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위탁

22 p.118-122 제 2편 제 I장 이탈 ②

은가루리나 2018. 3. 30. 17:17


제2편 거룩한 위탁과 기초


제1장 이탈 

제2장 섭리에 대한 신앙

제3장 섭리에 대한 신뢰

제4장 신뢰 계속 - 難問에 대한 해답

제5장 천주께 대한 사랑

제6장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제7장 聖主에 대한 모범



p.118



제二편 거룩한 위탁(委託)의 기초(基礎)


제 I장 이탈(離脫)




그런데、모든 양식(樣式)의 자아포기 가운데서、

각별히 곤란한 그리고 필요불가결한 두가지, 

즉 순명과 겸손에 관해서 주의를 촉구하고 싶다。


자부심(自負心)과 자아집착(自我執着)과는

본성이 궁박(窮迫)할 적에 발견하는 최후의 피난처이며、

영혼의 진보와 평화의 최대의 장애물 (障碍物)이 아니겠는가。


사람은 자신 외의 일체의 것、

즉 외적재보 (外的財寶)나 육신상의 은혜를 희생한 후에까지도 아직、

오만(傲慢)과 자의(自意)의 이중의 사슬에 얽매어 있는 일이 

너무나도 자주 있다. 


그러므로、우리를 완전히 해방하기 위해서는、

순명과 겸손의 두가지 불가분한 자매덕(姉妹德)에 호소하여야 한다。


난사(難事)와 역경(逆境)과 굴욕(屈辱) 안에 있어 

자연(自然)을 침묵시키면서 

인내로써 무슨 일에나、또한 언제라도 순명을 다하고、

자의(自意)를 이탈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열심히 노력하는 이는 얼마나 행복한가。



허다한 굴욕과 궁박의 복판에 있어 만족하고、

명해진 모든 일에 있어、

자기를 악하고 보잘것 없는 종으로 간주하며、

그리고 진심으로 

자기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낮은、

가장 비천한 이라고 스스로 말하고、

진실로 그렇게 생각하기에 이르는 이의 행복은 더우기 어떠하랴! 

(성 「분도」의 계율七· 11、三、四、六、七 참조)


영혼이 순명과 겸손에 극히 견고해졌을 때에는 

그것 자체로써 

덕의 부족에 기인하는 많은 충동(衝動)을 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고통은 자주 그와 같은 영혼을 습격할 것이다。


물론、

그 영혼은 그것에 대하여 무감각(無感覺)으로 있지는 않으나、

이것을 기꺼이 맞아들일 수 있는 각오는 이미 소유하고 있으며、

그리고 그 겸손 그 자체에 의해서 

완전한 위탁에 대한 준비가 있어 그것에 기울어지고 있다。


p.119


그와 같은 영혼은 

항상 과거의 죄를 여러 가지로 의식하면서도、

그처럼 순결했던 「젤뜨루다. 마리아」동정과 같이、

당신에게 당연히 돌려야 할 것을 요구하시는

무한한 정의(正義)이신 이를 흠숭하면서、

자신의 죄의 벌을 감사로써 받아들인다。


그러한 영혼은 시련이 닥칠 때 마다、

「나는 보속을 위하여 고통을 받아야 할 영혼입니다. 

주여、감사하나이다。

더구나 이것은 아직도 내가 받아야 할 모든 것은 아니나이다」

라고 말한다. 


그리고 만일 자기들의 나약함을 두리지 않는다면、

서슴없이 다음과 같이 덧붙일 것이리라。


「주여、

당신께 대한 보상을 다하기 위하여 나에게 더욱 고통을 주소서。

끊임없이 주소서」라고. 


그리고 만일 자기 안에 남아 있는 나쁜 경향을 반성하고 

극히 사소한 일에도 마음을 산란케 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아직도 고통을 당하고 또한 멸시를 받아야 할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통감하여、

자신에게 죽는 기회를 오히려 행운(幸運)처럼 기꺼이 맞이한다。


그리고 

때로는 자신의 고통을 잊고、천주께 가한 모욕만을 생각 하고는、

「잼마·갈가니」와 같이 이렇게 말한다。


「아、가련한 예수여、나 당신을 너무나도 괴롭혀 드렸나이다。

그러하오나 관대히 여기시어 나의 곁에 돌아오소서」라고.

 (「잼마·갈가니」 一五) 또는 「젤뜨루다·마리아」동정과 함께、



「나에게있어 모든 내적(內的)인 고통보다도 괴로운 것、 

참된 고문(拷問)에도 비할 수 있는 것은 사랑하는 이에게 가한 모욕、

그이에게 짊어지게 한 고통이다」(「한 신비자」二二)라고 말하자。


이처럼 광명에 충만하고 있는 영혼은 

무죄하고 유덕(有德)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무한히 거룩하신 분의 어전에 나아가는데

만만 부당한 자임을 인정하고、

주를 기쁘게 해드리려는 불타는 일념(一 念)에서 

가장 괴로운 정화(淨化)도 감수한다。


거기에 겸손이 얼마나 순명을 쉽게 하는가

또는 얼마나 거룩한 위탁에 마음을 준비시키는지 분명히 드러나 있다。


p.120


이에 반하여、

영혼이 순명과 겸손에 아직 불완전하다면、

그 때문에 허다한 곤란을 초래하고、

이것을 기꺼이 맞이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것이다。


또한 시련이 천주편으로부터 혹은 인간편으로부터 온다 하드라도、

그것이 자신에게 있어 당연한 그리고 필요한 것이라고 깨닫지 않는다면、

필연적으로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희생자와 같이 가장하거나、반항하거나、불만을 품거나 할 것이다。

그래서 천주의 은혜를 시련과 마찬가지로 남용함이 된다。



께서는 「잴뜨루다·마리아」동정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겸손은、

마치 물이 꽃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많은 은총에 충만된 영혼에 있어서는 불가결한 것이다。


영혼이 꽃이 피어 그 아름다움과 신선(新鮮)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겸손에 젖고、끊임없이 이 은혜의 물에 잠겨 있어야 한다。


햇빛의 열에만 쬔다면 오래지 않아 시들어 죽어버릴 것이다」

(「젤뜨루다 . 마리아 전」 一九장)




영해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온전한 사랑과 신뢰의 「영적유아(靈的幼兒)의 길」을 

찬양해 마지 않았는데、

성녀는 당연히 겸손으로써 그 토대로 삼았다。


그 모범과 그 교훈을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천주를 사랑하며、

많은 작은 희생을 바치고、어린이와 같이 천주의 팔에 자신을 맡기고 

그러기 위하여 어린이와 같이 순명하고 겸손한 이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녀는 스스로 다른 수녀들의 작은 종이 되어、

누구의 차별도 없이 모든 이에게 따르도록 노력하고 

자기 의지를 관철하는 것만을 두렵게 여겼다。


교만하여 스스로 자만하지 않고 도리어 자신을 낮추어 

누구에게도 무시(無視)되고、

모든 사람들의 발에 짓밟히며、


어린 예수님에게도 

하찮은 장난감처럼 항상 작은 이가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자서전」六、八、二、三 기타 참조) 



거기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자아(自我)에 죽고、

특히 얼마만한 겸손이 필요하였겠는가。


그러므로 

천주께서 그다지도 관대(寬大)하고 겸손한 영혼의 영광을 현양하시어、

이 성녀를 현대의 위대한 신비자로 삼으신 것은 

결코 늘라운 일이 아니다。



p.121


「게」주교는 이 영적유아(靈的幼兒)의 길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이것은 얼마나 완전한 길이랴! 

이것은 고통에 대한 사랑보다도 더욱 완전한 것이다。


왜냐 하면、

진실로 마음 고요히 작은 이가 되는 것보다、

커다란 희생을 인간에게 부과시키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교만은 일곱가지 죄원(罪源)의 괴수(魁首)이며、

모든 욕망의 근원이고、

태고(太古)의 뱀이 인간계(人間界) 에 쏟아 넣은 독(毒)이다。


유아(幼兒)로서의 정신은 고행(苦行)의 정신보다도、

보다 확실하게 이 오만(傲慢)의 뱀의 숨을 근절시킨다。


인간은 고통과 싸울 때에 쉬이 자기 자신을 찾아내어、

자신을 위대한 것으로 생각하고、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하여 감탄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참으로 유아가 되어 있다면、

자애심(自愛心)은 절망할 것이다。


이 거룩한 유아의 길의 과실을 아무리 압착(壓拷)하드라도、

스며나오는 것은、

위탁 외에는 결코 다른 것이 아닐 것이다。


유아는 조금도 거절하지 않으며、

거스르지 않고 자신을 남에게 맡긴다。

유아는 무엇을 알고、무엇을 할 수 있으며、무엇을 이해하고 있겠는가。

무엇을 알고、무엇을 이해하며、무엇을 할 수 있다고 

감히 자부할 수 있겠는가. 


유아는 전연 남의 뜻대로 되는 존재이다。

그러기에 사람은 

얼마나 신중하게 유아를 다루고 얼마나 그를 애무할 것인가。


그런데 

자신의 뜻대로 행동하는 이를 마찬가지로 과연 다룰 수 있겠는가.」

(「게」주교 「위탁二」)


P.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