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20 p.104-111 제 1 편 제 10장 위탁(委卓)과 희생의 서원(誓願) ②

은가루리나 2018. 1. 30. 14:15


omnia 등급변경▼ 조회 121  추천 0  2014.11.12. 14:59



제1편, 거룩한 위탁의 본질


제1장 최고의 규범으로서의 천주의 의지

제2장 천주의 명시의지와 임의의지

제3장 천주의 명시의지에 대한 순명

제4장 임의의지에 대한 적합

제5장 거룩한 의탁의 개념

제6장 위탁과 현덕

제7장 위탁에 있어서의 願望과 기도

제8장 위탁에 있어서의 노력

제9장 위탁에 있어서의 고통감

제10장 위탁과 희생의 서원



p.104



제 1 편 거룩한 위탁의 본질(本質) 


제 10장 위탁(委託)과 희생의 서원(誓願) 




끝으로 희생으로서의 자기봉헌,

즉 희생의 서원(誓願)이란 것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극히 미묘하고 복잡한 이 문제에 관해서

교리상 및 실제상의 충분한 설명을 할 생각이 없으므로,

다만 위탁이 어디에서 그치는가, 

어디에서 다른 길이 시작되는가를 명확히 하는데 필요한 점만을 

말해 둔다.


이 문제에 관하여 더욱 근본적으로 알려는 독자는

이것을 전문적으로 다룬 많은 저서를 참고로 할 수 있는데,

특히 희생의 관념, 상태, 서원등에 관해서는

다소 엄밀한 제한을 붙인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샤를.소베」신부의 소저(小著)는 탁월한 것이다.

(「소베」저 「예수 성심의 베로니까 동정 약전」중 「교의적 서문」 참조)



봉헌은 각가지 목적으로, 또한 각종 양식(樣式)으로 행해질 수 있다.


「젬마.갈가니」및 삼위 일체의 「엘리사벳」동정은 죄인을 위한 희생으로서,

영해 예수의 성녀「데레사」

주의 애련(哀憐)의 사랑에 대한 번제(燔祭)의 희생으로서,

또한 「젤뜨루다.마리아」동정

천주의 정의(正義)와 성성(聖性)과 사랑에 대한 희생으로서 자신을 바쳤다.


가장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것은,

혹은 손상된 천주의 영광을 보상하며,

혹은 연옥의 영혼을 구하고, 

혹은 성교회와 조국과 사제직과 수도회를 위하여,

또는 어떤 가족, 어떤 영혼을 위하여 

천주의 자비하심을 간청한다는 목적에서,

보상의 희생으로서, 천주의 정의(正義)와 성성(聖性)에 대하여 행해지는 

봉헌(奉獻)이다.


p.105


이 봉헌의 기초는 모든 성인의 통공(通功)이고,

특히 죄인을 위하여 행해지는 의인(義人)의 보속이며,

그것은 또한 

고통에 의한 구제(救濟)의 값어치를 나누어 주시기 위해서도

또한 이 길을 따르셨다.


주께서는 그 무한한 인자하심으로써 

특히 간택하시는 정예(精銳)의 영혼을 구령사업에 참여케 하시는데,

그 영광의 인성(人性)으로서는 이미 고통을 당하실 수 없으므로,

말하자면

「부가(附加)된 인성」(「삼위일체의 엘리사벳 전」12)을 당신에게 덧붙이시어,

이 인성에 있어, 고통에 의한 영혼의 구제를 계속하시고 있다.



어떤 시대에도, 각별히 어지러운 시대에는,

희생이 되는 영혼이 반드시 있었다.


불신(不信)은 암흑(暗黑)처럼 지상을 뒤덮고,

부패, 타락은 

더러운 파도와도 같이 범람하고 있는 불행한 현대에는,

희생이 되는 이가 증가하고,

희생을 특히 목적으로 하는 수도회가 더욱 많이 창립되어 왔다.


만일 사적계시(私的啓示)가 믿을만한 것이라면,

오주께서는 희생자, 더구나 용감한 희생자를 요구하시고,

그 고통과 간난(艱難)에 의해서 

죄인과 배은자(背恩者)를 위하여 보상이 되는 영혼을 찾으실 것이다.



「주께서는 고통을 당하고 계십니다.

고통의 길에 굳건히 주께 따르기를 바라는 영혼을 

충분히 발견할 수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젬마.갈가니 전」15, 24,「한 신비자」56)


p.106


이러한 계시(啓示)는 물론 존중해야 할 것이며,

또한 충분히 진실성이 있는 것이지만,

보다 확실한 의심할 여지 없는 보증(保證)은 

예수.그리스도의 대리자의 말이다.


교황「비오」9세는 관대한 영혼을 불러들여,

보상의 희생으로서 천주께 몸을 바칠 것을 격려하도록 

어떤 수도회의 총장에게 종용하였다.


교황「레오」13세는,

1884년 「프랑스」에 보낸 회칙 가운데서,

「특히 수도원에서 생활하는 이는 

겸손한 기도와 자발적 고행(苦行)과 자기봉헌(自己奉獻)에 의해서 

천주의 분노하심을 멈추시도록 노력할 것」을 당부하였다.


또한 성「비오」10세 교황은,

「성직자협회(聖職者協會)에 큰 찬사를 보내어

「이처럼 보속을 필요로 하는 불행한 현대에 있어,

많은 회원이 특별히 천주께 봉헌된 영혼을 위하여,

남모르게 자신을 보속의 희생으로서 제헌하며 

자기를 봉헌을 하고 있음을 알고서」만족히 여겨,

「이 그리스도교적 신심의 탁월한 임무에」

허다한 대사(大赦)를 부여하셨다.

실제 그것은 천주와 이웃에 대한 거룩한 사랑을 실행하는 

극히 훌륭한 하나의 방법이다.」

(「성청령」1910년 4월 28일 및 5월 2일자)



그러나 성「비오」10세 교황의 말에 의하면,

「그것은 매우 위대한 사업이기 때문에 그만큼 또한 매우 험준한 길이다」.


(동상) 교황이 장려하는 만큼 

결코 관대한 영혼의 용기를 꺾을 마음은 없지만,

단지 무분별한 행동을 미리 방지하겠다는 것이다.



희생의 수도회에 서원을 하는 많은 영혼에게는

부주의 또는 무사려등의 걱정은 보다 적다.


그것은 회칙(會則)이 그들의 봉헌의 범위를 정확히 한정하고 있으며,

또한 그들자신도 수련기(修鍊期)에 있어 자신의 힘을 시험했을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도서원(修道誓願) 이외에 있어서는

서원으로써 또는 서원 없이 자기를 바치고,

남김 없이 자신을 천주께 넘길 적에는

천주께서 이 넘겨진 권리를 어느 정도까지 사용하실지는, 

결코 미리서 알 수 없다.


물론, 

단지 충분히 확인된 소명(召命)에 응하기 위해서만

희생의 길에 나아갈 때에 있어서는,

소명을 주시는 천주께서는 반드시 

그것에 상응(相應)하는 은총을 주실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젤뜨루다.마리아」동정

오랜 동안의 무서운 시련을 겪고서 죽기 8일 전에,

「나는 자신을 바친 것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읍니다」

(「신비자」239 )라고 말할 수 있었다.


영해 예수의 성녀「데레사」역시 그가 임종하는 날에,

「자신을 사랑에 바친 것을 조금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읍니다」

라고 말하였다.


 p.107


경솔하게 더구나 

충분히 기도도 하지않고, 성찰(省察)도 하지 않았으며,

의견도 듣지 않고 시험해 보지도 않고서,

자기 봉헌을 감히 하는 영혼에 관해서도 같은 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도

대체 우리는 자신의 대담무모(大膽無謀)한 대가로서

천주께 특별한 은총을 요구할 권리가 있겠는가.


우리가 천주께 몸을 바칠것을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그만큼 빨리 불평을 하거나, 용기가 꺽기거나 하여 

지도자나 주위의 사람의 무거운 짐이 될지도 모른다.


「희생자의 참으로 알맞는 곳은 

그것은 사랑의 감미(甘味)안에 있어서가 아니라,

예수와 더불어 『갈바리아』산상에 있어서이다.

『갈바리아』의 위대한 희생이신 분과 더불어 희생이 되는 것이다.」

(「신비자」148, 180, 200 )



다음의 사실을 안다는 것은 극히 중요하다.


만일 어떤 이가 다소 지나치게 자부(自負)하여 

쉬이 천주의 권리에 자신을 넘기고,

희생으로서 자신을 바치는 것을 본다면,

그들이 자신을 바치고 있는 분은,

봉헌을 얼마만큼 항상 엄숙히 여기시는가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천주의 권리 가운데는,

사람이 자신의 자유를 온전히 천주께 양도해 버리지 않는 동안에는,

천주께서는 결코 그것을 행사하지 않으시는 것이 허다하다.


모든 것을 천주께 넘기는 이는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그러나 그러한 봉헌을 하는 이는 커다란 노고와 비상한 희생을

반드시 기대하지 않으면 안된다.」

(「게」주교 「그리스도교적 생활과 선덕」중의 위탁) 


이 사실의 증거는 

희생으로서 자신을 바친 많은 영혼의 전기(傳記)의 어느 「페이지」에서도 

빛나고 있다.





그러므로, 

봉헌(奉獻)과 위탁(委託)과의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현저한 차이점이 있다.


p.108


1.

단순한 위탁은 결코 자진하여 행동하지 않는다.


위탁은, 우리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고 

천주의섭리에 의한 모든 일에 관하여 거룩한 무관심에 머무르며, 

천주의 임의의지가 나타나는 것을 기다린다.


이에 반하여, 

봉헌에 있어서는 사람은 자진하여 행동한다.

자기봉헌(自己奉獻) 그 자체에 의해서 영혼은 암암리에 고통을 구하고

천주께 이것을 보내 주시도록 감히 바라고,

때로는 이것을 명백히 촉구까지 하는 것이다.


2.

위탁은 오만(傲慢)도 무모(無謀)도 착각(錯覺)도 포함하지 않고

도리어 현덕(賢德)과 겸손에 충만되어 있다.


왜냐 하면, 

위탁이란 만사(萬事)의 처리는 천주께 맡기고,

우리의 몫으로는 복종만을 보류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천주의 의지의 수행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봉헌에 대한 천주의 특별한 부르심이 없다면,

자기 봉헌은 위탁처럼 겸손하고, 

미혹(迷惑)함이나 자부심(自負心)을 멀리하고 있겠는가.


3.

영혼이 천주의 활동에 자신을 맡기고 있다면,

반드시 은총의 도우심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자진하여 행동하는 이는 

특별한 천주의 부르심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천주께서 자기와 일치하고 계신다는 것을 

과연 마찬가지로 확신할 수 있겠는가.




덕에 진보한 영혼은 

모두 거의 본능적(本能的)으로 거룩한 위탁에로 기울어진다.

그와 같은 영혼에게는 모두,

희생자로서의 정신으로써 그것을 실천할 것을 권장할 수 있다.


일상의 순명과 자발적 제욕(自發的制慾)에 관해서도 

또한 마찬가지다.

그와 같은 의도(意圖)는 

결코 우리의 의무를 조금이라도 과중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도리어 그것에 순수한 사랑의 새로운 수액(樹液)을 순환시켜,

그 가치와 생산력(生産力)을 증대시킨다. 


p.109


이에 반하여 

현덕(賢德)과 겸손은 자신을 희생으로서 바치는 것,

각별히 고통을 간구할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지만,

천주의 소명(召命)이 충분히 확인된 경우는 예외다.


그러나 그런 때라도, 

일반적인 시련을 깊은 인내로 견디며,

자발적 극기(自發的克己)를 함양하고,

또한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본 후에 

비로소 이것을 실행하여야 한다.


또한 우리가 어느 종류의 고통을 자발적으로 요구할 때에는,

처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며,

이 경우에는 다른 모든 행위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현덕(賢德)의 법칙에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현덕은 너무나도 위험한 시련을,

또한 애덕은 주위의 사람들에게 있어 

지나치게 무거운 짐이 되는 것과 같은 시련을 구할 것을 

우리에게 금하고 있다.



천주께 선택의 배려를 맡겼을 때에는,

그러한 제한을 둘 필요가 없는것 같이 생각된다.

왜냐 하면, 

그 때 처리하시는 것은 천주시며, 우리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자부(慈父)이신 천주의 예지(叡智)에 온전히 의지할 수 있다.


p.110


여하튼 

천주의 소명(召命)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고통을 요구한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최고의 선덕(善德)을 동경하는 영혼에 있어서는 

완전한 순명과 위탁 이외에 무엇을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서원(誓願), 회칙(會則), 섭리의 순응, 

이러한 것이야말로 

미혹(迷惑)함도 그르침도 없는 완덕에의 확실한 길이다.


거기에는 

영혼의 순결(純潔)과 완전한 제덕(諸德), 

사랑에 의한 천주와의 밀접한 일치(一致)를 획득하기 위한 

감탄스러운 수단이 발견된다.



이 점진적 변화(漸進的變化)는 

수도생활의 정규적(正規的)인 수업(修業)을 준봉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며,

이것은 

이미 오랜 생애를 메꿀 수 있을 정도의 커다란 노고(勞苦)를 요하는 일이다.


그러나, 

만일 그래도 우리의 관대(寬大)한 정신이 만족하지 않는다면

회칙은 필요한 허가를 얻어 그 명하는 이상의 것을 하도록 촉구한다.


이와 같이 

그것은 거의 무한히 마치 인간의 원망(願望) 그 자체와 같이

넓은 길을 희생의 정신 앞에 개척해 준다.



거룩한 위탁에 관해서는,

내적(內的)인 영혼은 모두 이것을 실천할 허다한 기회를 가지는 것인데,

수도자는 자주 공동생활(共同生活)에 있어,

장상은 그 임무의 수행에 있어 더욱 이것을 필요로 할 것이다.


우선 

천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택하신 십자가를 기꺼이 맞이하는 것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그리고 만일 천주께서 

그것이 

우리의 고통에 대한 거룩한 열망에 있어 아직도 불충분하다고 여기실 적에는 

당신 자신께서 그 번수와 그 무게를 증가시키실 것이다.



그러므로,

희생의 정신에 살기를 바라는 영혼에게 있어서는,

일반적으로 고통을 구할 필요는 없는 것이며,

그것을 

자기의 내적생활(內的生活)과 일상(日常)의 의무와 

자발적 제욕(自發的制慾)과 섭리의 순응안에서 

충분히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p.111


이 겸손한 길에는,

희생의 서원(誓願)의 화려함은 없지만,

희생의 정신은 거기에 충분히 넓은 활동의 영역(領域)을 발견하여

현덕(賢德)과 겸손(謙遜)과는 

아마도 거기에 더욱 안정(安定)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성신께서 어느 영혼을 희생으로서 자신을 바치도록 부르실 적에는,

그 영혼은 천주의 대리자의 허가와 지도 밑에서 행동하고,

또한 무엇보다도 

나날의 임무에 대하여 열심을 표시한다는 조건으로 

천주의 소명(召命)에 따르고 있는 이상 

아무도 이것을 무모(無謀)하다든지,

미혹(迷惑)함에 빠졌다고는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영혼은 무서운 허다한 시련을 예기(豫期)하지 않으면 안되겠지만,

그러나 영혼은 그 공로의 상을 받고,

또한 천주께서는 이 영혼과 함께 계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