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는 기도

동방정교회의 아포파티시즘과 헤시카즘

은가루리나 2015. 10. 23. 13:11


이해욱프란치스코60 등급변경▼ 조회 8 추천 0  2015.04.02. 12:39



기독교세계에서 오랫동안 잊혀져 온 형제 

동방정교회의 신학과 영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내용 일부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신학이 이성적 지식 및 그 서술에 치우치는 경향에 반대하여, 

참된 신학은 하나님께 대한 경외와 예배이며 

이는 성령으로 인한 영적 체험을 통해 가능하다고 하는 정교회의 주장이 

마음 깊이 와 닿습니다. 


그들의 신학과 실천에서 과도하거나 부족한 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서방의 교회에 던지는 깊은 메시지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페북 장기영님).




--- 동방정교회의 아포파티시즘과 헤시카즘 ---



1. 아포파티시즘 (apophaticism)


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라는 책을 읽은 

한 모스크바 국립 대학의 러시아 정교회 소속 신학생은 

루이스의 글에 대해 

“너무나 논리적이고 합리적” 이라는 점이 약점이라는 견해를 표현하였다고 합니다. 


또 다른 학생은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를 읽은 후 

“악의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 논리학을 사용하는 루이스의 방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형상학적 영역인 자연세계를 토론하는 데 있어 논리학은 좋은 도구이지만, 

형이상학적 영역에 속하는 대상의 본질을 다루는 데 

논리학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께 관련된 문제는 인간의 논리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라고 말하였다고 합니다.



동방정교회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요1:18, 요일4:12), 


“하나님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딤전 6:15-16),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롬11:33-35) 

등의 성경 구절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길과 하나님의 생각은, 

하늘이 땅보다 높은 것처럼, 

인간의 인식과 판단과 경험보다 무한하게 높으시기 때문입니다 (사55:8-9). 



하나님은 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고 우리가 판단할 수 없는 분이시라는 

동방정교회의 강조점은 

성경의 여러 본문들에서 충분히 증거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을 계시하실 때 

모세가 감당할 수 없기에 

바위 사이에 두시고 당신의 얼굴이 아닌 등만 보이신 예 (출33:11, 18-23)


이사야가 하나님의 이상을 보고 죽을까 두려워 하였을 뿐 아니라, 

심지어 스랍들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눈을 가린 사실 (사6:1-5), 


심지어 하나님의 천사를 보고도 기드온과 마노아가 죽음의 공포를 느낀 일 

(삿6:22, 13:22),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나타나실 때 엘리야가 겉옷으로 얼굴을 가린 일 

(왕상19:13), 


바울은 다메섹 도상의 빛으로 인해 눈이 멀게 되었을 뿐 아니라 (행9장), 


자신이 이상 중에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경험한 바를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가히 이르지 못할 말”로 표현한 일 (고후12:2-4) 등... 



동방정교회는 

인간이 알 수도 없고 접근할 수 없으며 감당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영광과 위엄과 신비 앞에서 


인간의 인식은 무지로, 

인간의 언어는 표현불가능으로, 

인간의 존재는 하나님을 감당할 수 없음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존재 앞에서 

인간의 인식의 제한성, 인간 언어의 개념적 부적합성, 하나님의 존재 자체의 불가해성을 

그들의 아모파틱한 (apophatic, 부정적인 묘사를 통하여 설명하는) 신학 언어를 통하여 

표현하였습니다.



“신성의 본질, 그것은 불가해한 것이다” (다마스커스의 존, 정교회 신학 해설 1편), 


“하나님은 마음으로 이해될 수 없는 분이시다. 

만일 그 분이 이해되는 분이라면, 그 분은 하나님이 아니다” (폰투스의 에바그리오스),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지식과 비전은... 우리의 모든 지식의 이면에 놓여 있어서, 

불가해성의 어둠에 의해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 (니사의 그레고리).



우리는 하나님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기 시작할 때 

- 예를 들어, 그 분은 전능하시고, 의로우시고, 사랑이시다 등 – 인간의 언어는 

그 과제를 이루기에 너무나 부적합하며, 

목표를 이루는 데 항상 부족하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어떤 주장이나 어떤 형태의 언어도 

초월적 하나님을 충분히 묘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위-디오니시우스의 “신비신학”에서). 



따라서, 모든 참된 신학은 근본적으로 부정적 (apophatic) 일 수밖에 없습니다. 

고백자 막시무스가 

“신적인 문제에 관한 한 부정적 진술만이 유일하게 진실한 진술이다” 라고 말한 것처럼, 

부정신학 (apophaticism) 이야말로 

우리의 인식 및 묘사의 한계를 넘어서 계시는 하나님과 조화되는 신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아포파티시즘 (apophaticism) 은 

우리의 정신이 지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그 분의 존재를 직면할 때 경험하는 

지적 파산의 표현이며, 

인간이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여 

그 이해 불가능하고 대상화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존재 앞에 

무릎을 꿇고 경배하는 행위이자, 

하나님의 신비는 우리의 말로는 설명될 수 없다고 하는 

하나님의 표현 불가능성의 선언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 이성의 근본적 부정이 아니라, 

보다 위대한 완전성 앞에서 우리의 지성은 앎이 아닌 무지로, 

신학과 교리는 지식과 서술이 아닌 

묵상과 형언할 수 없는 신비적 경험으로 변형될 수 밖에 없음을 의미합니다. 





2. 헤시카즘 (hesychasm)


동방정교회는 

인간이 알 수도 없고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과 신비성에 부합하는 신학의 방법을 

영적 경험을 통한 방법으로 가르쳤습니다. 


신학이 하나님께 관하여 이해될 수 없는 부분을 

마치 이해될 수 있는 것처럼 말하고 서술하는 것을 방자한 행위로 여기면서, 

동방정교회는

신자의 영적 체험을 하나님을 알아가는 인식론적 원리로 가르칩니다. 


즉, 하나님의 신비적 요소들은 

합리적 이성에 의한 지식과 서술의 대상이라기보다 

영적 체험과 경배의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식 불가능하고 표현 불가능한 

신비의 부정적 (apophatic) 암흑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영적 체험의 빛 가운데서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십니다. 



참된 신학은 

단지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학입니다.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과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것 안에서 

신자의 하나님 이해는 영적 체험과, 

신학은 영성과, 

인식은 신비와 분리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결합됩니다. 



그래서 서방의 신학이 

하나님께 관한 합리적 사색을 추구하는 추상적 신학으로 기울어지는 것에 반대하여, 

동방정교회는 

신학이란 하나님께 대한 역동적, 개인적, 신비적 경험의 신학이어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서방의 신학에서는 

영성적 삶이 없이도 신자는 여전히 

공식적이고 정통적이고 보수적인 입장의 신학을 견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교회의 신학은 

하나님의 신비가 성도의 영적 체험 속에서 계시되는 신학, 

영적 체험이 하나님께 대한 이성적 이해를 이끌고 인도하는 신학, 

즉 성령 체험에 의한 신학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부정신학 (apophaticism) 을 영적 체험 (hesychasm) 과 결합시킴으로, 

불가해한 하나님께서 

성령의 체험이라는 통로를 통해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을 가르칩니다.




신 신학자 시메온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성령은 표현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사람에게 보내진다. 

성령은 불신자, 학자들, 유명한 사람들, 우정을 이루는 데 성공한 사람들, 

풍부하고 세련된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들, 성공한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삶이 가난하고, 마음과 몸이 정결하며, 말에 가식이 없으며, 

그 생각이 단순한 사람에게 임하신다. 


하나님께서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을 만나주시는 것은

그들의 이성적인 사고나 교리를 통해서가 아니라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해서이다. 

그들이 인간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성령을 교사로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성령의 빛에 의해 성자를 체험하고, 

성부를 체험하고,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흠숭할 수 있게 된다.” 




데살로니가 대주교였던 팔라마스의 그레고리는 

하나님의 불가해성을 강조하는 초월적 아포파티시즘과, 

성령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다는 가르침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씨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신적 본성은 우리에게 접근 불가능한 대상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당신은 자비와 신적 활동을 통하여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신다.” 



닛사의 그레고리 역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나님께 관해 말할 때, 그 분의 본질에 관한 질문이 제기되면 

그 때는 침묵을 지켜야 할 때이다. 

그러나, 그 분의 자비와 활동에 관한 질문이 제기 되면 

그 때는 우리가 말해야 할 때이다.”



이와 같이 동방정교회는 

인간이 가까이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을 드러내시는 성령 체험 사이를 구별함으로써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 모두를 언명하는 동시에, 

하나님께 대한 신비한 영적 경험의 빛이 

아포파틱한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경외와 흠숭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을 체험할 것을 강조하는 

동방정교회의 수도사들이 천 년 넘도록 사용해온 

영적 체험에 이르는 실천적인 방법을 소개하자면, 

그 주된 방법은 정교하게 훈련된 기술들 

(몸동작, 호흡, 내적 성찰, 예수님을 부르는 기도 등) 을 통해 

고요와 평강 가운데 그리스도께만 집중하는 기도 (hesychasm) 입니다. 


그 다양한 방법 중 시내의 그레고리 (Gregory of Sinai) 가 제자들에게 가르친 

헤시카스트식의 기도방법의 한 예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약 8인치 높이의 낮은 의자에 앉으라. 

당신의 정신에 압박을 가하여 

그것이 당신의 머리에서 마음으로 들어가게 하고, 

정신을 마음 안에 잘 간직하라. 

당신의 가슴과 어깨와 목에 날카로운 고통을 느끼도록 

공을 들여 몸을 엎드리라. 

그리고 당신의 혼과 영으로 쉼 없이 부르짖으라.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 다음으로 

압박과 노력 때문에 생긴 혐오감으로 인해 당신의 정신을 후반부로 옮겨서 

이렇게 여러 번 반복하여 말하라.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게으름으로 인해 전반부의 기도와 후반부의 기도를 빈번하게 바꾸지 말라. 

이것은 끊임없이 옮겨 심겨진 나무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숨을 들여 마실 때 호흡을 잘 다스리라. 

그리고 당신이 편할 대로 호흡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왜냐하면, 

마음에서 일어나는 공기의 흐름이 정신을 어둡게 하고 지성을 촉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성은 마음으로부터 멀리하라… 

할 수 있는 한 호흡을 몰아 내쉬는 것을 통제하라. 

그리고 계속 당신의 정신을 마음 안에 붙들어두면서, 

지속적으로 끊임없이 주 예수를 부르라.







참고도서: 대니얼 B 클레데닌 지음, “동방 정교회 개론”, 김도년 번역 (서울: 도서출판 은성, 1996), 75-117.

[출처] 동방정교회의 아포파티시즘과 헤시카즘 |작성자 민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