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9. p.58-60 제 1편 제 5장 거룩한 위탁의 개념(槪念) ①

은가루리나 2017. 12. 19. 02:19


옴니아 등급변경▼ 조회 78  추천 0 2014.07.16. 04:37


제1편, 거룩한 위탁의 본질


제1장 최고의 규범으로서의 천주의 의지

제2장 천주의 명시의지와 임의의지

제3장 천주의 명시의지에 대한 순명

제4장 임의의지에 대한 적합

제5장 거룩한 의탁의 개념

제6장 위탁과 현덕

제7장 위탁에 있어서의 願望과 기도

제8장 위탁에 있어서의 노력

제9장 위탁에 있어서의 고통감

제10장 위탁과 희생의 서원



p.58


제 1 편 거룩한 위탁의 본질(本質)


제 5 장  거룩한 위탁의 개념(槪念) 




우선 나는 왜 거룩한 위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는지에 관하여 

말할 필요가 있다.


「게」주교는 그의 명저의 일편에 있어, 명백하게 이에 답하고 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위탁(委託)에 관해서이며, 이미 순명에 관해서가 아니다.


..... 순명은 사추덕(四樞德) 중의 의덕(義德)에 속하는데,

위탁은 향주덕(向主德) 중에 애덕(愛德)에 속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내가 말하는 것은 인종(忍從)이 아니다.



인종(忍從)

자연적으로 천주의 의지, 

더구나 그 의지에 대한 복종만을 대상(對象)으로하는 것인데,

나는 이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인종(忍從)은 말하자면 

정복(征服)된 의지, 즉 최초에 복종을 거부(拒否)하고 나서,

자신을 극복하여 비로소 양보한 의지를 천주의 손에 넘기는 것이다.


위탁은 그것을 훨씬 초월하고 있다.



수락(受諾)이란 말도 역시 여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천주의 의지를 수락한다고 말할 때,

그것은 인간의 의지가 자기의 권리를 충분히 확인한 후에,

비로소 자신을 예속(隸屬)시키는 것처럼 생각된다.


이것도 역시 우리가 의도(意圖)하는 것이 못된다.


p.59


적합(適合)이란 말도 있다.

이것은 매우 적절한 말이며, 하나의 정의(定義)라고 말해도 괜찮다.


『로드리게스』신부는 매우 장려할만한 『그리스도교적 완덕』가운데서

이 표제(表題)로 탁월하게 논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은 하나의 행위보다도 

오히려 하나의 상태를 보다 많이 표시하는 것이며,

그것은 비교적 힘이 드는 일종의 조정(調整)을 

미리서 가정(假定)하고 있는 것같이 보인다.


이 말을 입에 담을 때에 

사람들은 우선 바라보고, 감탄하며 

이어 그것에 닮으려는 하나의 모범이라는 관념을 상기한다.


그리고 적합이 노력 없이 성립하는 경우에까지도

꽤 차가운 무엇인가가 여전히 거기에 느껴진다.



무관심(無關心)이라고 하는말을 사용하는 편이 

오히려 타당하지 않겠는가.


이것도 역시 극히 정확하게 그리고 자주 사용되어 온 말이다.

(이것은 성「이냐시오」의 「심령수업」안의 중요한 용어이다)


실제 이 말은 내가 말하려는 

천주의 의지에 전폭적인 귀착(歸着)을 바치고 있는 영혼의 상태를 

표현하고는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소극적(消極的)인 말이다.


사랑은 이것을 사용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발판임에 불과하다.


왜냐 하면,

결국에 있어 사랑처럼 적극적(積極的)인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적절한 말로서 남는 것은 즉 위탁(委託)이다.」

(「게」주교「그리스도교적 생활과 성덕」중 「위탁」2)



실제 다른 어떤 저자도 

우리가 마치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는 유아(幼兒)와 같이,

섭리의 손에 자신을 맡기고 있는 신뢰에 충만한 사랑의 움직임을

이처럼 훌륭하게 묘사한 이는 없다.



이 말이 정관파(靜觀派)의 사람들에 의해서 기묘히 남용된 후에,

오랜 동안 물러갔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미 새로운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일방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므로

나도 역시 그 의미를 명백히 하고 나서 

마찬가지로 사용하기로 한다.


p.60


「즈네브」의 성 주교는 말한다.


「우리의 영혼을 위탁하고, 우리 자신을 떠난다는 것은, 필경,

자기의 의지를 포기하고 그것을 천주께 넘겨드리는 것 외에 

다름이 아니다」(「대화편」2 )라고.


그러므로,

위탁의 행위인 이 사랑의 움직임에 있어서는

출발점(出發點)과 도착점(到着點)이 있는 것이다.


과연 천주께 의지 전체를 위탁하는데는

의지가 자기 자신을 떠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탁에는 여기서 연구해야 할 두가지 요소,

거룩한 무관심(無關心)과 

섭리의 손에의 의지 전체의 교부(交付)가 포함되어 있다.


전자(前者)는 그 필수조건(必須條件)이며, 

후자는 그 구성요소(構成要素)이다.


먼저 거룩한 무관심에 관하여 말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