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모음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노자 도덕경 5장)

은가루리나 2017. 3. 10. 22:13


五章

 

天地不仁,

천지불인

 

以萬物爲芻狗;

이만물위추구

 

聖人不仁,

성인불인

 

以百姓爲芻狗。

이백성위추구

 

天地之間,其猶橐蘥。

천지지간     기유탁약호

 

虛而不屈,動而兪出。

허이불굴     동이유출

 

多言數窮,不如守中。

다언삭궁     불여수중

 

 

다섯째 가름

 

천지는 인자하지 않다.

만물을 풀강아지처럼

다룰 뿐이다.

성인은 인자하지 않다.

백성을 풀강아지처럼

다룰 뿐이다.

하늘과 땅 사이는

꼭 풀무와도 같다.

속은 텅 비었는데

찌부러지지 아니하고

움직일수록

더욱더 내뿜는다.

일이 많으면 자주 궁해지네.

그 속에 지키느니만 같지 못하네.

 

- 도올 김용옥이 말하는 "노자와 21세기" 중에서 -





 

[解 釋]

 

천지는 보편적이어서,

마치 사람들이 짚푸라기로 엮은 개를 대하듯이,

만물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오.

 

성인은 비인격적이어서,

마치 짚푸라기로 엮은 개를 대하듯이,

사람들에 대하여 무심하오.

 

이 천지간 자연의 움직임은

마치 풀무가 작동하는 모습과 비슷한 것 같소.

 

텅빔은 전혀 변함이 없는데,

움직일수록 텅빔으로부터 더욱 더 멀어지는 것이오 .

 

말을 많이 하면  텅빈 空(참나)을 자주 잃어버리게 되니,

空의 침묵 안에서 그대로 지키고 있음 만 못하오이다.

 

[해 설]

 

이 5장의 기본 주제는 도의 작용에 대해서 언급했읍니다.

도의 작용에는 크게 두가지가 볼 수가 있읍니다.

즉, 정(定)과 동(動), 또는 텅빔(虛)와 움직임(動)이라고 여기서는 표현하고

있는 데, 의식 측면으로 표현하자면 순수(존재)의식과 육체의식을 말합니다.

또한 침묵(虛)과 망상(動)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순수존재의식은 마치 순수허공처럼 무한한"虛空" 그릇으로 표현 할 수 있으며,

육체의식은 이 공간이라는 그릇안에서 부질없이 생주이멸하는 삼라만상의

변화되는 모습을 "움직임(動)"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지요.

또한 존재의식은 온갖 현상세계를 주시하는 주시자이며, 공간적이라면,

육체의식에 나타난 현상세계는 주시되는 대상이며,

그 움직임은 시간적인 요소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이 5장은 세부분의 다른 글들이 시대적으로 각각 덧붙혀져서

원래 초기에 쓰여진 원본내용이 덧붙혀진 글들로 인해 전체의미가

약간 촛점이 흐려진 듯 합니다.

그래서 해석에 들어가기 전에 시대별로 변화된 부분들에 대하여 간단하게

검토해 봄으로써, 이 5장 내용의 핵심이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간추려 볼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노자 도덕경이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어떤 학자도 명확하게 밝혀내지 못했지만,

대략 추정하기는 적어도 춘추전국시대(bc700여년~bc200여년)에 일반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다는 사실은 모두들 인정합니다.

우리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이 노자도덕경은 일반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이

통용본이라고 해서 "왕필의 주석본"을 보고 있는 것이죠.

이것 말고도 "하상공 주석본"등 많은 주석본이 있습니디만,

일단 왕필의 주석본을 기준으로 삼겠습니다.

 

그다음에 몇년전에 한 무덤에서 발견한 "백서본"이 있습니다.

백서본은 비단에 씌어진 것으로 고대무덤에서 발굴된 것이랍니다.

그리고 곽점본이라고 죽간(대나무 조각)에 씌어진 것이 다른 무덤에서 발견 되었는데,

전문 학자들에 의하여 연구된 바에 의하면,

각각의 노자 도덕경 내용이 조금씩 차이가 나며, 이를 시대별로 구분하면

노자 도덕경의 내용이 어떻게 변천하여 왔으며,

원래 내용을 나름대로 추정해 볼 수가 있다고 합니다.

 

왕필본이 대략 기원후 230여년 시대의 것이라면,

백서본은 대략 bc200여년 전후의 전국시대 말기의 것이라고 하며,

곽점본은 대략 bc500~bc400년경의 춘추전국시대 중기의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보고있는 왕필본을 기준으로 해서,

백서본은 대략 400여년 앞서 있는 것이라면,

곽점본은 백서본 보다 200년이상 앞서 있으니깐,

곽점본이 왕필본보다 약600여년이 앞서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왕필본의 경우는 원래의 원본 내용보다도 많은 개작과 변화가 있을 것으로 판단 됩니다.

실지로 많은 학자들이 연구 검토했으며,

이결과 노자 도덕경은 노자라는 한사람의 어느 도인이 저술한 글을 바탕으로,

도가 계통과 그외의 여러 학파가 오랜세월동안 조금씩 추가하거나 개작했다는 설이

점점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 옛날에는 종이도 없고, 단순히 대나무나 헝겁에다 스스로 혼자서 베껴 쓰는 과정에서

스스로 글옆에 개인적인 착어를 붙힌 것이 대대로 전래되어 내려 올 수도 있어서,

그러한 내용들이 왕필시대까지 전해 내려온 것일 수도 있죠.

 

노자 도덕경의 내용중에서 전후 연결이 안되는 문장들 중에 후대에 덧붙혀진 글들이

제법 많다고 하는군요.

이 5장에서도 그런 덧붙혀진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 후대에 붙혀진 문장들 때문에

전체 내용이 약간 다른 방향으로 변화되어 촛점이 흐려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읍니다.

이제 해석해 나가면서 그때그때 검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天地;시공간. 仁; 어질다,인자하다. 以; 써,~부터,닮다. 萬物 ; 삼라만상

爲; 여기다, 행하다,하다. 芻狗; 짚이나 풀로 만든 강아지.

 

天地는 하늘과 땅이라고 번역이 되지만, 여기서는 그런 현상적으로 나타난 구체적

사물이 아니라, 기본적인 자연자체, 즉 시간과 공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읍니다.

仁이란 사람이 갖이고 있는 人情,즉 인간적인 자애심을 말하죠.

그런데 仁자를 破字해 보면 사람人자에 둘二자이니깐,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 인간적인

관계를 말하는 것이죠.

여기서 不仁이란 인간적인 면이 없다는 것이죠.

즉, 인간의 마음이 희로애락(喜怒哀樂)하는 마음의 움직임이 없는 상태,

즉 무심한 상태를 말하며, 보편적인 우주적 의식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연자체는 사람의 마음과는 전혀 관계가 없죠.

그래서 번역해 보면 <자연은 보편적이어서>이렇게 해석을 해 보았습니다.

 

以萬物爲芻狗-마치 만물을 추구(풀강아지)처럼 여긴다.- 이렇게 직역할 수 있읍니다.

여기서 추구(풀강아지)란 옛날 중국에서 신에게 제사 지낼 때에 제삿상에 형식적으로 올려 놓는 제숫물로 제사가 끝나면 길에다 내 버린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 이전 원시시대에는 실제로 개를 잡어서 신에게 올렸는데,

세월이 가면서 점차 형식화되어 풀로 개모양으로 만들어 신에게 올리는 시늉만 한 것이겠죠. 이렇게 제사가 끝나고 길에 내다 버린 풀강아지는 누구도 거들떠 보지도 않는 하찮은 물건이죠. 자연은 모든 만물을 그렇게 하찮게 본다는 겁니다.

그러나 자연의 작용이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에는 쌀쌀하게 인정머리없이 보이겠지만,

자연은 "있는 그대로" 저절로, 무위적으로 흐를 뿐이죠.

 

이렇게 해서 두문장을 합쳐 말을 꾸며 보면,

<자연은 보편적이어서, 마치 사람들이 짚으로 엮은 개 보듯이, 만물을 무관심하게 대한다>

여기서 번역상으로 -천지가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

라고 그대로 직역해 버리면,

천지가 직접 그렇게 여기는 것도 좀 어색한 말이 되고,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는 표현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생각일 뿐이죠.

그래서 위와 같이 번역을 했읍니다.

 

다른 번역서들의 해석을 들여다 보겠읍니다.

-천지는 사사로운 정을 품지 않으니 만물을 풀강아지로 여기네-

-천지는 인자하지 않다, 만물을 풀강아지처럼 다룰 뿐이다-

-천지는 불인하여 만물을 풀로 엮은 강아지를 보듯이 무심하게 바라 볼 뿐이고,-

-천지는 어질지 않아서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대하고-

-하늘과 땅은 인하지 않으니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버려둔다-

 

聖人不仁 以百性爲芻狗

 

위의 문장과 동일하므로 그대로 해석하겠읍니다.

<성인은 비인격적(보편적)이므로, 마치 짚으로 엮은 개 보듯이,

모든 사람들을 무심으로 대한다.>

 

위의 천지의 경우에는 -  보편적-이라는 단어로 표현한 것을,

성인의 경우에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비인격적이다-라는 단어로 바꾸었읍니다.

두단어는 의미가 동일한 단어입니다.

 

여기서 백성이란 '온갖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지,

성인이 한 나라의 왕의 입장에서 말하는 '백성'을 뜻하는 것은 아니죠.

성인은 의식을 초월한 도인입니다.

따라서 사사로운 인간성에 좌우되는 마음이 사라졌읍니다.

마음은 인간적인 의식이지만, 깨달음이라는 것은 이 인간적인 마음을 버리는 것이죠.

깨달은 각자(覺者)는 한인간이라기 보다, 보편적 존재이며,

자연처럼 무심(無心)하고 무위적으로 살아 갑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의 자비심이 중생의 입장에서 볼때는 넓은 자애심으로 여기지만,

엄밀히 말해서 부처에게는 그런 감성적 자비심이 아니라,

자연과 일체가 된 일체심을 자비심이라고 합니다.

 

완전히 깨달은 성인은 사사로운 情에는 무심합니다.

옆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드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읍니다.

죽음과 탄생을 넘어서 있어서, 오히려 육체의 죽음을 반기는 것이 성인들이죠.

왜냐하면 육체때문에 의식이 생겼고, 모든 고통은 이 의식때문에 나타난 결과이며,

육체의 죽음으로 인해 개인적인 의식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게되죠.

그러나 육체가 살아 있을 때에 자신이 죽음을 넘어서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쳐야죠.

그것을 불교에서는 니르바나,즉 열반이라고 하죠.

성인들에게는 육체가 살아 있으면서, 이육체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나는 일,

이 열반이 인간에게 가장 축복받는 일이라고 말씀들 하십니다.

그래서 성인은 의식 넘어에 있는 비인격적인 보편의식에 자리잡고 있는 존재들이죠.

 

다른 번역서들의 내용을 들여다 보겠읍니다.

-성인은 사사로운 정을 품지 않으니 백성을 풀강아지로 여기네-

-성인은 인자하지 않다. 백성을 풀강아지처럼 다룰 뿐이다.-

-성인도 불인하여 백성을 풀로 엮은 강아지를 대하듯 간섭하여 말하지 않는다.-

-성인도 인하지 않으니 백성들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버려둔다-

-성인도 어질지 않아서 백성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취급합니다-

 

위의 천지불인과 성인 불인에 대한 구절은 왕필본보다 600년이 앞서고, 백서본보다

약 2~3백여년이 앞선 곽점본에는 없는 구절입니다.

따라서 춘추전국시대 중기와 말기 사이에 누군가가 앞구절을 삽입한 것이 그대로

전래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원래 노자 원본에 없었던 구절로 다음에 나올 한구절의 내용과는 약간 논리적 연결이 안맞는 것 같읍니다.

 

天地之間 其猶橐籥乎 虛而不屈 動而愈出

天地之間 ; 자연현상 또는 이현상계의 온갖 변화상을 말합니다.

맨첫번째 구절의 天地不仁의 天地와는 의미가 다릅니다.

앞의 구절 天地는 時空間이라는 빈그릇을 의미한다면,

이 구절의 天地之間은 그 天地라는 그릇안에서 움직이는 내용물을 말합니다.

其猶橐龠乎

其 ; 앞의 천지지간을 가리키는 대명사, 그것은-

猶 ; 오히려,가히,원숭이,움직이다,같다

橐 ; 전대,주머니,풀무,절구질하는 소리

龠; 피리

橐龠 ; 풀무 바람통과 바람이 나가는 파이프를 포함한 풀무기계의 한셋트.

乎 ;어조사,감탄사.

猶자는 풀무의 동작, 또는 '같다'의 의미.

'탁약'은 왕필이 주석에서는 풀무와 피리라고 되어 있고,

어떤 주석서에는 '탁'은 풀무 바람통 자체이고, '약'은 바람통에서 만들어지는 바람이

빠져 나가는 대나무 파이프를 말한다고 되어 있읍니다.

따라서 여기서는 '탁약'을 풀무로서 번역을 했읍니다.

두글자가 풀무와 피리든, 절구와 피리든, 전체가 풀무든 간에

여기서 노자가 말씀하시는 기본 요지는 움직이지 않는 텅빔과 움직임자체를

묘사하기 위한 비유이므로, 비유적 의미에서는 크게 차이가 나지는 않겠죠.

 

그래서 번역을 해 보면,

< 이 천지간 자연의 움직임은 마치 풀무가 작동하는 것과 비슷하다> 

풀무란 대장간에서 쇠를 달구기 위해서 숫불에 바람을 불어 넣는 기계인데,

그것의 구조가 큰 원통 안에 피스톤이 왔다 갔다 하면서 바람을 불어 넣어주는

구조인지, 아니면 큰 통안에서 날개를 움직여서 바람을 만들어 대나무 파이프를 통해서

숫불 속에다 바람을 넣어주는 구조로 되어 있는 지는 모르겠읍니다만,

좌우지간 큰 통안에 어떤 판때기나 날개가 움직여서 바람을 만드는 것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읍니다.

즉 큰 통의 공간 자체는 그대로 있지만 그안에서 움직이는 피스톤이나 날개가 움직이는 것은 마치 이세상의 공간은 항상 변함없이 그대로 인데, 모든 삼라만상의 움직임은

그 고요한 공간 안에서 부질없이 이리왔다 저리갔다 하면서 움직인다, 는 비유입니다.

 

실질적으로 우주허공은 그대로 있지만 그 허공안의 내용물들은 시간에 의하여 부질없이 움직이죠.

이것은 바로 천지, 즉 공간과 시간사이의 파동적 움직임을 풀무의 움직임 현상을 비유해서 표현한 것입니다.

이 세상은 시간과 공간의 움직임인데, 그것은 바로 파동성 의식흐름의 표현입니다.

이글에서 제가 유별난 특정 개념을 소개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 모든 나타난 현상세계는 전체가 의식의 작용이며,

움직이는 파동의식의 표현이라는 사실만은 말하고자 합니다.

노자도 바로 이러한 원리를 풀무의 움직이는 작동모양을 비유해서 말씀하신 것이죠.

 

虛而不屈

虛; 비다,구멍, 而 ; 어조사 , 屈 ; 굽다, 굽히다, 다하다,강하다.

직역하면,

- 텅빔은 굽어지지 않는다- 이렇게 직역됩니다만,

조금 말을 바꿔서 가다듬어 보면,

<텅빔(허공)은 변하지 않는다> 이런 말이죠.

비록 바로 윗구절에 풀무를 예로 들었읍니다만,

이 '허이불굴'은 풀무에 대해서 묘사한 것이 아니라,

천지지간에 대해서 묘사한 것이죠.

그래서 주어는 천지지간입니다.

즉 천지지간 허공의 텅빔은 항상 변화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풀무가 작동을 하고 있을 때도 그 공간자체는 찌그러지거나 굽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이죠.

 

이 <虛>를 의식적인 측면으로 보자면 순수의식이라고 볼 수 있읍니다.

완전히 절대본체는 아니지만, 우주적 자아 또는보편의식인 나로써,

참나에 가장 근접한 의식입니다.

따라서 <道의 본체>를 <참나>라고 하면,

현상계의 주시자인 <虛>는 <우주적인 나>입니다,

 

순수존재의식은 절대 본체에서 직접 나타난 육체감각기관에 의하여

변형되지 않은 보편적 우주자아의식을 말합니다.

이것은 절대본체와 같이 순수한 허공같으나, 의식이라는 빛형태의 극히 미세한 파동성

이 있어서, 대상적인 육체의식과 항상 같이 있읍니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살아 있고, 의식이 깨어 있기 때문에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삼라만상을 보고 아는데, 실은 그런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육체 개인의식이 아니라,

이 보이지 않고 알수 없는 순수한 텅빔(虛)의 존재의식입니다.

이것이 바로 개인의식의 주시자이며,

사람이 살아 있다고 느끼며, 자기 존재를 알고 있는 "내가 있다"는 앎 입니다.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이 순수존재의식을 "신"으로써, 어떤 이름과 이미지를 부여하고는

그것을 숭배합니다.

그러나 그 "虛"는 누구에게나 내면에 있으며,

마음으로는 알수가 없지만,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그자체가

바로 그 "허"인 순수존재의식 또는 "내가 있다"는 앎이 있다는 것입니다.

노자님은 이것을 바로 풀무 바람통 속의 공간인 "虛"으로 비유하고,

그 텅빈 공간 안에서 움직이는 판자날개와 바람을 이 감각상 표면에 나타난 현상세계의 움직임(動)으로  비유하신 것이죠

 

動而愈出

動 ; 움직이다, 떨리다, 愈 ; 낫다, 더하다,더욱,

직역하면,

-움직임은 더욱 더 나온다- 이렇게 번역이 됩니다만,

움직임자체가 허공으로 부터 빠져 나온다는 의미죠.

< 움직임은 텅빔으로부터 점점 더 빠져 나온다>

허공은 가만히 있지만, 움직일 수록 허공에서 밀려 나온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움직일수록 고요한 허공으로부터 점점 멀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움직임 자체가 무엇인가를(바람같은 것을) 점점 더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움직일 수록 고요한 텅빔이 사라진다는 의미로도 볼 수가 있읍니다.

원래 천지간에 있는 텅빔의 침묵이 움직임에 의해서 점점 잃어 버린다,는 것이죠.

이 움직임은 바로 마음의 흐름, 의식의 움직임을 말하고, 허공은 침묵을 의미합니다

 

바로 이 虛와 動을 말하기 위해서,

앞의 구절 '천지지간이 풀무의 움직이는 모습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이죠.

도의 절대본체에서 의식의 빛이 나옵니다.

이 의식이 처음 나올 때는 의식의 중심 주변에서 변화하지 않고 순수한 의식상태로

있는데, 이 순수상태의 의식이 존재의식입니다.

이 순수의식은 중심부분에 있어서 전혀 변형되지 않아서 완전히 텅빔의 상태죠.

시간도 공간도 활성화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때가 바로 空, 텅빔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일단 이 순수한 의식이 육체에 젖어 버리면 존재의식의 순수파동성이

변조되고 산란되고 분해되어 시간과 공간이 나타나고 삼라만상의 온갖 경계와

움직임이 나타나는 것이죠.

즉 虛와 動이 동시에 있는데, 이것들이 바로 절대본체의 작용의 측면이죠.

 

마치 이 우주공간자체는 항상 변함없이 있는데, 그 공간 안에서 온갖 삼라만상과 별들

물질들이 생주이별하는 것을 풀무의 바람통안의 공간과 날개의 움직임으로 비유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음의 움직임 자체에만 주의를 주면 허공(침묵)을 잊어 버리고,

허공에 주의를 주면 움직이는 이현상경계세계는 사라지죠.

허공이란 바로 우리들의 보편의식인 주시자를 말하며,

움직임이란 나타나 보여지는 현상세계와 육체마음을 말합니다.

의식상으로 보면 "虛"는 침묵이고,

"動"은 마음의 움직임, 즉 생각의 흐름 또는 망상(妄想)이라고 보아도 되죠.

 

虛而不屈 動而愈出,- 이 구절이 도덕경5장의 핵심 주제라고 말할 수가 있읍니다.

 

중간 구절 전체에 대하여 다른 번역서의 내용들을 들여다 보겠읍니다.

-하늘과 땅사이는 풀무나 피리와 같다. 텅비어서 막혀있지 않고, 움직일 수록 더욱 더 많은 것을 내어 놓는다.-

-하늘과 땅사이는 꼭 풀무와도 같다, 속은 텅 비었는데 찌부러지지 아니하고 움직일 수록 더욱 더 내뿜는다-

- 천지사이의 공간은 어떻한가? 절구질과 피리를 부는 것은 어떠한가? 천지간은 텅 비어서 찌그러지지 않을 뿐이지만, 절구와 피리가 속이 빈 것은 부지런히 움직일 수록 많은 것을 흘리고 있으니-

-하늘과 땅 사이는 마치 풀무같다고나 할까? 텅 비어 있으면서도 다하는 일 없이 움직이기 만 하면 더욱 (바람이)나온다.

-천지 사이는 아마도 풀무와 같나 보다, 비워도 비워도 다 함이 없고, 움직일 수록 더욱 더 잘 나오네.-

 

위의 번역내용들이 모두 움직일 수록 무엇인가를(바람등) 더 나오게 한다고 번역했는데,

움직임이 무엇인가를 만들어서 더욱 더 나오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움직이면 움직임자체가 텅빔(虛)로 부터 더욱 더 빠져 나오는 것이죠.

 

쉽게 말해서 마음이 조용하지 못하고 망상(妄想)을 내면 낼수록,

고요함으로 부터 점점 더 멀어진다는 말씀입니다.

망상을 내는 행위가 바로 풀무가 펌프질하는 모양으로 비유한 것이죠.

 

움직임 그자체 외에는 더 나올 것이 없는 것이죠.

그 움직임 자체가 텅빔으로부터 더욱 더 빠져 나오는 것이니깐,

실질적으로는 움직일 수록 道로 부터 점점 멀어지면서,

텅빔(虛)로부터 빠져 나온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해설서들이 이 구절에서 노자가 가르쳐 주는 손가락 방향을 잘못 보고 핵심을 놓치고 있는 것 같읍니다.

 

가장 오래된 곽점본(bc4~500년경)에는 이 중간 구절만 있고,

맨 첫구절과 마지막 구절은 없읍니다.

따라서 이 구절이 원래 노자의 원본 내용이라고 보면 되며,

맨 첫구절인 천지불인---, 성인 불인---, 과 뒤의 다언수궁,불여수중, 구절은

그 후대에 누군가가 삽입한 것이라고 보면 되겠읍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번역서들이 이 허이불굴과 동이유출,의 내용을 다른 의미로

주석하고 해석하므로써 이장의 전체적 핵심이 완전히 빗나가서 흐려지고 있음을

볼 수가 있읍니다.

 

多言數窮 不如守中

多言 ; 많은 말, 말이 많다. 數; 셈, 두서너,자주. 窮 ; 다하다, 마치다, 궁하다.

如 ; 같다, 쫏다,어떠하다, 가다 만일,어찌, 어조사 , 守 : 지키다.

 

多言數窮 ; -많은 말은 자주 궁해진다,- 이렇게 직역할 수가 있읍니다만,

이글에서 의미하는 것은, 많은 말은 텅빔(道)으로부터 멀어진다는 의미입니다.

 

"窮해 진다"는 것은 '말이 막히거나 궁지에 몰린다,' 라는 뜻이 아니라,

<텅빔(虛)이 소진되어 바닥이 난다,>라는 의미이며,

<완전히 道에서 동 떨어진다>는 말이죠.

 

이구절은 바로 전의 구절인 -動而愈出- 에 관련해서 후대에 누군가가 덧붙힌 말인데,

bc500년경의 곽점본에는 없는 문장이고,

그후의 bc200년경의 백서본에는 내용이 多聞數窮(다문수궁)이라고 되어 있읍니다.

즉 -많이 들으면 자주 궁해진다-라고 직역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학문을 많이 알면 궁해진다-는 의미죠.

요즘 언어로 너무 알음알이의 이론적인 개념만 아는 것을 말하는데,

그것이 400여년 후의 왕필본에서는 多言數窮으로 바뀌어진 것이죠.

사실 이구절은 없어도 상관이 없고, 오히려 후대사람들이 이구절을 보고서,

제5장의 전체 핵심이 빗나가게 되어,

결과적으로 "말이 많으면 자주 막힌다"는 식으로 해석을 잘못하게 된 것입니다.

 

노자가 훈계하는 조로 글을 쓴 것처럼 잘못 전달될 수 있는 구절입니다.

말을 많이 하거나, 개념적인 이론을 많이 알거나 간에,

그이전에 우선 마음의 움직임인 생각(망상)이 없어야 되겠지요.

오히려 多知數窮 이나 多意數窮, 이라고 하면 더 넓게 적용이 될텐데,

多言數窮,이라고붙혀 놓으니깐,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노자5장에서 이 多言數窮,이라는 사성어만 외워가지고 다른사람을  희롱하는 도구로 이용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더군요.

 

不如守中-  空(텅빔,침묵)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것만 못하다.-

이렇게 번역이 되겠읍니다.

여기서 中은 원래 그대로 있었던 텅빔(虛)를 말하며,

그 텅빔 안이라는 의미에서 中을 쓴 것 같읍니다. 

또한 움직임이 나오는 의식의 중심으로 지금 여기 현재점의 텅빔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읍니다.

 

多言數窮 不如數中-

< 말을 많이 하면 道(참나)를 자주 잃어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텅빔의 침묵 안에서 그대로 지키고 있는 것 만 못합니다.>

 

이부분에 대한 다른 번역서들의 내용을 들여다 보겠읍니다.

-그러함에 대한 말이 많으면 궁해지기 쉬우므로 적절한 (中)을 지키는 것만 못하다-

-말을 많이 하면 자주 궁지에 몰린다. 중간의 텅빔을 지키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많은 말은 자주 막히게 되니 허정을 지키는 만 못하네.-

-말이 많으면 자주 궁해지네. 그 속에 지키느니만 같지 못하네.-

-그와같이 말이 많을 수록 자주 막히는 바이니, 흉중에 담아두어 밝히지 않음만 못하니라-

- 말을 많이 한다면 처처에 막히게 될 것이니, 중도를 지키느니만 못하지 않겠는지요.-

 

제5장은 원래 처음부터 있던 내용에 앞과 뒤에 다른 구절이 삽입되어 원래 노자가

알려주려고 했던 道의 기본 작용인 虛(定)과 動, 또는 침묵과 망상, 이라는 두종류의

작용에 대한 핵심 가르침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은 것 같읍니다.

그러나 가만히 전체 문장구조를 살펴보면 맨첫구절은 도의 定的인 측면, 즉 텅빔에 대해서 더욱 강조하기 위해서 후대사람이 삽입한 것이고,

마지막 구절은 도의 動的인 측면에 대한 응용적인 면에서 주의를 환기시키는 훈시가 삽입되어 있읍니다.

제5장이 시기적으로 복합된 문장이라는 것을 발견함으로써 앞으로 검토해 볼 여러 장에서도 문장 내용이나 전체적 구성을 면밀히 조사해 봄으로써, 노자의 원래 문장과 후대에 삽입된 문장을 판별해서, 원래 노자가 가리쳐 보여주고자 하는 기본 메세지를 명확하게 밝혀 낼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