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

7. 세속적인 마음과 그 길 【세속적인 마음의 특성,세속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의 변덕스런 신앙심 , 세속적인 마음과 영적 수련】

은가루리나 2016. 11. 5. 01:22


7. 세속적인 마음과 그 길 




□ 세속적인 마음의 특성 



151.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① 이름뿐인 인간(Manush), ② 신을 깨달은 인간(Man-hush).

신을 갈망하는 것은 두 번째 인간이다. 

그리고 여자와 부(富)에만 열중하는 것은 첫 번째, 오직 이름뿐인 인간이다.


152. 한 가면을 각기 다른 사람들이 쓴 것 같이 

각기 다른 종류의 짐승들이 인간의 탈을 쓰고 이 세상에 왔다. 

늑대가 인간의 탈을 쓴 예도 있으며, 여우가 인간의 탈을 쓴 예도 있다.

그리고 독사, 곰 등이 인간의 탈을 쓰고 이 세상에 왔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두 겉보기에는

사람처럼 보인다.


153. 체는 가늘고 섬세한 것을 빼내 버리고 굵고 거친 것만을 보존한다.

선(善)을 거부하고 악(惡)을 받아들이는 것, - 이것이 바로 나쁜 영혼의 특성이다.

그러나 키는 이와 반대다. 굵고 거친 것(惡)을 밀어내고 가늘고 섬세한 것(善)을 취한다.



154.  태어날   때는 아무런 집착이 없지만 

일단 집착이 생기면 그 자신을 그 집착 속에 가두어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유를 원치도 않고 또 자유롭게 되고자 하지도 않는다.

보살펴 줄 가족이나 친지가 없는 사람은 대개 고양이, 개, 새 따위를 귀여워한다.

이처럼 그들은 우유에 대한 갈증(인간의 사랑)을 

유장(乳裝, 동물에 대한 사랑)으로 대신 풀고 있다.



155.  태어난 송아지는 아주 활기차고 즐거워 보인다.

하루종일 뛰놀다가 오직 어미젖을 먹을 때만 가만히 있다.

그러나 머지않아 그의 목에는 멍에가 얹힌다.

그 기쁨은 사라지고 그의 눈은 풀이 죽어 슬픔에 젖는다.

우리 인간도 이와 같다.

어린시절에는 세상일에 신경 쓸 필요 없이 마냥 즐거운 날이 계속된다.

그러나 머지않아 성년이 되면 이 세상의 감옥에 갇히게 된다.


결혼이라는 수갑이 채워지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하여 일정한 직업에 종사하게 되면

그의 모든 기쁨은 사라진다.

삶의 의욕과 창의력은 더이상 없고 

대신 거기 그의 이마에는 깊은 주름살이 패이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소년시절을 생각한다.

자기 생애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그때를 생각한다.

아침의 맑은 공기며, 상쾌한 이슬, 그리고 새로 핀 꽃들로 가득찬 어린 시절을 그리워한다.




156. 어린아이들은 부부의 즐거움을 모른다.

세속적인 사람들은 

신(神)을 자각(自覺)하는 데서 오는 그 엑스타시를 전혀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157. 세상사람들은 고통을 당하면서도 

여자와 부(富)에 대한 매력 때문에 그의 마음을 신(神) 쪽으로 향하지 못하고 있다.


158. 세속적인 사람은 종교적인 것이면 무엇이든지 반감을 갖는다.

그 자신이 종교적인 음악이나 기도 소리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걸 듣는 것까지 방해한다. 

그는 기도하는 자를 비웃고 구도자를 박해한다.


159. 지극히 세속적인 한 친구가 신봉자들 틈에 끼어 나를 찾아오곤 한다.

이 친구는 진리에 대한 이야기에는 전혀 흥미가 없었다.

다른 사람이 신과 영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동안 이 친구는 그걸 참지 못했다.

이 친구는 견디다 못하여 같이 온 사람에게 말했다.

<얼마나 더 앉아 있어야 하는가. 끝나려면 얼마나 멀었는가.>

옆사람이 말했다.

<잠시만 더 앉아 있게. 곧 끝나네.>

그러나 그 친구는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먼저 실례하겠네.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네.>- 이렇게 말하고는 나가 버렸다.


160. 세속적인 사람들과 이야기해 보라.

비둘기 둥지에 지푸라기만 가득 들어 있는 것처럼 

그들의 가슴에는 세속적인 생각들만 가득차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161. 죄많은 사람의 가슴은 곱슬머리카락과 같다.

곱슬머리카락은 아무리 곱게 펴려 해도 잘 펴지지 않는다.

사악한 사람의 마음을 올바르고 순수하게 만들기는 그리 쉽지 않다.




162. 순례자의 물병은 성지를 모두 순례했다.

그러나 전과 매한가지로 물병으로 남아 있다. 

---세속적인 사람의 마음도 이와 같다.


163. 도공(陶工)은 아직 굽지 않은 점토로 여러가지 형태의 그릇을 만든다.

그러나 일단 불에 구워지게 되면 더이상의 형태를 만들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속적인 욕망의 불에 구워져 버린 가슴은

아무리 고상한 정서로도 움직일 수가 없다.

어떤 사랑의 형태로도 더이상 주조할 수가 없다.


164. 물은 돌의 속을 적실 수 없다.

집착의 상태에 있는 영혼에게는 어떤 가르침도 영향을 미칠 수 없다.


165. 돌에 못을 박을 수는 없지만 그러나 흙에 못을 박으면 쉽게 들어 간다.

구도자의 충고도 세속적인 사람의 영혼에 영향을 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진리를 찾는 사람의 가슴에는 깊이 박힌다.


166. 부드러운 점토는 어떤 형태의 그릇이라도 만들 수 있지만

그러나 돌로는 어떤 형태도 빚기 어렵다.

신(神)의 예지가 신봉자의 가슴에는 깊은 영향을 주지만

그러나 속박의 차원에 있는 영혼에게는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없다.



167. 다리 아래의 물이 한쪽으로 들어와서 다른 쪽으로 흘러나가 버리듯

진리의 말이 세속적인 사람의 귀에 들어가면 

아무 감명을 주지 못한 채 다른 한쪽 귀로 흘러나가 버린다.



168. 세속적인 사람의 특징은 무엇인가.

몽구스* 길들이는 항아리 속의 몽구스와 같다.

몽구스 길들이는 사람은 몽구스의 집을 벽 높이 달아 놓는다.

밧줄의 한쪽은 몽구스 목에 잡아매고 다른 한쪽에는 무거운 돌을 잡아맨다.

집(항아리)에서 나온 몽구스는 벽을 타고 내려와 여기저기를 서성인다.

그러나 위급할 때면 다시 항아리 속으로 들어가 숨는다.

그러나 

밧줄의 다른 한쪽에 달린 돌의 무게 때문에 몽구스는 항아리 속에 오래 있을 수 없다.

돌의 무게가 몽구스를 항아리로부터 끌어내리기 때문이다.

--- 세속적인 사람은 

세파(世波)의 고통이 밀어 닥치면 견디다 못하여 신에게로 피난온다.

그러나 세속적인 유혹과 그 무거운 짐이 

결국 그를 다시 세속적 차원으로 끌어내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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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ngoose : 독사를 잡아먹는 짐승. 



170. (세속적인) 속박 속에 있는 사람은 결코 깨어날 수 없다. 

보라, 슬픔의 물결이 그를 덮친다. 

갖가지 위험이 그를 노리고 있다. 

그런데도 그는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시덤불을 좋아하는 낙타는 가시에 찔려 입에서 피가 나는데도 

여전히 가시덤불을 뜯어 먹고 있다. 

너무나 많은 고통이 그를 누르는데도 

그는 며칠만 지나면 그 고통을 다 잊어 버린다.


그의 아내가 죽든가 아니면 변심해서 돌아서는데도, 

보라 그는 다시 재혼을 한다.


아들 잃은 슬픔에 몸둘 바를 모르던 어머니는 

얼마 후 다시 보석반지를 끼고 몸치장에 여념이 없다.


부모들은 딸의 혼사 준비에 재산이 탕진되는데도 자꾸 아이를 낳고 있다.


소송사건으로 집안이 기우는데도 자꾸 소송사건에 말리고 있다.


자녀는 부양할 돈도 넉넉치 않은데 해마다 아이를 낳고 있다.


세속적인 사람은 두더지를 문 뱀과 같아서 

그것을 뱉지도 못하고 삼키지도 못한다.


이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모든 것은 껍질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아직껏 세속적인 것을 잊지 못한 채 신의 세계를 넘보고 있다.


그를 세속적인 환경에서 떼어내어 성스러운 분위기에 데려다 놓으면 

그는 풀이 죽고 여윌 것이다.


오물 속에서 살고 있는 벌레조차 쌀 독에 넣으면 곧 죽어버린다.




171.커드*를 만든 질그릇에 우유를 담아두는 사람은 없다.

우유가 커드처럼 굳어 버리기 때문이다. 


음식을 만들면서 한눈파는 사람은 없다.

한눈을 팔게 되면 음식이 모두 불에 타버리기 때문이다.


훌륭한 스승은 값있고 귀중한 교훈을 세속적인 사람에게 가르쳐 주지 않는다.

자기 편리한 대로 잘못 해석해 버리기 때문이다.

(* 우유를 발효시킨 것, 특히 장에 좋다고 한다. 몹시 신맛이 난다.)



172. 사람들은 자신이 원한다 해도 속세와 인연을 끊을 수 없다.

자기가 지은 업에 의해서 방해를 받기 때문이다. 


한 요기가 왕에게 말했다.

<왕이시여, 내 옆에 앉아서 신을 명상하시오.>


왕이 답했다.

<요기여,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소.

그대 옆에 앉아 있더라도 세속적인 환락이 내 마음에 가득합니다. 

내가 여기 이 숲속에 머물러 있게 되면 

아마 이 숲속에 왕궁이 세워질 것입니다. 

나는 아직도 환락을 즐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 세속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의 변덕스런 신앙심



173. 세속적인 사람은 그의 세속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종교적이며 자비로운 듯한 행동을 연출하고 있다. 

그러나 슬픔과 가난이, 불행이 닥치게 되면 그들의 그 신앙심은 사라져 버린다. 


그들은 앵무새와 같다. 

앵무새는 <라다크리슈나(神), 라다크리슈나>를 되뇌이지만 

그러나 고양이에게 잡히게 되면 외마디 비명을 지른다.

저 신의 이름을 버리고 그 자신의 본 소리로 비명을 지른다.


그러므로 나는 말한다. 

이런 사람에게 진리를 가르친다는 것은 쓸모없는 짓이다.

그대의 그 감동적인 설교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세속적인 차원에만 머물고 있다.



174. 스프링의자를 보라. 

사람이 앉게 되면 푸욱 들어가지만, 

그러나 사람이 일어서게 되면 다시 부풀어 원 상태로 된다. 


세속적인 사람도 이와 같다.

그들은 진리의 말을 듣는 동안만은 신앙심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다시 일상생활로 들어가게 되면 

고귀하고 간절한 그 생각들을 모두 잊어 버리고 전과 마찬가지로 먼지낀 상태에 있다.



175. 쇠는 용광로 속에 들어 가면 벌겋게 불이 단다. 

그러나 그 용광로에서 끄집어내면 다시 검게 된다.  

사원이나 종교집회에 있는 동안 세속적인  사람은 진리에 대한 열망으로 넘친다.

그러나 그곳을 떠나게 되면 진리에 대한 그 열망도 식어 버린다.



176. 저 쇠파리를 보라. 

쓰레기 통에 앉아 있다가 그 다음은 신의 음식*에 앉는다.

세속적인 사람은 진리의 말에 몰두하다가 

그 다음은 부와 쾌락에 그 자신을 잃어버린다.



177. 세속적인 사람의 마음은 변소에 사는 구더기와 같다. 

구더기는 언제나 오물 속에서 살고 있으며 그걸 무척 좋아하고 있다.

누군가가 그 불결한 곳에서 그(구더기)를 끄집어내어 연꽃 위에 놓았을 경우

그는 꽃냄새에 질식사(窒息死)할 것이다.


세속적인 사람을 보라. 그는 단 한순간이라도

세속적인 생각과 욕망의 불결한 환경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



178. 세속적인 사람이 신을 어떤 식으로 생각하고 있는가를 알고 싶은가.

아이들이 소꿉놀이를 하는 경우와 같다. 

아이들은 말한다.

「하나님(神)에게 맹세하고 말하겠는데......」

아이들은 이런 맹세법을 그들의 형이나 언니로부터 배운 것이다.

이는 멋장이가 지팡이를 휘두르며 정원을 산책하면서

꽃 한 송이를 꺽어들고 이렇게 외치는 거와 같다.

「오, 신이 만드신 이 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이는 불달은 쇳덩어리에 물한방울이 떨어진 것과 같아서

순간적으로 지껄인 말에 불과하다.

그(神)에 대한 열망으로 자신의 전체가 불타야 한다,

저 브라흐만(神)의 바닷속으로 깊이 침몰해야 한다.



□ 세속적인 마음과 영적 수련



179. 어떤 농부가온종일 사탕수수밭에 물을 주었다.

일을 다 끝내고서야 그 물들이 모두 쥐구명들 속으로 들어가 버린 것을 알았다.

그는 온종일 헛탕만 친 것이었다.

그의 마음 속에 세속적인 야망을 품고 있으면서 신을 찾는 사람의 경우가 이와 같다.

매일같이 기도를 할지 모르지만 그의 영적 세계는 전혀 진전이 없다.

신을 향한 그의 열정이 이 세속적인 야망의 쥐구멍 속으로 모두 빨려들어가 버리기 때문이다.

아무리 애써 봐도 그는 이전과 같은 차원에 머물 따름이다.


180. 기도에 몰입할 때 마음은 왜 하나에 집중되지 않는가.

사탕과자 위에 앉아 있던 파리는 쓰레기 담은 수레가 지나가면 대번에 쓰레기 위에 날아가 앉는다.

그러나 꿀을 찾는 벌은 오직 꿀 위에만 앉아 있을 뿐 결코 그런 오물 위에 앉지 않는다.

파리 같은 사람(세속적인 사람)은 일시적으로 신의 사랑을 맛본다.

그러나 오물(쓰레기)을 열망하는 그들의 본능이 세속적인 쓰레기쪽으로 그들을 끌어낸다.

스승(라마크리슈나)은 언제나 신의 사랑에서 오는 희열과 기도에만 열중하고 있다.


181. 마귀는 마귀들린 사람에게 겨자씨*를 던짐으로써 쫓아버린다.

그러나 겨자씨 자체에 마귀가 붙었다면 그 마귀들린 겨자씨를 어떻게 마귀 쫓는데 쓸 수 있겠는가.

 신을 명상하는 마음이 세속적인 거친 생각으로 부패되어 있다면

이 부서진 도구로 어떻게 진리를 찾을 수 있겠는가.




*우리나라 절에서 求病施食으로 귀신을 쫓을 때 팥을 던지는데 흰두에서는 팥대신 겨자씨를 던지는 모양이다.

(역자가 실지로 이런 광경을 목도하지는 못했지만......)



182. 젖은 성냥은 아무리 그어봐도 쉽사리 불이 켜지지 않는다.

거기 오직 연기만 날 뿐이다. 그러나 마른 성냥은 살짝만 그어도 이내 불이 붙는다. 

진실한 구도자(복종자)의 가슴은 마른 성냥과 같다.

신의 이름을 가볍게만 불러도 그의 가슴은 사랑의 불이 붙는다.

그러나 세속적인 사람의 가슴은, 부에 집착하고 욕망의 물에 젖어 있는 가슴은,

불기(火氣)를 거부하는 <젖은 성냥>과 같다. 

신은 여러 번 그에게 가르침을 주지만 그러나 신의 사랑의 불꽃은

결코 그의 가슴에서 점화되지 않는다. 



183. 세속적인 사람도 현자(賢者)와 똑같은 지식과 지성을 가지고 있다.

요기(yogi, 요가 수행자)와 같이 갖은 고통과 시련을 견딘다.

수도승과 같이 자기 자신을 억제하고 닦는다.

그러나 이 모든 애씀이 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부와 세속적인 명예를 위해서 하기 때문에,

그의 에너지가 길을 잘못 들었기 때문에, 결국 그의 이 모든 노력은 물거품으로 돌아가 버리고 만다.




184. 때 묻은 거울은 햇빛을 반사시킬 수 없다.

그 영혼이 순수하지 못하고 불결한 사람은, 마야에 현혹되어 있는 사람은

결코 신의 영광을 지각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영혼이 순수한 사람은

맑은 거울에 햇빛이 반사되듯 신을 지각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이 순수해야 한다.



185.  순수한 우유의 일정량을 물의 일정량과 섞었을 경우 적당한 시간이 지나면 크쉬라(Kshira, 응축된 밀크)로 응축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세속적인 사람의 마음은 불순한 생각과 더러운 물이 섞여 아주 묽다.

그는 오랫동안 그 마음을 다시 순수하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리를 향한 열정에 불붙기 위해서는 엄격한 규제와 일관성 있는 명상법을 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186.  [문] 세속적인 사람은 왜  신을 깨닫기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는가.


[답] 무대 위에서 가면극을 하고 있는 배우는 즉시 그 탈을 벗을 수 없다. 그대로 놔 둬라.

세속적인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몫을 연기하도록 내 버려두라.

때가 되면 그는 그의 거짓 얼굴(탈)을 벗어 던져 버릴 것이다.



187.  세속에 얽매여 있는 영혼은 언제까지나 쓰레기 속에서 살고 있는 구더기와 같다.

그들은 그 속에서 아무 고통도 고뇌도 없이 그렇게 태어났다가 그렇게 죽는다.

이런 영혼은 혼의 강도가 너무 약하다. 쓰레기 위에 앉았다가 사탕과자 위에 앉는 쇠파리와도 같다.

그러나 자유로운 영혼은 벌과 같다.

벌은 언제나 꿀만을 먹을 뿐 그외의 것은 일체 맛보려 하지 않는다.



188. 세속적인 사람은 악어와 같다. 

어떤 총알도 악어의 몸을 뚫을 수 없다.

엎어놓고 그 배를 찌르지 않으면 악어를 죽일 수 없다.


이런 사람에게는 아무리 좋은 충고를 해 줘도, 

아무리 자극을 줘 봐도 결코 그의 현 상황을 깨닫게 할 수 없다.

그가 집착하고 있는 대상으로부터 그를 떼어 놓지 않으면

그는 결코 그 자신이 처한 현재의 상황을 깨닫지 못할 것이다.



189. 「모든 것을 버려라. 신의 길만을 가라.」이렇게 말한다면

세속적인 사람은 결코 그 가르침을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 세속적인 영혼들의 주목을 끌 수 있을까를 심사숙고한 끝에

고어(Gour)와 니타이(Nitai)*는 그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묘안을 생각해 냈다.


니타이는 말했다. 

「자, 모두 오라. 신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라. 

맛있는 스프(soup)를 얻을 수 있을 것이며 예쁜 여자(異性)를 애무하게 될 것이다.」

이 조건은 많은 사람의 호기심을 끌어서 사람들은 너나 없이 신의 이름을 불렀던 것이다.


그후 조금씩 조금씩 그들은 저 성스러운 이름(神의 이름)의 넥타(甘露) 맛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마침내 니타이의 가르침 속의 숨은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맛있는 스프>란 다름아닌 신의 사랑 속에서 흘리는 자기 자신의 눈물이었다.

땅은 젊은 여자(異性)다. 

그리고 그녀를 애무한다는 것은

신의 사랑의 절정감을 감당할 수 없어 땅에 뒹구는 그 행위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