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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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나의 아버지시다.
저는 무엇이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창조의 테마를 어떤 계획 또는 설계도로 설명할 때,
우리가 살아가는 신비와 우리를 감싸고 있는 어둠을 풀어주는 열쇠를 찾으려 할 때,
아기를 품어주는 여인의 태(胎)야말로 훌륭한 상징이 아닐까 한다.
우주의 중심이라고 할 어머니의 따스한 품,
한 생명체가 꼴을 갖추어가는 모습,
사랑으로 수태된 생명의 신비,
자기를 낳아주는 부모의 얼굴을 고스란히 닮는 신기함...
이 모든 것은 하느님께 낳음받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을
너무도 잘 그려낸다.
전 우주는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는 거대한 '신의 영역'이다.
거대한 자궁이다.
전(全) 역사는 시간과 공간에 잠겨든 한 존재가 자라고 성장하며,
서서히 사물들 밖으로, '물(物) 밖으로' 밀려나가는 이야기들의 연속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가 태어나는 날은
지상 사물들에 꼭 맞지 않는 존재, 지상 사물로 만들어지지 않은 존재가
드디어 지상 사물 저편으로 밀려나가는 그날에 해당된다.
그날 예수님을 하늘 나라를 완성하실 것이다.
지금 시간 안에서는 모두가 생성 중이며, 출생을 기다리며 태중에 있는 처지다.
하늘 나라에 비추어 본다면 모두가 잠정적이다.
그 나라는 이미 우리에게 와 있으나 아직 완성을 보지는 못했다.
태중이기 때문에 어두울 수밖에 없다.
태아(胎兒) 기간이요 덜된 몸이므로 괴로울 수밖에 없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일도 그렇다.
엄마가 뱃속에서 꼼지락거리는 그 움직임에서 아기를 느끼고 사랑으로 품어주듯이,
하느님은 사물을 통해서 우리를 만지시고,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르시며,
역사를 통해서 우리를 알아보신다.
이 작업에서 일이 어렵고 감지하기가 힘든 것은 두 존재가 함께 움직이는 까닭이다.
엄마와 아기가 함께 움직이듯, 하느님과 인간이 같이 일하기 때문이다.
둘이 워낙 긴밀히 결속되어 하나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엄연히 둘이다.
언젠가는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 "당신"이라고, "너"라고 부르게 될 것이다.
'당신'을 발견하고 '이웃'을 발견하는 일은 믿음으로 이뤄진다.
우리를 낳아주시는 신성한 분을, 아직 뵙지 못했으면서도 "아빠"라 부를 분을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신앙으로다.
하지만 이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이뤄지는 이야기다.
여러 해를 두고 아무 말없이 지켜보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어느 고요한 밤의 정적 속에서, 또는 태양이 눈부신 신작로 위에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아빠"라는 말이 입에서 튀어나올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 말이 마음에 들어 빙긋이 웃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다.
진정으로 사랑에서 우러나 "아빠!"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은
드디어 신적인 탄생의 가장 심각한 순간을 넘겼다는 뜻이다.
아기의 머리가 산도(産道)를 빠져나오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그들은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
(요한 1,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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