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18 p.95-100 제 1 편 제 9장 위탁(委託)에 있어서의 고통감(苦痛感) ②

은가루리나 2018. 1. 26. 23:31


omnia 등급변경▼ 조회 278  추천 0  2014.10.14. 01:13



제1편, 거룩한 위탁의 본질


제1장 최고의 규범으로서의 천주의 의지

제2장 천주의 명시의지와 임의의지

제3장 천주의 명시의지에 대한 순명

제4장 임의의지에 대한 적합

제5장 거룩한 의탁의 개념

제6장 위탁과 현덕

제7장 위탁에 있어서의 願望과 기도

제8장 위탁에 있어서의 노력

제9장 위탁에 있어서의 고통감

제10장 위탁과 희생의 서원



p.95



제 1 편 거룩한 위탁의 본질(本質) 


제 9장 탁(委託)에 있어서의 고통감(苦痛感) 




그와 같은 보기는 허다히 열거할 수 있지만,

주의 종인 성인들의 예는 제쳐놓고,
주 자신의 묘법을 살펴보자.


p.96

주께서 세상에 들어오시자 마자, 
온 인류의 희생으로서 당신자신을 성부께 바치셨다.

그 생애는 십자가와 순교의 연속이었다.

성심(聖心)의 애정을 드러내시기 위하여 
간신히 만족할 정도의 눈물을 흘리셨고,
죄인의 마음 안에 유익한 두려움, 경건한 생각을 일으키시기 위하여 
겨우 족할만한 정도의 노여움을 드러내셨다.

그것 이외에는 언제나 감탄할만한 평온한 태도를 간직하시고,
세상을 정화(凈化)해야 할 피의 세례(洗禮)를 
열정적인 염원(念願)으로 바라셨다.

그러나 때가 이르자,
천주의 직관(直觀)에서 흘러나오는 완전한 행복의 희열(喜悅)을
영혼의 밑바닥에 까지 물리치시고,
자진하여 자신의 모든 능력, 
그 육체까지도 가장 두려운 최종적인 고뇌에 넘기셨다.

즉 자유로운 선택에 의하여
공포(恐怖)와 우민(憂悶)과 혐오(嫌惡)에 자신을 맡겨 버리시고,
그 영혼은 죽을 정도의 괴로움에 잠기셨던 것이다.


주께서는 
우리 죄악의 산더미, 성부께 대한 불의(不義)한 경모(輕㑄), 
지옥의 심연(深淵)에까지 전락(轉落)해 가는 영혼,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책벌의 고통과 배은망덕등을 
모두 똑똑하게 보시고 
끝 없는 고뇌에 대해(大海)에 던져셨다.

주께서는 세번 거듭하여 성부의 동정을 애원하시어,
「만일 할만 하시면 이 잔을 내게서 멀리 하소서」 라고 기도하셨지만,
한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당신을 격려하는 것도 승낙하셨다.

피땀이 그 전신을 흐르는 가운데서 주께서는 
「성부여, 내 원의대로 말으시고 오직 네 의향대로 되어지이다」라고,
더욱 오래 기구하실 뿐이었다.

이 전대미문(前代未聞)의 광경을 앞에 보고서,
비겁한 신자는 혼란에 빠져 깨달을 수 없겠지만,
그러나 
참된 신자는 주의 성지(聖旨)에 흠숭하고 감탄하며, 감사할 따름이다.




실제, 주께서는 인류의 구세주, 위로주, 또는 스승으로서 
사람들의 영혼에 있어 이보다 더 유익한 일을 할 수 있으셨겠는가.

(성「벨라도」「성 안드레아에 관해서」의 제1 설교에 있어
이 교지(敎旨)의 뜻 깊은 주석을 하고 있다)


p.97

구세주로서,
주께서 죄를 제외한 다른 것은,
우리의 모든 나약함과, 초상의 굴욕까지도 떠 맡으시는 것은 적당하였다.

그런데, 강하신 천주에게 있어, 
그러한 나약함의 외모에 해당되는 굴욕은 그 밖에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주께서는 이 모습을 자진하여 택하신 것이다.


위로주로서,
주께서는 우리의 모든 고뇌를 알으신 것은 알맞는 일이었다.

만일 주께서 공포, 혐오(嫌惡)의 정을 하등 느끼지 않으신 것처럼 보였다면,
우리는 감히 자신의 비참함을 
주의 어전에 피력(披瀝)할 수 있었겠는가.


마치 지상(地上)의 아버지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유아(㓜兒)가 되는 것과 같이,
주께서도 또한 자진하여 우리와 마찬가지로 되신 것이다.

그 겸손에 충만한 관대한 모습은 
우리의 마음에 무한한 신뢰와 용기를 일으키시어,
우리의 상처에 기름을 바르시는 것이지만,
그와 동시에, 
주께서 자진하여 받으신 극도의 굴욕과 고뇌와는 관대한 마음을 뚫고,
그리고 둘도 없는 벗이신 주께 대하여
그 고난당하심에 고난으로써 응하려는 원의(願意) 
- 말하자면, 주께 대한 벅찬 요망을 그 마음에 일어나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삼위일체의 「엘리사벳」동정은 말하고 있다.

「어느 날 밤, 나의 고통은 견딜 수 없을만큼 격심하게 되어,
나는 자신의 본성(本性)에 지배되는 것을 느꼈읍니다.

나는 그 때, 
고통을 겪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주를 위로해 드리기 위하여
이 고통을 바쳤읍니다.
그러자, 나는 갑자기 강하게 되는 것을 느꼈읍니다.

나는 일생 동안 항상 그러하였읍니다.
내리닥치는 모든 크고 작은 시련에 있어 
나는 항상 주께서 같은 고통을 당하심을 바라보고 
나의 고통을 주의 고통안에  
또한 나 자신을 주안에 소멸되도록 하였읍니다」
라고. (「삼위일체」의 「엘리사벳」 동정 전 17장)


p.98

영해예수의 성녀 「데레사」도 또한 말하고 있다.

「천주신 구세주께서, 
이세상의 가장 사랑하는 것을 모두 희생하시기를 요구하실 적에는,
특별한 은총 없이는, 저 고민의 동산에 있어서의 주와 같이,

『내 성부여, 만일 할만하시면 이 잔을 내게서 멀리 하소서』
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읍니다.

그러나 우리는 
『내 원의대로 말으시고 오직 네 원의대로 하소서』
라고, 곧 덧붙이십시다.

강한 천주신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약점을 알으시고
전에는 그처럼 열망하신 고통의 잔을 목전에 보셨을 적에는,
그래도 공포에 사로잡히신 것을 생각한다면, 
얼마나 위로가 되겠읍니까」라고. 
(영해 예수의 성녀「데레사」「두 선교사에의 제 1 서간」에서)



「젤뜨루다.마리아」동정도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에게는 매우 오래 동안의 고통이 있었읍니다.
이제부터도 있을 것입니다.
나는 그러한 때에, 
『아버지시어, 이 무서운 때에서 나를 도우소서』라고 기도하면서,
즉시 이 일시적인 공포를 극복하고,
『그러나 나 이 때를 위하여 세상에 왔느니라』고 말씀하신 
주의 늠름하신 태도를 본받기로 노력할 것입니다.」
(「현대의 한 신비자」 p. 215)




스승으로서
주께서는 여기서 우리에게 세가지 귀중한 교훈을 주신다.


1.
「내 원의대로 말으시고 오직 네 원의대로 하소서」라는
단호한 의지가 계속되는 이상 
고통의 감정, 공포, 권태, 혐오(嫌惡)등의 정을 느껴도,
그것은 죄가 아니며, 불완전(不完全)함도 아니다.

「겟세마니」동산에 있어서의 주의 완전하심과 위대하심은 
「다볼」산에 있어서의,
또 실은 성부의 오른 편에 앉아 계시는 그것에 비하여 
아무런 손색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않는다는 것은 오히려 일종의 모독(冒瀆)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영혼이 모든 감각적 도움을 잃고,
곤란과 반대와의 한 복판에 있으면서
그처럼 확고하게 천주의 의지에 충실히 머물러 있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신애론」9편 3장)



2.
다음에 또한 상처입은 어린이가 어머니에게 몸을 기대고,
그 상처와 고통을 어머니에게 드러내는 것처럼,
사랑에 충만한 순명으로써 천주께 고통을 호소하는 것은
반드시 죄도 아니며 불완전함도 아니다.

「사랑은 고통을 호소하는 것도,
『욥』이나 『예레미아』의 모든 비탄(悲嘆)을 입에 담는 것도 
분명히 허용하시지만,
그러나 그것은 
항상 거룩한 동의(同意)가 영혼의 깊은 곳에 정신의 최고점에 있음을 
조건으로 하고 있다.」(동서 및「서간」391)

이렇게 「즈네브」의 유화한 주교는 말하고 있다.


성인은 또한 다른 곳에서
「우리가 시종 비탄에 잠겨, 마치 동정해 주는 이가 모자라는 것 같이
만나는 사람마다 호소하거나, 세세하게 고통을 개탄하는 것」을 
비난하고 있다. (「대화편」21)



성「알퐁소」가 말하는 것도 이와 다른 것이 없다.

즉 병고 가운데 있으면서도 조금도 그 고통을 한탄하지 않는 것은,
물론 보다 완전한 일이다.

그러나, 
병으로 혹심하게 고통을 당할 때에는, 
그것을 동료에게 말하거나,
또는 그것에서 구원되도록 주께 탄원하는 것도 결코 죄가 아니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다만 커다란 고통에 관해서다.

왜냐 하면, 이에 반하여,
사소한 고통이나 극히 작은 부자유에 관하여 일일이 불평을 말한다는 것은
매우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이다」(「적합」5절 3)라고.


그러므로, 이러한 성 박사등은 
지나치지 않은 그리고 복종을 수반하고 있는 탄식(嘆息)을
올바른 것으로 인정하고 
다만 과도에 흐르는 것을 비난하고 있다.


p.100

3.
커다란 시련에 있어,
천주께 「만일 할만하시면 이 잔을 내게서 멀리 하소서」라고 기구하며
그리고 어느 정도까지 집요(執拗)하게 탄원하는 것까지도 죄가 아니며,
불안전함도 아니다.

왜냐 하면, 주 자신께서도 그와 같이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대가 성부의 위안을 구한 후에 만일 그것이 성의(聖意)가 아님을 알았다면,
십자가 상에서 내려올 필요가 없는 것처럼 
그대의 구원의 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용기를 북돋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겟세마니』동산에 있어서의 주를 바라보라.

일단 성부께 위로를 간청하시고,
그것이 성의(聖意)가 아님을 알으신 후에는,
이미 그것을 생각하지 않으시고 
초조하지 않으시고, 구하지 않으시고,
또한 위안을 바라지 않으시면서,
굳건히 인류구제(人類救濟)의 사업을 성취하셨다.」(「서간」392)

이것은 
성「프란치스꼬.살레시오」가 「샹딸」의 성녀 「요안나」에게 준 지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