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강의 내 뜻을 봉헌하기 위한 준비
하느님께서는 죄인의 청은 안 들어 주시지만 하느님을 공경하고 그 뜻을 실행하는 사람의 청은 들어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요한 9,31)
다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선물로 받기 위하여 내 뜻을 하느님께 봉헌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중심으로 사신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면서 내 뜻대로 살면서 지은 죄를 성찰하고 진정으로 통회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 안의 삶을 선물로 주시기 전에 그 동안의 삶을 심판하시고 죄를 역겨워하여 고의적인 소죄로부터도 완전히 벗어나게 하십니다. 새로운 영성을 체험하신 분들의 모범을 따라 우리도 우리의 뜻을 봉헌하도록 합시다.
제1일 성부의 뜻을 중심으로 사신 예수님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요한 4,34)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나는 듣는 대로 심판할 따름이다. 그래서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른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요한 5, 30)
예수님의 내적 생활은 성부의 뜻을 중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시는 순간부터 당신의 의식의 중심부에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사랑으로 인식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콘치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태어나던 그 순간부터 나에게는 하느님의 뜻 이외에는 다른 양식이 없었다...하느님의 뜻을 통해서 내가 이 세상 속으로 들어왔고... 하느님의 뜻으로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참혹한 순교로 내 삶을 끝마쳤고... 구원은 실패가 아니라 이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완성한 것이다. 하느님의 뜻은 내 사랑의 가장 깊은 심장 속에서 항상 울려오고, 그래서 내 심장은 영혼들의 구원과 나의 성부의 영광을 위하여 고동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시간과 영원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의 원천이라는 것을
사랑으로 인식하는 것 즉 깨달아 아는 것,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내적 생활 속에
깊숙이 참여하기 위해서 밟아야 할 첫째 단계입니다.
예수님께서 콘치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지상에서의 나의 삶은 이런 것이었고, 하늘에서의 나의 삶도 이런 것이다.
즉 나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바를 사랑하고, 경모하고, 완수해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만을 내 뜻으로 가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완성이요, 나와 같아지는 최고의 목표를 완성하는 인간의 완성이다.”
성녀 파우스티나도 이와 똑같이 사랑으로 하느님의 뜻을 의식하고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나는 하느님의 뜻으로 양식을 삼았다. 이것이 나의 음식이다. 내게 필요한 말은 하느님의 뜻이라는 말 한 마디이다. 나는 하느님 아버지의 거룩한 뜻을 계속 곰곰이 생각한다. 이 뜻만이 나의 모든 것이며, 나는 이 뜻으로 살고, 이 뜻으로 죽는다. 그리고 이 뜻은 하느님의 거룩한 뜻이다. 이것이 나의 매일의 양식이다. 나의 온 영혼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만을 열심히 듣는다.”
20세기에 살았던 이 모범적인 영혼들은 사랑으로 항상 하느님의 뜻에 집중함으로서, 예수님의 내적 생활에 완전히 동참하는 첫 단계를 밟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인간 존재들의 생애 안에서 매순간에 모든 순간에 성부께 완전한 사랑의 행위를 바치셨다는 것을 복녀 디나는 성령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성부님의 뜻의 완전한 만족이라는 신비에 대해 썼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뜻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 속으로 스며들어 완전히 용해되게 함으로써,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만족시켜 드렸다. 예수님은 영혼들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이 성취되도록 당신자신을 기쁘게 포기하여 맡겨드렸다. 그래서 실제로 보상을 해서 하느님의 계획이 완전히 성취되게 해 드렸다.”
복녀 디나에 의하면, - 그리고 우리가 이미 본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성 바오로의 서간에 의하면, - “영혼들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은 이미 예수님에 의해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지금 당신 신비체의 지체들이 이 성취 작업에 좀 더 깊숙이 참여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복녀 디나에게 성령을 통해서 자신을 성부님의 뜻에 완전히 승복하여 맡겨 드리라고,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는 예수님으로 하여금 그녀 안에서, 그녀와 함께 영원토록 일하실 수 있게 해드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그 “영원한 방법”으로, 신비체의 지체들은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서 준비하신 행위를 완전히 행할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행위 안에서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모든 영혼들에게도 현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의 가장 작은 행위도, 그것이 성부님께 영광을 드리고 모든 피조물들의 선을 위해서 행해진 것이라면, 모든 영혼들에게 유익한 영향을 미친다. 예수님께서 복녀 디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지금 네가 세말까지 봉헌(축성)된 수많은 영혼들을 보게 해 주겠다. 그러면, 너는 나에게 완전히 봉헌된 영혼이 모든 다른 영혼들에게 어떻게 빛을 줄 수 있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너는 나의 빛이 그 봉헌된 영혼을 통해서 먼 곳으로, 아주 먼 곳으로, 끝닿는 데까지 비추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시간이 끝나는 순간까지 선을 행한다는 말이다.
나는 봉헌된 영혼들에게
자신들을 내게 완전히 승복하여 맡기고,
자신들을 나로 가득 채우기를 요구한다.
그래서 나로 하여금 내가 원하는 대로
자신들 안에서 자유로이 행동할 수 있게,
그리고 자신들을 통하여 빛을 발할 수 있게 해 주기를 요구한다.
나는 그들을 전부 다 부르고 있다. 그들 모두에게 요구한다.
그리고 나에게 아무 것도 거절하지 않는 영혼이 얼마나 적은지를 너는 지금 보고 있다. 이 수많은 영혼들 안에서, 영혼 하나하나 안에서, 인간적인 것은 아무 것도 보이지 말아야 하고, 다만 나, 나 하나만이 보여야 한다. 나의 성부께서 봉헌된 영혼들을 보실 때, 그 영혼들 하나하나 안에서 그분은 나만을 알아보시고 나만을 보셔야 한다. 그렇지만, 아, 슬프다! 현실은 이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만약 봉헌된 영혼들이 나에게 아무 것도 거절하지 않는다면,
만약 그들이 자기들 안에서 언제나
내가 자유로이 활동할 수 있게 해 준다면,
그러면 모든 영혼들이 구원되었을 것이다.
그렇다. 다른 모든 영혼들이 모두 다 구원되었을 것이었다. 봉헌된 영혼들 안에서 나만을 보시면서, 당신의 지극히 사랑하는 아들만을 보시면서, 또한 나의 목소리만을 들으시면서,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영혼들에게 아무 것도 거절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봉헌된 영혼들을 통해서 , 내가 나의 하느님 아버지께 당신의 거룩한 뜻에 따라 다른 모든 영혼들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고 간청할 것이었고, 그러면 그분께서는 절대로 내 청을 거절하지 않으실 것이었다. 만약, 내가 나의 거룩하신 어머니께서 청하는 것을 하나도 거절할 수 없다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더구나 내가 청하는 것을 거절하실 수가 없으시다... 만약 내가 많은 영혼들이 지옥으로 떨어져 가는 것을 본다면, 그것은 그들 자신이 그렇게 되기를 원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기도 하고, 또한 봉헌된 영혼들이 나의 은총을 옳게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친히 봉헌된 영혼들을 통해서 빛을 발하실 때”, 봉헌된 영혼들이 만민에게 미치게 될 영향과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영혼들이 가진 제한된 영향력을 비교해서 설명해 주셨다. 예수님께서 복녀 디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게쎄마니에서... 나의 고민하는 마음이 수많은 다른 영혼들과 함께 봉헌된 영혼들을 보았다. 봉헌된 영혼들은 그들의 팔을 모든 영혼들에게 뻗치고 있었다. 나는 봉헌된 영혼들을 통해서 이 세상의 모든 영혼들에게 빛을 준다. 봉헌된 영혼들의 영향력을 생각해 보아라.”
복녀 디나는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영혼들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보여주신 영혼들은 보통으로 창조된 모든 영혼들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예수님께 보여 주신 영혼들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상관없이 창조된 모든 영혼들이었다. 예수님께는 모든 것이 현재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모든 세대에서 창조된 모든 영혼들을 한꺼번에 보셨고, 나에게도 당신께서 보시는 대로 보여주셨기 때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복녀 디나의 글을 통해서, 모든 영혼들에게 자신들 안에서 자신들을 통해서 당신이 만민을 위해서 활동하실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하십니다.
제2일 죄에 대한 성찰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돌아서라. 너희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 (에제 33,11)
2-44 나 자신의 나라는 내 어머니의 마음 안에 있었다. 그것은 어머니의 마음은 조금도 어지럽혀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16-25 “……인간의 모든 선은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데 있고,
모든 악은 인간 자신의 뜻을 행하는 데 있다.”
4-73 어디에서 인간의 악이 시작되는지 알고 싶으냐? 그것은 인간이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알기 시작할 때, 곧 철이 들 나이에 이르러 ‘나는 상당한 인간이다.' 하고 혼잣말을 하기 시작할 때부터이다. 자기 자신을 상당한 인물로 여기면서 내게서 멀어지는 것이다. 그 때에는 모든 것인 나에게 신뢰를 두지 않고, 모든 신뢰와 힘을 그 자신에게서 끌어낸다.
4-115 하느님이 시작이고 통치권자이며 주권자가 아닌 모든 곳에서는 (그들이 행하는) 모든 것이 그들로 하여금 자멸에, 따라서 온갖 악의 근원에 이르게 한다
문: 하느님은 질서이시니 그분께서 창조하신 만물도 그 신적 질서 속에서, 완전한 조화 속에서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분명 그렇질 못합니다. 완전한 조화가 있음 직한 곳에 있는 이 부조화의 원인은 무엇입니까?
답: 모든 피조물 가운데서 오직 사람과 천사만이 자유 의지를 받았습니다. 사람이 자유 의지를 잘못 사용하여 자신이 그 안에서 창조된 완전한 질서 상태를 떠나 버리기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 작은 책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인간의 뜻은 하느님의 뜻과 하나 되어 움직이도록 계획되었습니다.
인간의 뜻이 이 일치된 활동에서 벗어나면
무질서하고 약하고 항구하지 못하고 악에 떨어지기 십상이어서
이로 인한 온갖 비참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자연계의 나머지 모든 것은 하느님의 질서 안에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는 그들이 타락한 인간보다 우월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제 ‘하느님의 결정’이 실현될 때가 왔으니, 사람이 본래의 질서로 돌아와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하나의 공통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1. 교 만
1-7 교만은 인간이 하느님께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모욕이요 가장 무서운 배은망덕인 것이다.
1-19 교만이라는 죄가 그들의 정신을 어둡게 하고 마음을 타락시켜서 절제 없고 천박한 온갖 짓에 몸을 맡기게 하는 것이다.
3-10 교만은 은총을 태워 없앤다. 더할 수 없이 불행하게도 교만의 지배를 받게 되면, 이는 흉측하고 악한 어미이므로 영혼 안에 온갖 탕자들을, 곧 다른 모든 죄를 낳기 마련이다.
6-40,2 교만은 영혼 안에 크나큰 파멸을 초래한다. 이것이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을 이루고, 인간을 나의 모상에서 마귀로 변질시킨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7-8,8 교만은 영혼에 독이 될 만큼 무서운 죄다. 이 죄가 영혼을 죽이는 것이다.
2. 불 순 결
1-34 예수 성심에 가장 큰 모욕과 고통을 끼치는 죄는 바로 불순결의 죄이다.
1-58 인간은 갖가지 악습과 육정에 빠져 나를 모욕하고 있다.
3-113 나는 그 역겨운 음식이 인간의 음행임을 알았다. 그리고 맛이 고약한 음식은 사람들이 불완전하게, 아무렇게나 해 치우는 모든 선행이었다.
2-52 너희의 음행으로 어찌나 나를 지겹게 만드는지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난다.
너희가 나로 하여금 달아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이다.
2-52 나는 순결한 영혼들을 무척 사랑한다. 불결한 영혼들에게서 달아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순결한 영혼들에게는 자석에 끌리듯 다가가서 머물러 있게 된다.
4-35 모든 것 속에서의 순결. (사랑에 있어서나 일에 있어서나, 혹은 영혼이건 육신이건) 그 무엇에 있어서나 순결의 결핍은 지극히 하찮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마음에 반사되어 흠집을 낸다.
3. 이 기 심
4-52 이익 추구라는 독이 모든 마음들 안에 들어갔으니, 그들은 마치 해면처럼 이 독을 빨아들인다. 전염성이 강한 이 독이 수도원들과 사제들과 평신도들에게 침투한 것이다. 딸아, 진리의 빛과 덕행의 힘에 굴하지 않는 것은 저속한 이득에 굴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이 독 앞에서는 지극히 높고 고상한 덕행들도 부서지기 쉬운 유리처럼 산산이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4-82 나는 사람들이 나의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지만, 그들은 내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나를 사랑한다면 단지 그들 자신의 이익 때문인 것이다.
4-181 기껏해야 그들이 좋아하는 어떤 것과 나를 함께 원할 따름이다. 이는 내게 기쁨을 주지 않는다. 참된 지배는 오직 홀로 다스리는 것이니까.”
4-119 각 사람에게 있어서 주된 일은 생각과 말과 활동 속에서 자기 자신의 이익이나 남들의 존경과 만족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마음을 쓰는 것이다.”
4-93 영혼이피조물에 대한 사랑과 쾌락욕이나 이욕(利慾)이나 다른 것들로 흩어져 버리기 시작하면, 그 때에는 신적인 숨결이 영혼 밖으로 나가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속적인 사랑이 온 영혼에 두루 퍼지게 되면 신적인 사랑은 텅 비기 마련이다. 그런데, 인간은 지극히 순수한 신적 사랑의 집합체가 되지 않으면 아무도 천국에 갈 수 없다. 그럴 경우, 연옥으로 가서 그 불의 힘에 의해서 그것을 회복해야 하고, 그런 다음 사랑이 넘쳐흐르는 상태가 되었을 때 비로소 연옥을 떠나게 된다.
4-18 인간의 가장 강력한 원수는 쾌락과 재산과 명예에 대한 욕망이다. 이 원수들은 인간의 마음 속에 교묘하게 파고들어 끊임없이 들볶아 대기 때문에 인간을 불행하게 한다. 인간을 괴롭히고 우울하게 만들어 모든 행복을 잃게 하는 것이다. 나는 갈바리아에서 이 세 가지 원수를 쳐이겼다. 인간에게도 이를 정복할 수 있는 은총을 얻게 함으로써 잃어버린 행복을 되돌려 주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언제나 감사할 줄 모르는 배은망덕한 인간은 나의 이 은총을 배척하고 열광적으로 그 원수들을 사랑한다.”
4-56자애심은 극도로 근시안적이기에 우선 그들을 넘어지게 하고 다음에는 그들 안에 온갖 생각과 동요(動搖)와 주저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숱한 의심과 두려움을 느끼며 오늘 싫어하는 것에 내일 거듭 떨어지곤 함으로써 그들의 삶은 그것이 교묘하게 엮은 인위적인 덫에 언제나 걸려 있게 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순명의 예리한 시각은 자애심을 죽인다. 그것은 날카롭고 투명해서 옳지 못한 발걸음은 즉시 예견하고 미리 피한다. 이리하여 하느님의 작은 자녀로서의 거룩한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근시안적인 자애심은 그런 영혼들을 짓누르면서 참된 성덕의 길에서 조금도 진보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기만 하니 말이다.”
4-114 적어도 어떤 직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무사무욕의 정신이 지도자로서의 그를 특징짓는 빛이 되어야 한다.
4. 성 사
1-34 오, 성사들이, 그 자체로 거룩한 성사들이 성의 없이 마구 집전되고 있으니, 그분의 성심이 얼마나 미어지는 아픔에 잠기시는지! 허울뿐인 거짓 경건함이나 신앙심이 그것을 빌미로 예수님께 영예를 드리기보다는 오히려 더한 모욕을 끼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 그처럼 그릇되게 집전되는 성사들이야말로 지극히 거룩하고 깨끗하고 올곧은 그분의 성심에 역겨움을 불러일으키는 것이었다.
2-13 내 심장을 가장 깊이 찌르는 것은 독성 적인 미사와 위선이다.
8-59,4 나의 성사적인 운명은 돌 더미에 깔려 있는 것보다 감실 안에 있는 것이 더 불행하다는 것을 알아두어라. 사제들이, 또 일반 신자들이 범하는 모독의 수효가 얼마나 많은지, 나는 그들의 손과 마음속으로 내려가는 것이 여간 지겹지 않다.
5. 변 덕
4-62 내 마음에 가장 거슬리는 것은 툭하면 변덕을 부리는 짓이다. 이는 진리가 이 영혼들을 차지하지 않았다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신앙 문제 속에서도 자기 자신의 만족과 혜택과 이익을 찾을 가능성이 있다.
진리의 빛이 영혼 안에 들어와서 그 마음을 차지하면 쉽사리 변덕을 부리지 않게 된다. 과연, 그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희생하고, 홀로 진리의 지배만을 받는다. 그리고 불굴의 정신으로, 진리에 속하지 않은 것은 무엇이든지 쓰레기로 여기게 된다.”
6. 지 향
2-20 올바른 지향 없이 습관이나 이득 때문에 행해진 숱한 선행들은 어떻게 되겠느냐? 심판 날에 그 자체로는 선행인 많은 일들이 그들의 지향 때문에 썩어 있는 것을 볼 때 그들은 얼마나 부끄럽겠느냐? 그들의 행위가 다른 많은 행위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을 영예롭게 하기는커녕 수치롭게 할 것이다. 나는 위대한 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이 행해진 지향을 본다. 이 지향이야말로 내가 주목하는 것이다.”
2-17 “불행하다! 돈을 벌 목적으로 일하는 사람은 불행하다! 그는 이미 현세에서 받을 상급을 다 받았다.”
2-20 자기네가 하는 일의 지향의 순수성과 사랑의 강도에 따라서 내게 더 큰 광채를 준다.
2-44 너의 모든 활동이 나의 순수하고 거룩한 지향으로 빛나게 하여라. 그러면 내가 네 안에서 바로 나 자신의 모습을 보기에 내 은총의 힘을 아낌없이 쏟아 붓게 된다.
7-32,2 “딸아, 설사 경건해 보이는 행위라고 하더라도 나를 위한 각별한 지향이 없는 모든 행위는 인간 자신의 어둠이 가득한 영혼으로부터 나오기 마련이다. 반면에 나를 기쁘게 하려는 고결하고 각별한 지향으로 행해지는 것은 빛이 가득한 영혼으로부터 나온다. 지향이 행위를 정화하기 때문이다.”
7-67,2 “딸아, 실질적인 양분을 제거한 음식이 있다고 하자. 누군가가 이 음식을 먹는다면 그에게 유익을 주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위장만 부풀릴 것이다. 내적 정신과 올바른 지향이 없는 활동도 그와 같다. 신적인 실질이 비어 있기 때문에 유익하지 않고 다만 그 인간(의 자만심)을 부풀리는 역할만 한다. 그러므로 그는 유익보다 해악을 입게 된다.”
제3일 사랑에 대한 성찰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37-40)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1. 하느님 사랑
1-5 나는 너의 전부이니, 너에 대한 내 사랑과 같은 사랑으로 네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 보아라, 너를 에워싸고 있는 이 작은 세계 ?? 피조물에 대한 생각과 애착과 망상으로 이루어진 세계 ?? 를 네가 벗어나지 않으면, 나는 온전히 네 마음 속으로 들어갈 수 없고, 따라서 네 마음을 영원히 차지할 수도 없다.
1-10 그 시작과 과정과 끝맺음에 이르기까지 그분께 대한 사랑으로 하지 않는 일은 무엇이나 무미건조하고 아무 공로도 없는 것임을 분명히 지적해 주셨다. 사랑은 다른 모든 덕행에 광채를 주는 덕행이다. 사랑이 없는 모든 일은 죽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3-107 사람들은 오로지 그들 자신과 관계 있는 것, 곧 그들의 만족과 열정 따위 그들의 마음에 드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행동한다. 이 사랑은 나를 위한 것이라고 말들을 할 때에도 실제로는 다만 그들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이다.
4-25 영혼에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 사랑이 깃들여 있지 않은 영혼에도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 일체가 뒤죽박죽이고 아무런 조화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것이 무질서한 상태로 있게 된다.
4-73 모든 사람은 온 생애에 걸쳐서 어떤 간격도 두지 않고 끊임없이 나를 사랑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항상 사랑하지 않으면, 이 사랑에 소홀했던 날과 시간과 순간의 수와 같은 수의 빈곳을 자기 자신 안에 남기거니와, 이 빈곳들을 다 채우지 않고서는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이는 여생 동안 갑절로 나를 사랑하거나, 죽기 전에 다 끝내지 못하면 연옥불의 힘으로 그렇게 하거나, 둘 중 하나로 채울 수 있을 뿐이다.
4-94 어떤 사람이 나를 위해서 자기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그 모든 것이 내 영역을 벗어나므로 폭풍에 휩쓸린 먼지처럼 흩어지고 만다.”
11-24 사람이 그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설사 덕행에 관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때 마다 자아를 살찌워 하느님의 생명으로부터 달아나는 것이 된다. 반대로 영혼이 오직 나만을 생각하면 그 자신 안에 하느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4-182 은총에 대한 불순응은 영혼을 눈멀게 한다. 영혼으로 하여금 사물을 잘못 해석하게 하고, 어떤 기적 앞에서도 완고한 마음으로 있게 하는 것이다.”
6-92,2 내 자녀들의 특징은 십자가에 대한 사랑, 하느님의 영광에 대한 사랑, 교회의 영광에 대한 사랑에 있고, 그것도 목숨을 내어놓을 정도로 사랑하는 데에 있다. 이러한 특징을 지니지 않은 사람은 자칭 내 아들이라고 말할 자격이 없다.
2. 이 웃 사 랑
2-3 “내가 원하는 것은 다만 한 가지뿐이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2-20 나에 대한 사랑으로 변화되지 않은 이웃 사랑이라면
나는 그것을 내게 속한 무엇으로 여기지 않는다.”
2-22 사랑은 오로지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실행될 때만 완전하고,
오로지 그 때에만 진실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일체를 비운 사랑만을 사랑으로 인정한다.”
3-77 “다른 이들에 대한 존중의 결여는
참된 그리스도인다운 겸손과 친절의 결여이다.
영이 겸손하고 친절한 사람은 모든 이를 존중할 줄 알고,
남들이 하는 일을 항상 잘 이해하기 때문이다.”
4-8 자기 이웃을 해치는 사람은 자기를 해치는 사람이다.
이웃을 죽이면서 그 자신의 영혼을 죽이는 것이다.
사랑이 영혼으로 하여금 온갖 덕행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과 같이,
사랑의 결핍은 온갖 악덕을 받아들이게 한다.”
5-3 하느님과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이다. 거룩한 사랑은 삶의 성화를 이룩하는 반면에 악한 사랑은 삶의 멸망을 초래하기 마련이다.”
2-16 너는 사람들의 칭찬이나 조롱에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4-174 칭찬과 아첨은 침과 진흙이다.
이는 영혼을 더럽혀 흙투성이가 되게 하고
정신을 눈멀게 하며 (특히 그것이 사실이 아닐 때면)
사람으로 하여금 그 자신이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를 알지 못하게 한다.
10-4,2 사랑 결핍이 세상을 악덕의그물 속으로 집어던졌다.
제4일 덕에 대한 성찰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루카 6,27-28)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마태 11,29)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신다.? (야고 4,6)
“그러므로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 거룩한 사람, 사랑받는 사람답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동정과 호의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를 입으십시오.” (콜로 3,12)
1. 겸 손
2-9 겸손은 작은 초목이고 이 식물에서 자라는 가지는 신뢰이니,
신뢰가 없는 겸손이란 없다. 신뢰가 없는 겸손은 거짓 덕행인 것이다.”
2-24 “겸손은 하늘의 은혜에 대한 보증이다.
겸손은 영혼을 안전하게 감싸 주기 때문에
원수의 간계가 그 영혼 속으로 파고들지 못한다.
겸손은 하늘의 모든 은총을 안전하게 자리잡게 하기에
나는 겸손이 보이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하늘의 온갖 은혜가 풍성하게 흘러들게 한다.
2-24 “비록 무지하거나 가난하다 할지라도,
나는 단순하고 겸손한 사람들과 통교한다.
그들은 나의 은총들을 믿고 이를 중히 여기며 간직할 줄 알기 때문이다.
3-23 “영혼이 겸손해지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그만큼 더 진리에 다가간다.
3-28 겸손; 오, 그렇다.
겸손은 은총을 부르고, 사슬을 끊어 버리며,
영혼과 하느님 사이를 갈라 놓는 장벽을 처부수어 그를 하느님께로 돌아가게 한다.
겸손은 언제나 푸르고 꽃이 피어 있으며 아무런 해충도 갉아먹지 않는 작은 푸성귀이다. 바람도 우박도 열기도 그것을 해치거나 말라 죽게 하는 일이 결코 없다.
겸손은 푸성귀 중에서 가장 작지만 가장 높이 가지들을 뻗어 하늘 속까지 뚫고 들어간다. 그리하여 우리 주님의 성심 주위에 뒤얽힌다.
이 작은 푸성귀에서 나온 가지들만이 그 흠숭하올 성심에
자유로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겸손은 현세 삶이라는 풍랑치는 바다 속에서 평화의 닻이다.
겸손은 모든 덕행에 맛을 내며 죄의 부패로부터 영혼을 보존하는 소금이다.
겸손은 나그네들이 자주 다니는 길을 따라 돋아난 작은 풀잎이니,
밟혀서 사라졌다가도 금방 전보다 더 아름답게 돋아나는 것이 보이는 풀잎이다.
겸손은 들풀을 고상하게 만드는 자가(自家) 접목이다.
겸손은 일몰(日沒)이다. 겸손은 은총의 주화(鑄貨)이다.
겸손은 현세 삶이라는 밤의 어둠 속에서 우리의 발길을 인도하는 달이다.
겸손은, 재물 거래의 방법을 잘 알고 있는 약삭빠른 장사꾼과 같이,
자신이 받은 은총을 단 한 푼도 허비하지 않는다.
겸손은 하늘의 문을 여는 열쇠이니,
이 열쇠를 안전하게 보관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하늘에 들어갈 수 없다.
끝으로 (이 말을 하지 않으면 끝내지를 못하고 자꾸 계속할 것 같으니까),
겸손은 하느님과 온 천국의 미소이고, 온 지옥의 울음이다.
3-85 가장 높은 겸손은 어떤 이치도 따지지 않는 것이니,
이런저런 이유에 대하여 논하지 않고
너 자신의 무 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영혼이 그렇게 하고 있노라면 부지중에 자기가 하느님 안에 있음을 알게 된다.
4-35 2) 내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나, 모든 사람들 가운데 가장 못난 자로 스스로를 낮추는 깊은 겸손.
4-77 하느님을 가장 현양하는 덕행은 겸손이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나 사람들 앞에서나
인간을 가장 고상하게 높여 주는 덕행 역시 겸손이다.
2-26 “신앙의 정신으로 잘 무장이 되어 있을 때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멸시가 유익한 것이 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유익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이 너를 해칠 수 있다.
2-36 징벌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것이다.
6-88,3 영혼이 비어 있고 겸손할수록 하느님의 빛이 더욱더 그를 채우며 그분의 은총과 완전성을 나누어주신다.”
6-94,2 겸손은 가시가 없는 꽃이다.
가시가 없기 때문에, 찔려서 아프면 어쩔까 하는 걱정 없이
손에 들거나 꽉 잡을 수 있고 원하는 대로 아무 데나 놓을 수 있다.
겸손한 영혼도 그와 같다. 그에게는 상처를 내는 가시가 없다고 할 수 있다.
가시가 없기 때문에 다른 이들이 그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고,
그 자신도 당연히 남을 찌르거나 아프게 하지 않는다.
2. 인 내
4-53 인내는 순결을 능가하는 덕행이다.
참을성이 없으면 영혼이 자제력을 잃기 십상이고,
그러니 순결한 상태로 머물러 있기가 곤란한 것이다.
하나의 덕행이 생명력을 가지기 위해서 다른 덕행을 필요로 할 경우,
흔히 나중 것이 먼저 것보다 더 뛰어난 덕행이라고들 한다.
확실히, 인내는 순결의 인도자일 뿐만 아니라
굳셈이라는 산으로 올라가기 위한 사닥다리이기도 하다.
인내의 사닥다리 없이 산으로 올라가려고 하는 사람은
높은 데서 깊은 데로 똑바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더욱이, 인내는 끈기의 씨앗이다.
이 씨앗에서 굳셈이라는 가지가 돋아난다.
오, 참을성이 있는 영혼은 자기가 하기 시작한 선에 얼마나 확고하고 흔들림이 없는지! 그는 비가 오건 서리가 내리건 얼음이 얼건 불이 나건,
그 아무 것에도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의 오직 하나뿐인 목표는 자기가 시작한 선을 완성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홀로 인내만이 덕행들의 보고(寶庫)를 열 수 있는 비밀 열쇠이다.
이 비밀 열쇠가 없으면, 영혼에 생기를 주고
그것을 고상하게 만드는 다른 덕행들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4-61 인내하여라. 매사에 있어서 너 자신을 나의 뜻에 맡겨라.
잠시 동안만이 아니고 언제나, 언제나 그렇게 하여라.
선에 항구한 것만이 영혼이 참으로 유덕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항구함만이 모든 덕행을 함께 가져오고,
이것만이 영혼을 하느님과 덕행과 은총들에 결합시킨다고 해도 무방하다.
6-33,2 사람이 참을성이 없으면,
그의 사랑도 보잘것없고 경박하고
아무런 실속이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6-100,2 나를 가장 기쁘게 하는 것은 영혼의 항구한 인내이다. 항구한 인내는 영원한 생명의 보증이며 하느님 생명의 진보인 까닭이다.
흔들림 없는 인내력이 하느님의 뜻 안에 사는 이들의 특징이다.
(4.01,3,30; 21.27,3,5; 22.27,8,4; 36.38,4,25)
3. 내적 생활
3-72 휴식은 육신에 꼭 필요한 것이지만, 영혼에는 훨씬 더 필요하다.
사람은 자기의 중심에서 쉴 필요가 있는데 그 중심은 곧 하느님이다.
그러나 하느님 안에서 쉬려면 내적 고요가 필요하다.
이 내적 고요란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사람이 자기의 격정들의 질서를 바로잡아 고요해지게 하는 것이니,
하느님을 향해 있지 않은 모든 욕망과 성향과 애정에 침묵을 부과하는 것이다.
3-83 조금이라도 마음이 뒤숭숭해지면
이는 네가 하느님으로부터 그만큼 벗어나 있다는 표지이다.
줄곧 하느님 안에 있으면서도 완전한 평화를 소유하지 못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3-111 내적인 영혼 안에는 동요(動搖)가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그 영혼이 자기 자신 바깥에 나가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자신을 죽이는 자가 되는 것이다.
자기 밖으로 나가게 되면 하느님과 관계 없고 하느님도 아닌 수많은 사물과 때로는
그 자신의 참된 행복과도 무관한 것들을 집착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후에 자신으로 돌아올 때에 그 이질적인 것들을 함께 가지고 오기에, 그
것이 그를 괴롭히고, 이로 말미암아 그 자신과 은총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4. 고신극기
1-17 “사랑 부족과 배은망덕으로 당신께 무례한 언동을 하는 죄인들의 모욕에 대한 보상으로, 저의 이 사랑과 감사의 행위를 받아들여 주십시오...”
3-32 고행은 영혼의 악한 물기를 완전히 말리고 성화(聖化)의 물이 넘쳐 흐르게 한다. 이리하여 지극히 아름다운 덕행들이 싹트게 한다.”
3-37 금욕도 영혼 안의 모든 불완전과 결점을 바싹 말려 없앨 힘이 있다.
3-38 “금욕이 영혼의 호흡이 되어야 한다. 영혼이 금욕이라는 공기를 호흡하고 있으면 그 안에서 일체가 정화된다.
4-79 눈이 육신의 시력인 것과 같이 극기는 영혼의 시력이다.
그러므로 극기는 영혼의 눈이라고 할 수 있다.”
5. 감 사
4-83 너는 내가 너에게 주고 있는 은총들에 대해 적어도 감사해야 한다.
감사는 하느님의 소유인 보고(寶庫)를 마음대로 열 수 있는 열쇠이다.
5-11 감사는 하느님의 보고(寶庫)를 여는 열쇠인 까닭이다.
6. 충 실
5-19 “천사들은 목적을 이루건 이루지 못하건 언제나 그들의 의무를 다한다.
하느님께서 맡기신 영혼들을 돌보는 일에서 물러서는 법이 없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돌봄과 근면과 활동과 끊임없는 원조에도 불구하고
영혼들이 비참하게 멸망하는 것을 보게 될 때에도 언제나 제자리에 있다.
목적을 이루건 이루지 못하건 그들에게 맡겨진 일을 완수하는 것에
의지를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께 더 큰 영광을 드린다거나
더 작은 영광을 드린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제5일 회 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 15,7)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요한 5,14)
“내가 너의 악행들을 구름처럼, 너의 죄악들을 안개처럼 쓸어버렸다. 나에게 돌아오너라. 내가 너를 구원하였다.” (이사 44,22)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23)
1. 죄의 사악함
3-25 대죄는 그 죄를 지은 영혼뿐만 아니라 그 영혼 안에 있는 덕행들도 모조리 해치고 죽이는 죄이다. 소죄는 영혼을 매우 약하고 상처 입게 한다. 그러니 그가 쌓은 덕행들도 상처를 입는다. 그러니 죄는 얼마나 치명적인 무기이냐! 죄만이 영혼에 상처를 입히고 죽일 수 있다!”
1-34 “오! 죄라는 것은 얼마나 추하고 치명적인 것인가! 정말이지, 모든 사람이 죄에 대한 완전한 지식을 얻는 외에도, 죄의 독성과 그 쓰디쓴 결과의 본질을 체험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그러면 죄의 정체를 속속들이 알게 되었기 때문에,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끔찍한 괴물을 보듯 피하게 될 테니 말이다.”
1-56 그렇게 일단 나 자신의 허무 속으로 들어가자, 스스로의 모든 비참과 범한 죄들을 다 깨닫게 되었다. 심판관이신 그리스도의 참된 현존 안에서 나는 마치 한낱 나뭇잎처럼 떨기 시작했으므로 ‘고백의 기도’를 바칠 힘도 없을 지경이었다.
6-63,4 “나는 진귀한 아름다움으로 영혼을 지어내었고, 창조된 다른 어느 빛보다도 더 찬란한 빛을 부여하였다. 그럼에도 인간은 이 아름다움을 추악함 속에, 이 빛을 어둠 속에 흩어 없애고 만다.”
6-144,8 “나를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이는 교인들이다. 그들은 내 인성 안에서 살면서 나를 못살게 괴롭히고 내 인성의 살을 발기발기 잡아 찢기 때문이다. 내 인성 밖에서 사는 이들도 나를 찢긴 하지만 그래도 멀리 떨어져서 찢는 것이다.”
7-4,3 그것은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물리치고 하느님께서 주신 선하고 거룩한 모든 것을 떠나서 인간 자신의 뜻을 중요한 무엇으로 여기며 창조주를 모욕하는 것이 바로 죄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인간의 이 방자함과 자기 자신을 우상으로 삼는 짓을 보속하기 위하여 큰 희생을 바쳐서라도 나의 뜻을 완전히 흩어 없애고 아버지의 뜻으로 살고자 했던 것이다.”
8-44,3 영혼 안에 죄가 있거나 완전히 나의 것은 아닌 뭔가가 있으면 내가 그를 나로 가득 채울 수 없고 그 자신도 내 안에 온전히 잠길 수 없어지는 것이다.
8-58,3 죄가 시작되면 나와 피조물 사이가 갈라지기 시작한다.
이 분리가 내게는 비통을, 인간에게는 죽음과도 같은 참상을 초래하는 것이다
.” 오직 죄만이 모든 것을 파괴하고 인간을 나에게서 갈라놓을 뿐이다.
9-23,2 너는 영혼 안에 무질서를 가져오는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죄다. 극히 사소한 죄라고 하더라도 오직 죄만이 (영혼을 혼란에 빠뜨린다).
오, 죄가 영혼을 얼마나 추하게 변형시키고 퇴색시키며 쇠약하게 하는지!
2. 통 회
4-97 내게 자기를 봉헌한 이들마저 생활을 바꾸어 그 모욕을 근절하기는커녕, 어떤 점이 자기네 결점인가 하는 것을 따지는 데에만 마음을 쏟고 있다. 그런데 이것은 통회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다. 통회와 사랑은 매우 효과적인 두 가지 약과 같아서 상호 협력적으로 (치유력이) 강화되기에, 이것을 바르면 영혼이 완전히 낫는데도 말이다.”
4-178 죄는 영혼 전체를 중독시키며 추하게 만들어 그 영혼 안의 내 모상을 사라지게 하는 독이다. 통회는 이 독을 죽여 없애고 나의 모상을 되찾게 한다. 진정한 통회는 해독제인 것이다. 그리고 통회는 독을 지우고 영혼 안에 빈 자리가 생기게 하기에, 이 빈 자리를 나의 은총이 채우는 것이다.
2-69 내가 그 수많은 고난을 당한 까닭을 생각하여라. 그것은 바로 죄였으니, 아주 가벼운 결함도 네게는 무거운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 반면에, 네가 나를 통해 너 자신을 보지 않으면, 극히 사소한 고통도 견딜 수 없도록 부담스럽게 느껴지고 중대한 결함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될 것이다.
1-50 “사랑하올 예수님, 부디 저에게 참된 통회의 은총을 내려 주십시오. 당신을 모욕한 죄들에 대한 통회가 저 자신을 불살라 당신의 기억에서도 제 영혼에서도 그 모든 죄가 사그라지게 해 주십시오. 그렇습니다, 좋으신 예수님, 저에게 깊은 통회를 주시어, 당신을 모욕한 뻔뻔스러운 마음을 보속하게 해 주십시오. 이 통회가 죄를 자라게 한 모든 집착을 능가하게 하셔서, 완전히, 참으로 완전히 그것을 뿌리째 뽑아버리고 당신 품에 더 바싹 안기게 해 주십시오.
일단 이 은총부터 청한 나에게 예수님께서는 다정하게 말씀하셨다.
“나를 모욕한 일을 네가 뉘우치며 괴로워하고 있으니 내가 몸소 잘 참회하도록 도와 주마. 이와 같이 하면 네가 죄의 추함을 깨닫고 이것이 내 마음에 얼마나 쓰라린 고통을 끼치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런즉 나를 따라 이렇게 말하여라: ‘이 몸이 바다를 가로질러 가며 당신을 보지 못한다 해도 거기에 당신은 계시나이다. 땅 위를 걸어가도 당신은 제 발 아래 계시나이다. 그럼에도 저는 죄를 지었나이다...’ 여기서 예수님은 거의 울먹이는 음성으로 속삭이듯이 덧붙이셨다. : 그러나 나는 너를 사랑하며 지켜 주었다...”
“그럼에도 저는 죄를 지었나이다...”라는 말씀에서는 죄의 추함과 나의 악의와 뻔뻔스러움을 알게 되었으니, 이는 한 순간의 만족을 위하여 그분을 뒷전으로 돌림으로써 엄청나게 모욕했기 때문이었다.
1-56 주님을 모욕한 일이 너무도 죄송하고 마음 아팠으니, 나의 교만 때문에 예수님께서 겪으신 극심한 고통을 실감했던 것이다.
나는 교만이라는 죄의 추함에 대하여 계속 생각하였는데, 이는 내 마음 속에 이루 말할 수 없도록 통렬한 아픔을 일으켰다. 그분의 분명한 뜻을 거슬러 생각과 말로 지은 죄와 의무를 소홀히 한 죄를 고백하였다.
6-68,2 “딸아, 죄를 짓지 않으려고 조심함이 죄에 대한 통회를 보상한다.
깊이 뉘우치고서도 곧이어 죄를 짓는다면
그런 사람의 통회는 헛되고 알맹이가 없을 것이다.
반면에, 죄를 짓지 않으려고 부단히 조심하는 것은
통회를 대신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특별한 모양으로 은총의 도움을 받게 한다.
은총으로 말미암아 죄에 떨어지지 않을 뿐더러
언제나 영혼의 깨끗함을 유지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즉 너는 극히 사소한 일 속에서도 내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계속 조심하여라.
3. 결심, 죄를 지겨워함
1-17 인간이 천국을 얻기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설사 목숨을 바치는 한이 있더라도, 그 자신의 의지로 하느님을 모욕하는 짓은 결코 하지 않겠다고 끊임없이 다짐하는 것이다.
1-56 무능과 나약 대신에 앞으로 더 잘 행동할 수 있도록 새로운 은총과 힘까지 얻어 주셨던 것이다.
“예, 약속합니다. 저의 창조주, 구속주, 구원자이신 당신을 다시 모욕하기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할 것을, 몇 천 번이라도 약속합니다. 다시는, 다시는 절대로 죄 짓지 않겠습니다.”
4-84 네 의지로 내가 원하는 바를 행하겠다고 정말 결심했다면, 그런 후에 때때로 모자람이 있더라도 내가 대신 보충하겠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아라.
1-51 지극히 사랑하올 예수님께서 죄를 짓는 사람들 마음 안에 얼마나 큰 악의가 도사리고 있는지를, 감히 하느님을 아주 하찮은 쾌락보다 더 못하게 평가하는 사람들안에 얼마나 심한 악의와 주제넘은 건방짐이 숨어 있는지를 분명하게 깨닫도록 해 주신 이래로 나는 쭉 아주 작은 잘못도 범하지 않으려고 조심했을 뿐만 아니라 마음 속에 저절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죄의 그림자마저도 두려워하게 되었다. 그리고 과거에 지은 죄들에 대해서 얼마나 치를 떨며 부끄러워했는지 모든 사람들 중에서 내가 가장 악한 자라고 여기게 되었다.
2-1 주님께서 신성의 일부를 열어 당신 자신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영혼은 그와 같이 행동하기 마련이다. 오 이런 영혼은 죄를 얼마나 미워하는지!
2-44 죄에 대해서는 몸서리를 칠 정도로 지겨워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음을 어지럽혀선 안된다.
6-50,2 “딸아, 죄를 짓지 않겠다거나 어떤 선을 행하겠다고 작정한 사람이 그것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것은, 그렇게 하려는 의지가 전적인 것이 아니어서 하느님의 빛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표이다. 그가 진정으로 그런 의지를 지니고 있어서 피해야 할 악이나 행해야 할 선을 하느님의 빛에 의해 알게 된다면, 스스로 작정한 대로 수행하지 않을 수 없어지기 때문이다. 반면에, 하느님의 빛은 영혼 안에 확고부동한 의지가 보이지 않으면 필요한 빛을 주지 않기에 피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또는 행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없어지는 것이다.
우리 자신의 비참함과 나약에 대한 지나친 걱정은 하느님 뜻을 받아들이는 데에 장애가 된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가르침(8.07,7,1; 14.22,3,3).
4. 고해 성사의 은총
3-25 고해성사는 그에게 생명을 주고 그 상처를 치유해 주면서 덕행도 다시 활기차게 해 준다. 그리고 이 일은 영혼의 준비 정도에 따라서 크고 작은 차이가 생긴다. 이것이 성사의 힘이 작용하는 방식이다.
1-57 예수님께서 사죄경을 외우시면서 당신의 보혈로 내 영혼을 씻어 주신 뒤에 나는 마치 새로운 삶에 태어난 것 같았고, 평소보다 더욱 풍성한 은총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1-25 나는 사람들 마음의 주님이니, 내 마음에 들 때까지 그 마음들을 만들고 또 고쳐 만들 능력이 있다.
1-64 나는 하느님이니, 존재하는 모든 영혼을 각각으로 다 싸안으면서 하느님답게 행동하기 마련이다. 한 사람이라도 제외한다면 내 사랑이 내게 평화를 주지 않을 테니 말이다.
2-18 “나는 네가 극히 사소한 일에서도 고해사제를 온전히 신뢰하기 바란다. 그와 나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을 정도로 말이다. 네가 그의 말을 신뢰하고 믿는 데 따라서 내가 그 말과 함께 올 것이다.”
18-? 나의 사랑은 너희의 과거 삶이나 죄, 온갖 악행들을 잊어버릴 정도로 크다는 것을 알아라. 나는 그 모든 것을 내 사랑의 불바다에 묻어 태워버리겠다. 그런 다음 우리 함께 새 삶을, 온전히 나의 뜻인 삶을 시작하기로 하자.
제6일 모범 인물들
“하느님의 말씀을 일러 준 여러분의 지도자들을 기억하십시오. 그들이 어떻게 살다가 죽었는지 살펴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십시오.” (히브 13,7)
새로운 영성의 모범인물들은 자신들의 내적 삶에서 성령을 통하여 성부님의 뜻에 승복하여 위탁하였습니다.
20세기 모범인물들의 삶과 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자신들을 완전히 성부님의 다스리심에 승복하여 내맡기는 사람들 모두에게 당신의 마음(심장)을 완전히 열어주시려고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루이스 마리아 마르티네즈 (Luis Maria Martinez) 대주교님은 성부님의 다스리심을 이런 식으로 체험했습니다. 그는 회상합니다.
오후에, 하느님께서는 나를 감실 앞으로 데려가셨다. 그분께서는 내 마음을 아주 관대하게 만들어 주셔서, 나는 아주 강렬한 감을 가지고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드렸다.
“오 거룩하신 성부님, 오 흠숭하올 성부님, 성령님의 충동을 받아서,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이신 나의 어머니의 티없이 깨끗하신 손을 통해서, 그리고 불멸의 희생제물이신 당신의 아드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모든 것을 주님이신 당신의 거룩한 뜻에 내어 맡겨 드리면서, 오늘 저는 저 자신을 당신께 온전히 완전한 선물로, 순수한 봉헌물로 드립니다. 이는 오로지 하느님의 뜻이 저의 의견을 묻거나 저에 대해서 상관할 필요도 없이, 저와 저의 모든 것을 당신 좋으신 대로 사용하시기 위함입니다... 제가 이렇게 봉헌을 할 수 있는 것도 오로지 당신 능력의 도우심 덕택입니다. 저의 허무는 당신의 능력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 제가 당신께 드릴 수 있는 것을 드립니다. 저의 뜻을 거짓 없이 모두 당신께 드립니다... 그리고 저 자신을 주님이신 당신의 뜻 안으로 던져버립니다.”
마치 내 영혼이 하나의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가장 심오하고 가장 경이로운 그 무엇인가를 체험했다. 마치 그 순간에 성령께서 완전히 나를 다 차지하여, 내 영혼을 꽉 잡아서 예수님께 주어버리신 것같이 느껴졌다. 성령께서는 이 일치를 통해서 아주 강력한 바람이 되어 내 영혼을 아주 발가벗겨서 하느님의 가슴(품) 속으로 던져 넣어버리신 것이었다.
세상의 다른 한 편에서는, 폴란드의 수녀인 성녀 마리아 파우스티나(Mair Faustina)가 예수님의 뜻과 자신의 뜻을 교환하였습니다. 성녀가 1935년 2월 4일에, 자신의 수도 공동체와 함께 팔일 피정을 시작할 때,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피정 동안에 너는 너의 뜻을 완전히 없애버릴 것이다. 그 대신에 나의 뜻이 완전히 네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이를 위해서 네가 큰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깨끗한 종이 한 장 위에 이렇게 써라. ‘오늘부터 나 자신의 뜻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는 그 페이지를 줄을 그어 지워라. 그런 다음에, 그 종이의 다른 편에 이렇게 써라. ‘오늘부터, 어디에서나, 언제나 그리고 무엇을 하든지, 나는 하느님의 뜻을 행한다.’”
막시밀리안 콜베(Maximilian Kolbe) 성인이 마리아를 통해서 예수님께 완전한 봉헌을 하기 위해서 의지(뜻)의 교환 양식을 만들었습니다. 1920년 9월 20일에 그는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너는 돌이킬 수 없이, 무조건, 전적으로 티없으신 마리아의 소유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네가 가지고 있는, 그리고 또 가질 수 있는 모든 것들, 생각이든, 말이든, 행동이든, 그리고 성향(좋은 것이든,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 이든, 너의 모든 것은 다 전적으로 마리아의 소유이다. 그래서 네가 아니라 마리아께서 이 모든 것들을 가지고 당신이 좋으실 대로 하시는 것이다... 너는 그분의 손 안에 있는 그분의 도구이다. 그러니까, 너는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만 행해야 한다.”
콜베(Kolbe) 성인의 글을 보면, 완전히 하느님의 뜻에 승복하고 위탁하는 모습이 뛰어나게 잘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마리아 안에서 다스리시는 뜻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성 콜베(Kolbe)는 이렇게 썼습니다.
“티없으신 마리아의 뜻은 하느님의 뜻과 너무나 깊이 일치해 있기 때문에 이 두 뜻은 완전히 한 뜻으로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완수하는 것은 곧 티없으신 마리아의 뜻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주저 없이 당당히 말할 수 있다.”
또 한 번, 그는 이렇게 추가했다.
“마리아의 뜻은 하느님의 뜻과 가장 가까이 밀접하게 일치되어 있고 동화되어 있다. 마리아는 하느님 안에서, 그리고 하느님을 통해서만 살고 일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가장 깊고도 유일한 소원은 티없으신 분의 뜻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수행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매일 더 마리아께 속하게 된다. 그리고 마리아께서는 우리의 존재 전체를 소유하시게 된다. 그러면... 그때에는 이제는 더 이상 우리가 아니라, 티없으신 분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행동하시고 그분의 영향력을 발휘하시게 된다...”
그는 또 더 덧붙였다.
“그러니까 가치 있는 일이란 단 한 가지,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완전한 가치를 가진 것은 우리의 뜻을 마리아의 뜻 속으로 섞어 넣는 것이다.”
성녀 파우스티나처럼, 성 막시밀리안도 결국은 도덕적으로 죄를 범할 수는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마리아 안에서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생각도 말도 행동도 할 수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성녀 파우스티나와 성 막시밀리안은 자신들의 영혼 안에서 성령께서 지속적으로 다스려주신 결과로, 자신들이 즉각적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리라는 보증을 받았습니다.
성인은 거의 같은 시기에 이런 보장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성녀 파우스티나는 폴란드에서, 그리고 성 막시밀리안은 선교지인 일본에서 선교사로 봉사하는 중에 이런 보장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성녀 파우스티나는 예수님이 청하시는 대로 그분의 뜻과 자신의 뜻을 교환한 직후에 이 보장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녀는 이렇게 썼습니다.
“내가 예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내 뜻을 줄을 그어서 지우려고 무릎을 꿇었을 때, 나는 내 영혼 안에서 이런 목소리를 들었다. 오늘부터 너는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는 하느님의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과 성모 마리아의 활동을 통해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 완전히 승복하여 위탁하면,
그 영혼은 예수님의 성심과
완전히 일치(동화)하는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문: 누가 하느님의 뜻을 선물로 받을 수 있고 또 어떻게 이 위대한 선물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주제에 대하여 상세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답: 예, 좀더 길게 언급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먼저) 하느님의 관점으로 사물을 볼 수 있도록 그분의 도움을 청하는 것이 매우 유익할 듯 합니다. 하느님에게는 인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우리를 창조하신 것은 그분의 영광을 위해서였습니다. 성삼위의 사랑이 말하자면 폭발적으로 그분들에게서 터져 나왔기에 이 사랑을 받아들일 그릇을 원하셨고, 그것도 살아 있는 그릇들을 원하셨습니다. 그분들과 같은 ‘거룩한 사랑’으로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그릇들 말입니다.
이들은 그들이 창조된 더없이 고귀한 목적, 즉 하느님의 거룩한 사랑을 받고 소유함으로써 그들도 이 사랑을 성삼위께 돌려드리게 하려는 목적에 걸맞도록, 무에서 창조되어야 했습니다. 그 고귀한 목적을 위하여 하느님께서 인류 창조를 예정하셨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창조 대목을 보십시오!
그러나, 인성과 신성을 공유한 신적 위격이 존재하시지 않았다면 ?? 이 신적 위격 안에서 모든 피조물이 그들의 존재를 얻고, 성부께로 갈 수 있는 수단 및 성삼위와 같은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수단을 얻기 때문에 창조된 인성과 창조되지 않은 신성이 일치를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람이 된 ‘말씀’이신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분은 만물 가운데서 맏이이시고 만물의 왕이십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렇습니다. 영원 속에서 아담과 하와보다 앞서 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놀라운 계획 속에는 예수님께서 살과 피를 취하실 어머니가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평생 동정이신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보십시오! 사물의 신적 질서 안에서 마리아 역시 아담과 하와보다 선재(先在)하셨으니, 영원 속에서 그들보다 앞서 나신 것입니다.
확실히, 우리의 원조가 ‘원죄’를 짓지 않고 충실하게 남아 있어서 구원 사업의 필요성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예수님은 시간 속에 당신의 인성을 나타내 보이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우리의 이야기와는 다른 담론의 주제가 되겠지요.
인류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그릇이 되고 또한 그들의 창조주께 그 사랑을 돌려드릴 목적으로 창조되었으므로, 이 두 기능을 수행하기에 필요한 재능과 능력을 소유하도록 계획되었는데, 그 재능과 능력을 주는 것이 다름 아닌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극진히 사랑하시는 피조물 아담과 하와에게 하느님의 뜻을 선물로 주시며 그들을 영예롭게 하셨음을 보십시오!
인류가 이 선물을 받아 가지고 있으면 끊임없이 쏟아지는 하느님의 사랑과 그 모든 현현(顯現)을 충만하게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이 모든 사랑을 자기네 것으로 소유한 다음, 하느님께서 당신 뜻으로 생겨나게 하시어 그들에게 나누어주신 이 사랑을 같은 뜻으로 그분께 돌려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 창조에서 하느님이 품으신 이상이었습니다. 인류에게서 이 사랑과 영광을 받으시기로 성삼위께서 내적으로 결정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인간은 창조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사랑과 영광은 하느님께서 태초부터 원하신 것이었으니 (언젠가는) 반드시 가지게 되실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일체를 상실했으며, 하느님과 인간의 이 지극히 특별한 관계를 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구원자로 오셔서 그것을 온전히 되돌려 놓으셨고, 그 잃어버린 하느님의 뜻 선물을 되찾도록 우리에게 ‘주님의 기도’로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기도문 중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는 구절은 결국, 아버지의 지혜에 의하여 정해진 때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되찾아 주신 그 선물이, 세상 종말이 오기 전에 인류에게 되돌려지리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원래 의도하셨던 대로 순수한 사람들에게서 영광과 거룩한 사랑을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삼위의 그러한 관점을 통찰하게 되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저 이상이 실현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신다는 것을 쉽사리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곧 우리의 과거와 죄와 결점과 나약 따위 모든 것을, 더할 수 없이 너그러운 마음으로 보아주십니다! 다만 우리가 확신과 사랑을 가지고 그분의 성심에 의지하며 그분의 거룩하신 뜻을 받는 대신 우리의 인간적인 뜻을 봉헌하기만 한다면, 그리고, 특히 이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한 초기에 때때로 그렇듯이, 우리 자신의 뜻을 따름으로써 이 행복한 나라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즉시 돌아와서 그분의 뜻 안에 계속 남아 있고자 진지하게 노력하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선물 중의 선물인 이 선물의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아름다움과 가치를 우리들보다도 훨씬, 훨씬 더 잘 아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온전히 우리에게 주셔서 복된 생활을 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는 그분께서 항상 원하셨던 것인데, 이제 정해진 때가 온 것입니다! 인간 안에 묶이신 채 오직 인간을 위해 봉사하고 인간에게 존재를 부여하면서 인간이 비참한 자기네 뜻의 노예가 되어 있는 것을 보아 오신 그분은 오랜 세기에 걸쳐 연장된 그 고뇌에 이제 신물이 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름지기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인정하고,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살면서 이 뜻을 소유하여 하늘에서와 같이 이루기 시작하겠다고 그분께 말씀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보다 더 좋고 더 하느님 마음에 드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을 테니까요.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당신 나라를 열망하고 소유하기를 바라시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이 나라를 한 사람에게 알려 주실 때에는 거의 언제나 다른 사람을 통해서 그렇게 하시는데, 이는 그 사람이 이 나라를 청할 것에 대비하고 계신다는 표지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겸손하고 진지하게 간청하는 사람에게는 늘 주실 태세로 계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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