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신부님 강론

2017년 5월 11일 목요일 무위신부님 강론

은가루리나 2017. 5. 19. 18:36

오늘의 복음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16-20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17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8 내가 너희를 모두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 그러나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한다. 19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미리 너희에게 말해 둔다.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나임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찬미예수님!

 

우리 1독서를 계속 사도행전을 읽고 있는데, 사도행전의 말씀이,

계속,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는 내용이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어제 그제 , 베드로가, 도대체 어떻게 베드로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수 있을까?

베드로의 이야기로 3천명의 사람들이 세례를 받았다고 하죠.

여러분 3천명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사람들이 모여있다고 해보세요.

제가 강의를 할때 제일 많이 모인 것이 한 9백명 천명 채 안됬어요.

새남터성당에서.

그런데 그 세배의 사람들이 건물안도 아니고 넓은 터에서 모여있었겠지요.

 

옛날 성지순례가서보면, 원형경기장이 참으로 지혜롭게 만들었잖아요.

그 자리에 서서 말하면 사람들이 꽉차있어도,  다 들리도록 만들었다고 하죠.

소리의 과학적인 면을 계산해서 공간을 만든거죠.

 

또 예수님이 장정수만해도 5천명을 먹이신 빵의 기적이 있지요.

장정수만 5천명이라니..그런데 이스라엘사람들의 숫자는 상징적인 것으로 표현해요.

일 하나, 셋, 넷, 다섯, 일곱, 뭐 의미없는 숫자가 없지요.

열둘, 마흔, ...

장정만도 오천명이라니, 만명도 넘는 사람들 앞에서, 이 확성기가 있었겠어요? 그런데, 그 말,가르침에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되었다니..생각해보세요.

 

어떤 신부님은 강론 잘하신다. 뛰어난다. 그래서 강론 한말씀에 완전히 인생이 바뀐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강론 준비는 사제들에게 있어서 정말 중요한 일 중의 한 부분입니다.

어떤 신부님들은 1독서 2독서 복음. 매순간 묵상하면서 준비하고,

실지로 제가 보좌신부일때, 주임신부님 한분은 목요일부터 아예, 강론준비만 하셔요.

사제관에 앉아서, 글을 많이 쓰세요.

 

저도 나름대로 강론이 힘들어서, 책을 엄청 많이 샀어요.

명동나가서 책 사는게 취미였어요. 강론 참고용으로. 목차를 쫙 보고, 강론 주제를 뽑아서, 뭐 논문이고 리포트죠. 리포트. 그래서 리포트를 잘 만들면 저 신부 강론 잘한다는 말을 들어요.

그건, 하느님을 전하는게 하니라, 하느님에 대해서 알아듣기 쉽게 지식적인 것을 전하는 거죠.

그 말 한마디에 강론 잘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것으로 끝이에요.

 

여러분들, 그 유명한 강사가, 신부님이, 여러차레 강의를 통해서, 또는 저 신부님의 강의를 통해서 감화를 받은것이 얼마나 가는 줄 아십니까? 얼마나 가요?

저 자신도 그랬어요.

아 훌륭한 말씀이다. 그랬지만, 그 울림이 오래가지 못해요.

그러니까 많은 신자들이 제 식으로 말하면, 고 꼬락서니로 살아갈 수 밖에 없어요.

냉탕 온탕, 열심히 하다가 또 떨어지고, 이런 생활 반복이에요.

 

이제 저는 거기서 벗어났어요.

오늘 사도행전말씀에 보면, 제자들이 뜨거워요.

바오로사도는 예수그리스도인들을 잡아죽이는 앞잡이였어요.

그 앞잡이였던 사람이 이런 가르침으로 놀랍게 이방인들을 끌어들이기 시작했어요.

 

근데,정말 베드로사도는 좀 우직하고 얼뗘요.

여기에 비해서 바오로사도는 비상한 사람이죠.

그 베드로사도가 이 수많은 사람을 모아놓고 설교를 하는데, 그냥 감복을 해서,

그자리에서 세례를 3천명이 받았다고 하죠.

그것 원인은 뭡니까? 성령체험. 하느님체험이죠.

 

하느님의 역사는 삼위일체이신 성령의 이끄심에 의해서에요.

예수님도 성령의 이끄심에 의해서, 성령에 이끌려서, 광야로 나가고, 말씀하셨다.그랬지요.

이끌어 주신분은 성령이에요. 다 성령.

예수님이 협조자인 성령을 통해서 하느님을 체험할 때 바로 그 체험이 사람들을 감화시켰어요.

 

이제는, 저의 체험으로 많지는 않지만, 그 사람들이 완~~~전히 100% 다른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어요.

냉온탕,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 뜨거운 삶을 살아가고 있어요.

 

이건 뭐에요? 제가 체험한 것, 모든 것, 하느님만이 나의 삶의 주인이시고 모든 것을 하느님중심적으로 생각하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맡김으로써,

조금전에 우리가 외친 화답송.

'당신은 저의 아버지. 하느님은 저의 참 아버지.

그 하느님은 나의 구원의 바위.' 흔들릴 수가 없어요.

지금 박해시대가 온다고 하더라도 나는 아버지를 위해서 내 목숨을 바칠 수가 있어요.

 

생활속에서 들어나게 되어있어요.

진짜는 오래가요. 가짜는 오래갈 수가 없어요.

하느님체험만이 하느님뜻대로, 정말 죄스럽고 부족한 사람이지만, 하느님에 대한 체험만이 그 사람을 하느님 뜻대로 살 수있게 한다는 거에요.

이 놀라운, 오늘 바오로사도의 설교, 어제 그제 계속 이어지는  제자들의 복음전파,

이것이 바로 증거에요. 개신교의 간증은 일시적인 것이고요.

증거는 뭐에요? 증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증인만이 할 수 있어요.

 

증인 뭐에요? 순교자에요. 순교자를 마르띠르.martyr 라고해요. 증거자라고 해요.

목숨을 바쳐서가 아니라, 자기 삶을 통해서 있는 그대로의 삶을 드러내기 때문에,

마르띠르, 순교자, 증거자라고해요.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다 증거자가 되어야해요.

하느님에 대해서 전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체험한 하느님을 전하는 그런 신자가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내가 보내는 이는 누구에요?

당신이 보내신,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을 맞아들이라는 거에요.

거부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저를 따라서 외쳐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아멘!!!

 

하느님을 죽도록 뜨겁게 사랑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