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마크리슈나의 가르침

□ 스승과 제자의 관계 637-638

은가루리나 2017. 10. 21. 21:03


637.   제자는 경솔하게 스승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스승의 말은 귀담아 듣고 명심해야 한다. 

벵갈어의 이행연구(二行連句)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스승이 창녀집에 간다 해도 나의 스승은 여전히 위대한 나의 스승이다. 

스승이 사냥꾼이나 술주정꾼, 그리고 죄악에 찬 사람들과 어울려 다닌다 해도 

나의 스승은 내 자신의 순수다. 

그리고 스승에게는 결코 아무 결점이 없다.>





638. 신앙이 깊어지게 되면 가장 평범한 일을 통해서도 신봉자는 신을 기억하게 된다. 

신 속에서  그 자신을 잃어버리게 된다. 

챠이타냐(Chaitanya)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챠이타냐가 어느 마을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 마을 주민들은 북을 만들어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안 챠이타냐는 외쳤다. <이곳은 북을 만드는 마을이다.>



그에게 있어 북을 만드는 마을의 생각은 

여러 사람이 노래를 할 때 그 반주로 북을 두드린다는 생각으로 발전했다. 

그런 다음 그 음악은 다시 우리 영혼의 영혼인 신을 찬양하는 것이라는 생각으로 발전했다. 

이런 식으로 생각의 연속이 그의 의식에 불을 붙였다. 

그는 즉시 신에 대한 명상에 도취해 버렸다. 


이와 마찬가지로 스승을 진심으로 숭배하게 되면 

그의 모든 에너지는 언제나 스승을 향해 있다. 

스승의 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만날 때조차 

그의 생각은 즉시 스승에게 향하게 된다. 

그는 그 사람들의 발에 엎드려 존경을 표하며 헌물을 바친다.



 이런 경지에 이르게 되면 스승의 결점은 더이상 볼 수 없게 된다. 

이제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스승이 이따금 창녀 집에 간다 해도 나의 스승은 역시 신의 화신이다. 

아니 나의 스승은 신이요, 영원이요, 축복이다.> 

인간의 육체를 가진 스승은 결코 인간적인 모든 결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 법이다. 

인간의 육체를 가진 스승은 결코 인간으로 보지 않고 신의 화신으로 보게 된다. 

이는 마치 황달병에 걸린 사람이 모든 것을 노랗게 보는 거와 같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헌신은 그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신만이 오직 신만이 모든 것이다. 

신은 스승이요, 아버지요, 어머니요, 인간이요, 짐승이요, 생명체요, 비생명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