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나를 당신께 맡기나이다

하느님은 나의 아버지시다.

은가루리나 2016. 8. 27. 01:11



제1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하느님은 나의 아버지시다.







주께서 내게 해오신 바를 헤아린다면, 

주께서 내게 아무것도 강요하실 뜻이 없다는 인상을 분명히 받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제안에 불과하며, 그것도 말없는 침묵 속의 제안입니다.

도대체 시한이 없는 침묵, 세상 끝날 때까지 기다릴 줄 아는 침묵 속의 제안입니다.



주님의 침묵이 하도 무겁고, 주님의 기다리심이 너무도 철저하기에 

자칫하면 우리는 그것을 죽음으로, 하느님의 죽음으로 오해할 염려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그것을 압니다. 

주님은 제안을 내놓으신 뒤 잠자코 침묵을 지키십니다.

우리를 강제하기가 싫으시어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내처 당신께 걸어나오기 바라십니다.

우리가 자유롭기 바라십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이 곧 자유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하느님께 생길 만한 위험은 단 하나, 그것은 전제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도 그것만은 결코 스스로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어찌 그뿐입니까?

주님은 만물을 지으시고도 주님의 창조 권능을 용케 숨기십니다.

그래서 피조물들은 그것들이 절로 생겨난 양 착각하기 쉽습니다.

주님은 주의 백성을 구원에로 부르셨습니다. 

사막을 건너지르게 하시고,  만나를 먹여살리시고,

바위에서 솟는 물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예리고의 성벽을 무너뜨리시고, 약속의 땅을 차지하게 손을 쓰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다 이뤄지자, 주의 백성은 주님이 더는 필요없다고 다짐했습니다. 

여태까지 된 일은 자기네 수완과 힘으로 되었지 주님의 권능 덕분이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워낙 굳었던지 기회가 오자마자 주님을 버리고 새로 섬길 우상을 찾아나섰습니다.

주께서는 너무도 지혜로우시기에, 주님만큼 꼭꼭 숨을 줄 아는 종락이 아무도 없습니다.

오죽하면 주의 종 이사야가 주님을 "숨어 계시는 하느님"이라 했겠습니까?

주님은 창조계에 몸을 숨기십니다. 역사 속에 몸을 숨기십니다.

육화 속에 숨으시고 성체 속에 숨으십니다. 우리 인간들 속에 숨어 계십니다.

주님은 항상 숨어 계십니다.



그리고 주님을 찾아내라고, 그것도 우리 힘으로 찾아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그렇다고 믿고 있으면 다행이요, 그걸 깨닺지 못하면 깨닫게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소용이 있어야만 주님을 찾아나서는 것이 인정입니다.

절대적인 것, 영원한 것, 빛과 자유와 사랑의 필요...그것이 우리를 자극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는 것은 무엇보다도 모순에 찬 시련을 만났을 때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를 때, 단조롭고 시시한 일상사에 진력이 났을 때입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주님은 주님의 수법을 감추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부산스럽게 찾아다니는 것이 어릿광대 놀음이나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의 동기야 한결같이 우리를 강제하시기가 싫으시다는 데 있다고 믿습니다.



주님은 정략결혼은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 자유를 꺾어누르기 싫어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께로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 

주님이 영원으로부터 우리를 위해 마련해두신 그 길을 걸을 때 우리는 한없이 자유로움을 느낍니다. 

우리는 주님이 우리에게 오시면서 남겨두신 그 발자국을 밟으며 걸음을 옮기고 있으면서도 

그걸 알지 못합니다.

얼마나 걸려야 우리가 깨닫겠습니까? 

주께서 존재이자 의지이시요, 영원이자 그것의 실현이시며, 

경륜이자 그것이 펼쳐지는 역사이심을 언제가 되어야 깨닫겠습니까?



나는 희끄무레한 신앙으로 그것을 어렴풋이 알아냈습니다.

내가, 주님이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사람들을 만나보시는 장소를 알아낸 것도 

그 신앙 덕분입니다.

주님이 완력도 쓰시지 않고,  세찬 광선으로 놀라게 하시는 일도 없이 

람을 '아들로 삼으시는'  그 그윽한 신의 영역을 발견한 것도 신앙 덕분입니다.