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염불

버리다 비우다

은가루리나 2023. 2. 12. 12:33



■ 내맡김 영성 ■
내맡김의 영성은 "새로운 영성"이 아닙니다.

moowee 10.08.21 17:16

佛子들이 "버린다, 내려 놓는다" 쓰는 표현은,
하느님에 대한 존재를 부정하는 그분들의 입장에선 無와 空, 
어느 곳에도 다 버릴 수 있겠지만,

그래서 그분들에겐 "버리거나 내려 놓는다"는 표현이 
참으로 알맞는 용어가 될 수 있지만,

하느님을 신앙하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참으로 맞지 않는 부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그 모든 것은 사실은 자기의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지식으로가 아니라 몸으로 깨닫는 깨달음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의 주인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자기 맘대로 "아무 데나 버리거나 내려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버려도 하느님께 버리고, 내려 놓아도 하느님께 내려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버릴 곳도, 내려 놓을 곳도 
모두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버리다, 내려 놓다"라는 말보다 
버리고 내려 놓는 곳의 주인이 하느님이시기에 
"하느님께 맡겨 드리다"는 말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좋은글
12월 27일 신부님의 강론

내맡김의 복덩이 linn(무화) 11.12.27 13:05


"하느님을 알면 나 자신을 내려 놓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천주교 신자에게는 
내려놓는다는 표현보다는 맡긴다는 표현이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아무데나 내려 놓으면 안되고,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느님 것이므로, 
하느님께 내려 놓아야 합니다.

즉, 
비운다는 것은 하느님께 맡긴다는 것입니다.

아무데나 내려 놓으면 마귀가 가져갈 수 있으므로,  
하느님께 비우고, 내려놓고, 맡겨야 됩니다.




▣ 주일강론
두 번째 신앙의 해, 삼위일체 대축일(2014, 06, 15)

moowee 14.06.14 08:58


< 두 번째 신앙의 해, 삼위일체 대축일 > 2014, 06, 15


제가 지리산으로 처음 들어갔을 때 가장 부러운 것이 하나 있었다.

아직도 지리산에 그대로 남아 있다고 듣고 있지만
당시 서울교구의 어느 신부님이 세우신 비인가의 '작은 수도원'이었다.

"나는 언제 저런 작은 수도원 아니 기도원을 가져볼 수 있나?" 
하는 마음이 제 마음속 깊이 자리 잡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 기도원을 세우신 신부님이 전하던 영성이 바로 
'비움의 영성'이었다.

그래서 제가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을 전하게 되면서 조금씩 알려지게 되자 게중에는 
제가 전하는 영성을 비움의 영성으로 오해하던 분들도 있었다.

그러나 저는 
'비움'과 '내맡김'은 서로 다른 것이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비움'이라는 말과 비슷한 말이 있는데 
저는 그것을 '내려놓음'이라 하고 싶다.

어떤 어려움에 빠졌을 때 흔히들 하는 말이 바로
'내려놓으라'는 말이다.

"여보게 이 사람아, 이제 제발 그만 내려놓아."라고들 말이다.
반드시 무엇을 비워야만 내려놓을 수 있는 것이다.

비움은 곧 내려놓음이요 내려놓음은 곧 비움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나 비움도 내려놓음도 다 그 '주체'가 남아 있는 것이다.

비운 다음에도 비운 사람이 남아 있고
내려놓은 다음에도 내려놓은 사람이 남아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한 번 비운 다음에는 또 채울 수가 있게 되며
한 번 내려놓은 다음에도 
다시 채워지면 또다시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맡김',
특히 하느님께 완전히 위탁하는 내맡김, 거룩한 내맡김은
한 번 완전히 내맡기면 그것으로 그만 끝이다.

내맡기는 주체가 아무리 부족하고 죄스러운 주체라 하더라도, 
맹세 수준의 굳은 결심으로 한 번 하느님께 내맡겨,
하느님이 받아주시기만 하면 곧 
그 주체가 하느님의 것이 되기 때문이다.

내맡긴 주체가 이 세상에 남아 있다하여도
그 사람은 이미 하느님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데레사 성녀나 이냐시오 성인이나 후코 성인의 기도들이
바로 그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는 내용의 기도들이다.

완전한 내맡김, 
다른 말로 '거룩한 내맡김'은 곧 주체가 "無"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내맡김'과 '비움'이나 '내려놓음'의 큰 차이인 것이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이다.

한 분이신 하느님이 각각의 삼위로서 일체,
완전한 하나를 이루신다는 삼위일체이심을 기념하는 오늘,
저는 이해하기 어려운 삼위일체 교리를
'거룩한 내맡김의 영성'으로 이해해 보고 싶다.

'완전한' 사랑으로
三位 서로에게 '완전히' 내맡겨,
'완전히' 無化되어 '완전한' 하나가 되신 전능하신 하느님,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창에찔린예수화살에꽂힌신부 Jesus is pierced by a
Re:Re:Re:07 정무웅 신부- 
무(Nada)는 하느님으로 채우기 위한 비움이며 사랑하기 위한 비움이다

무화.보조 20.02.11 00:19


★영 성
영성생활과 애덕(정무웅 신부님)

moowee 추천 0 조회 571 13.11.05 17:43 댓글 88




I. 들어가는 말

Ⅱ. 합일과의 애덕
1. 사랑의 본질
2. 애덕과 자연덕
3. 애덕의 이중성
4. 애덕과 계명 그리고 복음적 권고

Ⅲ. 애덕과 정화
1. 정화의 기도
2. 정화의 수덕적인 면 1) 감각의 능동적 정화 2) 영혼의 능동적 정화
3. 정화의 신비적인 면 1) 감각의 수동적 정화 2) 주부적 관상 3) 영의 수동적 정화
4. 하느님 안에서의 변모

Ⅳ. 결 어


* * * * *

 

Ⅲ. 애덕과 정화
4. 하느님 안에서의 변모


(중략)
바오로는 그리스도의 강생을 천주성의 비움으로 묘사한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을 같이 하셨지만
억지로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 하시지 않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모두 버리시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이 되셨다”(필립 2,6~7).

그리스도의 강생이 자신의 비움을 통해 완성되셨음을 말한다.
하느님이 인간이 되시는 것은 자신의 비움을 통해서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하느님처럼 되는 데도 비움을 통해서 가능하다.


완덕이란 비움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것을 십자가의 성 요한은 (Nada)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
(Nada)를 통해 인간은 하느님과 합일에 이른다.

그런데 이 (Nada)는 하느님을 모셔드리기 위한 비움인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피조물로부터 이탈인 무(Nada)
하느님으로 채우기 위한 비움이며
하느님을 사랑하기 위한 비움이다.


자신의 포기는 하느님 사랑의 외적 표출이며
하느님이 인간 영혼 안에 거주하시기 위한 필연이다.

따라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영혼은 자연히 
애덕을 통해 그 안에 그리스도의 채움(Pleroma)이 이루어진다.

즉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무(Nada)를 만들고
이 비움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충만성을 드러내며
이 비움에 의해 완전한합일에 이른다.





Ⅳ. 결 어


가톨릭에서 Nada처럼 불교에서도 공(空)이나 무(無)를 말한다.

가톨릭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한 자 되어라”처럼
불교에서도 완전한 자가 되는 것이 보편적인 소명인 듯하다.


열반은 그들의 목적이다
열반이란 산스크리트어로 Nirvana로서
‘불꽃이 소멸되었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즉 불이 꺼진 상태 연소의 소멸을 가리킨다.

즉 열반은 소위 ‘3독심’이라는 탐․진․치(貪䐜癡)의 소멸로서
쾌락이나 명예나 축재 같은 욕망에서 완전히 탈피하여
더 이상 마음을 구속하고 이성을 방해하는 일이 없이
완전히 자유롭고 광활한 심경을 주는 상태로서
열반적정(涅槃寂靜)을 말한다.


이처럼
불교의 이론과 실천은 열반의 설명이고 열반의 실천이다.
열반에 이르는 길은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즉 (空)무아(無我)이고 무상(無相)으로
그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생활 태도를 말한다.


이런 측면에서는 가톨릭과 같다.

그러나 가톨릭이 무(無)나 (空)을 강조하지만
불교와 다른 점은 공(空)을 위한 공(空)이 아니라
채움(Pleroma)을 위한 공(空)인 것이다.

채움이 목적이라면 비움은 수단인 것이다.

불교에서는 비움이 목적이라면
가톨릭은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비움을 말한다.

즉 갈라디아서 2장 20절처럼
(Ego)의 비움(Xenosis)은 그리스도의 채움(Pleroma)을 위한 것이다.

완전한 하느님과의 합일을 위해서는
자신 안에 한 점의 티끌이나 애착도 없이 오직 그리스도로 채워야 한다.

그 때 우리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십자가 성 요한이 말하는 정화란
비움과 함께 동시에 애덕이 증가하는 장소이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열망
그만큼 피조물에 대한 애착으로부터의 비움을 전제로 함으로써
비움과 애덕은 동시에 일어나는 정화 안에서의 현상인 것이다.

그러므로 단지 정화를 끊음과 비움으로만 잘못 인식한다면
불교에서의 무(無)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애덕은 정화의 과정 안에서 형성되는 본질적인 것으로
궁극적으로는 하느님과의 합일을 목표로 하지만,
애덕을 추구하지 않는 정화는 열반을 목표로 할 뿐이다.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하느님에 대한 사랑,
즉 애덕에 대한 교의 신학적 측면과 실천적인 측면을
십자가의 성 요한의 체험 안에서 살펴보았다.

그리고
성삼위 내 주인 하느님 사랑이 우리 안에 가득 찬 합일적 삶일 때,
이 세상의 모든 악은 사라질 것이다.

악의 원인은 하느님과의 분열이고
하느님을 잊은 상태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 천주교서울대교구 사제연수원 은총의집 자료에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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