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창에 찔린 예수 화살에 꽂힌 신

11 {천상의 책 4권56장} 자애심은 심한 근시이다 / 리처드 로어 신부님의 벌거벗은 지금 - 에고는 우리 자신이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한다

은가루리나 2020. 7. 2. 22:51

 

사람들 가운데 이루어질 하느님 뜻의 나라

천상의 책

사람들로 하여금 질서와 그 본연의 위치와 창조된 목적에로 돌아오게 하시는 부르심


4-56 


1901년 2월 10일


순명은 매우 예리한 시각을 가지고 있지만,
자애심은 심한 근시이다



1 흠숭하올 예수님께서 계속 오시는 중이다. 
더없이 강렬하고 맑은 빛으로 환히 빛나는 눈으로 나타나셨기에
나는 그 눈부신 빛에 놀라면서도 황홀감을 느꼈다.

예수님은 내가 그렇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황홀해하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2 "내 사랑아,
순명은 날카로운 시각(視覺)을 가지고 있다.
그 아름다움과 예리함에 있어서 햇빛을 능가할 정도다.

반대로, 자애심은 매우 근시안적이어서
걸음을 옮기면 반드시 헛디디게 한다.

그러니 언제나 근심과 의심이 많은 사람들이
이 날카로운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해선 안된다.
반대로 그런 것은 자애심이 짜는 그물(덫)이다.


자애심은 극도로 근시안적이기에
우선 그들 자신을 넘어지게 하고
다음에는그들 안에 온갖 생각과 동요(動搖)와 주저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숱한 의심과 두려움을 느끼며
오늘 싫어하는 것에 내일 거듭 떨어지곤함으로써
그들의 삶은 그것이 교묘하게 엮은 인위적인 덫에
언제나 걸려 있게 된다.


3 이와 대조적으로
순명의 예리한 시각은 자애심을 죽인다.
그것은 날카롭고 투명해서
옳지 못한 발걸음은 즉시 예견하고 미리 피한다.

이리하여
하느님의 작은 자녀로서의 거룩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그리고 어둠이 어둠을 끌어당기듯이 빛은 빛을 끌어당기기에,
순명은 이 빛으로 '말씀'의 빛을 끌어당긴다.
이 두 빛이 합쳐져서 모든 덕행의 빛을 짜는 것이다."


4 이 말씀을 듣고 놀란 나는 이렇게 여쭈었다.

"주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진위를 의심하며) 주저하는 생활 방식은 거룩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5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더 진지한 어조로 이렇게 덧붙이셨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이쪽이 참된 순명의 표지라면 저쪽은 자애심의 표지이다.
저런 생활 방식은 내게 사랑보다는 역겨운 마음을 일으킨다.

진리의 빛이 거짓을 밝혀 줄 때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바로잡아야 하는데,
근시안적인 자애심은 그런 영혼들을 짓누르면서
참된 성덕의 길에서 조금도 진보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기만 하니 
말이다."





4-96,3
"딸아, 진주와 황금과 보석과 또 다른 귀중품들은
이중으로 잠금 장치를 한 튼튼한 금고에 보관된다.

내가 너를
거룩한 순명이라는 믿을 만한 보호자의 관리에 맡기고 있다면,
그리고 여기에 
어떤 도둑도 들어오지 못하고 
아무 결함도 없도록 이중으로 잠금 장치를 한 안전한 문이 있다면,
네가 두려워할 것이 무엇이냐?

완전한 멸망의 표를 지니고 있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자아일 뿐이다. 
이 자아란 것이 없다면 일체가 안전한 것이다."

 

 

 

* * *

 

 

 

벌거벗은지금 - 2부 네 마음을 바꿔라

변화를 싫어하는 에고


에고와 거짓 자아가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이 변화다.
그리고 그들의 사령탑을 통제하는 것은 그들의 마음(mind)이다.

어째서 그토록 현상유지를 고집하는가?

에고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변화'임을 알면,
왜 대부분의 사람이 단지 생존하기만을 고수하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에고는 맹목을 뜻 하는 다른 말이다.
나는 에고를 눈에 띄지 않은 자아(unobserved self) 라고 부른다.
일단 에고는 그 정체가 발각되면 게임이 끝나고 말기 때문이다.

에고는 눈에 띄지 않아야 한다.
자신을 지키려면 위장을 잘해야 한다.
악은 언제나 거절과 위장에 의존한다.
그래서 항상 그럴 듯한 천사로 위장한다.(2코린 11,14)


에고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저도 모르게 우리를 악으로 이끌 수 있다.
(바오로는 '에고'  '육'이란 말로 표현한다.)

성공하기 위하여 악은 어떻게든지 근사한 덕목처럼 보여야 한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착각하고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스스로 완벽하게 보고 있다고 확신하게 만든다.
바로 여기에 회심과 영적 변화를 가로막는 결정적 장애가 있다.


대부분 회개했다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다른 마음이 아니라 다른 행위, 다른 신조, 다른 체제들이다. 

그런데 우리를 성장시키는 건 그것들이 아니다.
우리를 바꿔놓는 건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우리가 이미 있는 곳에서
우리를 변함없이 안전하게 하고 힘 있게 한다.
그것은 흔히 '인생 전반부의 임무'라고 일컬어지는 것이다.

동의한다.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으로서
주어지는 일정한 행동거지와 신조들은  좋은 것이고
출발점에서는 필요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너무 떠받들면 머잖아, 유사시에 숨는 곳이 되고 만다.

바오로의 말에 따르면
그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길을 가지 못하게 하는
'감시자(후견인)'에 지나지 않는다.(갈라 3,24)


나는 그것을 '훈련용 자전거'라고 부른다.
그것들을 너무 오래, 너무 가까이 붙잡고 있다 보면
내적인 가치와 힘을 기르지 못해 더 크게 '자랄' 수가 없다.

당신이 아는 많은 사람이 이런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은가?
당신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끊임없이 변화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천국은 지금 그리고 영원히 있다. 
스스로 변하여 그 친교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천국에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