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는 기도

헤시카즘 - 성 베네딕도 화순 수도원 홈페이지에서

은가루리나 2015. 10. 21. 12:59


헤시카즘 (Hesychsam)




‘헤시카즘’은 사막 교부들의 영적 가르침의 핵심과도 같다. 

이는 헤시키아(Hσυχία, hesychia) 추구에 집중된 삶의 한 양식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헤시카즘 수행자란 헤시카즘을 실천하는 사람을 말한다. 

헤시카즘은 후대에, 특히 그리스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사막 교부들은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전개되는 사랑 안에서 인간적 완성이 실현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헤시키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고요를 찾아 세상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외적인 고요와 침묵보다도 중요한 것은 내적인 고요와 침묵이었다.


  그러나 헤시키아는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다. 

그것은 사랑을 목표로 하고 있다. 

헤시키아는 사랑에 이르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따라서 헤시카즘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 이르는 하나의 길이다.


  헤시카즘은 외적 헤시카즘과 내적 헤시카즘 두 가지로 구분된다. 


  헤시카즘 → 외적

          ↓ 

          내적 →⑴ 아메림니아

               →⑵ 넵시스

               →⑶멜레테

                         ↓  

                        ⑷ 끊임없는 기도




1. 외적 헤시카즘


  이는 ‘고요’를 찾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물러나는 것’

(Ἀνχώϱησις, anachoresis, fuga mundi)이다. 

아르세니우스가 이에 대한 모델이다. 

콘스탄티노플의 황실 고관이었던 그의 성소에 대해서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 당시 압바 아르세니우스는 여전히 왕궁에 살고 있었다. 

그는 하느님께 이런 기도를 바쳤다. ‘주님, 저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소서.’ 

한 소리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르세니우스, 사람들에게서 멀리 달아나라! 그러면 너는 구원될 것이다.’ 

아르세니우스는 사람들로부터 멀리 떠났다. 

그는 다음과 같은 기도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주님, 저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소서.’ 

그는 한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그에게

 ‘아르세니우스, 떠나서 침묵 중에 고요히 머물어라. 이것이 무죄한 삶의 기초이다.’


  '물러나라, 침묵하라, 고요히 있어라.' 

이 말은 수많은 헤시카즘 수행자의 모토요 생활지침이 되곤 한다. 

아르세니우스는 이를 실천에 옮긴 첫 번째 사람이었다. 

그는 스케티스(Sketis) 사막의 어느 암자에 살면서 자기 암자를 떠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는 철저하게 고요를 지켰다. 

그래서 로마의 어떤 귀부인이 그를 보고 싶어 병이 날 지경이 되어 찾아왔는데도 

아주 냉정하게 대하였다. 

아르세니우스는 고요를 지키려고 주교들과도 맞섰다. 

심지어 자기 형제들과도 맞서서 고요를 지켰다. 

하지만 아르세니우스의 또 다른 금언을 통해 

우리는 이런 외적 헤시카즘의 목적이 내적 헤시카즘에 있음을 보게 된다.


 “어느날 압바 아르세니우스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어떤 갈대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가 형제들에게 ‘내 귀에 들리는 저 움직임 소리는 무엇이오?’ 라고 물었다.

그들이 말했다. ‘갈대입니다.’ 

그러자 그는 그들에게 말했다. 

‘만일 어떤 형제가 잠심 중에 있다가 작은 새 소리를 듣게 되면, 그것으로 끝이오. 

그의 마음은 종전의 평화를 느끼지 못하게 되지요. 

그러니 당신들! 

당신들은 저 갈대의 소리를 듣고 있으니, 당신들 마음이 평화 속에 있을 수 없는 것이오.’”




2. 내적 헤시카즘


  아르세니우스가 실천한 세상으로부터의 물러남은 우리가 봐도 분명 심한 것 같다. 

그것은 디오게네스(Diogenes)같은 이방인 철학자들의 은거에 가까워 보인다. 

디오게네스는 통 속에서 은거하며 지냈는데 

어떤 높은 사람이 자기를 만나러 찾아오자 한다는 말이, 

“빛을 가리지 말고 좀 비켜주시오” 했다는 것이다. 

아르세니우스의 목적이 마음의 평화였다고 위의 텍스트가 보여준다고 해도 

다른 텍스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으로부터 물러남이 

목적이었음을 드러내주고 있다. 

안토니우스의 금언이 바로 그렇다.


  “압바 안토니우스가 다시 말했다. 

물고기들이 물 밖에 너무 오래 머무르면 죽습니다. 

수도승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세상 사람들과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거나 

또는 자신의 암자를 벗어나서 너무 오래 머무르면, 

그들은 마음의 깊은 평화를 잃게 됩니다. 

오시오. 우리도 물고기들처럼 합시다. 

그들은 바다로 재빨리 되돌아갑니다. 

그렇게 우리도 내적인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도록 빨리 우리의 독방으로 되돌아갑시다.’


  여기서 우리는 외적 헤시카즘, 곧 독방이 내적 헤시카즘을 향해 있으며 

내적 헤시카즘은 겸손,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 통회 혹은 눈물(Πἔνθος, penthos), 

그리고 모든 이에 대한 진실한 사랑 속으로 흘러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잘 볼 수 있다.


  내적 헤시카즘의 네 가지 특징은 다음과 같다. 

곧, ‘아메림니아’(Ἀμεϱιμνία, amerimnia), ‘넵시스’(Νῇψις, nepsis), 

‘크룹테 멜레테’(cruptẽ meletẽ), ‘끊임없는 기도’이다.



1) 아메림니아(Ἀμεϱιμνία, amerimnia)


   이는 ‘근심으로부터의 자유’를 뜻한다. 

인간 도시의 소음과 소란에서 물러날 필요가 있지만, 

여전히 마음은 더욱 흐트러지며, 

외적 고요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애착과 집착, 생각들로 말미암아 방해받고 시달린다. 

헤시카즘 수행자의 가장 큰 관심사는 

‘근심 없이’ [‘아’(부정사) + ‘메림니아’(근심)]지내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는 예수께서 복음서에서 권고하시는 자녀다운 신뢰의 덕을 뜻한다. 

즉, 이 지상 생활의 근심들과 일시적 상황들에 대한 걱정들을 밀쳐두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손에 맡겨드린다는 뜻이다.



2) 넵시스(Νῇψις, nepsis)


  이는 ‘깨어 있는 상태’ 혹은 ‘정신이 맑은 상태’를 나타낸다. 

엄밀한 의미로는 ‘하느님과 자기 자신에게 늘 깨어 있는 자세’, 

‘악한 생각들을 통해 마음과 정신 안에 들어오려 하는 악령으로 놀라지 않도록 

신중하고 주의 깊은 자세’, 

‘유혹이 다가오자마자 거부하려는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방어 자세는 정신과 마음에 대한 ‘경계’ 또는 ‘주의’(Πϱοσοχή, prosoche)라고도 부른다. 

안토니우스는 내적으로 깨어 있는 상태를 유지하며 독방에 머물라고 권고한다. 

이것이 바로 자기 자신과 하느님의 현존 앞에 온전히 깨어있는 영혼의 상태이며, 

마음을 지킨다는 뜻이다.



3) 크룹테 멜레테(cruptẽ meletẽ)


 ‘아메림니아’와 ‘넵시스’는 영혼을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가질 경향이 있다. 

하지만 '멜레테'(meletẽ → meditatio)는 그보다 좀 더 긍정적인 것으로서 

영혼을 준비시켜 곧바로 끊임없는 기도를 하게 만든다.


 ‘묵상하다’란 뜻의 그리스어 동사 ‘멜레탄’(meletan → meditari)은 

그 이상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단어에는 또한 ‘수행’이란 뜻도 담겨져 있다. 

멜레테에서 묵상은 영혼이 기도할 준비를 하도록 큰소리를 내며 이루어진다. 

한마디로 기도를 위한 준비운동인 셈이다. 

짧은 성구들이 반복되면서 영혼 속으로 스며들어가게 되고 

이어서 기도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당시 사람들은 서로 말을 할 때 큰 소리를 내던가, 

아니면 작게 속삭이던가 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앞서 본 대로 

파코미우스의 수도승들은 일터나 성당이나 식당이나 어디서나 성서 구절을 되뇌었다. 

이집트 북부의 은수자들은 혼자 살았고 

큰 소리를 내느라 다른 사람을 방해할 위험도 없었다.


  시소에스(Sisoes) 압바는 한 텍스트를 만들어 놓고는 반복해서 읽었다. 

“주 예수여, 내 혀로부터 저를 구하소서!” 

스케티스에 오기 전 큰 범죄를 저질렀던 마카리오 역시 이런 기도문을 반복했다. 

“저는 죄 많은 인간이오나, 당신은 하느님이시니,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지만 교부들은 보통 겸손 때문에 자신의 멜레테를 숨겼다. 

‘크룹테 멜레테’는 ‘숨겨진 기도의 수행’이란 뜻이다.


  ‘멜레테’란 보통 두 종류이다. 

곧 ‘도움이나 보호를 요청하는 기도’와 ‘자비를 구하는 기도’이다. 

마카리오는 이런 두 종류의 멜레테를 보여주는 한 예를 전하고 있다. 

“누군가 압바 마카리오에게 ‘어떻게 기도해야 합니까?’라고 물었다. 

압바가 대답했다.

‘여러분은 긴 말을 늘어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단순히 여러분의 손을 펼쳐 들고 

‘주님, 당신 뜻대로, 당신이 아시는 방법대로 하시고, 제게 자비를 베푸소서!’

라고 말하시오. 

그리고 만일 여러분 안에서 마음의 갈등이 일어나면, 

‘주님, 도와주십시오!’ 라고 하시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바를 아시고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훨씬 후대에 가서 이 기도는 

‘창을 던지다’라는 뜻의 라틴 단어에서 나온 말인 ‘화살기도’라고 불리게 되는데, 

성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한 서간에서 이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이집트의 수사들은 기도를 자주 바치는데, 

그 기도들은 매우 짧고 화살처럼 빠르게 내뱉는다고 합니다.” 

동방에서는 이를 ‘단음절 기도’(monologue prayers)라고 부르는데, 

그 뜻은 하나의 단어로 이루어진 기도라는 말이다. 

이 수행으로 인해 ‘예수기도’가 생겨나게 되었다.



4) 끊임없는 기도


 ‘아메림니아’, ‘넵시스’, ‘멜레테’는 지속적인 기도로 나아가야 한다. 

수도승들은 “끊임없이 기도하시오”라는 성 바오로의 말씀을 실천하고자 노력해왔다. 

하지만, 그들은 기도가 쉽지 않은 것임을 경험으로 알았고 

그것이 일종의 투쟁임을 깨닫게 되었다. 

더욱이 그들은 인간 육체는 길들여져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 역시 생계를 위해서 노동을 해야 했다. 

수도승들의 노동은 먼저 생계유지라는 실제적 목적과 

‘아케디아’(Ἀκηδία, akedia)에 대한 치료제라는 영적인 목적, 

그리고 가난한 이들과의 나눔이라는 애덕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이런 본질적인 손노동과, 

수행생활이 목적하는 끊임없는 기도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 하는 것이었다. 

수도승들은 ‘멜레테’ 수행을 통해 단순한 기도, 즉 마음의 기도에 이르렀다.



성 베네딕도 화순 수도원 홈페이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