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나를 당신께 맡기나이다

제1부 하느님은 나의 아버지시다

은가루리나 2018. 4. 21. 09:57



하느님은 나의 아버지시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일은 복잡해진다. 사리가 분명해진다.

이념을 실천으로 옮길 때 우리는 발밑에서부터 허물어져내리는 파멸을 의식한다.


우리는 어떤 일을 머리에 그리고서 실제로는 엉뚱한 일을 저지른다.

선을 바라고선 악을 행하며,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미워하고,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을 드리우고,

기쁨이 있는 곳에 슬픔을 뿌린다.


인간이 지상에 세운 건물, 그것은 하나의 재앙이다.

손색없는 바벨탑이다. 그리고 어느 시대나 그러했다.


물론 인간은 자유가 있으니 정도(正道)를 거슬러 갈 힘이 있다고 해야 옳으리라.

그것도 자유로이 선택한 길이라고 넉살좋게 말할 수 있으리라.


종달새 둥지처럼 자유스럽고 평온한 도시를 세우는 대신에 우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

'인간의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은 가관이다.

심지아 뉴욕, 시카고, 도쿄, 홍콩, 밀라노 같은 데서도 마찬가지다.


한편에서는 사람이 굶어 죽고 다른 편에서는 배불러 죽는다.

한편에서는 사람이 심심해서 죽고 다른 편에서는 과로로 쓰러져 죽는다.

어찌된 노릇인가?


어째서 우리 인간의 역사는 이기심과 탄압, 폭력과 죄의 역사여야만 하는가?

그 거창한 악들이 멀리도 아니고 바로 현대에, 

소위 가장 계몽된 우리 현대인들(우리는 대개 그렇게 자부한다)이 사는 이 시대에 저질러졌다는 데 대해 

우리는 상심하고 주저앉는다.


우리 시대만큼 전쟁들과 민족 상잔, 대학살의 수용소들, 고문, 아사로 얼룩진 처절한

세기가 또 있었을까?

이 편리하고 기술적으로 성숙한 사회에 어디서나 송장 냄새가 풍기는 것은 어인 일인가?


우리 모두가 이 엄청난 죄상과 모순 앞에 끌려나와 있는 만큼 내노라하고 거만하게 자랑할

것이 도무지 없다.

우리의 죄상과 모순을 보고서도 무엇인가 짚이는 것이 없는가?


창조의 경륜과 설계도를 보고서는 

어느 것이 하느님의 역사(役事)고 어느 것이 우리 인간의 활동인지 구분이 안 된다는 

살을 부렸었다.

지금 우리의 죄상과 모순을 대하고서도 그런 의심이 드는가?


아니면 적어도 여기서는 하느님의 것과 우리의 것을 구분해야겠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 우리의 죄상과 모순을 볼 때는 적어도 하느님이 우리의 흉악과 무관하신 분이시요,

구원의 복음을 가지고 우리와 시비를 가리려 거기 서 계시는 분이심을 알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심연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의 죄악에서다.

악의 심연 밑바닥에 도달할 때 우리는 가까이 있는 은총의 심연에 눈뜨게 된다.


우리의 무력함이 뼈저리게 느껴질 때 우리에게는 무엇인가가 필요함을 깨닫는다.

방탕한 아들 - 그는 우리 각자의 초상화다 - 

이 집을 나가기 전에는 자기 부친을 잘 몰랐었다면,

돌아와서 그전의 신분으로 돌아간 지금은 

부친이 어떤 분인지 똑똑히 알았을 것이요, 

두 눈으로 본 부친의 크나큰 자비를 미루어 부친을 새삼스럽게 알아모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