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14 p.78-83 제 1 편 제 7장 위탁(委託)에 있어서의 원망(願望)과 기도(祈禱) ②

은가루리나 2018. 1. 8. 16:32


옴니아  95  추천 0  2014.08.21. 04:53



제1편, 거룩한 위탁의 본질


제1장 최고의 규범으로서의 천주의 의지

제2장 천주의 명시의지와 임의의지

제3장 천주의 명시의지에 대한 순명

제4장 임의의지에 대한 적합

제5장 거룩한 의탁의 개념

제6장 위탁과 현덕

제7장 위탁에 있어서의 願望과 기도

제8장 위탁에 있어서의 노력

제9장 위탁에 있어서의 고통감

제10장 위탁과 희생의 서원



p.78



제 1 편 거룩한 위탁의 본질(本質) 


제 7장  위탁(委託)에 있어서의 원망(願望)과 기도(祈禱) 




「프란치스꼬.살레시오」가 설파하는 것은 그보다도 더욱 명백하다.

그는 항상 천주의 의지가 가장 잘 나타나는 방향에로 나아갈 것,

그리고 그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바라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 영혼의 구세주이신 예수께서도, 그 선구자 성『요안』도,

또한 행한다는 배려는 모두 그 어머니에게 맡기셨다.


그 외부적행동(外部的行動)에 관해서는 

필요한 것을 그들 자신을 위하여 바라고,

또한 행한다는 배려는 모두 그 어머니에게 맡기셨다.」라고.


그는 또한,

「천주의 임의의지(任意意志)에 대하여는 

마치 밀랍(蜜蠟)처럼 유연(柔軟)하여 다루기 쉬운 것이 되어서, 

행하실 것을 맡기도록」격려하고 있다.


p.79


그리고 그는 모범으로서

한 외과의(外科醫)의 딸이 그 벗에게 말한것을 듣고 있다.


「나는 몹시 고통을 겪고 있읍니다.

그렇지만, 나는 의약(醫藥) 같은 것은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무엇이 가장 나의 전쾌에 유용한지, 나로서는 전연 알 수 없읍니다.


나는 무엇인가 한가지 것을 바랄 수 있겠읍니다만,

그것이 내게 있어 필요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읍니다.


내게 있어서는 아버지에게 그 모든 배려를 맡기는 것이,

가장 현명한 것이 아니겠읍니까.


아버지는 나의 건강에 필요한 것은 무엇이나 알고 계시며,

또한 그렇게 하실 수도 있고 그것을 바라고 계십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적절한 것을 바라시는 것을 기대하고 

다만 아버지를 바라보며,

자녀로서의 사랑과 완전한 신뢰를 아버지께 드러내는 것이 

나의 즐거움입니다......



이 딸은, 자신의 병을 걱정하는 나머지,

여러가지 의약을 아버지에게 구하고,

또는 아버지가 어떻게 하여 자기의 혈관을 째는가,

피가 어떻게 흘러나올 것인가 등에 관하여,

헛되이 마음을 산란케 하는 것보다는 

아버지께 대하여 훨씬 강한 사랑을 이로써 입증하고 있지 않는가.」

(「신애론」9편 14 및 15장)


p.80


이 경건한 박사의,

「아무 것도 바라지 않으며, 

아무 것도 구하지 않고 아무것도 거절하지 않는다」

라는 유명한 금언을 모르는 이가 있겠는가.


그는 이 말이 각가지 덕의 실천에 무관계하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지만,

수도원에 있어서의 소임과 직무에 있어서는 

이것을 적용하기를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그는 또한,

질병, 위안, 고뇌, 간난에 있어,

말하자면 그것이 내적(內的)인 것이건, 외적(外的)인 것이건,

지상(地上)의 일체의 사물 및 섭리의 처리에 대하여도 또한,

이 금언을 적용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이 태도를 비할 바 없이 유익한 것으로서, 

깊이 정신에 새겨 두도록 열망하고 있다.」(「대화편」6, 그외 )



어느 날, 누가 이 성 박사에게 관용(寬容)의 동기에서 

「낮은 임무」를 바랄 수 있는지 어떤지를 물었을 때, 

그는 겸손의 이유를 들어, 이에 아니라고 대답하였다.


「나의 딸들이여, 이 원의(原意)는 그 자체로서는 조금도 나쁘지 않다.


그렇지만 그것은 매우 괴상한 것이며,

단지 인간적인 사고방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실제 그대들은 그와 같은 낮은 임무를 바라고서,

거기서 당연히 부딪치게 될 굴욕이나 천대나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과연 있겠는가.

그리고 그런 용기가 언제까지나 계속할 수 있다고 알고 있는가.


그러므로 높고 낮음의 구별 없이 모든 임무에 대한 원의(願意)는 

이것을 하나의 참된 유혹이라고 간주하여야 한다.


왜냐 하면,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순명이 우리에게 명하는 일은 이것을 행하려고 다짐하고 있는 것이

항상 보다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대화편」21및 22)


p.81


요컨대,

천주의 임의의지(任意意志)에 속하고 있는 모든 일에 대해서는, 

그것이 절대적이며,

또한 철회(撤回)할 수 없는 것으로서 나타나지 않는 한 

우리는 원의(願意)를 품고 기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을 섭리의 손에 맡기는 것이야말로, 보다 완전한 길이다.


그렇지만 또한 하나의 시련이 끝나도록 기구해야 할 경우가 있다.

예컨대, 장상(長上)이 그것을 명하는 때가 그것이다.


만일 힘과 용기에 자신을 잃었다고 느낀다면,

그런 때 다음과 같이 기구함으로써 넉넉할 것이다.


「나의 천주여, 이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하소서. 

그렇지 않으시면, 나의 힘을 더으소서.

유혹을 물리쳐 주소서. 

그렇지 않으시면. 이에 쳐 이길 수 있는 은총을 내리소서」라고.


이러한 기도의 양식에 관해서 말한다면,

우리에게 있어 꼭 필요한 영적은혜(靈的恩惠)는 

이를 무조건 기구하여야 한다.


더구나 현세적(現世的)인 은혜에 관해서는 같은 조건을 붙여야 한다.


만사에 초월하여 바라야 할 것은 순경(順境)이나 역경(逆境)을 불문하고,

항상 우리의 경우를 성화(聖化)하면서

「천주의 나라와 그 의덕을 구하는」것이다.

「이에 모든 것은 더음으로 주시리라.」(마태오 6.33)




이 순서를 뒤바꾸어 오직 시련이 끝나는 것만을 구하는 이에게 대하여

「드.라.골롬비에르」신부는, 

다음과 같은 초자연적(超自然的)인 말을 하였다.


「나는 그대들이 기구하는 것도 기구하여 얻으려는 것도, 

헛되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다.


미사의 봉헌을 청하는 것과, 단식의 약속을 하는 것은 

모두 완전한 개선(改善), 인내(忍耐), 세속의 경멸, 피조물로부터의 이탈등을 

천주로부터 받기 위한 것이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 후에,

그대들은 건강의 회복이라든가 사업의 성공이든가를 

기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천주께서는 그 때, 그러한 기도를 기꺼이 들어 주실것이다.


또는 오히려 기구에 앞서 그대들이 바라는 것을 알으시는 이상,

그런 것을 충족시키심으로써 만족하실 것이다」라고. (「기도에 관한 설교」)


p.82


이 교지(敎旨)는 거룩한 영혼들의 실제의 행동과 잘 일치하고 있다.


그러한 영혼들은, 

가끔 하나의 시련이 그치도록 구하지만

더욱 기꺼이 고통을 바라는 방향으로 기울어져 간다.


그리고 

자신의 관대한 마음에만 따를 적에는 이 목적으로 자신을 천주께 바친다.


그러나 겸손의 소리가 희생적 정신의 소리보다도 강하게 들릴 경우에는

이미 아무 것도 기구하지 않고, 섭리의 손에 자신을 맡겨 버린다.


결국 그러한 영혼을 지배(支配)하고 좌우(左右)하는 것은

순명과 천주의 모든 의지에 대한 사랑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영해 예수의 성녀「데레사」는,

오래 동안 고통과 죽음을 환희(歡喜)의 사자(使者)와 같이 부르고 있었는데,

후에도 여전히 그런 것을 사랑해 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이러한 것을 바라지 않고,

자기에게 있어 필요한 것은 오직 사랑 뿐이라고 하였다.


그는 영적유아(靈的乳兒)의 길, 신뢰와 온전한 위탁의 길만을 

오로지 사랑하였다.


「나의 천상정배(天上浄配)는 

순간마다 나의 힘에 견딜 수 있는 고통을 주시고,

이보다 더하게는 주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만일 다음 순간에 있어 나의 고통을 더하게 하신다면,

그와 동시에 힘도 더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나는 너무나도 작은 존재이므로,

주께 더욱 커다란 고통을 원할 수 없읍니다.


나는 죽는 것도 사는 것도 바라지 않읍니다.

주께서 나에게 택할 것을 허용하신다면, 나는 아무것도 택하지 않읍니다.


나는 주께서 바라시는 것만을 바라고,

주께서 행하시는 것만을 사랑하고 있읍니다.」(「자서전」8및12장)


p.83


「젤뜨루다.마리아」동정도 또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천주께 구하지 않았고,

오직 천주를 배반하지 않는 은혜와 사랑 안에 성장하여 더욱 더 조촐하게

사는 은총만을 기원하였다.


「주여, 당신께서 내가 고통을 당하는 것을 바라신다면,

그러면 나 또한 그것을 바라리이다.


당신이 내가 많은 고통을 당하는 것을 바라신다면,

그러면 나 또한 많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바라리이다.


당신이 내가 위로 없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바라신다면,

그러면 나 또한 위로 없이 고통을 당하리이다.


당신이 택하시는 십자가는 모두 내 것이 되리이다.


그러나 만일 나 당신께 배반하는 일이 있아오면

원컨대 그러한 상태로부터 나를 이끌어 내주소서.


내가 만일 당신의 영광이 될 수 있는 자라면,

뜻대로 언제라도 고통을 당하게 하소서.」(「현대의 한 신비자」중에서)




「젬마.갈가니」는 자기봉헌(自己奉獻)의 목마름에 매우 불타고 있었는데,

재화(災禍)와 박해(迫害)와의 홍수의 한 복판에 있어 그 처럼 용감했던 그도,

잠시 동안의 휴식(休息)을 탄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그 내적고통(內的苦痛)중에서 사랑의 마음으로 간청하였다.


「나의 성모여, 예수님은 어디에 가셨읍니까.

아, 주여, 내가 가진 것은 당신 뿐이로소이다.

그럼에도 당신은 나로부터 피하여 가셨도다.」라고.


그러나,

그는 드디어 완전한 위탁으로써 이렇게 말하기에 이르렀다.


「만일 나로부터 당신의 사랑해야 할 현존(現存)을 빼앗으시고,

나에게 순교의 고통을 맛보게 하시는 것이 뜻이라면,

그것이 당신의 만족하시는 것임을 알기만 한다면

그것은 나에게 있어 똑 같은 것이로 소이다.」(「젬마.갈가니」전)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마태오 6.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