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17 p.92-95 제 1 편 제 9장 위탁(委託)에 있어서의 고통감(苦痛感) ①

은가루리나 2018. 1. 21. 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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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편, 거룩한 위탁의 본질


제1장 최고의 규범으로서의 천주의 의지

제2장 천주의 명시의지와 임의의지

제3장 천주의 명시의지에 대한 순명

제4장 임의의지에 대한 적합

제5장 거룩한 의탁의 개념

제6장 위탁과 현덕

제7장 위탁에 있어서의 願望과 기도

제8장 위탁에 있어서의 노력

제9장 위탁에 있어서의 고통감

제10장 위탁과 희생의 서원



p.92



제 1 편 거룩한 위탁의 본질(本質) 


제 9장 탁(委託)에 있어서의 고통감(苦痛感) 




단순한 인종(忍從)에 있어서도, 또한 완전한 위탁에 있어서까지도,

다소의 고통감(苦痛感)이 반드시 존재한다.


실제, 우리의 유기적 능력(有機的能力)이 

감각적 고통(感覺的苦痛)의 인상(印象)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영혼의 상위능력(上位能力)이라도,

바라고 바라지 않음을 불구하고 피로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타락의 상태에 있는 우리는 

금단(禁斷)의 나무의 열매에는 마음이 이끌리고,

어려운 의무에는 싫증을 느끼며,

그래서 끊임 없이 치열한 싸움에 마음이 찢어지는 것이다.


천주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의 쾌락을 희생할 것이나,

또는 사랑을 위하여 고통을 참아 견딜 것을 요구하실 때에는,

우리가 영혼의 상위(上位)에 있어 아무리 기꺼이 천주의 뜻에 따르려고 하지만

영혼의 하위(下位)에 있어서는,

아직도 희생의 고통을 느끼는 적도 있으리라.



이것은 실제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천주께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고 지상(地上)의 사물(事物)로부터 이탈시켜,

은총에 풍부케 하시려고 계획하시기 때문이다.


천주께서는 특히, 굴욕으로써 교만의 병을 고치시고,

고난과 궁핍으로써 관능(官能)의 만족을 없애시기를 바라신다.


그리고 병근(病根)이 깊이 자리를 잡고있는 만큼

우리는 오래 그리고 자주 그 치료에 복종하여야 한다.


p.93


물론, 은총의 도유(塗油)와 수득(修得)한 덕이 있다.

전자는 고통을 완화(緩和)하고, 후자는 의지를 견고케 한다.


성「아우구스띠누스」가 이것을,

「사랑이 있는 곳에는 고통이 없고, 

비록 고통이 있을지라도 사람은 이를 사랑한다」

(「과부의 신분의 선에 관하여」 21장)라고 언명한 것은 참으로 적절하다.


그러므로 의지의 가장 거룩한 상태에 있어서도,

고통은 여전히 감각 안에 남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풍부한 위안 안에 심취(心醉)되고,

사랑의 힘에 황홀(恍惚)하게 되며,

그리고 고통의 감정이 기쁨 안에 자취를 감춰버리는 수가 있다.


또한 때로는 이에 반하여

참된 사랑의 증거인 관대함이 의지의 첨단(尖端)에서 물러가고,

희열(喜悅)은 그 자취를 감추며, 평화는 사라지고 

영혼은 공포, 권태, 혐오(嫌惡)등의 정에 사로잡혀,

거의 죽을 것만 같은 우민(優憫)에 잠기는 것 같은 경우가 있다.


또는,

때때로, 허다한 가장 격심한 시련을

감탄할만한 평온(平穩)가운데 정복(征服)한 후에까지도

사소한 일 때문에 고민하는 경우가 있다.



「컵」이 충만했을 때 그것을 넘치게 하려면,

한 방울의 물로 충분하다.


천주께서는 자주 커다란 승리(勝利)후에 

우리는 겸손에 머물게 하시려는 뜻으로,

하찮은 싸움에 있어, 우리의 나약함을 폭로시키신다.


여하튼, 

천주의 뜻에 대한 어린이와 같은 동의(同意)는 덕의 열매이며,

무감각(無感覺)의 것이 아니다.

지상의 생활은 성인에게 있어서도 영속(永續)하는 낙원(樂圓)은 아니다.




그러므로 「즈네브」의 성인 주교는 그 딸들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느낀다든가, 느끼지 않는다든가, 그런 것을 염두에 두어서는 안된다.

무관심이나 위탁에 관해서는,

우리는 결코 천주의 의지에 거스리는 것 같은 생각을 갖지 않는다든가,

또는 

우리의 본성은 천주의 임의의지에 의해서 생기는 일에 

반항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알아 들어서는 안된다.


왜냐 하면, 그러한 일은 자주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위탁에 필요한 덕이 머무는 것은 영혼의 상위(上位)에 있어서이며, 

영혼의 하위(下位)는 보통 조금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영혼의 하위에는 의지를 사용할 필요는 없고,

오히려 그 바라는 것을 무시하고, 

비록 아무리 불쾌스럽게 느껴지드라도 

천주의 의지를 안고 이에 일치하여야 한다.」


p.94


또한 성 박사는,

「인간이라는 것을 참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의 공상적 무감각(空想的無感覺)은

일종의 미몽(迷夢)이다.

그러나 이 영혼의 하위에 공납(貢納)한 후에는 

상위에 대한 의무를 수행하여야 한다.


거기에는 

우리를 고뇌에 있어 더구나 고뇌에 의하여 위로해 주는 신앙의 정신이 

왕좌(王座)를 차지하고 있다」

(「대화편」2, 「서간」448 ) 라고 항상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성인은 자신이 그 말대로 행하였다.


「나는 지금 이 축복해야 할 순회방문(巡回訪問)에 나서려 하고 있는데, 

이미 들이나 밭의 구석구석에 각가지 십자가가 서 있는 것이 눈에 보인다.

내 육신은 그것에 전율(戰慄)하고 있지만, 내마음은 그것을 예배하고 있다.

.....아, 장하다 대소 각가지 십자가여!

나는 너희의 그림자에도 알맞지 않으나 너희의 발에 친구 하고 있노라 」고 

서간에서 말하고 있다.(「서간」399 )



어머니와 누이의 죽음을 당하여,


「나는 이 이별의 커다란 타격을 느꼈다.

그것은 혹심한 것이었지만, 그러나 평온(平穩)함을 잃지는 않았다.

천주의 임의의지(任意意志)는 항상 거룩하고 

그 명령은 참으로 사랑스러운 것이다」라고 그는 써 보냈다. (동432 및 458)


성인은 항상 천주의 섭리에 의지하고 있었지만, 

커다란 시련에 있어 빛난 승리를 거둔 바로 그도,

그 후에 사소한 일 때문에 다소 마음이 산란하여

두 시간 동안이나 잠을 이루지 못한 적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나약함을 스스로 비웃고,

그것이 어린이의 불안(不安)과 같은 것임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것에 도피할 방법을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내가 그처럼 커다란 공격에 동요하지 않은 것은 

내 힘에 의한 것이 아니고, 

오직 나의 구세주의 은총에 의한 것임을

천주께서는 나에게 깨닫게 하시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셨다. (동431)


p.95


「샹딸」의 성녀 「요안나」는,

정신의 힘과 거룩한 위탁에 뛰어나 있었음에게 불구하고 

그의 지도자 성「프란치스꼬.살레시오」는

그를 내적 고통에 있어 끊임 없이 위로하고 고무해 주어야만 했다.


성녀가 가족의 죽음을 당하여 드러낸 비통(悲痛)은,

보는 사람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였다.


또한 장녀(長女)를 잃었을 때에 끝까지 간호했던 용기는

실로 거룩하게 우러러 볼만한 것이었는데,

드디어 정신을 잃고 깨어난 후에도, 

오랜동안 전연 상심(喪心)한 것처럼 되어 있었다..



성「프란치스꼬.살레시오」의 죽음에 직면하였을 적에는

이튿날까지도 그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그러나, 

「만일 성녀는 그 눈물이 천주의 뜻에 맞지 않는 것임을 알았더라면,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 성녀는 눈물을 거두게 하기 위하여

거의 병에 걸릴 정도로 몹시 자제(自制)하지 않으면 안되었지만,

순명으로써 눈물이 흐르는대로 맡겨 두었던 것이다.


성녀는 말한다.

「아, 얼마나 큰 타격입니까!

그러나 나에게 그것을 주신것은 부드러운 자부(慈父)의 손이십니다.

나는 그 손에 친구하고, 진심으로 그것을 애무하며,

그 가장 거룩한 의지 밑에 온 마음을 굴복시키고,

전력을 다하여 흠숭과 존경을 바치리다」라고.

(「샹딸의 성 요안나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