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8. p.52-57 제 1편 제 4장 임의의지(任意意志)에 대한 적합(適合)

은가루리나 2017. 11. 29. 15:58


옴니아 등급변경▼ 조회 92  추천 0  2014.07.11. 06:02


제1편, 거룩한 위탁의 본질


제1장 최고의 규범으로서의 천주의 의지

제2장 천주의 명시의지와 임의의지

제3장 천주의 명시의지에 대한 순명

제4장 임의의지에 대한 적합

제5장 거룩한 의탁의 개념

제6장 위탁과 현덕

제7장 위탁에 있어서의 願望과 기도

제8장 위탁에 있어서의 노력

제9장 위탁에 있어서의 고통감

제10장 위탁과 희생의 서원



p.52


제 1 편 거룩한 위탁의 본질(本質) 


제 4 장  임의의지(任意意志)에 대한 적합(適合) 




천주의 명시의지(明示意志)의 실행을 가르쳐 순명(順命)이라고 말하며,

그 임의의지(任意意志)에 대한 복종을 드러내는데 적합(適合)이란 말을 

쓰지만,

이것은 가장 일반적인 관용(慣用)에 따른 것이다.


그렇지만, 이 점에 관해서는 

꽤 커다란 의견의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여야 한다.

특히, 성「알퐁소」는 자주 이 양자를 

단지 「적합(適合)」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각 저자가 이러한 말로 의미하는 바를 명확히 알기 위하여

문장의 전후관계(前後關係)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다른 모든 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섭리에의 적합,

즉, 천주의 임의의지에 대한 복종에 있어서도 또한, 

그 완전성(完全性)의 정도는 마찬가지가 아니다.

즉, 

천주의 의지에 결합하는 우리 의지에 관대(寬大)함의 정도 여하에 따라,

또는 이 결합의 동기(動機)의 고상함의 정도 여하에 의해서 

각가지 차별이 생겨난다.




(1) 

만일, 우리의 의지를 천주의 임의의지(任意意志)에 적합시키는 

관용(寬容)으로써 분류의 기초로 한다면,


「로드리게스」신부는 적합을 다음의 세 단계로 나누고 있다.


p.53


제 1 단계


이 단계에 속하는 사람은 반대나 고난을 바라고 사랑하기보다는,

오히려 될 수 있는대로 그런 것을 피하려 한다.

그러나, 

만일 그런 것을 피하기 위하여 죄를 범하게 되는 경우에는

오히려 그것을 인내하려고 한다.


이것은 최저(最低)의 단계이며, 

적합의 첫 걸음이고,

단지 엄밀한 의무의 수행에 불과하다.


실제, 사람은 

현재 부딪치고 있는 불행에 고민하면서도,

또는 병고(病苦)에 신음하고 시달리면서도,

그리고 친족붕우(親族朋友)의 죽음을 슬퍼하면서도,

역시 체념(滯念)하고서 천주의 의지에 복종할 수 있다.



제 2 단계


이 단계에 속하는 사람들은, 

고통을 바라거나, 그것이 오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것에 부딪칠 적에는, 기꺼이 이를 참아 견딘다.

왜냐 하면, 

그러한 간난신고(艱難辛苦)가 천주의 계획의 범위 안에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단계에 있어서는, 

천주를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을 사랑하는 것이며,

이점이 전자와 틀리는 바이다.


인종(忍從)이 이 점에까지 이른다면, 

사람은 어떠한 혹심한 시련을 당하는 경우에도,

그저 단지 인내(忍耐)로써가 아니라, 일종의 기쁨으로써 

마치 그것이 천주께서 어여삐 여기시는 희생으로 확신하여

그것을 잘 감수하기에 이른다.


제1단계에 있어서는 사람은 인내로써 고통을 참고,

제2단계에 있어서는 그것을 미소로써 맞이하여,

천주로부터의 귀빈(貴賓)으로서 기꺼이, 정중하게 접대한다.


p.54

제 3 단계


이것은 세 단계 중에서 가장 완전한 것이며, 

사람은 이 단계에 있어서는, 

단지 천주를 사랑하기 위하여 

천주께서 주시는 모든 고통을 감수 인내할 뿐 아니라,

이 사랑의 고조(高潮)에서, 

말하자면 고통을 향하여 전진(前進)하기에 이른다.


즉 고통은 천주의 손으로부터의 선물이며,

흠숭해야 할 성지(聖旨)의 결과임을 인정하고,

그것이 오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다.

(「로드리게스」저「그리스도교적 완덕」제8론술 12장)


이와 같이 하여,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치욕(恥辱)을 받는데 족하다는 것을 

기꺼이 여기고, (사도행전5.42)

또한 성「바오로」는 간난 중에 있어 위안에 충만되었다.(코린토후서7.4)


그리고 여기에서 

제2 단계가 자아내는 사랑이 확실히 희망의 사랑이라는 것,

그리고 이 단계와 제3의 단계 사이에 있는 상위(相違)는 

가장 정확하다는 점에 관하여,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을 허용하기 바란다.



위에 말한 개략적인 분류는, 

일반적으로 승인되어 있는 것이며,

설명의 자세한 점에 있어서는, 저자에 의해서 각기 틀리지만,

근본적으로는 항상 같다.


그런데 이 분류는 이미 성「벨라도」에게서 찾아볼 수 있으며,

각 단계를 확정하는데도 그 동기를 설명하는데도 

그이 이상으로 탁월한 자는 없었다. 


성인은 우선, 이러한 세 단계를 각각, 

초심자(初心者), 진보의 단계에 있는 이그리고 완덕에 달한 이의 

과정으로 나누어,

동기로서는 두려움, 희망, 및 사랑을 각기 해당시켰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부언하고 있다.


초심자는 두려움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내로써 짊어지고,

진보의 단계에 있는 이는, 희망에 움직여서 기꺼이 이를 짊어지고 

사랑에 불타는 이더욱 열애로써 이를 껴안는다」라고.

(성「벨라도」, 「성 안드레아에 관해서의 제1 설교」5번)



p.55


(2)

만일 천주의 임의의지(任意意志)에 대한 우리의 적합(適合)의 

동기(動機)라는 점에서 생각한다면, 

순수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과,

다른 초자연적 원인(超自然的原因)에 기인하는 것과의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성「벨라도」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초심자(初心者)는 단지 인종(忍從)할 뿐이며,

더구나 그것은 주로 두려움의 생각에서 나온다.


또한 진보의 과정에 있는 이는,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짊어지지만,

그 한층 탁월한 적합은 망덕(亡德)에 기인하는 것이다.


끝으로, 완덕에 이른 이는 열애(熱愛)로써 십자가를 껴안지만,

그 완전한 적합은 거룩한 사랑의 결과이다.



두려움이 단지 인종(忍從)을 낳게 한다는 것은 쉬이 깨달을 수 있으리라.

그러나 

복종이 점점 그 관대(寬大)함을 덧붙여, 상쾌한 것이 되기까지에는 

더욱 완전한 자기이탈(自己離脫)과, 

더욱 활발한 신앙과, 

더욱 견고한 천주에의 신뢰를 전제로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반드시 순수한 사랑에서 나온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 하면, 

영원한 행복에 대한 원망(怨望)도 또한,

우리를 거기에까지 잘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천국을 열망하고 있는 영혼은, 

작은 시련은 물론, 커다란 고통까지도 하나의 재보(財寶)와 같이 간주한다.


즉, 그와 같은 영혼은, 

저성 「바오로」의 

「현시의 고난은 

우리에게  (주실 것으로) 나타날 장래의 영광에 비할바이 못되는 것으로 

나는 생각하노라.

.....현재의 가볍고 짧은 순간의 우리의 환난이 

우리에게 영원하고 비할데 없이 큰 영광을 풍성하게 이루어 주기 때문이니라」

(로마서8.18, 코린트후서4.17)는 

매력적인 약속을 깊이 마음에 침투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p.56


끝으로 

그것 자신으로 이미 가장 완전한 것을 이루는

순수한 사랑에 의한 적합(適合)이 있다.

왜냐 하면, 

어떤 것도 거룩한 사랑과 같이 

고상한, 우아(優雅)한, 관용(寬容)한, 그리고 견인(堅忍)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랑은 모든 사람의 의무인 이상,

적어도

때때로 그와 같은 사랑에 의한 적합에 기인하는 각가지 행위를 

할 수 없는 신자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사랑에 있어 성장함에 따라, 

사람은 그러한 향위를 흔연(欣然)히 잘 실천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오로지 순수한 사랑에 살게 되는 날이 이르렀을 때에는,

마찬가지로, 이 순수한 사랑으로써

천주 섭리의 처리에 적어도 습관적으로 적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이 덕에 진보한 영혼은 

끊임 없이 거룩한 사랑 안에 보다 높아져 갈 수 있음과 같이,

사랑에서 나오는 적합 안에도 

쉴 새 없이, 더욱 더 성장해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적합의 모든 단계 가운데서 

거룩한 위탁은 대체 어디에서 발견되겠는가.

그것은 단계의 꼭대기에 있는 것이다.


p.57


만일 복종의 관대성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거룩한 위탁은 그 최고의 단계에 위치하는 것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제 1 단계, 즉 인종(忍從)은 거기까지 오를 수 없다.

왜냐 하면, 그것은 단지 신자로서의 생활에는 충분하겠지만,

완덕(完德)의 생활에 있어서는 이미 불충분하며,

거룩한 위탁을 의미하는 완전한 이탈(離脫),

의지 전체(意志全體)의 봉헌을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제 2 단계는 그보다도 관용(寬容)한 것이지만,

그러나 거기에 있어서도 

영혼은 아직 완전한 이탈의 영역(領域)에 이르지 않고 있다.

이 이탈이 없이는 영혼은 모든 것에 무관심(無關心)하며, 

자기의 의지를 온통 섭리의 손에 안심하고 맡기는 경지(境地)에 이를 수 없다.

(본서 제2편 제5장 참조)



만일 그 결정적 동기(決定的動機)에 관해서 생각한다면,

거룩한 위탁사랑에 의한 일종의 적합이며,

이 사랑은 

어린이와 같은 신뢰(信賴)와 온전한 봉헌(奉獻)을 강조하는 성격을 부여하는 

특수한 색채(色彩)를 띠는 것이다.


즉, 거룩한 위탁은 뒤에 더욱 명백히 되는 바와 같이,

사랑과 적합과의 정점(頂点)이다.


나는 단지 인종(忍從)이나 순수한 사랑의 결과가 아닌 적합을

업신여기려는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 중요성과 가치를 명백히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본서의 계획은 

거룩한 위탁에 관해서만 명백히 말하는데 있으므로,

성「프란치스꼬.살레시오」의 교설을 바탕으로 하여,

아래에 정확 상세하게 이에 관해서 말해 보자.


여하튼 나는, 

아직 적합(適合)의 길에 그다지 나아가지 못한 영혼이

이로써 커다란 이익을 얻어 진보함에 따라,

많은 일에 이를 적용하기를 절실히 희망해 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