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뜻이 영혼을 다스리실 때

루이사 피카레타에 관한 더 상세한 소개 (2 )

은가루리나 2017. 8. 16. 22:06

루이사 피카레타에 관한 더 상세한 소개 (2)

 

                                                                                              10 /11 /2011

그러면, 루이사는 어떻게 일상생활을 하며 지냈겠는가? 이에 대해서 그녀의 마지막 고해사제인 베네뎃토 칼비 신부는 다음과 같은 증언을 남겼다.

 

 

1. 루이사 생애의 특별한 현상들

 

새벽 여섯 시경에 고해사제가 루이사에게 도착해 보면, 루이사는 마치 대리석 덩어리처럼 굳어 있었다. 얼마나 단단히 굳어 있는지, 게다가 얼마나 무거운지, 루이사의 여동생이나 집안의 다른 사람이 고해사제나 주교의 명에 따라 루이사를 평상시 자세대로 침대 위에 앉히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치 큰 납덩어리 같이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어서 팔다리를 펼 수도 없었던 것이다.

 

다만 고해사제가(혹은 특별한 사정이 있을 경우, 다른 사제가) 강복하면서 엄지손가락으로 그녀의 손 등에 십자성호를 그어 줄 때만 비로소 생기가 돌아오며 몸의 동작도 회복되곤 했다. 그렇게 해야 되살아나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동생으로 하여금 여느 때와 다름없는 자세로 자기를 앉히기 쉽게 해 주는 것이었다.

 

 

다른 특별한 현상은 (이미 지적한 대로) 64년 동안을 오직 침상에서만 지냈는데도 욕창으로 고생한 적이 전연 없었다는 점이다. 또 하나의 특별한 사실은 그녀의 식사였다. 조금만 먹어도 고스란히 토하곤 했기 때문 침대에 붙박이게 된 때로부터 64년 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결국 아무 것도 먹지 않고 산 셈이니, 그녀의 음식은 다만 하느님의 뜻과 성체 예수님뿐이었다.

 

이러한 현상들과 다른 특별한 현상들이 목격되자 철저한 통제를 받았다. 더군다나, 우리 교구의 장상들이 임명한 적지 않은 수의 박사와 교수들이, 곧 교의와 윤리와 수덕신비신학 교수들이 판단을 내리기 위하여 그녀를 철저히 검사하기도 하였다. 그들 중 두 사람만 지적해 보면, 한 사람은 로마 (성 안토니오) 국제대학교의 생리학 및 의학교수인 도메니코 프란체, O.F.M. 박사였으며, 또 한 사람은 (같은 대학교의) 윤리와 수덕신비신학 등의 교수인 콘살보 발스 박사였다.

 

 

이와 같이 루이사를 (그 죽음 같은 상태에서) 깨운 고해사제나 다른 사제는 그 다음에 그녀의 조그만 방 침상 옆에서 거룩한 미사를 집전하였다. 루이사는 영성체를 하고 나면 마치 잠자는 것처럼 황홀경에 잠겨 주님과 두 세 시간 친밀한 대화를 나누곤 하였다. 이때는 몸이 경직되거나 감각이 없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복되신 주님께서 더욱 눈에 띠는 방식으로 낮 동안 그녀와 함께 계시는 일이 잦았으므로 주변인들도 그것을 목격하곤 하였다.

 

의식이 돌아오면 그녀는 침대에 앉은 채 일을 시작했다. 그것은 레이스를 뜨거나 붙이면서 수예품을 만드는 일이었는데, 주로 장식품이나 테이블보였고 성당에서 쓰이는 다른 품목들도 있었다.

 

 

루이사는 날마다 그녀 주위에 모이는 몇몇 소녀들과 아이들에게 그 수예품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곤 하였다. 그러나 이 일보다 훨씬 더 그들을 끌어당긴 것은 하느님의 현존에서 발산하는 루이사의 부드러우면서도 자연스러운 매력이었다. 그들은 루이사가 늘 해 왔던 것처럼 ‘수난의 시간들’을 그녀와 함께 묵상하며 기도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여기에 모이는 소녀들 가운데 다수는 “수난의 시간들”을 외울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보속의 성시간을 가졌고 다른 신심업도 행하였다. 루이사의 생활은 이처럼 겉보기에 언제나 같은 것이었으니, 곧 일과 침묵과 기도의 생활이었다.

 

 

오후 두 시 반이나 세 시가 되면 그들은 루이사에게 약간의 음식을 주었지만, 이미 언급한 대로 그녀는 잠시 후에 그것을 고스란히 토했으며, 이 용도로 쓰이는 그릇이 따로 정해져 있었다. 오후에 그녀는 보통 한 시간의 묵상기도를 바쳤다. 그들은 커튼을 내려 침대를 둘러싸게 한 다음 그녀를 홀로 남겨두거나, 때로는 그녀에게 찾아오신 천상 여왕님과 함께 있게 하고 방을 나갔다. 그런 다음 루이사는 저녁 열 시나 열한 시까지 일을 계속하였고, 그 이후에 글을 쓰곤 하였다. 주님께서 어떤 것을 나타내 보이시거나 말씀을 주신 것이 낮 동안이었건 밤에 잠들어 있었을 때였건, 아니면 쓰라는 명을 받은 때였건 이 시간에는 언제나 글을 쓴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정이나 새벽 한 시경이 되면 침대에 누워 그 “죽음”의 상태에 들어갔고, 그러면 감각 기능이 마비되는 것이었다. 침대에 미처 드러눕기 전에 이 상태가 오면, 앉아 있었던 자세대로 석상처럼 굳어 있는 것이었다.

 

루이사의 나날은 그렇게 지나가곤 하였다.

 

 

이제 안니발레 마리아 디 프란치아 신부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자. 그는 17년 남짓 루이사와 알고 지냈지만 그녀의 특별 고해사제가 되어 가까이서 접촉한 지 2년이 채 안된 1927년에 세상을 떠났다. 프란치아 신부는 루이사의 삶과 저술 및 하느님의 뜻에 관한 가르침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므로 “수난의 시간들”을 출판하였다. 그가 코라토에 온 것은 1910년이었고, 이때부터 루이사를 방문하기 시작하면서 특별한 영적 관계를 맺게 되었다. 루이사와의 만남이 그의 삶에 헤아릴 수 없는 변화를 일으켰으며, 하느님의 뜻에 관한 지식이 그의 영성에 근본적인 바탕을 이루게 되었다. 트라니 교구 대주교는 루이사의 저술들과 관련된 출판을 지도하도록 프란치아 신부를 교구의 교회서적 검열관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수난의 시간들”을 출판하기 위하여 모든 힘을 쏟았고, 그 책에 긴 해설문을 직접 붙이기도 했으며, 넷째 판까지 모두 교회 인가와 오류 없음의 확인을 얻었다. 교구 검열관인 그는 또 루이사가 쓴 전반 열아홉 권의 책들에 대해서도 교회 인가를 얻어 내었다.

 

디 프란치아 신부가 루이사에 대하여 남긴 다음의 증언을 주목해 보자.

 

 

 

“…. 루이사는 홀로 숨어 지내며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친히 의무를 지우지 않으셨다면,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 또 앞으로 언제까지 계속될지 모르지만 – 흠숭하올 예수님과 사적으로 지속된 장기간의 통교 내용을 결코 글로 옮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의무는 어떤 때는 주님께로부터 직접 부과되는 것이었고 또 다른 때는 루이사의 영적 지도자들로부터 거룩한 순명의 이름으로 오는 것이었습니다.

 

루이사는 이 순명이 엄청난 고통을 불러일으킬 때에도 굳건하고 아낌없는 마음으로 복종해 왔습니다. 그녀의 순명은 절대적인 것이어서 만일 그렇게 하라는 명령만 있다면 천국마저 거절할 정도입니다. 이것은 고결하고 참되고 검증된 영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입니다. 그녀는 지금까지 40년 동안 내적으로 투쟁하면서 그 “귀부인 순명”의 지배를 받아 온 것입니다….

 

 

이 고독한 영혼은 온전히 하느님께만 속한 극히 순결한 동정녀로서, 우리의 거룩하신 구원자 예수님의 특별한 총애를 받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에 걸쳐 당신 사랑의 기적을 증가시켜 오신 주님께서 이 동정녀를 도구로 쓰시고자 하신 것 같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고 가장 배운 것이 없는 루이사를 부르셨으니 말입니다.

 

 

더욱이, 주님께서는 그녀를 숭고한 사명에 맞갖은 도구가 되도록 기르고자 하셨으니, 다른 누구의 사명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 숭고한 사명은 바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라고 하신 ‘주님의 기도’처럼 하느님 뜻의 승리가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주님의 이 동정녀는 소녀 시절부터 지금껏 하느님 사랑의 산 제물이 되어 40년 이상 침상에 붙박여 있었습니다. 그 동안 예수 성심의 영원한 사랑 안에서 더없이 큰 기쁨에 잠겨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자연적이고 초자연적인 광범위한 고통을 체험했습니다. 모든 한계를 뛰어넘는 그 고통은 예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었고, 때때로 중단되기도 했지만 지속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몸의 고통에다 영혼의 고통까지 겪었습니다. 몸의 모든 고통은 손발과 옆구리, 혹은 이마에 보이지 않는 성흔을 받은 신비스러운 상태에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로부터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고통을 자주 받았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고통을 허락하지 않으시면, 그것이 월등 더 큰 영적 고통이 되곤 했던 것입니다. 이는 그녀가 진실로 고결한 영혼임을 드러내는 또 하나의 표입니다….

 

 

이처럼 장기간에 걸쳐 침상에서만 계속 생활하는 산 제물의 상태로 영적이고 육체적인 수많은 고통에 참여해 온 루이사에 대해서 상세히 언급하면, 이 이름 없는 동정녀를 보는 것이 괴롭고 혼란스러울지도 모릅니다. 고통스러운 병증 때문에 침대에 누워 있기만 하는 사람을 보는 것 같을 테니 말입니다. 그렇지만 루이사의 경우에는 또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십가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이 정배가 낮 동안 침상에 앉아서 수예품을 만들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온갖 극단적인 고통을 겪으면서 밤을 지낸 사람이라는 것을 내비치는 단서가 조금도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특별하거나 초자연적인 어떤 표시도 도무지 없습니다. 오히려 건강하고 기쁘고 행복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으로 자기가 맞아들인 몇 사람의 벗들과 이야기를 하거나 생각에 잠기거나 때로는 웃기도 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한 가지만 더 지적해 보면, 예수님의 이 정배는 현세적이라기 보다는 천상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소망은 알려지지 않은 무지한 사람으로서 예수님과 그분의 복되신 어머니 – 그녀를 특별히 보호해 오신 어머니 – 외에는 아무도 찾지 않으며 이 세상을 통과하는 것이니 말입니다….”

 

 

필자는 이것이 근거가 확실한 증언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루이사를 매우 잘 알고 있었고 큰 열성으로 “수난의 시간들” 거듭거듭 출판했던 디 프란치아 신부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1990년 10월 7일에 시복되었고 2004년 5월 16일에 시성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프란치아 신부는 우리 시대의 사제들을 위한 모범으로 공표되고 칭송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