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위신부님 강론

2017.12.02 하느님 체험-증언|無 爲 行

은가루리나 2017. 12. 27. 16:07

moowee | 등급변경| 조회 170 |추천 0 |2017.12.02. 20:48



시작기도로 <주님의 기도>를 바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다함께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범주 신부님과의 만남에 대하여)

이범주 신부님께서 번역하신 천상의책을 포함한 많은 책들의 이용, 감사



강의에 앞서 내가 먼저 여러분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

나는 오늘 여러분 앞에 <신앙적 도전>을 하러왔다,

이 강의를 통해서!


그리고 내 강의를 듣고 <그래 너 잘났어~> 하더라도,

또 기분이 상해도 할 수 없다, 왜? 내 이야기가 사실이니까!


또 그리고 이 강의가 끝나고 성당문을 나서는 순간,

지금 들은 모든 이야기를 다 잊어버리시는 편이 오히려

편안한 종교생활(놀이)을 위해서도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더 나아가 나처럼 <하느님께 미친놈>이 될 지 모르니까!
또, 내가 체험한 그 체험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따라할 수 있으니까.

또, 정말로 하느님을 사랑하려고 이를 악문 사람들만 가능하니까.


그러나 나는 오늘 이 강의를 통해서

여러분 중 단 한 명이라도 건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겠다.

아니, 하나도 건지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것마저 하느님께 맡기겠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이 번 돈으로 1천명이 넘는 많은 유대인을 죽음에서 구해 준

독일 사업가가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일은 세상을 살라는 일>이라는

탈무드의 격언이 새겨진 금뺏지를 바라보며 그 금뺏지로 최소한

한 사람의 생명을 더 살릴 수 있었을텐데 하며 울부짖는 장면이 생각난다.


지금 <내가 사는 목적>은 단 한 가지밖에 없다.

하느님 아버지의 가장 소중한 영혼들,

단 한 명의 영혼이라도 더 구원시키는 일이며

그것이 나의 사명이며 내가 사는 목적이다.


나의 사명이며 내가 사는 그 목적을 통하여

<아버지의 완전한 영광>을 이 세상에 크게 드러내 드리기 위함이다.




지난 9월말, 서울대교구 11차 사제피정에 참가했었다.

서울 강남의 1만명에 가까운 어느 대형본당 신부가 강론을 했는데,

요지는, 본당에서 아무리 많은 노력을 기울여도 날이갈 수록

주일미사참례자 수가 점점 줄어가기에 큰 걱정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5년 동안 아무 연락 없이 쉬고 있는 신자 1,500명을

본당 교적에서 정리하셨다는 말씀도 곁들이셨다.


지난 2016년 한국천주교 교세통계를에 의하면

주일미사 참례자수가 전체 신자의 19.5%라 한다.

지금 이곳 ㅇㅇ 본당의 경우는 어떠한지 모르겠다.




이미 유럽에서는 성당이나 교회가 다른 용도로 팔려 호텔,
식당, 연주회장, 창고, 심지어 술집으로 변모하는 성당과 교회들이

점점 늘고 있는 추세란다. 가장 큰 원인은 신자수 감소란다.

성당 미사 참석률이 급격히 하락하고 있는 추세라 하는데,

프랑스에서는 정기적인 주일미사 참례자가 5%도 안 된단다.
체코의 경우는 겨우 3%에 불과하단다.


점차 많은 교구에서 신자수가 감소하면서
사용되지 않는 성당과 교회들이 값비싼 유지비를 계속 지출할지
아니면 헐어버리거나 용도변경해야 할지 큰문제에 직면했단다.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에서는 한 때 방치됐던 성모 마리아 성당이
대규모 개축공사 뒤 최고급 레스토랑으로 변신했다 한다.




전임 교황 베네딕도 16세께서는 

이런 현상을 신앙의 위기로 판단하시고

이미 지난 2012년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50주년을 맞이하여

<신앙의 해'> 선포하셨던 기억이 나는지요?


그 이후 5년이 지난 지금 우리 교회는 그 무엇이 달라졌는가?

왜 이런 서글픈 현상이 우리교회 안에 일어나고 있는가?

여러분은 <그 원인>을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나는 그 원인을 <하느님 체험>에 두고 있다!

하느님을 체험한 신자들이 매우 적기 때문이다!


아니 감히 말씀드려,

하느님을 체험한 성직자들이 너무 적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체험>이 매우 중요하다.

체험, 그것도 <깊은 체험> 없으면 재미가 없다.

재미가 없으니 오래 갈 리 만무하다.


<골프>를 생각해 보자.

나는 과거 정말 골프에 미쳤었다.

골프가 너무너무 재미있었다, 하느님보다 훨씬 더 좋았다.

그렇게도 재미있고 좋으니 틈만 생기면 필드로 달려갔었다.

과거 8년간 경력에 홀인원 두 번, 이글 두번, 싱글 여러번.


그런데 지인들 중에 가끔 골프를 중단하는 분이 있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골프가 재미없어 중단한다는 말을 들었다.

적성도 있었겠지만 <깊은 체험>이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적지 않은 영세자들이 세례 후 1, 2년 내에 성당에 발길을 끊는다.

재미가 없다, 아무리 재미를 붙이려 노력해 봐도 너무 재미가 없다.

아니 교회밖에 재미있는 것이 너무 많다, 널려있다.


그것은 신앙체험 즉

<하느님 체험>, 깊은 하느님 체험이 없기 때문이다.




비교종교학자 오강남 교수와 성해영 교수는

그들의 공동저서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에서

각 종교가 자기 신자들을 신앙적 체험 즉, 

<종교적 깨달음>으로 이끄는가 그렇지 못한가에 따라

종교를 <표층적 차원><심층적 차원>의 종교로 나누고 있다.

 

<표층적 종교>는 내가 착한 일을 하면

산타 할아버지가 굴뚝을 타고 내려와서

나에게 선물을 가져다 준다는 믿음에 머무는 종교이며,

<심층적 종교>는 그 아이가 어른이 되어

산타 할아버지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종교를 말한단다.

 

표층적 차원의 종교가 개인의 믿음을 강조한다면,

심층적 차원의 종교는 깨달음을 강조한단다.


<어린 시절>에는 '교리'와 '신학과 '성인들의 삶'을 배우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 아닌

나의 하느님을 만나게 해야 하며, 바로 그것이 심층적 종교 란다.





두 달 전, 내가 아는 지방 교구의 어느 후배 신부가

에니어그램의 창시자이며 <벌거벗은 지금>의 저자인

<리처드 로어> 신부가 그 책에서,

"하느님을 체험하지 못한 성직자가 많다"는 내용의 글을 읽은 후

자신도 그 중의 한 사람임을 깨닫고 큰 쇼크를 받아,

자신의 사제생활이 크게 달라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리차드 로어 신부는 그책에서

"하느님 체험 없는 성직자는 남들에게 그것을 가르칠 수 없었기에,


'가톨릭과 정교회'에서는 신자들을

<성당생활과 성사생활>기대는 존재로 만들고,

'프로테스탄트'는  신자들을

<테크닉으로서의 신앙>에 기대는 존재로 만든다."고 말하고 있다


교회를 이끄는 지도자들이 신자들에게

자신이 체험한 <하느님을>  전해야 하는데,

다른 사람이 체험한 <하느님에 대해> 전할 뿐이다.

그러니 지도자의 가르침에 <힘>이 없고

<교리>와 <이론만> 있을 뿐이다.


하느님에 대한 이론들은 <유튜브>에 더 잘 나와 있다.

유튜브는 헌금도 교무금도 없고 언제나 출입이 자유롭다.

그리고 잔소리와 야단도 없고 무엇보다 재미있다.


헌금에 교무금에 잔소리와 야단에 그리고 무엇보다

신자들을 재미없게 만들던 사제가 바로 나이다.


오랜세월 '하느님 체험' 없이 하느님에 대해 떠들어 대며

하느님 때문에 밥벌어 먹고 살던신부 중의 대표가,

지금 여러분 앞에 서 있는 바로 이 신부이다!




내가 몸에 병을 얻고 산으로 들어간 것이 2006년 2월,

약 12년 전 나는 병으로, <죽는 것이 별거 아니구나!>를 체험한 뒤

모든 것을 버리고 지리산 속으로 들어갔다.


병든 나를 산 속으로 내몬 것은 다름아닌

< ", 이러다 죽는 모양이구나!">였다.


겉으론 화려했던 사반 세기 나의 사제생활 전체가

한 순간 다 무너져버렸다, 질병 앞에!


질병에서 벗어나려 좋다는 온갖 건강법들에 무던히도 매달렸지만,

<하느님 섭리 앞>에선 그 어떤 약제도 요법도 모든 것이 무용지물,

마침내 < "아, 이러다 죽는 모양이구나!">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처음 <사제직>에 대한 꿈을 갖고,

소신학교 3년, 대신학교 6년 그리고 사제생활 24년,

전문인으로서의 33 뒤로 하고 산으로 들어간 나는

오랜세월 너무도 허망하게 살아온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아, 이러다 죽는 모양이구나!>라는 깨달음 앞에선

<어떤 거짓>도 자리할 수 없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바로 앞에 와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깨달았다!

내가 그 오랜세월 <하느님을 모르면서> 생활해 왔던 사실을,

아니 <내가 모르는 하느님>을 믿고 따른다며

그 오랜세월 사제생활 해왔던 사실을!


하느님하느님에 대한 가르침을 가르친다는 신부가

하느님도 모르며, 또 모르는 하느님을 믿고 따랐다는 말은

도대체 무슨 말인가?


한 마디로 <하느님을 체험하지 못한 사제였다>는 말이다.

그 말 이외에 다른 마땅하고 옳은 다른 말이 또 있겠는가?



"그들을 내버려 두어라. 그들은 눈먼 이들의 눈먼 인도자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마태 15, 14)


내가 바로 <눈먼 인도자>였던 것이다.

그 오랜세월 나는 눈먼 인도자로서 눈먼 이들만이 아니라,

<눈뜬 이들>까지 억지로 하느님뜻대로가 아니라

내 뜻대로 이끌어왔던 것이다.


나는 그동안 정말 눈먼 사제였다.

겸손한 말이 아니라 정말 실력도 쥐뿔 없는 신부 놈이

어쩌다 윗분들의 눈에 들어 그 젊은 나이에 평화방송 상무이사,

가톨릭대학 대외협력처장, 학교법인 사무국장 등등,

세상 말로 출세가도를 달렸었다, 눈먼 신부가.


눈먼 사제, 다른 말로 <靈眼이 열리지 않은 사제>

출세가도를 달리다보니, 그 끝은 낭떠러지!


아, 얼마나 큰 통회의 눈물을,,, 얼마나 많이많이 흘렸는지,,,,


몸도 영혼도 다 병든 사제,

그 앞에, 그 눈 앞에 낭떠러지가 눈에 들어왔고,

그 낭떠러지 저 밑바닥에 계신 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눈을 크게 떠 자세히 바라보니 그분은 나의 주인이신 하느님이셨고,

그분이 바로 나의 아버지, <나의 참아버지>이셨다!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가, 도대체?

서당개 3이면 풍월도 읊는다 했는데,

유아세례와 어린시절 성당 주일학교가 놀이터였고,

소신학교를 시작으로 서당개 10배  33년간의 긴 신앙생활에

입에서 늘 떨어지지 않았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병을 얻고 모든 것을 버리고 산 속으로 들어가서야

비로서 처음 <나의 참아버지>로 체험했다니!


< Mio Padre(나의 아버지) 1곡 신자들 감상(약4분)>




어느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던 <병든 나>였지만,

하느님은 나를 만드신 참아버지, <나의 진짜주인>이시기에

아버지는 다시 나를 부르셨고 나를 원하셨다.


<낭떠러지 끝에 서 있었던 경험>을 해본 분은 잘 알 것이다.

그때 나의 느낌을, 그분은 나에게 거기서 뛰어내리라 손짓하셨다.

<아, 이러다 죽는 모양이구나!>를 체험한 나는 망설임이 없었다.


나는 눈도 감지 않고 아니 눈을 더욱 크게 뜨고 단숨에 뛰어내렸다,

<내맡김의 낭떠러지>, <내 뜻의 절벽> 밑으로!



나의 주인이신, 나의 아버지께 병든 나를 내맡겨드렸던 것이다.

아버지께선 병들고 무겁고 지친 나를 당신 팔에 가벼이 받아주셨다.

나는 가까이서 아버지를 보았다, 처음으로, 나의 참아버지를!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전능하시고 자비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 아버지,

저의 모든 것을 당신께 맡기오니 저를 이끌어주소서!>


< 내가 직접 노래 부름- 진분홍 곡>




내가 처음 지리산에 들어갈 때 나에겐 <기도목표>가 있었다.

그것은 당시에 유행하던 <향심기도><관상기도>였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그 두 기도를 <강력히 보류>시키셨다.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지리산에서의 <나의 모든 삶>은 이미, 아버지의 <철저한 계획>과

<놀라우신 섭리> 하에 놓여진 생활이었던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영적수준이 낮은 나같은 사제에겐 어울리지 않는

<관상기도와 향심기도>를 접게 하시고, 너무나도 단순한

<화살기도>로 나를 이끌어주셨다.



여기서 <화살기도>라는 말이 나왔으니

<화살기도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알고 넘어가자.


어린 시절부터 많이 들어왔던 화살기도,

우리 엄마 입에서 떠나지 않았던 <예수 마리아 요셉이여!>


나는 그 화살기도를 어떤 일이 생길 때나

어려움에 처한 누구를 떠올리며 가끔가끔 바치는

<짧은 기도>로만 알고 있었다.


또는 본당에서 본당신부나 수녀 그리고

어떤 누구를 위한 영적예물을 위한 기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화살기도란 

<끊임없이 반복해서 바치는 짧은 기도>를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 교회의 오랜 전통 중의 하나가 바로 화살기도이다.

<초기 수도원의 수도자들>은 공동기도 시간 외의 일하는 시간에도

그들의 입에서 기도가 떠나지 않게 생활했다.


그들은 일할 때에 자신들이 좋아하는 <짧은 성경구절>이나

<주님의 기도>나 <거룩한 짧은 말>을 끊임없이 계속 되풀이하였다.


그중의 하나가 동방교회 수도자들이 애용하던 

"예수의 기도"이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님,

죄인인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끊임없이

되풀이 하여 기도하였던 것이다.





<예수 기도와 거내영 화살기도와의 차이점>

구원에 대한 확신 유무

- (에수기도, 성모송 - 자비를 베푸소서, 이제와 저희 죽을 때 : 지금 여기 보다 미래위해 기도)




현대 영성의 대가 <토머스 머튼>신부님의 말씀,

"자꾸자꾸 반복하여 말하고 되뇌어라! 수시로! 그리고 끊임없이!

그것이 기도이고, 기도는 하느님과 깊은 관계이다."

바로 <끊임없는 화살기도>를 말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왜 나를

<끊임없는 화살기도>로 이끌어주셨는가?


이것도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기도는 <잠시의 쉼>이나 <잠깐의 끊김>도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며,

하느님은 끊임없이 당신을 청하는 사람만 만나 주신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시어, 내가 끊임없이 당신을 청하게 함으로써 

당신을 체험시켜 주시기 위함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루카 18, 1절 이하>

제자들에게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라> 하지 않으셨고,

분명히 <낙심하지 말고 '끊임없이' 기도하라> 하시면서

<과부의 청을 들어주는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들려주셨다.


바오로 사도 또한 <1 테살 5, 17>에서 테살로니아인들에게

그냥 <기도하십시오 또는 열심히 기도하십시오,>하지 않으셨고,

"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려는 사람은

누구나 반드시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는 뜻이다.


내가 처음으로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

그것이 바로 <끊임없는 화살기도>였던 것이다.


그리고 역시, 나를 따라서 일상생활 속에서도

늘 끊임없는 화살기도를 바치는 이들도 나와 똑같이

누구나 <하느님을 체험>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과거 내가 누웠다 일어나기도 힘든 건강상태에서도

나는 나의 건강보다 먼저, 하느님만을 끊임없이 청했었기에

내가 하느님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니

하느님이 나를 만나주셨던 것이다.


그때 나는 분명 나의 건강을 위하여 빌지 않았다, 정말이다.

제발 나를 살려달라 기도하지 않았다.

나의 건강도 병도 나의 죽음까지도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드렸다!


그러나 나를 살려주시고 건강을 허락하신다면

나의 모든 삶을 통해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가겠다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화살기도를 바쳤다.




우리가 <기도하는 목적>은 분명,

<세상의 것들을 먼저> 청하는 게 아니라,

성령, <하느님을 청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루카 11, 9 ; 13)말씀을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거야 할

매우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이 사실을 아주 열심하다는 신자들조차 너무 모르고 있다.

<성령과 성령의 은사>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루카 11, 13>에서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깨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성령의 은사 를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고 히셨는지?


아니다, 분명 <성령>을 얼마나 잘 주시겠느냐 하셨지,

<성령의 은사>를 더 잘 주시겠느냐 하시지 않았다.


<성령과 성령의 은사>가 같은 말인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마태 5, 18>"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그냥 지나는 소리로,

아니면 쓸데없이 <끊임없이 기도하라>든가

<성령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하지 않으셨다.


성령과 성령의 은사는 분명 다른 것이다.

내 쉬운 표현으로 말하자면 '성령의 은사'는 <하느님의 깃털>,

'성령'은 <하느님 몸통>이다.


우리가 청하는 것이 하느님의 몸통을 청해야지

자꾸 하느님의 깃털을 먼저 청하니 깃털은 가벼워

바람이 불면 날아가 떨어지는 곳이 진창일 수가 있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성령의 은사>는

몸통인 하느님 만나기 위한 '징검다리'이다.


하느님의 몸통을 잡지 못하고 징검다리 위에서

깃털과 부르스를 추다가는 마귀밥이 되기 쉽상임을 잊지말아야.



<기도의 올바른 순서>가 바로 그것이다,

<세상의 것들을> 먼저 청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느님>먼저 청하는 !




예수님께서 또 <마태 6, 31절 이하>에 분명히,

<기도의 순서>에 대해 매우 명확히 가르쳐주셨음에도

대부분의 많은 신앙인들이 이 기도의 순서를 잊어버렸기에,

하느님을 체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렇기에 신앙생활이 재미없고 또 그렇기에 평생고생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필요로하는 것들에 대해서 너무 잘 알고 계신다,

비록 그것이 하느님을 모르는 이들이나 찾는 것들일망정,

<하느님을 먼저 청하면> 그것들마저 곁들여 주신다 하셨음에도

기도의 순서를 바로잡으려는 신앙인이 얼마나 되는지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자, 이제 여러분은 <하느님 체험>에 있어서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를 다들 잘 아셨을 줄 믿는다.


그러면 세상 것보다 <하느님을 먼저 청하면>, 그리고

<끊임없이 기도하면> 누구에게나 하느님이 찾아주시는가?


아니다,

먼저 하느님이 내 안에 <오실 자리>를 마련해 드려야 한다.


내 안에 나를 가득 채우고 있는 내 뜻을 버려야 한다,

내 뜻을 비워야 한다, 내 뜻을 내려놓아야 한다.


어디다 내 뜻을 버리고, 비우고, 내려놓을 수 있는가?

아무데나 내 뜻을 버리고, 비우고, 내려놓을 수 없다.


이 세상 모든 곳은 다 하느님의 것이다.

이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허락 없이 아무곳이나

버리고, 비우고, 내려놓을 수 없다.


그래서 하느님께 맡겨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그리고 사실 지금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나의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다 <하느님의 것>이다.


나의 생명도, 나의 배우자도, 나의 자녀도 모두 다!

한 마디로 <하느님이 나의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먼저 인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끊임없는 기도도 필요 없고

또 하느님도 만날 수 없다, 죽을 때까지, 이 세상에선.

더나아가 저 세상에서도 바로 만나뵐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라고 인정하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은,

그 고백을 하느님 앞에 맡겨드려야(봉헌) 한다.


하느님이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생명보다 더 소중한

이사악을 요구하셨을 때 기꺼이 이사악을 봉헌했듯이.


어린 마리아가 천사의 전갈을 받고 자신의 뜻을 접고

순명으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듯이.


그리스도 예수님이 아버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신의 생명을 바치셨듯이.


여러분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모든 것을 원하실 때,

여러분의 모든 것을 다 내어드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결심을 미사를 통해서 하느님께 봉헌해 드린 뒤,

<끊임없는 화살기도>로 살아가면 된다.


신경 쓰는 일 외의 모든 시간을

아침에 일어나서 화장살에 앉아서도 칫솔질할 때도,

세수하고 샤워할 때도, 밥짓고 음식만들 때도, 전철 안에서도,

운전하거나 길을 걸을 때도, 그 얫날 수도자들이

노동하는 모든 시간을 끊임없이 화살기도를 바쳤듯이

<하느님 아버지, 저의 모든 것을 당신께 맡깁니다,

저를 이끌어주소서.>를 끊임없이 바쳐야 한다.


나는 지리산 사는 5년 동안 끊임없이 화살가도를 바쳐왔고

그리고 나는 지금도,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바칠 것이다.


지리산에 사는 동안에는 화살기도 성가가 만들어지지 않아

그냥 화살기도를 입으로 머리로 마음으로 외워댔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이제는 성가로 만들어져 끊임없는 화살기도 바치기가

너무 즐겁고 쉽다.


정말 굳은 결심하고 3개월 동안 집중적으로 화살기도를 노래하면

큰 효과를 볼 것이다. 나와 나를 따라 하는 사람들은 다 경험했다.


글라라수녀원에서 펴낸 <하느님 안에 숨은 생활>이라는 책에도 

"3개월 동안 아무것도 거절하지 않는 영혼은 

틀림없이 완덕에 도달한다." 했다.


공자는 중용에서 성인이 되기 위한 대전제를 <실천>으로 보았단다.

공자의 <能久 3개월>은 무엇이든 3개월만 끊임없이 실행하면

그것에 대해 능한 사람 즉 성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라 한다.


나는 그것을 직접 체험했다.

한 가지 화살기도를 선정하여 3개월 동안 끊임없이

그 한 가지 기도만 집중해서 바쳤더니 3개월 후에는 그 기도가

뇌리에 각인 되어 어느 때나 저절로 흘러나옴을 체험했다.

심지어는 잠을 자는 가운데도 기도가 흘러나온다.


나는 여러분께

러시아의 영성서적 <순례자의 길>에 나온 글을 읽어드리겠다.


【순례자는 단순한 농부로서

어떻게 멈추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가?” 라고 묻는다.

영적 사부(Staretz)는 그에게 단순한 방법을 제시해준다.

 

그는 반복되는 예수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는데,

하루에 3000번에서, 6000, 그리고 12,000번까지 하게 된다.

그 이후에 그는 더 이상 그것을 셀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혀가 저절로 그 단어를 낭송하여 서두르지도 않고,

잠을 잘 때조차도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얼마 후에 그는 두 번째 단계로 들어갔다.

그 움직임은 그의 입술로부터 혀로 옮겨 갔다.

그때 그 기도는 혀로부터 마음(심장)으로 옮겨갔다.

순례자는 기도가 심장의 고요함 속에서 암송되고 있음을 느꼈다. 】


이 순례자가 체험하는 모든 체험은 누구나 가능한 것이다.

나와 나의 증인들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여러분 중에서도 이 순례자의 체험을 직접 체험하는 분들이

많이 아니 적게라도 나오면 참으로 기쁘고 좋겠다. 


< 신자들 눈감고 감상 - 송기창 노래 (8) >




이제 이렇게 <끊임없는 화살기도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변화가 찾아오게 되는가를 알아보겠다.


끊임없는 화살기도로 정화된 사람들 안에 찾아오신

하느님께서는 이제 그 영혼을 서서히 정화시키신다.


세례 후 그동안 자신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사랑해 드리지못하고

자기 뜻대로, 욕심대로 살아온 그를 <완전한 회개의 길>로 이끄신다.


인간의 노력에는 한계가 있다. 인간 스스로의 노력으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직접 변화시켜주신 새삶>을 살게 된다.

그것은 죽을 때까지 변함이 없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변화시켜주셨기 때문이다.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아니, 자기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느님이

자기의 참 아버지이심을 깨닫게 만들어 주신다.



그 사람 눈에서는 뜨거운 통회의 눈물이 그치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 자신의 모든 것에 대해 한없는 감사의 마음을 주신다.



영혼 깊은 곳에서 자신을 구원해 주신 하느님께

뜨거운 찬미와 찬양이 그치지 않는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살아가게 된다.






1. 미래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에서 해방된다.

 2009.12.30

 

'성모님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맡기면

완전히 100%를 내맡기면 무엇보다 '미래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

더 나아가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까지도 모두 사라지게 된다.

 

과거에 나는 교통사고를 크게 두 번이나 경험해 보았다.
그러하기에 장거리 여행이나 장거리 운전을 하게 되면
늘 '죽음에 대한 걱정'을 쉽게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러나 내 자신을 하느님께 완전히 내맡겨 드린 후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의 모든 것

나의 부족함과 죄까지도 송두리째 모두 다

하느님께 내맡겨 드렸기 때문이다.

 

나의 모든 것이 이미 다 그분의 것이 되었는데

무슨 걱정과 두려움이 남아 있겠는가 말이다.

 

밖에 나가서 교통사고로 죽더라도,
또는 비행기가 공중폭파 되거나 추락하여 나의 몸이 산화된다 하더라도
나의 주인이신 전능하신 그분께서 어련히 다 알아서 해주시겠는가?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긴 영혼에겐,

더 이상  '불행'이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이 불행이라고 여기는  안에도 반드시 '하느님의 뜻'

깊이 숨어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불행이 크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그 안에는

더욱 깊고 큰 하느님의 뜻이  존재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쩌면 불행이 기대되기도 한다.
'행복이라는 관념''불행이라는 관념'

결코 둘이 아님을 깨닫게 된 것이다.

행복이라는 관념 속에 계신 하느님께 늘 감사드리며

불행이라는 관념 속에 계신 하느님께도 더욱 감사를 드리게 된다.

 

미래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

더 나아가 죽음까지도 그것들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몽땅 다 내맡겨 드렸고

그래서 나의 모든 것이 없어졌는데 그 무엇을 두려워 하겠는가!

 

오로지 '여기지금'을 살아갈 뿐이다.

'하느님의 뜻대로' 말이다!


 



2.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2009.12.31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맡긴 영혼은

'삶의 목적'이미 확고히 세워졌기에

자신의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않게 된다.

 

하느님께 내맡긴 영혼의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내 뜻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 뜻대로만 사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다
.

 

하느님께 내맡긴 영혼은 자신의 모든 것이 하느님께 내맡겨졌기에, 

자신의 미래에 대한 계획을 스스로 세우지 않는다. 

 

세울 필요도 없고, 세워서도 안 된다.  

'지혜의 원천'이신 하느님께서 직접 계획을 세워주시는데

왜 내가 나의 짧은 머리로 내 스스로 계획을 세우는가?

 

내가 계획을 세우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그것은 마치 유치원 어린이가 스스로를 똑똑히 여겨

선생님의 지도를 거부하는 것같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오히려,  그동안 나를 지탱해 오던 나의 '경험'과 나의 온갖 '지식'

내 머리 속에서 빼내 버리는 작업이 그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는데 있어서 나의 '경험과 지식'

'도움'되보다는 '방해'가 될 때가 많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세워주시는 계획은

참으로 놀랍고 오묘하고 신기하기만 하다.

 

어떤 이는 "그 계획을 하느님께서 직접 세워주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스스로 생각해 놓고 그것을 하느님께서 세워주신 계획이라 

착각하는 것인지 어떻게 알아?" 라고 반문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참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100% 완전히 하느님께 내맡기면, 

'내맡김의 삶'을 통해 하느님께서 나날이 조금씩 그것을 가르쳐 주신다.

 

나의 뜻과 의지 모두를 하느님께 다 내맡겨 드렸는데
하느님께서 계획을 세워주시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 

 

처음엔 '느낌'을 통하여 알게 해주시고, 

나중엔 성령의 '영감'을 통하여 알려 주신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오랜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며,
하느님 뜻의 철저한 수용과 그에 따른 그분의 뜻과의 완전한 일치와
그분께서 주시는 통찰력 등 많은 체험과 은총을 통하여

얻어지게 되는 결과임을 우리는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 
 

하여튼,  그것은 사실이다. 

여러분이 한 번 '거룩한 내맡김'을 통하여 직접 경험해 보면, 

내 말이 진실임을 알게 될 것이다. 

 

"누군가 알려 주시지 않으면,  내가 그런 말을 어떻게 하겠는가?"

오상의 비오 신부님께서 하신 말씀 그대로 일 것이다.

 

"누구나 하느님 뜻을 실천하려고만 하면,

 이 가르침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인지

 내가 스스로 말하는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요한 7,17) 




 

3. 하느님께서 당신의 지혜로 무장시켜 주신다.

2010.01.04. 11:16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맡기면, 

하느님께서 당신에 대한 '앎'을 그 영혼의 필요한 정도에 따라

처음부터 '하나하나', '차례차례', '나날이 조금씩', 

때로는 '엄청나게' 깨우쳐 가르쳐 주신다 


"여러분은 그분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았고

지금도 그 상태를 보존하고 있으므로,
누가 여러분을 가르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께서 기름 부으심으로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십니다.
기름 부음은 진실하고 거짓이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 가르침대로 그분 안에 머무르십시오. (1 요한 2, 27)"라는

말씀대로 정말 기가 막힐 정도로 잘 가르쳐 주신다.


그 가르치심에 놀라움을 금치 못해, 

영혼은 그저 '탄복의 탄복'을 되풀이할 뿐이다.

 

그래서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긴 영혼들은

영적 스승을 찾아 헤맬 필요가 전혀 없다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맡겨 드려 자기가 없어졌기에, 

하느님께서 '내맡김의 최고의 스승'이신 예수님을 

'개인 교사'붙여 주시기 때문이다.

 

또 그래서 하느님에 대해 알기 위해 이 유명 강사 저 유명 강사, 

이 강의 저 강의, 이 피정 저 피정, 이 세미나 저 세미나를 찾아

스스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분주할 필요가 전혀 없다. 

 

필요하다면, 그것들의 필요성이나 접하는 순서까지도

예수님께서 직접 다 가르쳐 주신다

 

당신에 대한 앎에 있어서

인간이 정한 순서가 그분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되기도 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에 대한 앎을 알게 해 주시는 데 있어서

모든 것을 다 도구로 쓰신다. 

 

당신을 알려 주시려,

때로는 필요한 ''까지도 직접 골라 주신다정말 놀랍다!

 

만일 하느님에 대한 앎을 더 많이, 

더 빨리 알기 위해 스스로 노력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또 하나의 '탐욕'이며 100%를 완전히 내맡기지 못했다는 하나의 증거이다. 

 

하느님께 내맡긴 영혼의 특징 중의 하나가 

어떤 일에든 '서두름'이 없다는 것이다


서두름은 '조급함' 때문이요,

조급함은 '답답함' 때문이며 그러한 감정은 

자기가 스스로 하려 하기에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이 직접 나에게 모든 것을 다 해 주시는데 왜 내가 답답한가? 

"남이 뭐 누는데왜 내가 힘을 주는가?" 말이다! 

 

하느님께 완전히 내맡긴 영혼은

늘 느긋하고 여유롭고 그래서 늘 평화롭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해주시기 때문이다.

 

오로지 그분께서 이끌어 주시는 대로 이끌릴 뿐이다. 

바람 부는 대로 '바람을 타고', 물 흐르는 대로 '물을 타고'

하느님의 이끄심대로 '하느님 뜻을 타고' 살아야 한다

 

'바람'과 '물'은 곧 '하느님 뜻'이며

하느님 뜻대로 살게 되면 서두를 필요가 없어진다. 

바람 따라, 물 따라, 하느님 뜻을 따라!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내맡긴 영혼들을 당신 도구로 쓰시기 위해서, 

날이 갈수록 그들의 영을 열어 주시어

당신 지혜로 완전하게 무장시켜 주시


성령께서는 하느님 지혜로 무장된 영혼에

탁월한 '통찰력'을 선물로 주시어 

어떤 일이나 상황에 대해서 뛰어난 '영적 분별력'을 갖게 해주신다.

 

나는 '하느님을 아는 재미'

이토록 재미나는 재미인 줄 꿈에서도 몰랐었다. 



누구나 '하느님을 아는 재미'에 빠지면

마약에 빠져있던 사람도, 도박에 빠져있던 사람도, 

도색에 빠져있던 사람도, 광적 취미빠져있던 사람도

단번에 그 재미를 다 놓아버리게 되는 것이다.

 

진실로 '진짜 재미'는 영원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의 '찰나적이고 한시적인 재미'는 분명 '가짜 재미'이다. 

이 세상에서 시작하여 죽어도 끝나지 않으며, 

하느님 나라까지도 영원히 지속되는 재미가 '참재미'이다.

 

영원히 지속될 수 있기에

하느님과 사귀는 일은 인간에게 있어서 '지고한 가치'인 것이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필리 3, 7- 9)




 


4. 돈이나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어진다.

 2010.01.04. 20:07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면

이 세상 '재물'이나 ''에 대한 욕심이 사라진다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드려 나는 없어지고
'하느님을 온전히 소유'하게 되었는데 이 세상 그 어떤 무엇이 탐나는가?
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얻게 되었는데 말이다!


어떤 무엇이 부족하거나 설령 전혀 없더라도

항상 '충만감'을 느낀다, 늘 '뿌듯한 마음'이다. 

 

오랜 세월 집 없이 전세살이하던 사람이

처음 자기 집을 갖게 되었을 때 그 뿌듯함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매우 '거룩한 뿌듯함'일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께 모든 것을 다 내맡긴 영혼들의 입에선

'청원 기도'가 사라진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마태 7, 7) 라는 예수님 말씀대로
청하는 사람에게, 찾는 사람에게, 두드리는 사람에게
원하는 모든 것을 다 들어 허락해주시는 하느님이심을 잘 알지만, 
이 세상 것들에 대해선 전혀 청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소유하신 하느님을 소유하였기 때문이다
그 영혼이 하느님으로 온통 채워졌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는 단계가 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것에도 단계가 있다하느님 나라 안에도 차원이 있다

 

기도에도 단계가 있다

청원 기도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이 세상의 것들을 구하는 청원 기도는 분명 낮은 차원의 기도이다.

 

가장 높은 차원의 기도는 '하느님만을 청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올바로 청하기 위해서'

하느님 당신 자신이 가장 바라고 계시는 것을 당신께서 직접,
스스로 하시도록 해 드리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청한다고 하면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헤아려 청해 드리지 않고

내가 원하는 것을 청한다면 그것은 분명 잘못된 처사이다

 

하느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것을 청하는 것이 다름 아닌,

'하느님께 자신을 모든 것을 내맡기는 것'이다!

 

우리는 언제까지 청원 기도를 바칠 것인가

"아무것도 청하지 말, 아무것도 거절하지 말라."

프란치스코 살레지오 성인(1567-1622)의 말씀대로,

이제 우리의 청원 기도는 '이 세상 것들'에서 '하느님'으로 바뀌어야 한다.

 

하느님께 내맡긴 영혼은 오직 하느님만 청해야 하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그 어떤 것도 거절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 '고통'이든 '질병'이든 더 나아가 '죽음'이라도 말이다.



참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맡긴 영혼들은 

이 세상의 돈재물명예칭찬사람들

'자기의 것'으로 만들지 않는다


모든 것을,

그것들의 원래 주인이신 하느님께 고스란히 다 되돌려 드린다.


 



5. 죄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2010.01.04 

 

무엇보다도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내맡겨드리면 죄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죄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 멀어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의 모든 것, 부족함과 죄스러움마저도 하느님의 자비로

모두 하느님의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그래서 '거룩' 자체이신

하느님의 것이 되었기에 죄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다.

 

하느님과 거리가 먼 모든 것들로부터 점점 멀어지게 된다

거룩하지 못한 세상의 모든 취미쾌락재물

심지어는 사람들에게서 멀어진다


그동안 알고 지내던 사람들까지도

하느님께서 하나하나 다 차례로 '선별'해 주신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새로운 인연을 맺어주신다.

 

하느님께 내맡긴 영혼들은

'과거의 인연'에 대해 너무 연연해서는 안 된다


하느님의 선별로 서로 멀어졌던 인연이라 하더라도

그들이 하느님과 가까운 생활로 거룩해진다면

다시 가까워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유유상종'이다.

 


지금까지는 죄를 범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다해도 별 소용이 없었지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겨 온전히 하느님의 것이 되었기에

이제는 하느님께서 직접 ''를 막아주신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나신 분께서 그를 지켜 주시어

악마가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합니다." (1요한 5, 18)


초보 때 가끔 죄에 떨어지지만
그것은 '겸손되이'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하기 위함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자신의 의지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과 은총에 의해서만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음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그것을 허락하신다
.


참으로 우리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뜻과 그분의 은총이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도저히 그 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악의 파수꾼인 마귀는 감히 하느님과 대적한 존재이다. 

마귀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하느님이시며, 

그분의 뜻과 은총만이 죄를 극복할 수 있으며, 

'죄를 극복하는 최선의 탁월한 방법'이 바로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내맡기는 것,
'거룩한 내맡김의 삶'을 사는 것이다
.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완전히 100% 다 내맡기겠다는

'맹세 수준의 굳은 결심'을 하는 순간,

'하느님의 씨'가 그 영혼 안에 착상된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씨가

그 영혼 안에서 자라나 완전히 영혼을 채우게 되면

그 영혼은 마침내 '하느님처럼' 되어 하느님을 직접 뵈옵게 되는데

그 순간이 바로 '죽음'이다

 

죽음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이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씨가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1요한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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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은 나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다.

비천한 영육을 내맡겨 드렸을 뿐인데 내 안에 와 계신 하느님께서

나의 모든 삶을 하나하나 다 이끌어 주시기 때문이다.

물론, 나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하느님께 더욱 집중몰입하고 하느님만 더욱 뜨겁게 사랑하기 위한

사랑가인 내맡김의 화살기도 성가를 끊임없이 노래 부르는 것이다.


당신을 향한 끊임없는 사랑가에 흡족하신 하느님께서는

더욱 우리를 사랑해 주시며 우리 마음에 사랑의 말씀을 속삭여 주신다.

그 말씀이 바로 '영감'이다.


그러면 그 영감, 사랑의 속삭임대로 이끌려드리는 삶이 바로

<거룩한 내맡김의 삶(영성)>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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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거룩한 내맡김의 삶이야 말로 수원교구 영성신학 교수

정영식 신부님의 말 그대로의 주부적 영성(수동의 영성)이다.

정 신부님의 표현대로 쉽게 말해 <냅둬영성>이다.





{■ 注 : 물 댈 주, 흐를 주 풀이할 주
원래는 '물 줄기'를 뜻하였으나 나아가 물을 댄다는 뜻으로 사용됨
■ 부(賦) : 구실 부 부역, 펴다, 베풀다, 주다, 나누어 주다, 받다 매기다, 부과하다

■ 주부(注賦) : 부어 넣어 줌 <동아 새국어사전>
■ 주부적 영성 : 우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물을 대 주 듯이

당신의 은총을 쏟아 부어 넣어주시는 영성
그런데, 인간이라는 그릇이 텅 비어 있어야 한다


그릇을 비우려면 내 안의 모든 것을

주인이신 하느님께 다 맡겨 드려야 하는 것이다,

<내맡김은 하느님 뜻 안에 살아가기 위한 첫걸음>이기 때문이다.






36-10


하느님의 뜻 안에 들어가기 위해 꼭 필요한 것




2 “내 착한 딸아, 

내 뜻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대단히 쉬운 일이다. 

너의 예수는 어려운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내 사랑이 나로 하여금 

사람의 이해력에 맞추어 가르치게 하기에, 

사람은 내가 가르치며 바라는 것을 어려움 없이 행할 수 있다.


3 너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내 ‘피앗’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은, 


첫째, 내 뜻 안에서 살기를 바라고

그것도 확고하게 열망하는 것이다.


둘째, 그 첫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일단 첫걸음을 내딛기만 하면, 

나의 거룩한 뜻이 

그를 어찌나 많은 빛과 큰 매력으로 에워싸는지 

그 자신의 뜻을 행하고 싶은 욕구가 사라진다.


사실, 

첫걸음을 내딛자마자 자기가 힘센 사람이 된 느낌을 받는다. 

욕정과 나약과 비참의 밤이 낮으로 

- 신적인 힘으로 바뀜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둘째 걸음을 내딛지 않을 수 없어지고, 

이 둘째 걸음이 그를 불러 셋째 걸음을, 

마찬가지로 넷째 걸음, 다섯째 걸음 등등을 옮기도록 

그를 이끌어간다.



6 그러니 (내 뜻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이나! 

단, 반드시 원해야 한다.


딸아, 우리 (성삼위)의 사랑은 너무나 큰 나머지 

다양한 단계의 아름다움과 성덕이 

우리의 거룩한 뜻 안에 있는 영혼을 꾸미도록 정하였다. 


이 영혼들이 아름다움과 거룩함과 사랑에 있어서 서로 구분되지만, 

모두가 아름답게 제각기 독특한 특색을 띠게 하는 것이다








천상의 책

6-142


1905년 11월 8일


하느님의 뜻 안으로 들어가는 첫걸음은 맡김이다.



1 몹시 괴로운 투쟁을 벌이고 나자 

그분께서 아주 잠깐 오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2 "딸아, 내 뜻에 자기를 맡기는 영혼은,


마치 좋은 음식을 가까이서 보며 식욕을 느끼고,

입맛이 당기는 바람에 그 음식을 맛있게 먹기 시작하여 

자기의 살과 피로 변화되게 하는 사람과 같다.


그가 그 좋은 음식을보지 않았다면 

식욕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고 맛도 볼 수 없었을 것이니,

줄곧 배가 빈 상태로 있었을 것이다.


3 그러한 것이 영혼에게는 맡김이다.


내 뜻에 자기를 맡기면

바로 그 맡김을 통하여 신적인 빛을 보게 되고,

이 빛이 하느님을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 것을 죄다 흩어 없앤다.


그래서 하느님을 뵙게 되면 그분을 향유하고 싶어지고,

하느님을 향유하게 되면 

그때에는 하느님을 먹고 있는 느낌이 된다.


그렇게 하느님이 완전히 그 자신으로 변하는 느낌이 되는 것이다.



4 그런즉 


첫걸음은 맡김이고,


두 번째 걸음은 모든 것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열망이고,


세 번째 걸음은 하느님의 뜻을 일용할 양식으로 삼는 것이고,


네 번째 걸음은 하느님의 뜻을 소화하여 자기 것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첫걸음을 내딛지 않는다면, 

그 영혼은 하느님이 빈 상태로 있게 될 것이다. "




거룩한 내맡김의 삶의 최종목표는 <하느님 뜻 안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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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들이 있을까.

가톨릭 영성을 단순화시켜 분류하자면, 근본적 영성, 특수한 영성,

주부적(注賦的) 영성, 개인적 영성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주부적(注賦的) 영성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주부적 관상(觀想, contemplatio)이다.

근본적 영성과 특수한 영성이 보다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하느님과 직접 연결되는 것으로,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 십자가의 성 요한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주부적 관상은 하느님의 은혜로 인하여 신적(神的) 영역을 체험하고

신비에 대한 깊은 깨달음을 얻는 것으로, 수동적 관상이라고도 한다.



얼핏 몇몇 특별한 은총받은 이들에게만 가능한 영성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누구나 가능한 영성이다.


주부적 영성은 영성생활의 최고 형태이다.

인간이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탑이다.

 

인간 노력에 의한 기술적, 전문적 접근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러한 노력들이 낮은 단계의 성취를 보장해 준다면,

주부적 영성은 최고 단계의 성취에 이르게 한다.

 

이 단계에서는 자동(automatic)으로 움직인다.

하느님께서 자동으로 직접 인도해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