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16 p.87-91 제 1 편 제 8장 위탁(委託)에 있어서의 노력(努力) ②

은가루리나 2018. 1. 15. 14:15


옴니아 등급변경▼ 조회 87  추천 0  2014.09.15. 05:47


제1편, 거룩한 위탁의 본질


제1장 최고의 규범으로서의 천주의 의지

제2장 천주의 명시의지와 임의의지

제3장 천주의 명시의지에 대한 순명

제4장 임의의지에 대한 적합

제5장 거룩한 의탁의 개념

제6장 위탁과 현덕

제7장 위탁에 있어서의 願望과 기도

제8장 위탁에 있어서의 노력

제9장 위탁에 있어서의 고통감

제10장 위탁과 희생의 서원



p.87



제 1 편 거룩한 위탁의 본질(本質) 


제 8장 탁(委託)에 있어서의 노력(努力) ② 





4.


천주의 명시의지 (明示意志)

결코 그 때문에 무시(無視)되어서는 안된다.


예외(例外)나 정당한 면제(免除) 이외에는 

어디까지나 그것을 준수하여야 한다.


천주의 명시의지(明示意志)가 우리에게 부과하는 의무야 말로,

우리의 영적 생활(靈的生活)의 올(가로줄)이며,

거룩한 위탁이 

그 위에 우아스러운 무늬와 풍부함과 다양성(多樣性)을 나타내는 바탕이다.


그리고,

이 사랑과 효심(孝心)에 충만한 적합(適合)과는 

모든 덕의 실천에 대한 자발심(自發心)까지도 방해하는 것은 아니다.


회칙(會則)과 섭리와는 이것을 위하여 날마다 무수한 기회를 제공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 밖에도 무수한 기회를 스스로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특히, 천주와의 밀접한 일치의 생활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선덕의 단계를 오르는데 이 유력한 수단을 멸시 할정도로 

우리는 충분히 풍부하지 못하다.


의무로서 행하여야 할 일의 보수가 얼마나 풍부하드라도 

그 때문에 

의무 이상으로 생기는 선의(善意)가 가져다 주는 탁월한 증가(增加)를 

업신 여겨서는 안된다.


거기에 천주께서는 모든 것을 행하시고,

영혼은 단지 그것을 받는다는 것에 머문다는 것과 같은 

순연(純然)한 수동적 상태(受動的狀態)와는 훨씬 다른 것이다.


p.88


수동적 상태는 

각가지 정도에 있어, 신비적 길에 나타난다는 것, 

그리고 그런 경우에 

우리는 천주의 활동에 협력하여

이것을 방해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된다는 것에 관해서는 

아래에 말하겠다.


더구나, 이러한 신비적 길에 있어서까지도 

순연한 수동적인 상태는 드문 예외인 것이다.


만일 우리가 천주의 계획의 처리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많은 영혼에 관해서의 경험이 있다면

위탁은 

무위(無爲)한 대기(待機)도, 현덕(賢德)의 망각도, 태만한 무기력(無氣力)도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혼은 위탁에 있어 

천주의 명시의지(明示意志)에 속하는 모든 것에 관해서는,

그 전활동력(全活動力)을 보유하고 


임의의지(任意意志)에 의한 사건에 관해서는

예견할 수 있는 것은 예견하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일체 이것을 행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영혼은 

스스로 하는 배려에 있어 천주의 의지에 적합하며,

은총의 활동에 순응하고 

섭리에 대한 예속(隸屬)과 복종안에서 행동한다.



성공을 부여하시는 것도, 이것을 거절하시는 것도,

온전히 천주의 자유(自由)시므로,

영혼은 그 정하시는 모든 것을 사랑으로써 미리 받아들여,

그리고 이 일에 의해서,

사건의 전후 역시 환희와 평화안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질서있는 노력을 멸시하고, 자발적 정신을 감소시키며,

영혼의 거룩한 정력을 약화시키는 

그 정관주의자(靜觀主義者)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태만한 수동적 상태는 배척되어야 한다.

(「도스다」와 신부 저「천주와의 일치」4편 10장)




p.89


정관주의자들은 

성「프란치스꼬.살레시오」의 교지(敎旨)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자칭하고 있지만,

그것은 커다란 오류(誤謬)이 었다.


그러기 위하여 그들은 

이 경건한 박사의 저서의 몇 개소에서,

혹은 몇 마디, 혹은 몇 귀절을 전후(前後)의 관계에서 분리하여

그 의미를 바꿀 수 밖에 없었다.



여기에는 성 박사의 교지(敎旨)의 전부를 인용할 수는 없다.


혹은 양친의 품에 안겨, 

혹은 스스로 그 작은 발을 옮기며 성전에 참여하시는 성모에게 

우리를 비교하여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이 천주의 인자하심은 우리의 길에 우리를 이끄시지만,

우리도 또한 자신의 작은 발을 옮겨놓는 것,

즉 우리 편에서는 은총에 의해서 할 수 있는 일은, 

이것을 하기를 바라신다고」라고.

(「성모의 봉헌에 관한 제 1 설교」2)


마치 어머니가 유아(幼兒)를 걷게 하려고 땅위에 세울 때,

유아는 자신이 걷는 것처럼,

또한 자신을 안아 올리려 할 적에는 그 하는대로 되는 것처럼


천주의 임의의지(任意意志)를 사랑하는 영혼은,

옮겨지는대로 맡겨 두어도, 

천주의 명시의지(明示意志)에 속하는 모든 일을

커다란 주의로써 행하면서 또한 걷는 것이다.(「대화편」2)


p.90


이 거룩한 위탁에 충만한 성인은 마찬가지로 위탁의 정신에 풍부했던

「샨딸」의 성녀「요안나」에게 다음과 같이 써 보내고 있다.


「성모께서는 다만 겸손에 의해서 깊게 되시고,

소박(素朴)하심으로써 비천하게 되시고,

사랑으로써 관대함만을 사랑하시어 

기꺼이 말구유의 곁, 십자가의 밑에 머물러 계셨다.


우리도 또한 이 경건하고 작은 덕의 낮은 골짜기를 걷자.

우리는 거기에 

모든 애정 안에 가장 빛나고 있는 애덕, 순결의 백합화, 

제욕(制慾)의 제비꽃을 발견할 것이다.


더우기 내가 애호하는 것은 

마음의 유화(柔和), 정신적 빈곤, 생활의 소박,

이 세가지의 작은 덕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것은 

다만 유화(柔和)한 예수님을 받아 짊어지기 위해서이며,

그것은 혀로써 예수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팔로서 선업(善業)을 행하며,

어깨로 

그 성지(聖旨)에 의한 멍에와 마음의 건조(乾燥)함과, 불모(不毛)를 

참아 견디는데 있다(「서간」398 및 401)라고.


이것은 과연 수동적(受動的)인 게으른 태도이겠는가.

아니, 오히려 그것은 영적활동(靈的活動)의 충실(充實)이 아니겠는가.




「나는 예수님 곁에 오르기 위한 하나의 『엘리베이터』가 필요합니다.

왜냐 하면,

나는 완덕의 험악한 단계를 올라가기에는 너무나도 작기 때문입니다.

..... 하늘까지 나를 끌어올릴 『엘리베이터』.....

예수님이여, 그것은 당신의 팔이 옵니다(「자서전」8,9장)


라고 영해 예수의 성「데레사」는 말하였다.



그렇다고,

정관주의자(靜觀主義者)등은 서둘러 개가(凱歌)를 올려서는 안된다.

성녀가 말한 것은 사랑과 신뢰와, 각별히 겸손의 말이다.


왜냐하면,

소화(小花)「데레사」성녀는,

주께서 그를 팔로 안으시어 옮기실 때까지는, 

수동적 나태(受動的懶怠)안에

순간이나마 머물러 있기를 기도(企圖)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리어 그는 커다란 활동력(活動力)으로써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덧붙여 말하고 있다.


「그러기에 나는 크게 될 필요가 없사옵니다.

어디까지나 작은 이로서 머물러 있어야 하나이다.

그리고 더욱 더 작은 이가 되어야 하나이다.」



실제 성녀는 은총에 의해서 

모든 은혜 안에 자신을 무시하는 겸손과,

유아(幼兒)와 같은 순명과, 

시련에 있어서의 놀라운 위탁과,

평화의 천사로서의 자비와, 

무엇보다도 천주께 대한 비할 바 없는 사랑

자신의 것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랑은 

「만사를 선용(善用)할 줄 아는」사랑이며,


그 겸손으로 아무 것도 위대한 것은 할 수 없다고 믿으면서도

「하나의 희생, 하나의 시선(視線), 하나의 말도 놓치지 않고,

가장 사소한 행위까지도 이용하며, 

더구나 

사랑으로써 그러한 것을 행하고,

사랑으로써 고통을 당하며, 

사랑으로써 기뻐하기까지 하는」사랑이다.(「자서전」8, 9장)


p.91


참으로 거룩한 영혼들은 모두가,

천주께서 그들을 지탱하시고 그들이 행하여야 할 일을 하시기를 

기다리지 않고

도리어 자진하여 훌륭하게 그 영적활동(靈的活動)을 증가하고

어떤 일이라도 선용하는 수단을 강구하는 이라는 것을 

덧붙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예컨대 

삼위일체의「엘리사벳」동정과 「젤뜨루다.마리아」동정의 생애의 보기는 

가장 명백히 이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