른 종교와의 만남에 있어서 한 가지 풀지 못했던

그리고 또 아직도 여러 질문을 할 수 있는 요소 중에 하나가

 

불교에는 어떤 신적인 존재에 대해서 인정하지도 거부하지도 않고,

렇다고 신을 믿지도 않잖아요.  

절대자를 믿고 그 관계 안에서 종교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자기자신의 해탈, 혹은 중생의 구제를 목표로 하죠.

 

물론 그 안에도 관계가 있지만 신과 인간의 관계는 아니죠.

그런데 우리 그리스도교 안에서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인격적인 관계를 벗어나서는

설명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나는 거죠.

 

유일신을 믿는 하느님을 믿는 이런 종교적인 관계 안에서 인간의 모습을 갖고 있는 것과

자아가 하느님과 관계 없이 하는 것과 토마스 머튼은 계속해서 갈등을 하게 됩니다.

 

아무리 설명을 하려 해도 이 둘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같은 자아 같은 사람이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거죠.

이것을 인격적인 톤, 인격적인 뉘앙스를 벗어날 수 없다.

여기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대화를 하면

오히려 서로 다른 도움을 받을 수 있고 대화를 할 수 있고,

서로 풍부해질 수 있지 않느냐라고 묘사합니다.

 

차이는 분명히 있지만  같은 인간이 하느님을 체험하고,

같은 인간이 해탈을 체험한다는 측면에서는 인간의 체험이라는 같은  요소가 있지 않는냐~

이렇게 설명을 합니다. 

 

이런 모습에 대해서는 조금 더 나중에 토마스 머튼의 불교와의 대화를 좀 더 깊이 다루면서

추후에 더 충분히 얘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또 하나 토마스 머튼이 관상적인 대화에서 발견한 요소 중에 하나는

신의 핵(a Zen core)이라고 하는데,

'선'이라는 용어가 禪불교의 '선'이라는 용어하고는 다르다는 겁니다. 

'선'이라는 요소는  모든 종교의 영적인 것을 찾아가려는 자기자신을 넘어가려는 그런 요소로써의

공통적인 부분이지만 선불교로서는 불교에서 그것을 사용했기 때문에 선불교라고 구분합니다.

나중에 자세히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체험으로서의 중요성을 많이 강조합니다. 

처음의 불교를 만나면서 다른 종교를 만나면서 지적인 측면 앎으로써 배움으로써

예를 들면 처음에 헉슬리의 <목적과 수단>이라는 책을 읽고 난 다음에는 막 탐독을 하죠. 

동양의 사상에 대해서 지적인 면에서 동양 사상에 대해 접근을 하고 대화를 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루이빌과 폴론나누와의 체험을 통해서 느낀 것은

종교적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소위 체험을 나누는 것이  중요하구나~!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영적인 체험의 중요성 대해서 토마스 머튼은 계속해서 강조하게 되고

경험적인 것, 실존적인 것을 삶의 자리에서 나누게 되지 너무 이상적인 대화, 교리적인것은

우리 삶에 종교간의 대화에서 물론 필요한 요소이기는 하지만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토마스 머튼이 여러가지 다른 종교인들과 대화하면서

또 중요하게 생각한 것 중에 하나는 우정 관계입니다. 

서로가 인간 대 인간으로써 친교를 나누고 서로 함께 하고 이런 것들을 강조하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토마스 머튼이 체험을 강조하고 서로 도움을 받고 대화를 통해서

관상적인 것을 어떻게 해야 되는지 설명을 쭉 드렸습니다. 

 

이제 지금부터는 토마스머튼이 불교와 어떻게 만났는지에 대해서  

아주 조금 구체적으로 다루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조금 다른 챕터라니까 경계가 생겨났는데, 토마스 머튼이 그 동안 여러 처음 불교를 만나서

여러 다른 불교와 만나서 대화를 하게 된 과정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맨 처음 불교를 만나게 된 것은 1937년의 올더스 헉슬리의 <목적과 수단>이라는

이 책을 읽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에 보면 동양의 금욕주의와 동양의 신비주의에 대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는 동양의 어떤 사상에 대해 매료가 됩니다. 

도서관에 가서 동양에 관련된 여러가지것들 특히 금욕주의와 신비주의에 관계된 것들을

샅샅이 찾아서 읽었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런데 이제 동양의 불교의 가르침이라던지 신비주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지만  

아시아의 사상을 처음에 접했을 때는 아까 말씀드린 지적인 접근이었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신비적인 동양의 사상을 인정하거나 받아들이기 보다는

그런 영향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졌지만 그것을 이교도이거나 받아들이기 보다는

'아~ 좋은 방법이다. 이런 것이 있구나~ 이 정도 어떤 실천적인 도구로써 괜찮구나~

이렇게만 받아들였지 이것을 진정으로 대단하다~ 말년에 가졌던  것처럼 배워야겠다~

이런 마음을 가지지는 못했습니다.

 

칠층산에서 내린 결론

동양의 신비주의는 '악은 아니지만은 그 자체로별로 유용하지 않다.'

실천적으로는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그리스도교 안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실제로 좌선을 해봅니다.

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으면 어떻게 돼요?

다리가 엄청 저리죠? where is my leg? 다리가 너무 저려서 이런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토마스머튼은 그것을 한번 해보려고 시도는 했지만

실제로 불교에 대해서 긍정적인 생각보다는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합니다.

 

왜냐하면 허무주의(nihilism) 이건 이단일 뿐이다.

또 자기부정을 많이 하기 때문에 고통에 대한 얘기도 많이 하죠.

부정적인 그런  생각들을 많이 갖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도 합니다.

"동양과 동방 정교회의 신비주의 안에서 기술과 몸의 조절,

내면의 훈련에 대한 강조는 우리(가톨릭)과 그 기술들에 대해서

얼마나 극도로 무관심했는지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좌선을 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방법들을 묘사를 하는데

우리 그리스도교에서는 이런 것들에 너무 무관심했다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토마스 머튼이 점점 시간이 흘러 가면서 다른 종교를 만나고 연구를 하면서

조금씩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특히 선수행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됩니다.

 

예를 들면 1949년 6월4일에 중국 난징 교회의 바오로 유핀이라는 대주교님께서

겟세마니 수도원을 방문했을 때 그 대주교님께서 수도원에서 강연을 하셨는데

이 강연에 매료가 됩니다.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표현을 하는데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중국의 관상적인 삶과 수도생활에 대해서 말을 하면서

불자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퍼붓는 비난이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교에 의해 중국에)세워진

병원들은 매우 훌륭하나 (중국 그리스도교에는) 관상가들이 없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라고

토마스 머튼의 영적일기에 보면 나옵니다. 이 부분을 보면 재미있죠.

그리스도교인들이 학교도 세우고 병원도 세우고 활동은 했지만

진정한 그리스도교 관상가는 중국에 없다고 진정한 관상가를 보내달라고

겟세마니의 관상 수도자들에게 말씀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머튼이 중국에 관상가들이 많이 있죠. (30;00)

중국에도 스님들이 있고 유교도 있고 도교도 있고 어떠한 영적인 진리를 찾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점점 깨우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또 중국에 이런 관상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 특히 대주교님의 방문을 통해서 깨닫게 되기도 합니다.

 

점점 토마스 머튼이 여러가지 모양으로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서 여러가지 방법에 대해서  

하느님이 토마스 머튼에게 뭔가 새로움을 주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러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고 계시는 거죠.

 

홀로 수도원에서 살고 있지만 대주교님의 목소리를  통해서 또 책들을 통해서 

여러가지 본인의 여러가지 내적인 체험을 통해서 토마스 머튼에게 다른 종교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끌어 주고 계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마 여러분들의 삶의 주변에서도 꼭 다른 종교인들이 아니더라도

다양하게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그 만나는 여정에서

때로는 새로운 도전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내가 다른 종교인을 만나서 불편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다른 종교인들을 만났을 때 내가 성경에 대해 이렇게 지식이 약했구나!를 느끼게 됩니다.

아~ 저렇게 열심히 불자들이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열심히 기도해야 되겠구나!'도전을 받기도 합니다.

 

저도 토론토에서 많은 무슬림들을 만났었는데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하루에 다섯 번씩 꼬박꼬박 기도하는 모습을 통해서

'아~ 정말 나도 저들의 열심함을 배워야겠구나!' 깨달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다른 종교인들을 나와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배척할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있는 좋은 면들 또 그들을 통해서 주님께서 그들 안에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가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 때 다른 종교인들을 다른 각도로 바라볼 수 있는 은총도

받을 수 있지 않겠나 생각됩니다.

모든 것 안에 계신 주님의 사랑은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을 해오시고 섭리해 오십니다.

 

지금 나는 다른 종교인들을 어떻게 바라 보고 있는지...

지금 나는 다른 종교인들에게 무엇을 배우고 있는지...

지금 나는 다른 종교인들에게 무엇을 나눌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수 있는 한 주간이 되시길 빕니다.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