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7. p.48-51 제 1편 제 3장 천주의 명시의지(明示意志)에 대한 순명 ③

은가루리나 2017. 11. 6. 16:21


옴니아 등급변경▼ 조회 74  추천 0  2014.07.01. 22:13


제1편, 거룩한 위탁의 본질


제1장 최고의 규범으로서의 천주의 의지

제2장 천주의 명시의지와 임의의지

제3장 천주의 명시의지에 대한 순명

제4장 임의의지에 대한 적합

제5장 거룩한 의탁의 개념

제6장 위탁과 현덕

제7장 위탁에 있어서의 願望과 기도

제8장 위탁에 있어서의 노력

제9장 위탁에 있어서의 고통감

제10장 위탁과 희생의 서원



p.48


제 1편 거룩한 위탁의 본질


제 3 장 천주의 명시의지(明示意志)에 대한 순명 



성「프란치스꼬.살레시오」도 또한 이에 찬의(贊意)를 표시하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일 사람이 영적생활에 있어,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탁월할 만큼 열심히 그 진보를 바란다면,

회칙을 잘 준수하고 공동생활에 따라가는 편이 훨씬 우월하다.

왜냐 하면, 그것은 천주께 도달하는 곧은 길이기 때문이다.」라고.


성녀「젤뚜르다」는 체질이 쇠약하였기 때문에,

장상(長上)은 그를 다른 이들보다 부드럽게 대우하여,

규칙이 명하는 고행(苦行)을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이 가련한 딸이 성인이 되기 위하여 무엇을 하였겠는가고,

그들은 생각하겠지만,

그는 원장의 명령에 겸손되이 복종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비록 열심에 충동되어,

수녀들이 하고 있는 일을 자기도 하려고 몹시 바라고 있었을 경우에도,

결코 그것을 외면에 드러내려고는 하지 않았다.


침상에 눕도록 명령을 받았을 적에도, 한마디의 대꾸도 없이

마치 다른 자매들과 함께 성가대에 자리를 잡고 있는 때처럼,

천상정배(天上浄配)의 어전에 있는 기쁨을 누릴 것이라고 확신하여,

명해지는대로 그저 자리에 드는 것이었다.


주께서는 어느 날, 성녀 『메크딜다』에게,

『누가 만일 지상에 있어 나를 찾으려고 바란다면,

우선 제단의 지극히 거룩하신 성사 안에 물어보아라.

그리고 다음에 『젤뜨루다』의 마음 안에 물어보아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많은 보기를 인용한 후, 거룩한 박사는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우리는 천주께서 우리의 성소(聖召)에 의하여 요구하시는 바에 

전심(專心)하며

우리의 성성(成聖)에는 이보다 탁월한 길은 없다는 것을 인식하여 

열심과 겸손으로써 이러한 거룩한 수도자들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

(「대화편」제7, 15및20 )라고.



그리고 

실제 우리의 생활상의 신분과 우리의 성성(成聖)의 길을 선택하신 것은

천주 자신이신 이상,

그것에 복종하는 것 외에 우리에게 있어 훌륭한 것은 결코 또 없다.


p.49


「『말다』의 일은 거룩하였다. 그것은 참된 것이다」라고

어느 거룩한 창립자는 말하고 있다.


「『마리아』의 관상의 감미로움도, 그 통회도, 구세주의 발을 씻은 눈물도 

모두 거룩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가 모두 훌륭한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베타니아』,

즉 이 말이 뜻하는 『순명의 집』에서 행해져야 했다.


성『벨라도』가 주의하고 있는 것과 같이, 

마치 주께서는 그로써,

선업(善業)에 대한 열심도, 천상의 일에 관한 관상의 감미로움도, 

통회의 눈물도, 

『베타니아』이외에서는 당신의 마음에 알맞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기를 바라시는 것과도 같다.」

(성「이냐시오」저「순명에 관한 서간」제6신,

성「벨라도」저「성전의 기사회 수사에 대하여」제13장)



이러므로, 천주의 명시의지(明示意志)에 대한 순명은,

완덕에 이르기 위한 정상(正常)의 길이다.


물론 나는 천주의 임의의지(任意意志)에 대한 복종을 

소홀히 여기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그 매우 중요함과, 영향의 결정적임을 강조하는 바 이다.


임의의지에 대한 복종은 

회칙의 은혜 풍부한 작용에 대하여 항상 유익한 지주(支柱)도 되고, 

또한 때로는 불가결한 보조(補助)를 가져다 준다.

그리고 이것이 개인적인 것일수록, 더욱 귀중하게 된다.


회칙이 명하는 바는 필연적으로 일반적인 것에 그치는데,

천주께서는 우리의 특별한 필요에 응하여, 

임의로 각가지 일을 선택하신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천주의 명시의지(明示意志)에 대한 복종은 

불의(不意)의 각가지 일에 있어서도 

성화(聖化)를 위한 일정하고 통상적인 방법이며,

매일 및 순간마다의 의무라는 것은 역시 변함이 없는 진리이다.

우리가 이 복종으로써 성화를 시작하고 계속하며,

또한 끝내야 한다는 것은 이 때문이다.


p.50


내가 이 연구를 시작함에 있어,

이 가장 중요한 진리를 상기하는 것을 좋다고 여긴 것은,

후에 거룩한 위탁에 베풀어지는 정당한 찬미를 보고,

이 길만을 유일(唯一), 전체적(全體的)인, 것처럼 오해하여

배타적인 열심으로 이것에만 따르려는 사람을 없이 하기 위해서 이다.



실로, 

거룩한 위탁은 심령생활(心靈生活)의 길에 있어 중요한 부분을 이루지만

결코 그 전체는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순명의 덕은 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만일 이것을 소홀히 여긴다면, 

우리는 얼마나 큰 손실(損失)을 입을지 모른다.

수도자가 눈이 떴을 때부터,

온 종일 거의 빈틈이 없는 규칙의 연속에 의해서 인도되는 것도,

순명에 의한 것이므로, 

이것은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천주의 의지가 미리서 드러났던지,

또는 사건의 진행에 의하여 명백히 되었던지, 

여하튼 그 권리는 같은 것이며, 그 부과되는 의무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순명이냐 위탁이냐의 어느 하나를 선택할 것은 아니다.

양자는 항상 

서로 의지하여 가장 밀접하게 제휴(提携)하여 나아가는 것이어야 한다.



여기서 약간의 번거로운 표현에 관하여 한마디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를테면, 위탁에 있어서는

천주께서 우리를 「그 팔로 안으시고 거보(巨步)를 내 디디게 하신다」

라든가,

이에 반하여 순명에 있어서는

「우리는 조금씩 거닐은다」라는 표현방법은, 

이것은 하나를 업신여기고, 다른 것을 과찬하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물론, 그 대상(對象)에 관해서만 고찰한다면,

순명이 

우리로 하여금 종종걸음으로 걷게 하는 경우가 가장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기회는 날마다 몇 천이고 셀 수 있으므로,

그 번수와 연속(連續)만으로도 이미 우리를 훨씬 진보시키는 것이다.


작은 일에 대한 끊임 없는 충실(充實)은 범용(凡庸)한 덕이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을 죽이고 자기를 온전히 천주께 맡기는 

유력한 하나의 방법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숨은 영웅적 행동(英雄的行動)이다.

더구나, 우리의 진보가 거보적(巨步的)이고,

또한 매우 큰 것이 되지 않으리라는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므로 순명의 대상(對象)이 

어려움을 수반하는 것, 뛰어난 것이어야 한다는 이유는 조금도 없다.

다만 동기(動機)가 순수(純粹)하고 의향(意向)이 거룩하기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성모 마리아는 외관상(外觀上) 가장 흔한 일밖에는 행하지 않으셨지만,

그러나 그 일에 전심(全心)을 기울이셨기 때문에

그것을 무비(無比)의 가치있는 것으로 하셨다.

우리 역시 자기 처지에 응하여 같은 일을 못한다는 법은 없으리라.


p.51


거룩한 위탁 그 자체도,

커다란 시련(試鍊)에 있어서보다도, 오히려 사소한 일에 있어 자주 행해진다.

그 밖에, 천주께서 뜻대로 우리를 

「그 팔에 안아, 우리 편에서는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덕에 나아가게 하신다」

라는 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


적어도 일반적으로 

천주께서는 우리의 능동적(能動的)인 협력, 개인적 노력을 요구하신다.

그리고 덕의 진보는 덕을 행하는 이의 선의(善意)와 관련되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사람은 

순경(順境)에는 도취되고, 역경(逆境)에는 불순명(不順命)이 되어 

천주의 활동에 거스르는 일까지도 있다.

우리는 그때 거보(巨步)를 내딛게 되지만,

그것은 도리어 뒤를 향해서의 거보(巨步)이다.



결국, 우리는 천주의 어떠한 의지도 존중하며,

그 명시의지(明示意志)에 대한 복종과 

임의의지(任意意志)에 대한 위탁(委託)을 간단없이 행하여야 한다.


어느 것에 있어서도 천주께서는 일반적으로 

우리의 협력 없이는, 우리를 성화하시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즉, 천주와 우리와의 활동이 함께 필요하다.

그리고 진보의 정도는 우리의 선의(善意)에 비례(比例)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