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12 p.69-73 제 1 편 제 6장 위탁(委託)과 현덕(賢德)

은가루리나 2018. 1. 5. 01:55


옴니아 등급변경▼ 조회 69  추천 0  2014.08.06. 00:35


제1편, 거룩한 위탁의 본질


제1장 최고의 규범으로서의 천주의 의지

제2장 천주의 명시의지와 임의의지

제3장 천주의 명시의지에 대한 순명

제4장 임의의지에 대한 적합

제5장 거룩한 의탁의 개념

제6장 위탁과 현덕

제7장 위탁에 있어서의 願望과 기도

제8장 위탁에 있어서의 노력

제9장 위탁에 있어서의 고통감

제10장 위탁과 희생의 서원



p.69



제 1 편 거룩한 위탁의 본질(本質) 


제 6 장  위탁(委託)과 현덕(賢德)




천주의 임의의지(任意意志)에 속하는 만사(萬事)에 관해서

우리는 

천주께 대한 신뢰와 섭리에 대한 온전한 위탁이 아무리 완전할지라도,

현덕(賢德)의 법칙에 따른다는 것은 결코 면제되지 않는다.


자연적(自然的)과의 구별 없이 

이 덕의 실천은 

천주의 명시의지(明示意志)에 속하는 나날의 불변의 법칙이다.


천주께서는 확실히 우리를 도우시려는 뜻을 가지고 계시지만,

그것은 

우리가 해야할 일은 우리 스스로 행한다는 조건 밑에 있어서이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이를 돕는다.」

그렇지 않는다면 

천주를 시험하고, 그 세우신 질서를 문란케하는 것이 된다.




주께서는 각자에게 신뢰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지만(마테오 6.25 이하),

부주의라든가 태만은 누구에게도 허락치 않으신다.


주께서는 들의 백합화에, 하늘의 새에게 

길쌈하는 것도 추수하는 것도 요구하지 않으시지만,


「우리에게 지혜와 선견(先見)과 자유가 부여되어 있는 이상,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천주의 의지이다.


.....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고서,

모든 것을 천주께 맡겨 버린다는 것은 비겁하고 교만한 일이다.


성왕『다위』의 경건함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압살론』의 반역을 당하여 

그는 왕국과 그 자신에 관해서의 천주의 뜻을 경건하게 기다림과 동시에

일각(一刻)도 때를 놓치지 않고서 퇴각(退却)을 안전히 하고,

모든 것을 회복하기 위하여 

군대와 참모(參謀)와 고굉지신(股宏之臣)에게 필요한 모든 명령을 내렸다.

(열왕기하 2, 15, 18 참조)


이것은 천주께서 바라시는 바다.」



천주의 뜻에 맡긴다는 구실 밑에,

주의와 적절한 배려를 배척한 당시의 정관파주의자(靜觀派主義者)등에 대하여

「보수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이 

사도적 교의(使徒的敎義)에 바탕을 두고 있는 그리스도신자의 위탁이며,

그것은 두가지 토대를 전제(前提)로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즉, 하나는 천주께서는 우리의 일을 배려하신다는 신앙,

그리고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행동하여 경계한다는 것이 역시 필요하다는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천주를 시험하는 것이다.」라고.

(「성서에 의한 정치관(政治觀) 6장」)


p.70


그래서 우리의 선견(先見)이 미치지 못하는 

오직 천주의 임의의지(任意意志)에만 기인하는 많은 사건,

이를테면 각가지 천재지변(天災地變),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으로 일어나는 사변(事變)과 같은 일도 있으며,

또한 현덕(賢德)이 

유해한 우발적사건(偶發的事件)을 예견(豫見)하고

또는 그 악한 결과를 경감(輕減)하기 위하여 

넓은 역할을 연출하는 경우도 있는데,

현덕은 항상 사건에서 우리의 영익(靈益)을 이끌어내야 한다.




아래에 몇 보기를 말해 보자.


우리는 온전한 신뢰로써 

천주께서는 결코 우리의 힘 이상으로 시험되도록 맡겨 두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이것은 바로 천주께서는 그 약속하심에 충실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스스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너머질까 조심하고」(코린토전10.12),

「깨어 기구하여써 유감에 들지 아니케 한다」(마테오 26.41) 라는 

조건 밑에서 이다.



영적위안(靈的慰安)과 마음의 건조(乾燥), 광명(光明)과 암흑(暗黑),

정온(靜穩)과 폭풍우(暴風雨)에 있어서도

영적생활(靈的生活)을 요동시키는 것과 같은 각가지 변동의 한 복판에 있어서도

우리는 우선 필요에 응하여, 

태만, 방심(放心),애착,

그 밖에 은총에 거스르는 일체의 유의적 원인(有意的原因)을 제거하는 일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그러한 변동 가운데 있어서도 

자기 의무에 굳게 머물러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대가(代價)를 지불해야만, 

우리는 사랑과 신뢰로써 천주의 임의 의지(任意意志)에 

자신을 바칠 권리를 가지는 것이다.



이 일은 책임있는 업무에 종사하는 이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번갈아 성공, 또는 실패를 체험하겠지만,

청담(晴曇)여하에 있어서도 항상 천주의 섭리에 의지할 의무가 있으며,

또한 그럴 필요를 느낄 것이다.


p.71


그렇지만,

「천주께 자신을 맡겨 드리고, 

그 배려 안에 안주(安住)한다는 구실로 

장상(長上)인 자가 직무의 수행에 적합한 일을 배우는 것」

(「대화편」2,「신애론」10편6장)

그리고 자신의 신분상의 모든 의무를 완수함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물적사물(物的事物)에 속하는 것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다.


위탁(委託)이 아무리 완전하드라도, 

갑은 씨를 뿌리고, 수확에 종사하며,

을은 의복을 만들고, 

병은 식사를 준비할 필요가 있다.



건강과 질병에 있어서도 역시 그것과 다르지 않다.


누구도 

무책임한 부주의에서 자신의 생명을 위험에 처하게 할 권리는 없으며

각자는 자신의 건강에 적절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천주의 뜻에 의해서 질병에 걸렸을 적에도,

그 완쾌에 필요한 치료의 길을 강구하는 것은 천주의 명백한 의지이다.


세속에 있는 이는 의사를 불러,

그리고 보통 일반적인 의약(醫藥)을 사용하여야 되지만,

수도자는 장상에게 사실을 말하고 그 지시(指示)에 따라야 한다.

성인들은 바로 그렇게 했었다.

그들이 가끔 현덕(賢德)의 상도(常道)를 벗어난 적이 있다 하드라도,

그것은 

더욱 높은 현덕의 원칙에 따라 몸을 처리하기 위한 것 외에 

다름이 아니었다.



p.72


그러므로, 

위탁은 현덕(賢德)을 불필요로 하지는 않으나, 무익한 걱정을 금한다.


주께서 극력 배척하신 것은 음식물이나, 음식등에 대한 과도한 배려이다.

하늘에 새에게는 먹이를 주시고,

들의 백합화를,「살로몬」왕보다도 더욱 아름답게 입히시는 

하늘의 성부께서는

어떻게 당신의 지상(地上)의 자녀들을 버려두실 수 있으시겠는가.

더구나, 백합화는 길쌈하지도 않고 새는 씨를 뿌리거나, 추수하거나,

창고에 쌓지도 않는다. (마테오 6.25 이하)


「베드루」역시, 

천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배려하시므로,

모든 근심 걱정을 천주께 맡기도록 권고하고 있다. (베드루 전서 5.7)


성영 작가도 일찌기 이렇게 읊었다.

「너는 주께 너의 사정을 부탁할찌니, 그 이는 몸소 너를 붙들어주시고,

의인이 비틀거리게 길이 버려두지 않으시리로다」(성영 54.23) 고.




「프란치스꼬.살레시오」역시,

위탁과 일치하는 현덕(賢德)에 관해서 같은 말을 하고 있다.


그는 우선, 천주의 명시의지(明示意志),

즉 서원(誓願)과 회칙(會則)과 장상(長上)에 대한 순명을 준수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어 이보다 탁월한 길은 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인은 질병, 위로, 건조(乾燥), 

그 밖에 이와 비슷한 일에 의해서 제시되는 천주의 의지까지도 

마찬가지로 수행할 것을 우리에게 바라고 있다.


요컨대,

우리가 완전한 이가 되기 위하여 

천주께서 바라시는 모든 주의와 노력을 치를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대화편」3)


이것으로써 성인은,

「우리가 통상 자신과 자신의 완덕에 관해서 품고 있는 지나친,

불안한 마음을 모조리 버리고, 

순수히 자기의 일에 전념(專念)하고,

천주의 지선(至善)하신 손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도록 권장한다.」

(동서 7)


이것은 현세적 사물(現世的事物)에 관해서지만

「영적생활과 완덕에 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동서3)


왜냐 하면,

「우리 마음에 도사리고 있는 이러한 불안(不安)은 

자애심(自愛心)에 사주(使嗾)되는 각가지 욕망과 자기 안에 있어,

자기를 애무(愛墲)하는 부드러운 정에서 생기기 때문이다.」(동서 12)


p.73


현덕과 위탁과의 총명한 결합은 성인 박사의 일관한 교설이다.

실제, 그는 저서의 어느 곳에서 깊은 신뢰가 있는 영혼에 대하여,


「노도, 키도, 돛도, 아무런 양식이 없이, 아무런 저축도 없이, 

어떠한 일에도, 육체와 영혼에 관해서까지도, 조금도 걱정하는 일 없이,

천주의 섭리의 대해(大海)에 나아가라」고 권하고 있다.


「과연 자신을 당신께 온전히 맡기고 있는 영혼에 관해서는

주께서 충분히 배려하심이 틀림 없기 때문이다.」(동서 2 및 3)


그러나 경건한 박사는 여기서 성가족(聖家族)의 「에집트」에의 피난,

즉 인간이 예견할 수도 그것에 미리 대비할 수도 

전연 불가능한 경우의 하나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실로, 그러한 때에는 섭리에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더구나 전폭적인 신뢰로써 이를 행할 수 밖에 다른 길은 없다.





“ 너희는 나와 함께 한 시간도 깨어 있을 수 없더란 말이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 (마태 26,40-41)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닥친 시련은 인간으로서 이겨 내지 못할 시련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성실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여러분에게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십니다." (1코린 10,12-13)





세상 걱정과 하느님의 나라 (마태 6,25-3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1 베드 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