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21 p.113-118 제 2편 거룩한 위탁의 기초 / 제 I장 이탈 ①

은가루리나 2018. 3. 30. 17:15


제2편 거룩한 위탁과 기초


제1장 이탈 

제2장 섭리에 대한 신앙

제3장 섭리에 대한 신뢰

제4장 신뢰 계속 - 難問에 대한 해답

제5장 천주께 대한 사랑

제6장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제7장 聖主에 대한 모범



p.113



제二편 거룩한 위탁(委託)의 기초(基礎)




거룩한 위탁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사랑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이미 단지 인종(忍從)과 같은 

천주의 의지에 대한 적합(適合)의 하나의 낮은 단계는 아니고、

사랑과 신뢰(信賴) 와 동심(童心}으로써 하는 위탁이며、

천주의 의지(意志)안에 우리의 의지를 온전히 융합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천주와 인간과의 의지를 이처럼 밀접하게 일치시키는 것이 

사랑의 특성이다。 


적합(適合)의 이 단계는 순수한 사랑의 매우 탁월한 활동이기도 하며、

일반적으로는 

오직 순수한 사랑에 사는 진보된 영혼에게서만 발견되는 것이다。

(본서 제二 편 五장 참조)


그렇지만、이 단계는 완전한 이탈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며、

또한 사랑은 

여기에 섭리에 대한 신앙과 신뢰에 각별히 의뢰하지 않으면 안되므로、

우선 최초로 이탈(離脫J과 신앙(信仰)과 신뢰(信賴)에 관해서 말하고、

이어 거룩한 위탁의 본질적 원리(本質的原理) 

즉 위탁의 근원인 사랑에 관하여 말하고서 이 편을 마치도록 하겠다。




p.115



제二편 거룩한 위탁(委託)의 기초(基礎)


제 I장 이탈(離脫)  




완전한 적합(適合)에 있어 필요한 예비적조건(豫備的條件)은 

완전한 이탈이다。


왜냐 하면、 

만일 우리의 의지가 무엇인가에 강하게 애착하여、

마치 풀이나 못으로 굳게 고착(固着)되어 있는 상태에 있다면、

그 의지를 분리시켜 천주의 의지에 일치시켜야 할 적에는、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의지는 아무리 적게 애착하고 있어도 저항(抵抗)할 것이다. 


거기에 피하기 어려운 알력(軋轢)과 분열(分裂)이 야기되어、

그래서 우리는 신속 및 용이한 적합(遍合)에서、

특히 완전한 위탁(委託)에서는 아직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다。


그 이유에는 다음 두가지가 있다。



1. 거룩한 위탁은、

천주께서 바라시는 것은 모두 이에 응하도록 미리서 각오하고、

그 하시는 모든 것은 

이것을 사랑으로써 받아 들인다는 점에까지 도달한 바、

우리의 의지와 천주의 의지와의 전체적 일치(全體的 一 致)이다。


그것은 사건발생전(事件發生前)에 있어서는、

평화와 신뢰에 충만한 대기(待機)이며、

사건발생후(事件發生後)에 있어서는 

사랑이 깊은 어린이와 같은 복종(服從)이다。


이러한 위탁에는 얼마나 깊은 이탈(離脫)이 예상(豫想) 되는지 

쉬이 이해될 수 있으리라。


p.116


2. 이 이탈은 뜻이 깊을만큼 보편적(普遍的)인 것이어야 한다。


대저 천주께서는 우리에게 

부유(富裕) 또는 빈곤(貧困)、질병(疾病) 또는 건강(健康) 

신심업(信心業)에 있어서의 위안(慰安) 또는 시련(試鍊)、

세인의 존경(尊敬) 또는 경멸(輕蔑)、

애모(愛慕) 또는 증오(僧惡)의 어느 것을 바라신다 하드라도、

천주께서 최고의 주권자(主權者)이신만큼、

당신의 뜻대로 우리를 처리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천주께서는 그 자유로운 의지에 의해서 

우리의 외적인 재보(財寶)、

육체와 정신과 호평(好評)과의 은혜 등을 

뜻대로 우리의 의견을 기다리지 않으시고、

더구나 대개는 뜻하지 않을 때에 

그런 것을 우리에게서 앗아가실 수 있으시다。


그러므로、우리의 의지가 

천주께서 바라시는 모든 것을 사랑으로써 받아 들이려는 각오를 

계속 가지기 위해서는 

항상 모든 종류의 선익(善益)、

즉 재산、친척、붕우(朋友)、건강、휴식、안락(安樂)、욕구(欲求)、

학식、위안、존경、애모 (愛慕) 등의 모든 것에서 

전연 이탈해 있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사물과 그 밖에 이에 유사(類似)한 것에서 

의지는 항상 완전히 이탈하여、 

천주와 그 의지만을 탐구하여야 한다. 


이와 같은 각오만 있다면、

천주의 임의의지(任意意志)가 비록 예기(豫期)되지 않을 때라도、

또는 그것이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든지、

우리는 곤란을 느끼지 않고 쾌히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위탁에 도달하려고 바란다면、

극기(克己)、자아포기(自我抛棄)、희생의 정신、십자가의 사랑 등、

이름은 여하튼、

그리스도교적 제욕(制愁)을 각별히 중요시해야 한다。


이 길에 의해서 

완전한 이탈에 이르고、또한 거기에 확고하게 머물러 있기 위해서는、

견인지구(堅忍持久) 로써 최선을 다하여 

이를 수련(修練)할 필요가 있다。



「로트한」(Roothaan) 신부가 적절하게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제욕(制愁)없이 무관심(無關心)에 이르려고 한다는 것은 

전연 허사일 것이다。

왜냐 하면、

혹은 단지 제욕에 의해서만、흑은 특히 제욕에 의해서、

사람은 무관심이 되고、또한 그러한 행동을 드러내게 되기 때문이다。」

(성「이냐시오」의 「심령수업」(心靈修業) 중 「기초적 묵상」四)



p.117


그러나 또한 「러·고디에」(Le Gaudie)신부는 

다음과 같은 적절한 주의를 덧붙이고 있다.


「계명을 지키는 위에、

부(富)와 외적선익(外的善益)을 부러 멸시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더우기 명성이나 모든 영예(榮譽)를 경멸한다는 것은 

그것보다도 더욱 곤란하다. 

더구나 생명이나 신체나 자기의 의지 등을 무시한다는 것은 

더욱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가장 곤란한 것은、

자신의 자연적인 은혜도、위안도、

영적기호 (靈的嗜好)도、선덕(善德)도、

끝으로 은총도 천국의 영광까지도 

천주의 의지와 그 영광만에 예속(諫屬)시키는 일이다。」

(「러·고디에」저 「영적생활에 있어서의 완덕」1 부 一 편 一 四장)




그러므로、거룩한 위탁에의 길은 길고、또한 매우 험준하다。


그러한 높은 단계에 도달하는 영혼은 적으며、

도리어 대다수의 사람들이 적합(適合)、혹은 단지 체념(諦念), 

인종(忍從)의 중도(中途)의 단계에 머무는 것도 그러기 때문이다。


대개의 사람은 완전한 위탁을 좋아하지만 

그러나 그것에 상응(相應)한 대가(代價)를 지불하려 하지 않는다。


천주께서 오로지 보시는 것은 빈 그릇을 그 은혜로 채우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노력을 요하는데 

불행하게도 사람은 그릇을 충분히 공허하게 하지 않는다。


거기에 성「프란치스꼬 . 살레시오」가 깊이 음미한、

「똘레르」의 아름다운 말이 적응된다。


어떤 사람이 「뜰레르」에게、

어디에 있어 천주를 찾아냈느냐고 물었을 때에、

그는「나를 버린 곳에서 천주를 찾아냈고、

나를 찾아낸 곳에서 천주를 잃었다」라고 대답하였다。

(「성 프란치스꼬 . 살레시오의 정신」三.五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