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11. p.65-68 제 1편 제 5장 거룩한 위탁의 개념(槪念) ③

은가루리나 2017. 12. 26. 14:23


옴니아 등급변경▼ 조회 79  추천 0  2014.07.31. 04:38


제1편, 거룩한 위탁의 본질


제1장 최고의 규범으로서의 천주의 의지

제2장 천주의 명시의지와 임의의지

제3장 천주의 명시의지에 대한 순명

제4장 임의의지에 대한 적합

제5장 거룩한 의탁의 개념

제6장 위탁과 현덕

제7장 위탁에 있어서의 願望과 기도

제8장 위탁에 있어서의 노력

제9장 위탁에 있어서의 고통감

제10장 위탁과 희생의 서원



p.64


제 1편 거룩한 위탁의 본질


제 5 장  거룩한 위탁의 개념(槪念) 




(2)



거룩한 무관심은 

천주의 손에 우리 전체의 인도(引導)를 가능케 하였는데,

이 사랑과 신뢰에 충만한 어린이와 같은 위탁

거룩한 위탁의 적극적 요소(積極的要素)이며,

그것을 구성하는 원리(原理)이다.



그 의미(意味)와 범위(範圍)를 명확히 하는데는 

사건이 바야흐로 닥치려는 직전(直前)과

이미 도래한 때에 있어서의 심리학적(心理學的) 두가지 계기(契機)를 

고찰하여야 한다,


p.65


사건발생전(事件發生前)


사건이 예견(豫見)된 것인지 아닌지 불구하고,

성「프란치스꼬.살레시오」의 설에 의하면

「그것은 단순한 일반적대기(一般的待機)」이며,

어머니의 품 안에 안긴 유아(幼兒)처럼,

조용하게 기꺼이 천주께서 바라시는 것은 모두 받으려는

신뢰에 충만한 마음가짐이다.


그러한 때에 

우리는 현명한 선견(先見)을 활동시키는 의무나 

스스로 지망(志望)하여 선택할 권리가 있겠는가.

이에 관해서는 이하의 장(障)에서 말하겠다.


그러나 아직 동 박사의 교설에 의하면,

자기의 광명에는 전연 신뢰를 두지 않고 

천주에게만 사랑에 충만한 신뢰를 두고,

지상(地上)의 사물에 일체 무관심하게 된 영혼이 가장 바라는 태도는

「천주께서 결정을 보류하신 사물은

이것을 제멋대로 원하거나 바라거나 하지 않고,

도리어 천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좋도록 하시는대로,

바라시는 것도 행하시는 것도 천주께 맡겨드리는 것이다.」

(「신애론」9편 14 및 15장)



사건발생후(事件發生後)


즉 사건에 의해서 천주의 임의의지(任意意志)가 명백히 되었을 적에는 

영혼의「이 단순한 대기(待機)는 승락(承諾) 내지 동의(同意)로 변한다.」

(동서 15장)


이와 같이 하여 하나의 사건이 신적광명(神的光明)에 비추이고,

천주로부터의 것임을 알게 되면,

영혼은 즉시 열심으로써 이를 맞이하며, 이에 강하게 애착(愛着)한다.


바로 이것이 사랑의 그러한 상태의 바탕이며,

또한 외관상(外觀上)의 무관심(無關心)의 비결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생명이 참으로 자아의 모든 것에서 물러나

그 전체를 거기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 만큼 생명은 거기에 충실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혼에 닿는 천주의 하나하나의 의지는 

얼핏 냉회고목(冷灰枯木)인 것같이 보이는 이 영혼의 골수까지도 감동시킨다.


마치 어머니에게 잠을 깨이게 되면 

반드시 바로 손을 어머니 쪽에 내미는 어린이와 같이 

이 영혼은 천주의 의지 하나하나에 미소하며,

그것을 경건한 애정으로 포옹하는 것이다.


그 온순(溫順)함은 활동적이며, 그 무관심은 사랑에 충만한 것이다.


그와 같은 영혼의 천주께 대한 태도는 오직 한가지 생활한 

그렇습니다』라는 것이다.


그 한숨 한숨, 한걸음 한걸음은 천상의 『아멘』과 서로 합쳐

같은 박자로 울리는 뜨거운『아멘』이다. (「게」주교)



p.66


성「프란치스꼬.살레시오」는 이 위탁을 「의지의 죽음」이라고 말하였다.


그것은, 

「우리의 의지가 천주의 의지 안에 온전히 살기 위하여,

자신의 통상적생명(通常的生命)을 떠나는 것이며,

의지는 그 때, 

이미 아무 것도 바랄줄울 모르며, 또한 바라려고도 하지 않고,

남김 없이 섭리의 손에 자신을 맡겨 버려 천주의 의지에 일치하고,

거기에 온전히 녹아 들어가 보이지 않을 정도에 이른다.」

(「신애론」9편 13장)


참으로 복되도다, 그 같은 죽음이여!

이 죽음에 의해서 사람은

「마치 아침마다 별빛이 태양의 빛 안에 사라져 버리는 것과 같이,

탁월한 생명에로 높여지는 것이다.」

(성「프란치스꼬의 정신」15편 11장)




거룩한 박사에 의하면 우리의 의지가 이와 같이 하여,

천주의 의지 안에 옮겨 들어 가는 단계에는 두가지가 있다.


첫째에 있어서는,

영혼은 아직 일어난 일에 관하여 주의하고 있지만 

거기에 섭리를 보고 이를 찬미한다.


「준주성범」(遵主聖範)의 저자는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주여, 내 의지가 당신 안에 올바르고 견고하게 머물러 있는 한,

당신의 성의(聖意)대로 나에게 이루어지소서.


..... 당신께서 만일 나로 하여금 암흑(暗黑)안에 있기를 바라신다면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당신께서 만일 나로 하여금 광명(光明)안에 있기를 바라신다면,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당신께서 만일 나에게 위로를 주시오면, 당신은 찬미를 받으소서.


당신께서 만일 나에게 고통을 주시오면, 

당신은 마찬가지로 항상 찬미를 받으소서.」

(3권 17장)라고.


p.67


둘째에 있어 영혼은,

일어난 일을 충분히 느끼고는 있지만

이미 그러한 것에 일체 개의(介意)치 않는다.


영혼은 그러한 것에서 떠나,

「천주의 인자하심과 온화하심에 마음을 향하여 

천주의 뜻을 이미 그 결과와 일어난 일에 있어서가 아니라,

천주의 뜻 그 자체에 있어 그 독특한 우월성(優越性)에 있어 찬미한다.

..... 이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탁월한 수업(修業)이다.」

(「신애론」9편 15장 및 「서간」392)




거룩한 무관심,

즉 천주의 손에 있어서의 우리 의지의 사랑의 위탁을 더욱 잘 이해하고

맛보게 하기 위하여,

「즈네브」의 경건한 주교는

허다한 많은 유례(類例)와 지극히 우아한 비유를 들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낱낱이 인용할 수 없으므로,

독자 자신이 원문(原文)을 참조하기 바란다.



그는 보기로서 성녀「마리아.막달레나」, 성「베드루」의 장모,

성「루이」왕의 왕후였던 「프로방스」의「말가리다」등을 들고 있다.

누가 저 

벽감(壁龕)의 성상(聖像), 벙어리가 된 음악가, 외과의(外科醫)의 딸등의 

교묘하고 우아한 이야기를 모르겠는가.

그러한 것을 읽을 적마다, 

누구나가 다대한 흥미와 아울러 같은 정도의 교훈을 섭취할 수 있으리라.

거룩한 저자는 약간의 비유적(比喩的)인 표현을 특히 애호하고 있었다.


즉 자신의 뜻이 아니고,

다만 주인의 뜻대로 어디에든지 따라가는 하인이라든가, 

섭리의 배에 탄 나그네는, 배가 나아가는대로 몸을 맡겨,

천주의 의지에 운반되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을 것이라든가,

아직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지 않고,

다만 걷는 것도 하는 것도, 바라는 것도 

모두 어머니의 배려(配慮)에 전부 맡기는 유아(幼兒)라는 것과 

같은 표현이다.


특히 성모의 품에 안기신 어린 예수의 모습을 보라고 성인은 말하고 있다.

자애로우신 성모의 걸음걸이나 바라시는 것 모두 아드님을 위해서다.

아드님은 성모께서 급히 걸으셔도, 행방(行方)을 묻지 않으셨다.


당신 자신을 대신하여 바라시고, 걸으시는 배려(配慮)는 

모두 성모께 맡기셨다.

아드님에게 있어서는 성모의 품 안에 계시는 것만으로 넉넉하였던 것이다.


p.68


그런데 이상에서 위탁 전체의 개념을 전부 말했으므로,

이하 각 장(章)에 있어, 

위탁이 현덕(賢德), 기도, 원망(願望), 개인적 노력(個人的努力),

고통감(苦痛感) 등을 배제(排除)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고찰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