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19 p.101-104 제 1 편 제 10장 위탁(委卓)과 희생의 서원(誓願) ①

은가루리나 2018. 1. 30. 13:41


omnia 등급변경▼  조회 118  추천 0  2014.10.27. 06:18



제1편, 거룩한 위탁의 본질


제1장 최고의 규범으로서의 천주의 의지

제2장 천주의 명시의지와 임의의지

제3장 천주의 명시의지에 대한 순명

제4장 임의의지에 대한 적합

제5장 거룩한 의탁의 개념

제6장 위탁과 현덕

제7장 위탁에 있어서의 願望과 기도

제8장 위탁에 있어서의 노력

제9장 위탁에 있어서의 고통감

제10장 위탁과 희생의 서원



p.101



제 1 편 거룩한 위탁의 본질(本質) 


제 10 장 위탁(委卓)과 희생의 서원(誓願) 




이 양자를 비교함에 앞서,

거룩한 위탁에 관한 관념을 간단히 정리해 둘 필요가 있다.


거룩한 위탁은 천주의 임의의지(任意意志)에의 적합(適合)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사랑에서 나온, 그리고 고도(高度)에 달한 적합이다.


그것은 

영혼의 무감각(無感覺)에 의해서가 아니라 덕에 의해서, 

천주 또는 그 숭경할 의지가 아닌 모든 것에 대하여

거룩한 무관심을 간직하고 있는 상태에 있다.


천주의 임의의지(任意意志)를 나타내는 

사건의 발생전에 있어서는

영혼은 천주의 명시의지를 충실히 수행하면서 

단순 및 일반적 대기(一般的待機)안에 머물러 있다.



영혼은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것에 대하여는 

현덕(賢德)에 따라서 행동하지만,

이에 반하여 자신에게가 아니라, 

오직 천주의 명시의지에 달려 있는 일에 관해서는,

비록 정당히 바라고 기구할 수 있는 경우라도 

아직 일반적으로는 모든 것을 성의(聖意)대로 바라고 처리하시는 배려를 

하늘의 성부께 맡긴다.


영혼은 그렇게까지 천주를 신뢰하고,

그 의지만을 행할 것을 뜨겁게 바라고 있다.


천주의 뜻이 한번 사건에 의해서 명백히 되자 마자,

즉시 사랑으로써 이에 동의(同意)하지만,

그것은 남으로부터 움직여지는 기계처럼 되는 것이 아니고,

이성(理性)과 의지(意志)와의 능력을 모두 활용(活用)시켜서, 

천주의 임의의지에 적합하고 일치하여

거기에서 될 수 있는대로의 이익을 이끌어 내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사랑과 위탁과의 진실성은 

영혼이 고통을 느끼는 것을 결코 방해하는 것은 아니지만,

마구 그것에 좌우됨이 없이 

오로지 천주의 의지를 최선을 다하여 행함으로써 만족하게 여긴다.


이상은 성「프란치꼬.살레시오」에 따라 말해온 

거룩한 위탁의 일반개념(一般槪念)이다.



p.102


이제 그것을 다음과 같은 기도의 형식으로 나타낼 수도 있다.


「나의 천주시여,

나 지상(地上)에 있어,

당신과 당신의 지극히 거룩하신 의지만을 우러러 받드나이다.


나 당신께 대한 사랑과 모든 덕에 성장하기를 절실히 바라고 있으므로

당신께서 명시(明示)하시는 의지는 

이것을 모두 충실히 수행할 것을 바라나이다.


그러하오나 

나에게 의하지 아니하고 당신에게 의하는 모든 일에 관해서는

신뢰로써 당신 손에 나를 맡기오며,

단순하고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써 

당신이 바라시는 모든 것을 기다리나이다.


나 아무 것도 바라지 않으오며,

아무것도 구하지 않사옵고,

아무것도 거절하지 않나이다.


나 고난을 두리지 않겠나이다.

대개 당신은 나의 나약함에 따라 그것을 주시기 때문이옵니다.


나의 유일한 희망은 

주께서 바라시는대로 나를 이끄시는데 맡기오니,

또한 사랑으로써 당신의 뜻에 동의하는 것이옵니다.」



이 위탁을 위와 같이 알아 듣는다면,

어떠한 위험도 외람됨도 거기에 감추어 있지 않음은 분명하다.


그것은 단지 

사랑과 신뢰에 충만한 어린이와 같은 복종에 다른 것이 아니며,

이것을 하나의 이상(理想)으로서

이미 선덕(善德)에 나아가고 있는 모든 영혼에게 종용(慫慂)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단순한 대기(待機)의 태도는

아마 활동과 봉사직 정신에 열중하는 현대의 사회에 있어서는

다소 수동적으로 흐를 염려가 있지 않겠는가.



여하튼,

현대에는 위탁에 있어 더욱더 멀리까지 나가는 습관이 퍼지고 있다.


만사(萬事)를 안배하시는 배려를 천주께 맡기지 않고

성의(聖意)대로 택하실 것을 조용히 기다리지 않고서

도리어 사람은 스스로 앞서 나아가며,

자신을 꺼내어 자신을 바치고, 자신을 천주께 넘긴다.


어떤 이는 

위탁에는 이러한 비약이 반드시 수반하고 있어야 한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자기봉헌(自己奉獻)이 무엇인지를

더욱 깊이  검토할 필요가 있다.


p.103


지금 어떤 영혼이 고통을 천주께 구하지 않고,

단지 은총의 도우심에 의하여,

천주께서 바라시는 모든 것을 받아들일 결심을 하고

흔연히 이에 향하는 것을 천주께 증거하려 한다면,

그것은 이미 말한 위탁과 거의 같은 것이다.


래서 이것을 

겸손을 잃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덕에 진보한 모든 영혼에게 권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혼이 천주를 향하여,

「주여, 나에게 고통을 주시는 것을 염려하지 마옵소서.

나 그것을 바라옵고 당신께 그것을 구하려 하나이다.

이 원을 채워주시오면,

주께서는 나의 은밀한 염원을 채워 주심이로소이다」라고 기구한다면,


자기봉헌은,

아직 희생으로서의 봉헌은 아닐망정, 비교적 그것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성「프란치스꼬.살레시오」가 말하는 위탁은 아니다.


그러한 봉헌은,

후에 희생이 되는 것에 관하여 말할 때에 명백히 되는 것과 같이

다만 시련에 부딪쳐 충분히 충실을 드러낸 영혼에게만,

더구나 조심스럽게 허락할 수 있는 것인데,

모든 사람에게 이것을 권장할 수는 없다.


실제 그다지 덕에 견고하지도 않는데,

지나치게 자기에게 신뢰하고 있는 영혼에게는 

그러한 고원(高遠)한 원의를 품기에 앞서,

마땅히 천주의 명시의지(明示意志)를 충분히 실천하고

나날의 십자가를 거룩하게 하여야 한다는 것을 

이해시켜야 할 것이다.



성「베드루」는 자진하여 

흠숭하올 주와 함께 수난하고 죽기까지 하겠다고 말하였다.

그 사랑과 진실함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지만,

그래도 참월(僭越)이었다.

결과는 그것을 너무나도 명백히 나타내고 있다.



「위탁」을 그렇게 설명하는 저자는 

「보수에」에의 저작 가운데 있는「천주에의 위탁송(委託誦)」에 

바탕을 두고 있다.


나에게는 

그 특징은 「묵상의 여러 상태」에 있어서의 그것과

꼭 같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여하튼 

성「프란치스꼬.살레시오」가 해석하는 것과 같은 위탁은 아니고

일종의 봉헌이며, 

그리고 비교적 강조된 봉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