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뜻이 영혼을 다스리실 때

루이사 피카레타에 관한 더 상세한 소개 (1)

은가루리나 2017. 8. 16. 22:05

루이사 피카레타에 관한 더 상세한 소개 (1)

 

                                                                                                  

                                                                                           10/11/2011

루이사는 82세까지 이 땅에서 살았지만, 그 중 64년을 “세상에서 가장 작은 수방(=독방)”인 그녀의 침상에서 지냈다. 침대 둘레와 위쪽에 밝은 색의 쇠붙이 구조물이 있고 거기에 커튼이 달려 있어서 이커튼을 내리면 넓이가 2m2될까 말까 한 독방이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루이사와 그녀의 사랑이신 예수님께는 넉넉한 공간이었으니, 예수님께서 거의 매일 찾아오셔서 그녀의 내적 인간 전체가 당신을 닮아가도록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뿐만 아니라 “엄마” – 루이사는 성모님을 그렇게 불렀다 – 를 위한 공간이기도 하였다.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께서도 루이사가 예수님의 내면과 당신 자신의 내면을 온전히 본받게 하시려고 자주 방문하셨던 것이다. 루이사는 끊임없이 “귀부인 순명”의 지배하에 있었다. 언제나 묵묵히 이 “귀부인”에게 순종했는데, 그것은 그녀의 고해사제의 명령에 대한 순명이었지만, (고해사제는 주교에 의해 임명되었으므로) 결국은 주교에게서 비롯되는 명령이었다.

 

우리 주님께서 개입하셔서 의심할 여지가 없도록 결정적으로, 루이사의 자리를 잡아 주셨으니, 그것은 보속의 산 제물이라는 신분이었다. 콜레라의 만연으로 코라토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죽은 1886년에, 이 전염병이 루이사로 하여금 산 제물의 신분을 받아들이게 한 도구가 되었다. 예수님께서 이 재난이 중단되도록 고통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셨는데, 루이사가 이를 받아들여 사흘간 고통을 겪고 나자 몇 달동안 계속되었던 콜레라가 사라졌던 것이다.

 

루이사가 21세가 되었을 때, 새로 임명된 고해사제인 미켈레 데 베네딕티스 신부는 그녀의 영을 알고 시험하고 분별하기 위해서, 만일 고통을 받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의 명령에 대한) 순명의 행위로 그렇게 할 것을 첫째 요건으로 정해 주었다.

한 해가 지난 후,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고통 중의 그녀 자신을 봉헌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 고통은 이전처럼 때때로 중단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것이 될 터였다. 그녀의 모든 고통은 진노하신 하느님의 정의에 보상을 바침으로써 인간에게 떨어질 많은 징벌을 피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갈수록 사악해지는 인류가 받아 마땅한 징벌이요, 그것도 임박한 징벌이었다.

 

루이사는 고해사제에게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원하시는 바를 알리면서 “당분간” 고통을 받을 수 있도록 명령을 내려 달라고 청하였다. 그 당시 루이사는 그 고통의 기간을 40일로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고해사제가 이를 허락하자, 그 때부터 루이사는 줄곧 침대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그래도 병에 걸리거나 욕창으로 고생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녀가 임상적인 병에 걸려 고통을 당한 것은 오직 임종 무렵뿐이었다. 1947년 3월 4일, 페렴에 걸린 지 보름 만에 숨을 거두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지속적인) 산 제물의 상태는 일련의 독특한 은총들을 받게 되는 새로운 시작이었다. 예수님께서 매우 자주 찾아오셔서 ‘신비적인 혼인’을 준비시키시면서 그녀가 하느님의 뜻에 완전히 일치하도록 이끄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또 십자가와의 결합과 같은 다른 신비적인 결합들을 위하여 그녀를 끊임없이 준비시키셨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그분께서는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구세주의 모습으로 나타내 보이시면서 당신 수난의 가장 고통스러운 상처들을 그녀에게 박아 주셨다. 그러나 그녀의 소망대로 겉으로는 그 성흔(聖痕)이 전연 보이지 않게 해 주셨다. 그 때부터 루이사는 예수님께서 그녀 안에 새롭게 재현하시는 십자가 고통을 받게 되었다. 고통에 대한 만족할 줄 모르는 열망에 시달린 루이사는 몇 년이 지난 후에 자신의 그 모든 바람까지 하느님의 뜻에 맡겨야 한다는 것을 배워 익혔다. 고통을 받고자 하는 소망 외에도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싶은 소망도 있었던 것이다.

 

1899년 고해사제가 세상을 떠난 후 새 고해사제인 젠나로 디 젠나로 신부가 루이사를 돌보는 책임을 맡게 되었고, 그것이 24년 동안 계속되었다. 젠나로 신부는 루이사를 순명의 지배 아래 두면서 최초의 명령으로 그녀와 예수님 사이에 일어난 일을 처음부터 전부 글로 옮기라고 하였다. 그래서 루이사는 1899년 2월부터 글쓰기에 들어갔다.

 

예수님께서는 루이사의 숭고한 사명을 위한 준비를 계속하셨는데, 그것은 가장 큰 은총이며 탁월한 상태인 ‘하느님 뜻 안에서 사는 것’이었다. 그분께서 이에 대해 처음 말씀하신 것은 1889년이었으며, 은총 중의 은총인 이 은총을 루이사에게 주시면서 “하느님 뜻의 작은 딸”이라는 이름도 지어 주셨던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 주님께서는 조용하고 은밀하게, 루이사와 더불어, 새로운 ‘은총의 시대’를 열기 시작하셨다. 이는 곧 세상에 하느님 뜻의 나라가 참으로 오심으로써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Fiat Voluntas Tua, Sicut In Coelo Et In Terra)라고 하신 ‘주님의 기도’ 가 실현될 시대이다.

 

루이사는 글쓰기를 계속하여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사는 것에 관한 가르침을 주제로 36권의 책을 썼고, 뿐만 아니라 1915년에 초판을 내고 1916년, 1917년, 1921년 및 1932년에 중간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시간들과 1932년에 출간하여 1933년과 1937년에 중간한 “하느님 뜻의 나라의 동정 마리아”와 같은 다른 책들도 썼다. 이는 모두 교회의 출판인가와 오류 없음의 판정을 받은 책들이었다. 순명으로 그녀에게 글을 쓰게 한 명령이 마침내 거두어진 것은, 제 36권의 마지막 장을 완료한 1938년 12월 28일의 일이었다.

 

젠나로 신부는 1922년에 세상을 떠났고, 그 후임은 프란체스코 데 베네딕투스 신부였는데 수년 후인 1926년에 숨을 거두었다. 그녀의 대주교가 임명한 마지막 고해사제인 베네뎃토 칼비 신부는 그녀가 죽을 때까지 고해사제로 있었다.

 

끝으로, 루이사는 짧지만 고통이 심한 폐렴을 앓다가 1947년 3월 4일 새벽 여섯 시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시신은 나흘 동안 공적인 공경을 받았다. 그 후 루이사의 고향인 코라토가 소속된 트라니 대교구와 다른 지역으로부터 많은 대표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장례식이 엄수되었으니, 이것이 그녀가 받은 최초의 영예였다. 그 당시에 찍힌 여러 사진들이 이 사실을 입증해 주거니와, 루이사의 유해는 현재, 교회의 인가에 따라, 코라토의 산타 마리아 그레카 성당에 안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